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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풍수의식
최 운 식*
<차 례>
1. 머리말
2. 명당에 대한 인식
가. 명당과 발복
나. 명당의 획득
다. 명당의 파손과 비보(裨補)
3. 명당을 아는 사람
가. 이름난 지관
나. 가짜 지관
4. 풍수설화에 나타난 민간의식
가. 행복 추구의 의지
나.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에 대한 보상
다. 선의 승리에 대한 믿음
라. 운명과 의지의 조화
마. 현세 중심의 세계관
5. 맺음말
1. 머리말
설화에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이를 풍수설화라 한다. 풍수설화에는 풍수설에 관한 이야기, 풍수설을 시행하는 지관(地官)에 관한 이야기, 일반화된 풍수관념이나 풍수신앙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풍수설화는 전승집단이 지니고 있는 풍수에 관한 의식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풍수설의 이론과 일치할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풍수설화에 관한 연구로는 4편의 박사학위 논문과 2권의 저서, 그리고 여러 편의 논문이 있어서 풍수설화에 관한 논의가 깊이 있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들 연구에서 설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풍수의식을 다루기는 하였으나,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아니하였다. 이 글에서는 선행 연구 성과를 참고하면서 설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풍수의식을 집중적으로 논의해 보려고 한다.
풍수설화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옛 문헌에 실려 있는 자료, 최근까지 구전되다가 채록되어 설화집에 수록된 자료, 지금도 구전되고 있는 자료가 있다. 이 글에서는 옛 문헌과 설화집에 수록된 자료와 필자가 채록한 자료 600여 편을 대상으로, 이들 자료에 나타난 한국인의 풍수에 관한 의식을 알아보려고 한다.
2. 명당에 대한 인식
풍수설은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생기론(生氣論)과 감응론(感應論)이 그 요체이다. 세상 만물은 음양의 기(氣)가 활동함으로써 생기는데, 그것이 땅 속으로 들어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생기(生氣)가 된다. 이 생기가 지맥(地脈)을 따라 흐르다가 결집된 곳이 '명당(明堂)'이다. 명당에 집을 지으면, 생기가 그 집에 사는 사람에게 감응하여 집안이 잘 되고, 거기에 묘를 쓰면, 생기가 백골에 감응하여 후손이 발복한다고 믿는다. 앞의 것이 양택풍수(陽宅風水)이고, 뒤의 것이 음택풍수(陰宅風水)이다. 풍수설화에는 양택풍수에 관련된 이야기도 있지만, 음택풍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가. 명당과 발복(發福)
명당을 얻으면 운이 틔어서 복이 닥친다고 믿는 민간의 의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풍수설화에는 명당을 얻은 뒤에 발복(發福)하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풍수설화에서 명당을 얻은 뒤에 발복하는 내용은 아주 다양하고, 흥미롭다.
[자료 1]
도선 국사가 송악의 곡령(鵠嶺) 산마루를 지나는데, 왕륭(王隆)이 새집을 짓고 있었다. 그가 보니, 그 자리가 후일에 왕이 날 터이므로,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때, 그 집 하인이 나와 왜 거기에 서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후일 왕이 날 터가 분명한데 집을 잘못 짓고 있다고 하였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들은 왕륭이 그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왕륭에게 그 곳의 지세를 설명한 뒤에 "여기에 집을 짓되 이러이러하게 하면 2년 뒤에 왕이 될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 그리고 이 글을 아이가 자라면 주시오." 하고 말한 뒤에 봉서(封書)를 주고 가 버렸다.
그로부터 2년 뒤에 그 집에서는 과연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자라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려 태조 왕건이다.
이것은 왕건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왕건은 명당에 집을 지은 뒤에 생기를 받아 태어났으므로, 고려 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양택풍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료 2]
옛날에 한 총각이 강원도 산골에서 숯을 구워 팔면서 어렵게 살았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산 속의 한 곳을 파고 묻으려고 하였다. 그 때,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올라와서, 그곳은 자기 조상의 묘이니 그곳에 묘를 쓰지 말라고 하였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 울고 있으니, 한 노인이 나타나 "그곳은 가묘(假墓)이니 염려 말고 묘를 써라. 오시(午時)에 하관하면 미시(未時)에 발복할 것이다."하고 일러주어 그대로 했다.
그가 어머니를 묻고 집에 돌아오자 비가 주룩주룩 왔다. 그 때, 길을 가던 한 처녀가 비를 피하기 위해 그 집 추녀 밑으로 들어섰다. 그 처녀는 서울 재상가의 딸인데, 딸의 운수를 점친 부모가 멀리 산골에 가서 남편을 얻어야 잘 살 것이라 하여 내보냈으므로 떠돌아다니다 그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 총각은 그 처녀와 혼인하였다.
그의 아내는 그가 일하는 숯구덩이에 왔다가 이맛돌이 금덩이임을 알고, 그에게 팔아오게 하였다. 그는 새로 집을 짓고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
이것은 상주가 묘를 쓰자마자 복을 받는 '금시발복담(今時發福談)'이다. 부모도 없고 가난하기 짝이 없는 숯구이 총각이 아내를 얻고 부자가 된다는 것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이 명당에 묘를 쓰자마자 이루어졌으니, 명당의 효험은 대단한 것이다.
[자료 3]
예전에 어떤 사람이 장가들기 전에 죽은 외아들을 대사의 말대로 손자 본다는 묘자리에 묻었다. 얼마 후, 한 처녀가 그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 가마를 멈추고 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그 묘가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한 도령이 나와 그녀를 겁간하였다. 그가 가면서 신표로 은장도를 주므로, 처녀는 반지 한 짝을 빼서 그 도령에게 주었다.
그 후, 처녀는 임신을 하자 아버지께 묘 앞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며 은장도를 내놓았다. 처녀의 아버지와 그 도령의 아버지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묘를 파 보니, 관 속에 그 처녀의 반지 한 짝이 들어있고, 매장할 때 넣어둔 장도는 없었다.
몇 달 후, 그 처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는 관을 열었기 때문에 정기가 빠져 장님이 되었다. 그 아이가 점쟁이로 유명한 김계관(金啓棺)이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외아들이 장가도 가기 전에 죽어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용한 지관의 말대로 명당에 묘를 써서 죽은 아들에게서 손자를 보았다. 죽은 이의 영혼이 살아 있는 여인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정령잉태(精靈孕胎) 모티프'는 {삼국유사}의 도화녀(桃花女)가 진지왕의 영혼과 관계하여 비형랑(鼻荊郞)을 낳았다는 이야기, 고소설 [금방울전]의 막씨가 죽은 남편과 정을 통하여 금방울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많은 구전설화와 고소설에 나타난다. 이 모티프가 풍수설화에서는 명당의 영험성을 강조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자료 4]
어떤 사람이 지관에게 묘자리를 잡아 달라고 했다. 지관은 한 자리를 잡아 주면서, 사자생손(死子生孫)하여 삼정승이 날 자리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묘를 썼는데, 묘를 쓴 후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혼인하는 날 밤에 죽었다. 이것을 본 셋째는 결혼하지 않으려고 집을 떠나 먼 곳에 가 있다가 거기서 혼인하였는데, 역시 첫날밤에 죽었다.
세 며느리는 다 과부가 되었으나, 모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세 아이가 자라서 모두 정승이 되었고, 그 아들들은 모두 판서가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지관의 말대로 사자생손(死子生孫) 한다는 묘자리에 묘를 썼는데, 지관의 말대로 세 아들이 모두 죽었다. 그러나 세 며느리가 모두 유복자를 낳아 정승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지관은 주인공에게 '사자생손지지(死子生孫之地)'라고 말하여 아들의 죽음을 말하였다. 그러나 주인공은 삼정승이 난다는 말에 마음이 홀려 아들이 죽는다는 말은 흘려들었다. 그 결과 그는 세 아들을 장가간 첫날밤에 잃었지만, 유복자로 태어난 세 손자가 모두 정승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 이것은 대를 이을 아들을 두는 일도 중요하지만, 태어난 아들들이 자라 벼슬을 하여 가문을 빛낼 수 있다면 웬만한 희생은 감내하겠다는 의식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료 5]
함경도에 사는 풍수 이씨가 아버지의 유골을 몸에 지니고 명당을 찾아 팔도 강산을 돌아다녔다. 그는 경상도 웅천 바닷가에서 명당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명당이 산 맞은편 바다 가운데 바위 밑에 있어서 쉽게 갈 수가 없어 한탄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그 근처에서 놀고 있던 아이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바위 밑에 있는 왼쪽 구멍은 천자가, 오른쪽 구멍은 왕이 날 명당인데, 헤엄을 못해 갈 수가 없어 그런다고 하였다. 아이는 헤엄쳐 가서 살펴보고 와서 그의 말대로 물 속 깊은 곳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왼쪽과 오른쪽에 구멍이 있다고 하였다.
이씨는 아이에게 아버지의 유골을 파 오게 한 뒤, 자기 아버지의 유골은 왼쪽 구멍에, 아이 아버지의 유골은 오른쪽 구멍에 넣고 오라고 하였다. 물 속으로 들어간 아이는 그가 시킨 대로 하지 않고, 왼쪽과 오른쪽을 바꿔서 넣었다.
그 후 풍수 이씨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라고 한다. 그리고 헤엄치던 아이는 중원으로 가서 병술을 닦아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다가 나라를 세웠는데, 그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라고 한다.
위 이야기에서 이성계와 주원장은 바다 속에 있는 명당의 위력으로 조선의 왕과 명나라 천자가 되었다. 이씨는 천자가 날 명당을 알고서도 헤엄을 잘하는 아이에게 그 자리를 빼앗김으로써 왕이 날 자리에 유골을 넣었다. 이것은 풍수관념을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면서 합리화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명당을 얻으면 그 효험이 나타나는데, 바로 나타나 금시 발복하는 경우도 있고, 몇 년 후에 발복하는 경우도 있다. 발복의 내용을 보면,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얻어 부자가 되고, 배우자가 없는 사람은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 자손이 없는 사람은 자손을 얻고, 신분 상승을 원하는 사람은 본인의 노력 또는 남의 도움을 받아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룬다. 이처럼 명당은 결핍된 재물, 명예, 배우자, 자손, 건강 등을 얻는 복된 땅이다.
나. 명당의 획득
명당을 얻는 것은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므로, 사람들은 명당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설화에는 명당을 얻기 위한 노력과 명당을 얻는 과정을 매우 흥미롭게 이야기한다.
[자료 6]
옛날에 한 총각이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가난하여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기 손으로 장례를 치를 요량으로 밀짚방석으로 시신을 말아 짊어지고 산으로 갔다.
주막에서 밥을 먹던 지관이 뒷산에서 총각이 땅을 파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살펴보니, '땅을 파 놨다가 용천수(湧泉水)로 씻어서, 군기(軍旗)로 둘러 가지고, 금관(金棺)에 넣어서, 오시(午時)에 하관하면 크게 일어날 명당' 자리였다. 지관은 그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말없이 지켜보았다.
총각이 땅을 다 파고 나니, 느닷없이 소나기가 내려 파 놓은 자리에 물이 고였다. 이 때, 나무하러 가던 아이들이 작대기에 수건을 달아 고인 물을 휘저으며 노는데, 꼭 군기를 돌리는 것과 같았다. 잠시 후, 총각이 누런 금색의 밀짚방석에 시체를 말아서 지고 오더니, 하관을 안하고 잠시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지관이 한 수 배우려고 하관을 왜 안 하느냐고 묻자, 총각은 "어머니가 배고프게 돌아가셨으니 음식 냄새라도 맡고 가시게 하려고 점심때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지관이 감탄하고는 3년 후에 발복할 자리라고 일러 주었다.
3년 후에 지관이 다시 와 보니 정말 노총각이 장가도 가고, 큰 집 사고, 논 사서 잘 살고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젊은이는 관을 짤 수도 없고, 지관을 부를 수도 없으며, 누구의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궁핍한 처지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시신을 밀짚방석으로 말아 가지고 산으로 가서 아무 데나 파고 묻었는데, 그 자리가 명당이었다. 명당에 매장하기 위한 까다로운 절차도 우연히 해결되었다. 이러한 우연은 신이자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어서 가능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각지에서 널리 전해 오는데, 이들 이야기에서 우연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얻은 명당은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 내리는 보상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당은 우연히 얻는 경우도 있지만, 위기에 처한 풍수를 도와주고 얻는 경우도 있고, 평소에 좋은 일을 많이 하여 그 보상으로 명당을 얻는 경우도 있다.
[자료 7]
그전에 논에 나가 일하고 돌아오던 농부의 아내가 다 죽게 된 중을 자기의 젖을 먹여 살렸다. 그리고는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잘 간호해 주었다. 원기를 회복한 중은 자기를 구해준 보답으로 묘자리를 잡아주겠다며, 농부에게 삼 정승 육 판서가 날 묘자리를 잡아 주었다.
농부는 초빈(草殯)해 두었던 아버지를 그곳에 모셨다. 그 후로 농부의 자손들은 훌륭하게 되어 삼정승 육 판서가 나왔다.
[자료 8]
옛날에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매일 저녁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다녔다. 어느 날, 성묘를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는데, 올 때에도 또 그 돌에 걸려 넘어졌다. 그가 그 돌을 캐내어 집으로 가져왔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황금 덩어리였다.
그는 황금 덩어리를 장에 가지고 가서 삼만 냥을 받고 팔았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두 여인이 서로 먼저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연유를 알아 보니, 나랏돈 3만 냥을 쓴 아들이 돈을 갚지 못해 죽게 되었는데, 구할 방도가 없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먼저 죽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돈 3만 냥이면 세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밤, 그의 집 정원에 있는 감나무에 달린 감을 몰래 따먹으려고 나무에 올라갔던 노승이 떨어져 죽게 되었다. 그는 노승을 방안으로 모시고, 보름 동안 치료해 주었다. 그 노승은 사례로 그에게 부친의 묘자리를 잡아 주겠다며 산으로 가자고 하였다. 얼마 후, 노승은 어느 기와집 뒤 비각이 서 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그 자리가 명당이니 그곳으로 이장하라고 하였다.
그가 그 집 주인이 누구인가 알아 보니, 지난 번에 삼만 냥을 주어 살려 준 사람들이 사는 집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그 집 주인은 그 자리가 '세 사람 살린 사람이 묘를 써야 하는 자리'라고 하면서, 생명의 은인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 자리에 부친을 안장하고, 잘 살았다.
[자료 7]의 주인공은 음식을 먹지 못하여 죽게 된 노승을 살려준 대가로 명당을 얻었다. 노승이 명당을 잡아주었다고 한 것은, 수도를 많이 한 스님은 풍수지리에도 통달하였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자료 8]에서 주인공은 세 사람을 살린 공으로 명당을 얻었다. 두 이야기는 적선한 사람만이 명당을 얻을 수 있다는 사고의 표현이다.
[자료 9]
예전에 전라도에 사는 한 사람이 제천에 사는 명풍수 이삼득을 찾아왔다. 그는 한달 간 그 집에 유한 후, 많은 돈을 주고 가면서 자기가 죽거든 좋은 묘자리를 잡아달라고 했다.
얼마 후, 그의 아들들이 이삼득을 찾아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좋은 묘자리를 잡아달라고 했다. 이씨는 전라도로 가다가 산 속에서 날이 저물어 어느 오두막집을 찾아들어 갔다. 그 집에는 대사 한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잠을 자려고 할 때, 대사가 옷을 벗다가 장삼 자락으로 이씨의 눈을 때렸다. 이씨는 아픈 것을 참고 그대로 잠을 잔 후 약속 장소로 가서 좋다고 생각되는 묘자리를 잡아주었다.
이씨는 돌아오는 길에 또 그 주막에서 자게 되었는데, 먼저 그 대사가 또 와 있었다. 그 대사는 또 다시 장삼 자락으로 이씨의 먼저 때렸던 눈을 때렸다. 이씨가 화가 나서 대사에게 호통을 치니 대사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곳의 산신령이다. 네가 묘 자리를 잡아준 그 사람은 돈을 벌 때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네가 좋은 자리를 잡아주어서 복을 받게 해주면 되겠느냐? 그래서 내가 어제는 네 눈을 어둡게 하느라고 때린 것이고, 오늘 때린 것은 네 눈을 다시 밝게 해주느라고 때린 것이니 그리 알아라."
이삼득은 그 후에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자리를 많이 잡아주었다. 그러나 자기 자리는 말하지 않고 죽었다.
이 이야기에서 이름난 풍수는 자기에게 돈을 많이 준 이에게 좋은 자리를 잡아주려고 하였으나, 산신령이 눈을 어둡게 하여 좋은 자리를 잡아주지 못하였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유명한 지관이 자기를 잘 돌봐준 젊은이에게 명당을 잡아주었는데, 몇 년 후에 와 보니, 그가 죽고 집안이 망하였다. 지관은 자기가 묘자리를 잘못 잡아주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지관 노릇을 하지 않겠다며 패철(佩鐵)을 깨뜨리려고 하였다. 그 때, 산신령의 화신인 노인이 나타나 "그 젊은이는 선대에 살인을 한 사람이 있어서 그 벌을 받은 것이니, 자책(自責)하지 말고 지관 일을 계속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적악(積惡)한 사람은 명당에 묻힐 수 없고, 혹 묻힌다 하여도 명당이 그 효험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설화에서 명당 자리는 동물의 도움으로 얻기도 한다.
[자료 10]
옛날에 남의 집 머슴살이하는 총각이 나무를 하다가 포수에게 쫓기는 노루를 구해주었다. 그는 노루가 일러주는 곳에 집을 짓고 짚신장사를 하며 살았다.
어느 날, 길 가던 여인이 비를 피하여 그의 집에 들어왔다. 그 여인은 남편을 여의고 집을 나온 재상의 딸인데, 그에게 함께 살자고 하였다. 그는 그녀와 혼인하여 살며 아들 삼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노루의 보은으로 명당을 얻어 집을 짓고 살다가 발복한다. 동물 의 보은으로 명당을 얻는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동물로는 호랑이가 많이 등장한다. 호랑이는 목에 비녀가 걸려 고생을 하다가 비녀를 빼준 사람에게 명당을 알려 주기도 하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 명당을 알려 주기도 한다.
설화에는 남의 명당을 빼앗는 이야기도 많이 있다. 권력이나 재물을 가진 사람은 이를 이용하여 남의 명당을 빼앗는다. 그럴 경우에는 산송(山訟)을 제기하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여 고민하다가 지혜로 문제를 해결한다.
[자료 11]
옛날에 출가한 딸이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친정에 갔는데, 두 노인들이 내일 장사지낼 자리는 물이 나지 않으면, 당대에 정승 판서가 나는 자리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딸은 몰래 물동이를 이고 산으로 가서 부친의 묘자리 파놓은 곳에 물을 길어다 부었다. 이튿날, 상주는 그 곳에 물이 고인 것을 보고, 다른 곳에 장사하였다.
얼마 후, 딸은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 오라버니에게 그 묘터를 달라고 청하여 그 자리에 묘로 썼다. 그 후 딸의 아들 삼형제가 정승과 판서가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시집간 딸은 꾀를 써서 친정 아버지의 명당을 빼앗는다. 이 이야기는 여자가 시집을 간 뒤에는 친정보다는 시댁의 영달과 자손들의 장래에 더 마음을 쓴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머슴살이하는 총각은 풍수에 능한 사람이 자기가 본 자리가 명당인가를 시험하기 위해 달걀 세 개를 사다 달라고 하자, 삶은 달걀을 섞어 주어 그 사람이 자기가 명당을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고 그냥 가게 한다. 총각은 그 자리에 달걀을 묻어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묘를 쓴다. 이 이야기 역시 꾀로 명당을 얻은 예이다.
설화에는 암장(暗葬)하거나 투장(偸葬)하는 이야기도 많이 있다. 이것은 힘이나 꾀로 남의 명당을 빼앗을 수 없을 때에 하는 방법이다. 이런 이야기는 명당을 얻기 위한 집념이 얼마나 강하고 질겼는가는 보여 준다.
다. 명당의 파손과 비보(裨補)
얻은 명당은 잘 보존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파손되어 명당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명당은 그에 따른 금기(禁忌)를 어기거나 비밀을 지키지 않을 경우, 악을 행한 경우, 더 좋은 자리를 얻으려는 욕심에서 이장(移葬)하는 경우에 파손된다.
[자료 12]
옛날에 한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최씨가 도사를 잘 대접하였다. 도사는 집터를 잡아주면서 홍씨는 집안에 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최씨는 그 집터에 집을 짓고 이사한 뒤에 하는 일이 잘 되어 부자가 되었다.
어느 겨울, 한 아이가 대문 앞에 와서 울고 있었다. 그 아이의 성이 홍가였는데, 그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 아이를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보살핀 뒤에, 대를 잇게 하려고 양자를 삼았다. 그 아이는 자라서 과거에 급제하여 판서가 되었는데, 원래의 성을 따라 홍씨로 행세하는 바람에 최씨 집안은 대가 끊기고 망하게 되었다.
[자료 13]
노승이 묘자리를 잡아 주면서, 돌이 나오더라도 파내지 말고 그 위에 묻으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광(壙)을 파는데, 구들장 같은 돌이 나왔다. 일꾼들이 돌 위에 시신을 모실 수 없다면서 파내려고 돌을 들췄다. 그 때, 돌 밑에 있던 꿩 두 마리가 날아갔다. 일꾼들이 놀라서 얼른 돌을 내려놓는 바람에 밖으로 나오려던 꿩 한 마리가 눈을 다친 채 그대로 갇히고 말았다. 상주는 할 수 없다면서 돌 위에 시신을 안장(安葬)하였다.
그 후에 그 사람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위로 둘은 죽고, 셋째는 장님이 되었다.
[자료 14]
지금 영릉(英陵) 자리에는 원래 다른 사람의 묘가 있었다. 그 곳에 묘를 쓸 적에 지관이 상주에게 "이 산소를 쓰고 집안이 잘 되더라도 재실(齋室)을 짓지 말라."고 하였다. 그 후, 자손이 번창하니, 후손들이 재실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며 재실을 지어 놓았다.
세종이 승하한 뒤에 지관이 왕릉자리를 찾으러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지관이 비를 피하려고 재실의 처마 밑에 섰다가 둘레를 살펴보니, 바로 거기가 명당이었다.
지관의 말을 들은 조정에서는 그 묘를 파내고, 거기에 세종을 안장하였다. 여기가 영릉인데, 산소 터는 좋으나 남의 묘를 빼앗았으므로 그 아들인 문종은 몸이 약해져서 일찍 죽고, 손자인 단종도 세조의 손에 죽는 가정 풍파를 겪게 되었다고 한다.
[자료 12]에서는 '홍씨를 집안에 들이지 말라.'는 금기를, [자료 13]에서는 '돌을 파내지 말라.'는 금기를, [자료 14]에서는 '재실을 짓지 말라.'는 금기를 어긴 탓으로 명당이 파손되어 화를 당했다.
설화에서 금기는 도사나 노승, 노인, 지관 등 신이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 금기가 지켜질 때에는 복을 받지만, 그것이 파기될 때에는 큰 전환을 맞게 된다. 그래서 비극적인 결과를 맞기도 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더 큰 행복을 가져오기도 한다. 설화에서 금기는 지켜지기보다는 파기되는 경우가 더 많다. 금기의 파기는 감성적 자아와 이성적 자아가 내면에서 갈등을 겪다가 감성적 자아가 승리함으로써 일어나는데, 이것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인간적 약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 15]
그전에 어느 마을에 한 양반이 세력을 떨치며 살았다. 어느 날, 한 종이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는데, 양반은 그 종의 가족을 모두 죽이라고 하였다. 이 때, 다른 종들이 그의 두 살 먹은 아이를 빼돌려 어느 절에 맡겼다. 그 아이는 금강산에 있는 절에서 20년 동안 지술(地術)을 공부한 뒤, 복수할 결심을 하고 그 양반 집을 찾아갔다.
젊은이는 그 양반집 사랑에 머물면서 그 집의 조상의 행적과 내력을 이야기한 뒤, 조상의 묘자리를 봐 주겠다고 하였다. 젊은이는 가장 좋은 묘자리를 가리키며 명당의 기(氣)가 쇠하였으니, 이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양반은 젊은이가 매우 박식(博識)하므로, 의심하지 않고 이장하기로 하였다. 양반이 그 묘를 파고 석관의 뚜껑을 열자, 학 한 마리가 나와 날아가더니, 산자락 끝에 앉았다. 양반은 젊은이의 말대로 학이 날아가 앉은 나무 밑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로 그 집안은 망하여 300여 호 살던 씨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위 이야기에서 양반은 작은 실수를 한 종의 가족을 죽인 벌과 더 잘 살려는 욕심 때문에 명당을 파손하고 말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악행을 하거나 과욕을 부리면 얻었던 명당을 파손하게 된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자료 16]
옛날 어느 용한 지관이 죽으면서 자기의 시신을 동네 사람들 몰래 대동 샘에 넣으라고 하였다. 아들들이 유언대로 하고, 무덤에는 빈 관을 묻었다. 어머니는 죽은 남편과 아들들이 자기에게 숨기려 한 것을 고깝게 생각하여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마을 사람들이 우물물을 품어내고 보니, 죽은 지관은 큰 암소가 되어 막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그 후로 그 집안은 망하고 말았다.
명당은 대지의 비밀이므로, 꼭 필요한 사람 외에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 좋다. 그 비밀이 널리 알려지면, 명당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위 이야기에서 명당의 비밀은 어머니에 의해 폭로된다. 어머니는 남편이 자기를 성이 다른 사람이라 하여 따돌리자, 남편과 자식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서운함에서 비밀을 폭로한다. 이 이야기에서 명당 파손의 비극은 동네 사람이 먹는 우물을 명당으로 상정한 데에 첫째 원인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아내를 가족으로 보지 않은 남편의 편견 때문이라 하겠다.
[자료 17]
그전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집에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아 며느리가 손이 마를 날이 없었다. 어느 날, 중이 와서 시주를 청하는데, 며느리는 시주를 하면서 자기가 좀 편히 살고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중은 그녀에게 뒷산 중턱에 있는 바위를 굴리면 된다고 하였다.
며느리가 사람들을 풀어 그 바위를 아래로 굴렸더니, 그 집이 망하였다. 그 후로 손님이 오지 않아서 며느리의 손이 마르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생기가 흐르는 지맥(地脈)을 끊어 명당을 파손한 단맥설화(斷脈說話)의 한 예이다. 단맥을 하면 명당이 파손되어 그 집안이나 후손이 망하고, 그 마을에서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풍수설화에 나타나는 단맥의 수단과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지맥을 칼이나 낫으로 자르기도 하고, 도끼로 찍거나, 쇠·쇠말뚝·쇠못 등을 그대로 박거나 달구어 박아서, 또는 삽으로 파거나 숯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끊기도 한다. 또 흙으로 파거나 바위를 깨뜨려서, 또는 나무를 베어서 지맥을 자르기도 한다. 지맥을 끊을 때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거나 피가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지맥을 사람의 혈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 데서 나온 구성이라 하겠다.
단맥설화에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조선에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명산의 혈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단맥의 행위자로 대표적인 인물은 이여송이고, 그 다음으로 일본인, 고종단, 중국 사신 등이다. 이처럼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두 나라에 대한 적대 감정과 민족자존 의식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1985년 3월 서울의 '오르내림 산우회'에서는 삼각산 백운대 정상에서 1927년에 일본인이 박았다고 하는 쇠말뚝을 뽑아냈다. 또, '한국 산악회' 경남 지부에서는 1986년 8월 15일에 경남 마산시 교방동에 있는 무학산 학봉에서 일본인들이 박았다고 하는 쇠말뚝을 제거하였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조선의 풍수지리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풍수침략 행위를 자행하였음을 사실적으로 말해준다.
풍수설로 보아 명당에 결함이 있을 때 이를 보완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것을 비보(裨補)라고 한다. 이것은 풍수설의 순수 이론을 적용하여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적 전개보다는 지술 시행의 실제로서 전승된다. 그래서 비보에 관한 설화는 다른 설화에 비해 문학적 형상력이 떨어진다.
[자료 18]
강원도 양양에 조산(造山)이란 마을이 있다. 옛날부터 인심이 후하고 농사도 잘 되어 넉넉히 살았으나, 큰 인물이 나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 노인들이 정자나무 밑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데, 한 노승이 마을을 두루 살피고 다녔다. 노인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노승은 금강산에서 온 중이라면서, 지세가 하도 좋아 살펴보았는데, 먹고살기는 걱정이 없겠으나, 인물이 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노인들이 어떻게 하면 인재가 나겠느냐 물었다. 노승은 설악산의 주맥(主脈)이 이 마을에 와서 끊겼으니, 인력으로라도 산 하나를 만들어 그 맥을 이어주면 설악산의 정기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인공적으로 산을 만들었더니, 많은 인재가 나왔다. 그 후로 마을 이름도 '조산(造山)'이라고 하였다.
[자료 19]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에 조선 후기에 세도를 부리던 김좌근의 묘가 있다. 김좌근이 세상을 떠난 뒤에 아들 김병기의 부탁을 받은 명풍수가 묘자리를 잡으러 다니다가 이 곳에 와 보니, 여산 송씨의 정자가 있는 자리가 명당이었다. 송씨가 정자를 옮기니, 김병기가 그 곳에 묘를 썼다.
그 자리는 권력과 돈은 있으나 자손이 귀한 자리였다. 풍수는 지형에 맞추어 묘 아래에 아흔아홉 칸 짜리 집을 짓고, 그 앞에 연못과 소 구유 형상을 만들고, 거기서 500∼600m 남쪽에 외양간의 빗장 역할을 할 나무를 심었다.
[자료 18]은 산을 만들어 비보함으로써 인재가 나도록 한 이야기이다. [자료 19]에서는 소의 형상을 한 명당을 비보하기 위하여 집을 짓고, 소가 먹을 물이 있는 연못과 구유를 만든 뒤에 소가 달아나지 않도록 외양간의 빗장 역할을 할 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그 묘 아래에 그 집과 연못과 나무가 지금도 있다.
비보 이야기는 양택풍수 설화에 많은데,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 때문에 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 동대문의 이름은 원래 '흥인문(興仁門)'인데, 세조 때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바꾸었다. 그 까닭은 풍수설에서 인(仁)은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東)을 뜻하므로 흥인은 동방을 뜻한다. 여기에 지(之) 자를 더한 것은 서울의 지세가 북·서·남은 모두 산과 높은 지형으로 되어 있으나 오직 동쪽만이 낮으므로, 글자 한 자를 더 보태서 그 꺼진 곳을 메우는 의미로 흥인지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숭례문(崇禮門)'의 현판은 세로로 걸려 있다. 예(禮)는 오행상 화(火)에 속하고, 화는 남쪽을 뜻하는데, 경복궁을 마주 바라보는 관악산이 화형(火形)의 산이므로 이 화산을 억누르기 위하여, 곧 불을 불로써 마주 대하기 위하여 문의 현판을 불타오르는 형국처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여기에는 풍수설에 의한 비보의 뜻이 담겨 있다.
음택에 관한 비보로는 조선 태조의 선대 묘가 왼쪽 허리 부분이 낮고, 허(虛)하기 때문에 철룡(鐵龍)을 묻어 지맥을 보충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개인적인 양택 비보로는 고려 말 신돈이 왕위 찬탈을 목적으로 하여 자기 마을의 비보를 위해 오봉산을 축조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땅속을 흐르는 생기가 모인 곳이 명당인데, 그 곳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발복한다고 한다. 이런 명당을 얻으면 금시 발복하기도 하고, 긴 시간을 두고 그 효험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무척 명당을 얻고싶어 하였는데, 명당을 얻는 방법이나 과정을 보면, 우연히 명당을 얻기도 하고, 덕을 쌓은 뒤에 명당을 얻기도 한다. 또 동물의 보은으로 명당을 얻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선행에 따른 보상의 성격을 지닌다. 권력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은 이를 이용하여 남의 명당을 빼앗기도 하였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꾀를 써서 명당을 차지하거나, 암장이나 투장의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명당은 그에 따른 금기를 어기거나 비밀을 지키지 않을 경우, 악을 행한 경우, 더 좋은 자리를 얻으려는 욕심에서 이장하는 경우에 파손되어 명당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또 과욕이나 실수로, 또는 의도적으로 지맥을 끊어 명당을 파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비보(裨補)하여 명당의 결함이나 미비점을 보완하는 경우도 있다.
3. 명당을 아는 사람
지술(地術)은 풍수설의 학습과 수련을 통하여 얻는 고도의 기술이요 감식(鑑識) 능력이다. 이러한 지술을 익힌 사람만이 명당을 알아볼 수 있다.
지술을 익혀 집터나 묘자리 등을 잘 잡는 사람을 지관(地官), 지사(地師), 풍수(風水)라고 한다. 지관은 원래 왕가에서 능(陵)을 조성할 때 그 지역의 지리를 살피기 위해 땅 보는 일을 맡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조선 시대에는 풍수사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 임명하는 임시직이었다. 그 후로 이 말은 풍수의 경칭으로 쓰이고 있다.
설화에는 지술을 익힌 진짜 지관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지술을 모르는 가짜 지관의 이야기도 많이 있다.
가. 지술을 익힌 진짜 지관
진짜 지관 이야기에는 지술의 학습과 수련 과정, 지관의 활동 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자료 20]
그전에 한 지관이 조선의 스승에게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중국으로 지술을 공부하러 갔다. 중국에 가서 한 스승을 만났는데, 지술을 제대로 익히려면 10년은 공부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는 10년을 기약하고 공부하였는데, 9년을 공부하고 나니,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스승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묘자리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청년에게 묘자리를 잡아 주면서, 그 자리는 삼일만에 장가가고, 평생 의식 걱정을 하지 않을 자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2년 후에 다시 가보니 그 청년이 삼일만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기의 공부가 부족함을 느끼고, 다시 중국으로 가서 스승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더 공부하였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지관 노릇을 잘 하였다. 그가 어느 마을에 가니, 한 양반이 외아들을 잃고 대가 끊어질 것을 슬퍼하고 있었다. 그는 양반에게 '죽은 아들에게서 손자 보는 묘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 양반이 아들을 묻은 뒤, 한 처녀가 길을 가다가 소변을 보려고 그 묘 뒤로 갔는데, 묘에서 한 청년이 나와 겁탈한 뒤에 은장도를 주고 다시 묘로 들어갔다. 그 여자는 아들을 낳은 뒤에 장도를 가지고 그 양반을 찾아갔다. 양반은 아들의 관에 넣은 장도칼을 보고, 그녀의 말을 믿었다. 양반은 그의 덕으로 죽은 아들에게서 손자를 얻었다.
지관의 수련 과정을 말해 주는 이 이야기는 지술(地術)이 갈고 닦아야 할 도(道)임을 말해 준다. 10년을 기약하고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 더 배울 것이 없다 하여 1년을 채우지 않은 것은 자만이요 불성실이다. 그는 자만 때문에 한 청년을 죽게 하였음을 뉘우치고, 다시 가서 남은 공부를 마침으로써 조선에 하나밖에 없다는 '사자생손지지(死子生孫之地)'를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지관으로서 완성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자료 21]
박상의가 서당을 다니는데, 가는 길에 한 여자가 나타나 두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그런 일이 여러 날 계속되자, 그의 얼굴에 핏기가 없어졌다. 서당 선생님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오는 길에 여자가 입을 맞추고, 입에 무엇을 넣었다가 내가고, 다시 넣었다가 내가곤 한다고 하였다. 선생님은 그것이 입으로 들어올 적에 꽉 물어서 자기한테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선생님이 그 말을 한 뒤로는 그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석 달이 지나 그도, 선생님도 그 일을 거의 잊어버릴 때쯤 여자가 나타났다. 그가 입안으로 무엇이 들어올 적에 그것을 꽉 물으니, 그 여자가 뺨을 때렸다. 그가 뺨을 맞고 엎어지는 통에 그것을 삼켜 버렸는데, 그것은 백년 묵은 여우 구슬이었다.
그가 그 구슬을 삼키고 하늘을 봤으면 천리(天理)를 알았을 터인데, 선생님이 옳게 가르쳐 주지 않고 욕심이 나서 구슬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하늘을 쳐다볼 생각을 못하고 구슬을 삼키면서 땅을 보았기 때문에 천리는 모르고 지리(地理)만 알게 되었다.
[자료 21]은 조선 시대에 이름난 지관 박상의가 지술에 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자료 20]의 주인공은 중국에 가서 10년을 공부하여 지술을 익혔는데, 박상의는 사람의 정기를 빼앗으려는 100년 묵은 여우와 목숨을 건 싸움에서 승리하여 지술을 완성한다. 이 이야기에는 지술 획득이 수학(修學) 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신비의 경지에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자료 22]
조선 22대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 풍수지리설이 이치에 맞는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지가서(地家書)에 뜻을 두고 연구하는 한편, 팔도에서 이름난 지사(地師)를 불러다가 답산(踏山)하면서 지리 연구에 열중하였다. 몇 해를 두고 연구하니, 어느 묘자리는 어떨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조사해 보면, 사실로 들어맞음을 알고 풍수지리란 이치가 있는 것이라 믿게 되었다.
하루는 평복으로, 지사(地師) 한 사람을 데리고 경기도 과천 땅을 답산하였는데, 어느 평민이 묘를 쓰고 있었다. 왕이 지사와 함께 그 곳 지세와 좌향을 보니, 하관(下棺)만 하면 맏상주가 죽을 자리였다. 왕이 상주에게 이 자리를 잡아준 사람이 누구인가 물으니, 과천에서 지술이 용하기로 이름난 이 생원이 잡아 주었다고 하였다.
왕이 그 자리는 상주가 죽을 자리이니 쓰지 말라고 하였으나, 상주는 가난하여 장례를 연기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쓰겠다고 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과천 호방에 가서 500냥을 찾아 쓸 수 있는 증서를 써주며, 그곳에 묘를 쓰지 말라고 하였다. 상주가 대답하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 왕은 과천 이 생원의 오두막을 찾아갔다.
왕이 이 생원을 만나서, 오늘 잡아준 묘자리가 상주 죽을 자리인 것을 알고 잡아주었느냐고 물으니, 알고 잡아 주었다고 하였다. 왕은 괘씸한 생각이 들어 무슨 이유로 그런 자리를 잡아 주었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 생원은 마땅한 자리가 없어 잡아 주었는데, 그 사람은 그 자리에 묘를 쓰지 않았을 것이며, 하관 전에 500냥이 생겼을 것이라 하였다. 그 말을 듣고 기가 꺾인 왕은 지리를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이런 곳에서 궁색하게 사느냐고 물었다. 이 생원은 이 집터가 상감 마마께서 왕림하실 자리여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왕은 마음 속으로 크게 탄복하고 돌아왔다.
대궐로 돌아온 왕은 예의를 갖춰 이 생원을 부른 뒤에 함께 답산하여 사도세자의 묘자리를 잡아 이장하였다. 그 곳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융릉(隆陵)이다.
위 이야기는 표면에 정조가 나타나 있지만, 실은 정조나 정조와 함께 온 지사보다 지술이 한 수 위인 과천 이 생원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追尊)하고, 좋은 자리에 안장하기 위해 몸소 풍수지리를 연구하고, 답산(踏山)하였다는 정조의 효성이 풍수지리설과 얽혀 재미있게 표현되었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과천 이 생원과 같은 유능한 지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료 23]
옛날에 지리를 잘 보는 지관이 서울 북악산에 올라갔다가 반쯤 묻힌 유골을 발견하였다. 그가 그 자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아들이 있으면 판서가 될 자리였다. 그는 유골의 눈에 막대기를 꽂아놓고, 대신들이 많이 사는 마을로 가서 동정을 살피니, 한 판서가 눈이 아파 고생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가 판서의 병을 고쳐 주겠다고 들어가 침을 놓은 후 산으로 가서 유골에 꽂은 막대기를 빼니, 판서의 병이 나았다. 판서는 그를 깊이 신임하게 되었다.
그가 판서와 함께 판서의 부친 묘를 찾아가 보니, 치산(治山)을 잘 해 놓았다. 그는 그 묘가 판서의 친산(親山)이 아니니, 자세한 내막을 어머님께 여쭤보라고 하였다. 판서가 그간의 일을 어머니께 이야기하고, 사실을 말해 달라고 하니, 판서의 어머니는 젊었을 때 한 남자가 후원 담을 넘어와 관계를 맺은 뒤에 그를 임신한 일을 실토하였다.
그는 친산을 찾아주겠다면서 판서를 데리고 북악산으로 갔다. 그가 반쯤 묻힌 유골의 눈에 막대기를 꽂으니, 판서는 전처럼 눈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 유골이 친아버지임을 확인한 판서는 그에게 돈을 주어 묘를 잘 꾸미게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지관은 유골과 자손의 감응 관계를 이용하여 지술의 영험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판서의 출생의 비밀을 밝혀내고, 판서로 하여금 친아버지의 유골을 찾게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관의 영험성을 높이고, 유골과 후손의 감응을 믿는 마음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자료 24]
지술에 능한 남사고(南師古)가 길지(吉地)를 찾아 부친의 묘를 썼다. 그런데 묘를 쓰고 나서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길지를 찾아 옮겼다. 이 일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였다. 마침내 한 곳을 찾아가니,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길지가 있었다. 그가 크게 기뻐하며 거기에 묘를 쓰는데, 인부 중 한 사람이 일을 하면서, "구천십장(九遷十葬) 남사고야!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으로만 여기지 말라. 고사괘수(枯蛇掛樹) 이 아닌가." 하고 노래하였다. 남사고가 놀라 다시 산의 형세를 살펴보니, 과연 죽은 용의 형상이었다. 급히 그 인부를 찾았으나, 홀연히 없어져 찾을 수가 없었다.
남사고가 탄식하며 "땅이 다 각기 주인이 있으니, 뜻대로 구하기 어렵구나!" 하고, 크게 해롭지 않은 자리를 골라 이장하였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사고(南師古)는 조선 명종 때의 학자로, 역학(易學)·풍수(風水)·천문(天文)·복서(卜筮)·상법(相法)에 도통하여 예언에 능했으며, 만년에는 천문교수(天文敎授)를 지낸 인물이다. 풍수에 능하여 많은 사람에게 길지(吉地)를 잡아주었다고 하는 남사고가 자기 아버지를 안장할 명당을 구하지 못하여 탄식한 것은 그의 욕심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신이한 능력에 속하는 지술은 남을 위하여 베풀 때에는 효험이 나타나지만,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쓸 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 지술을 모르는 가짜 지관
설화에는 지술을 깊이 연구하여 이름난 지관의 이야기도 있지만, 지술을 모르는 가짜 지관의 이야기도 많이 있다.
[자료 25]
예전에 박 생원이라는 선비가 소나기에 돌피 멍석이 떠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글만 읽었다. 부인이 글만 읽어서 어디다 써먹을 거냐며 풍수 노릇이라도 하라고 하였다. 그는 부인이 빌려다 주는 패철을 차고 집을 나섰다. 그가 서울 가까이에 있는 객주집에 가니, 윤 대감 집에서 풍수를 잘 대접한다고 하였다.
그가 윤 대감 집에 가니, 많은 풍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아는 것이 없으므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를 본 상주가 다른 풍수는 다 보내고, 그를 붙잡아 두었다.
그는 그 집에서 오래 묵은 뒤에 집에 가려고 마음먹고, 그 집을 나섰다. 상주들은 그가 묘자리 잡으러 가는 줄 알고 따라 나섰다. 그는 산에 올라가서 산을 둘러본 뒤에 죽을 힘을 다하여 도망하였다. 그가 도망하다가 발을 헛디뎌 잔솔밭에 주저앉자, 상주 3형제가 와서, 여기가 명당이냐고 물었다. 그가 엉겁결에 그렇다고 대답하니, 상주는 거기에 묘를 쓰기로 하였다. 땅을 파니, 물이 나오는데도 상주들은 그의 말만 듣고 거기다 묘를 썼다.
그가 얼마 뒤에 집에 와 보니, 아내는 윤대감이 보내준 돈으로 집을 새로 짓고 잘 지내고 있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남의 묘를 써 줬으니 큰 죄를 지었다며 걱정하였다.
3년 뒤에 윤대감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청하므로,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따라갔다. 그 묘 아래에 재각(齋閣)을 짓고, 잔치를 벌인 윤 대감은 그를 상좌로 모시면서 묘의 혈맥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물이 나는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거북이 자리라고 하였다. 윤 대감은 중국의 명사가 서기(瑞氣)를 보고 그 묘를 찾아와서, 한 밤중에 묘 위에 가서 반듯이 드러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입으로 천상 은하수가 떨어질 것이라며, 시험해 보라고 하여서 그의 말대로 하였더니, 물이 떨어졌다고 하였다. 윤 대감은 박 생원 덕분에 좋은 명당을 잡게 되었다며, 더욱 후히 대접하였다.
위 이야기에서 선비는 가난에 지친 아내의 성화에 책을 덮고 지관 일을 하러 나섰다. 그는 풍수에 관해서는 몰랐기 때문에 도망하다가 넘어진 자리를 명당이라고 잡아주었다. 그 런데, 그 자리가 진짜 명당이었다고 한다. 그가 명당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와 우연성에 의한 것이다.
[자료 26]
옛날에 가난한 선비가 패철을 빌려 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가 어느 초상집에 가니, 그 집에는 풍수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그에게는 묻는 말이 없었다.
그 집에서는 풍수들을 열흘 동안 잘 대접한 뒤 산을 보러 가는데, 이번에 그의 차례라고 하였다. 아는 것이 없는 그는 도망가려다 칡덩굴에 발목이 걸려 넘어졌다. 상주 삼형제가 따라오자, 그는 할 말이 없어 이 자리가 어떠냐고 물었다. 상주들이 좋다고 하여 그 곳에 장사 지내기로 하였다. 그는 상주에게 총소리가 세 번 나면 묘를 쓰라고 하고서, 포수 친구한테 가서 아무 날 오시에 총을 세 번 쏘아달라고 하였다.
상주들이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데, 한밤중에 중 셋이 내려가면서, 한 중이 "자리 잘 잡았다!"고 하니, 뒤에 오던 중이 "오시에 장사를 지냈으면 더 좋았겠다!"고 한다. 그 뒤에 오던 중이 "오시에 총소리가 났으면 삼 정승 육 판서가 날 자리구나!"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상주는 기뻐서 그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다.
위 이야기에서 선비는 풍수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지만 명당을 잡아 주고 돈을 받았다. 그의 성공은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와 지략에 의한 것이다.
[자료 27]
옛날에 가난한 선비가 돈을 벌어오라는 아내의 성화를 못 이겨 집을 나섰다. 그는 한 부자가 상을 당하였다고 하므로 찾아가서 푸짐한 대접을 받고, 상주들에게 위로의 말을 하자, 상주는 그에게 묘자리를 잡아달라고 하였다. 그가 산으로 올라가서 보니, 아무 것도 모르는 그에 눈에도 좋아 보이는 자리가 있었다. 상주들이 좋아하며 무슨 혈이냐고 묻자, 그는 금계포란혈(金鷄抱卵穴)이니, 닭 울음 소리가 나는 새벽에 하관하면 좋다고 꾸며서 대답하였다. 상주가 언제 장례를 지내면 좋겠느냐고 묻자, 그는 별을 보고 시(時)를 잡아줄 테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며칠 동안 대접을 받으며 집안의 구조와 닭장의 위치를 알아둔 그는, 어느 날 자시에 출발하라고 하였다. 별을 보고 시간을 계산한 그는 닭장에서 닭을 붙잡아 안고서 산밑으로 가서, 닭이 울게 하였다. 상주들이 안장하고 돌아온 뒤, 닭 울음 소리가 났느냐고 물으니, 상주들이 기뻐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 집에서는 그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다.
그는 명풍수라고 소문이 나서 국상(國喪)에 지관으로 불려갔다. 마침 겨울이라 온 산이 눈으로 덮여 있는데, 한 군데만 눈도 없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소나무 밑에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가 '여기가 천하 명당이다!' 하고 말한 뒤에 보니, 구렁이는 간 곳이 없었다. 뒤따라오던 지관들과 문무백관들이 보니, 정말 명당 자리였다. 그래서 그는 그 보상으로 많은 재물을 받았다.
집에 돌아오니, 부인이 "요행히 두 번은 왔지만, 세 번까지 오겠습니까? 재물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 주고, 우리는 이 금붙이 하나만 가지고 멀리 가서 삽시다." 하고 말했다. 그 뒤로 그의 종적이 묘연하였다.
위 이야기의 주인공 역시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와 지략,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으로 가난에서 벗어났다. 그는 아내의 말대로 가짜 풍수노릇을 하여 얻은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에 꼭 필요한 재물만 가지고 종적을 감춘다. 여기에는 우연이나 행운이 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요행을 바라는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자료 28]
옛날에 한 선비가 과거에 낙방을 하고 집안이 기울게 되자, 패철을 차고 집을 나섰다. 어느 부자가 상을 당했는데, 그 집에는 많은 풍수가 와 있었다. 그가 말없이 앉아 있으니, 상주는 그가 실력 있는 풍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그 날 밤, 그 집 막내며느리가 몰래 찾아와 살려 달라고 하므로 그 연유를 물었다. 자기는 시집온 지 일곱 달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일로 장례를 치른 뒤에 자기를 죽이려고 광에 가뒀는데, 몰래 나왔다고 하였다. 그녀는 지난 밤 꿈에 산신령이 현몽해 "내일 어떤 풍수가 올 터인데, 내가 시키는 대로 일러 주면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했다 하였다. 그는 그녀가 일러 준대로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튿날, 상주는 그를 시험하려고 증조부 묘에 가서 묘자리가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며느리의 말대로, "이 묘 쓰고 만석꾼이 되었겠다."고 하였다. 조부 묘에 가서 어떠냐고 묻자, 역시 일러 준대로 "호와혈(虎臥穴)로 범이 새끼 낳는 형상이라, 일곱 달만에 아이 낳으면 만석 거부가 더 생기고, 삼정승이 난다."고 하였다. 상주는 막내며느리가 일곱 달만에 아이를 낳은 것이 조부 묘의 덕이라 여겨 기뻐하였다. 상주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어디에 모시면 좋겠느냐고 묻자, 역시 일러 준대로 마을 뒷산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가 3년을 상주와 함께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막내며느리가 예조판서인 오빠에게 서신을 전해 달라고 하였다. 그 후 그는 예조판서의 도움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을 하였다.
위 이야기의 주인공 역시 보이지 않는 신령의 도움으로 죽게 된 막내며느리를 살리고, 묘자리를 잘 잡아주어 가난을 면함을 물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까지 하였다.
[자료 29]
옛날에 가난한 선비가 부인이 삼아준 비를 팔러 장에 갔다. 그가 비를 판 돈을 가지고 돌아오는데, 나무꾼들이 큰 구렁이를 잡아 안주를 하려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가진 돈을 주고, 대신 구렁이를 풀어 주게 하였다.
그는 아내가 동생에게서 빌려다 주는 패철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는 어느 대감이 죽어 풍수를 모은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그가 초상집에서 자고 일어나 보니, 웬 아이가 아궁이 앞에서 불을 쬐는데 가엾어 보여 자기 밥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그 아이의 말대로 상주가 보아둔 묘자리가 절대 물이 나지 않을 것이니 묘를 쓰라고 하였다. 상주는 그의 말대로 묘를 쓴 뒤에 맏상주는 아들 삼형제를 낳았다. 상주는 많은 돈을 그의 집으로 보내 주었다.
그 상주의 아들 삼형제가 병이 났을 때, 그는 그 아이의 도움으로 삼형제의 병을 낫게 해 주었다. 상주는 그에게 더 많은 돈을 주었다.
그는 어느 부잣집에 가서, 그 아이의 말대로 주인 아버지의 시신이 물 위에 떠 있는데, 이마에 도끼가 꽂혀 있다고 알려주었다. 주인이 묘를 파고 보니, 그의 말과 같았다. 그것은 주인의 이복동생이 자기 잘 되게 하려고 한 짓이었다. 부자는 그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다.
그가 집 가까이 오니, 그 아이는 그가 전에 살려 준 구렁이라고 하면서, 더 이상은 도와줄 수가 없으니, 장님 행세를 하라고 하였다. 그 아이는 그의 눈을 대롱으로 쳐서 겉으로는 눈이 먼 것 같으나 실제로는 아무 이상이 없게 해 주었다. 그래서 선비는 평생을 마음 편하게 살았다.
위 이야기의 주인공은 죽게 된 구렁이를 살려주고, 그 구렁이의 도움으로 풍수 노릇을 잘 하여 많은 재물을 얻었다. 구렁이는 그를 세 번 도와준 뒤에 그의 눈을 먼 것 같이 만들어 마음 편하게 살게 해 준다. 동물 보은담의 성격을 띤 이 이야기의 바탕에는 적선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풍수설화에는 지술을 아는 진짜 지관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지술을 모르는 가짜 지관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진짜 지관은 엄격하고 힘든 학습과 수련 과정을 거쳐서 지술을 습득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집터나 묘자리를 잘 잡을 뿐만 아니라 땅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예견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가짜 지관은 가난을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지관 노릇을 하여 성공함으로써 재물과 벼슬을 얻는다. 이들의 성공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와 노력, 임기응변하는 재치와 우연에 의한 것이다. 우연의 뒤에는 보조자의 도움이 있는데, 그것은 부지런히 공부하거나 일한 사람, 또는 선을 행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의 성격을 띤다.
4. 풍수설화에 나타난 민간의식
풍수설화는 이 설화의 주된 전승집단인 민간이 지니고 있는 풍수에 관한 의식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민간이 지녔던 여러 가지 의식이 나타난다.
가. 행복 추구의 의지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풍수설에 의거하여 명당을 얻어 거기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려고 애쓰는 것 역시 행복을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풍수설화의 주인공 역시 행복을 추구하는데, 행복의 조건은 이야기에 따라 따르게 나타난다. 앞에서 인용한 [자료 2]에서 숯구이 총각은 명당을 쓴 뒤에 아내를 얻고 부자가 된다. [자료 6]에서는 노총각이 명당을 얻은 뒤에 장가가고, 부자가 되어 잘 산다. 그 외의 많은 자료에서 주인공은 명당을 얻음으로써 부자가 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
[자료 1]과 [자료 5]에서는 명당을 얻은 뒤에 고려 태조 왕건, 조선 태조 이성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태어났다. [자료 4]에서는 명당을 얻은 뒤에 그 집안에서 정승과 판서가 났다. [자료 7]에서는 죽어 가는 중을 살린 덕으로 명당을 얻은 뒤에 그 집안에서 삼 정승 육 판서가 났다. 그 외의 많은 자료에서 주인공은 명당을 얻음으로써 벼슬을 하고, 명예를 획득한다. 이것은 신분 상승에 관한 욕구가 매우 컸음을 의미한다. 명예나 신분 상승은 묶어서 귀(貴)라고 할 수 있다.
[자료 3]에서는 외아들이 죽어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탄식하던 주인공이 명당을 얻은 뒤에 손자를 보았다. 그 외의 많은 자료에서 주인공은 명당을 얻은 뒤에 아들을 얻거나 자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풍수설화에는 행복을 얻으려는 욕구와 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설화에 나타나는 행복의 조건은 부, 귀, 배우자, 자손, 건강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한국인의 행복에 대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풍수설화에도 이러한 것들이 강조되어 나타나는데, 건강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나.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에 대한 보상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상상력의 소산인 풍수설화에는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
[자료 2]와 [자료 6]에서는 가난하지만 부지런히 일하며 착하게 산 총각이 우연히, 또는 산신령의 도움으로 명당을 얻은 뒤에 아내를 얻고, 부자가 되었다. [자료 7]에서는 들에 나가 부지런히 일하던 농부의 아내가 죽어 가는 중을 젖을 먹여 살리고, 그 덕으로 명당을 얻어 삼 정승 육 판서가 나오게 한다. [자료 8]에서는 부지런히 일하며 저녁이면 아버지 산소에 성묘 다니던 사람이 성묘 길에서 금덩이를 얻고, 그것을 판 돈으로 세 사람을 살림으로써 그 덕으로 명당을 얻는다. [자료 10]에서 나무꾼은 포수에게 쫓기는 노루를 구해 주고, 그 보은으로 명당을 얻는다. 이 외에도 많은 자료에서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 효성이 지극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이것은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민간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다. 선의 승리에 대한 믿음
풍수설화에는 선과 악이 대립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결국은 선이 반드시 승리한다. [자료 15]에서 세력을 가진 양반이 종의 작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온 가족을 죽인다. 그 때 살아 남은 종의 어린 아들이 절에 들어가 지술을 공부한 뒤에, 그 양반 집으로 와서 선대 묘의 기가 쇠하였으니 이장하라고 하여 명당을 파손한다. 그래서 그 양반 집은 망했다고 한다. 이것은 세력을 가진 자의 횡포에 대한 응징으로, 선의 승리를 의미한다. [자료 14]에서는 세종대왕을 영릉에 모시기 위해 남의 묘를 빼앗은 징벌로 세종의 장자인 문종이 일찍 죽고, 그 아들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의 손에 죽는 가정 풍파를 겪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악행을 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민간의 의식이 왕실이라 하여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 다. [자료 9]에서는 명 풍수가 많은 돈을 준 부자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잘 잡아주려고 하였는데, 산신령이 그의 눈을 어둡게 하여 좋은 자리를 잡아주지 못했다고 한다.
유명한 지관이 자기를 잘 돌봐준 젊은이에게 명당을 잡아주었는데, 몇 년 후에 와 보니, 그가 죽고 집안이 망하였다는 이야기 역시 악을 행한 자의 후손은 벌을 받는다는 의식의 표현이다. 지술에 밝기로 이름난 남사고가 아버지를 명당에 매장하려고 아홉 번이나 이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여 집안이 망했다고 한다. 이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권력을 남용하여 욕심을 채우려 하면, 벌을 받는다는 의식의 표현이다.
설화에서 선과 악이 대결하는 경우에는 선이 승리한다. 이것은 선의 승리를 믿으며 사는 민간의 간절한 소망이요 믿음이다. 이런 의식은 풍수설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라. 운명과 의지의 조화
풍수설화에는 운명론을 보이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자료 6]에서 가난뱅이 총각은 풍수설에 관해 아는 것이 없는 무식쟁이였다. 그가 우연히 명당을 잡고, '땅을 파 놓았다가 용천수(湧泉水)로 씻어서, 군기(軍旗)로 둘러 가지고, 금관(金棺)에 넣어서, 오시(午時)에 하관'해야 하는 풍수설의 까다로운 전제 역시 우연의 일치로 다 해결하고 복을 받는다. [우연히 잡은 명당] 이야기에서는 머슴살이하던 총각이 아버지의 시신을 지고 눈길을 가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관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그대로 두었는데, 그 자리가 명당이었다고 한다.
[이성계와 명천자 주원장]에서는 이성계와 주원장이 한 섬에서 탄생하였는데, 주원장의 아버지가 그 부친의 시신을 지고 가서 산에 묻으려고 하면 산신령이 방해하여 딴 곳으로 옮기기를 여러 번 하였지만, 결국은 천자 날 자리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의 밑바탕에는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는 운명론이 자리잡고 있다.
[자료 18]과 [자료 19]의 비보 이야기는 명당의 결함이나 미비점을 보완하여 복을 누리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이다. [풍수를 대접하고 출세한 신동이 이야기]에서는 양반 집에 가서 하룻밤 유하기를 청하였다가 매를 맞는 풍수를 성의껏 대접한 신동이 금시발복지지를 얻어 그 덕으로 양반집 딸을 아내로 얻고, 벼슬도 하였다고 한다. [자료 7]에서는 죽게 된 중을 젖을 먹여 살린 뒤에 잘 보살펴 준 농부 내외가 명당을 얻어 발복하였다고 한다. [자료 8]에서는 자기가 가진 돈을 모두 주어 세 사람을 살린 사람이 명당을 얻어 발복하였다고 한다. 이들 이야기는 주인공 스스로의 노력과 선행을 강조하는 것으로, 주인공의 의지와 운명이 조화되어야 함을 말해 준다.
운명론과 의지의 조화는 [자료 25]∼[자료 29]의 가짜 지관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가난을 벗어나려는 굳은 의지와 임기응변하는 지혜가 우연의 일치 또는 신이한 보조자의 도움으로 성공을 거둔다.
마. 현세 중심의 세계관
풍수설화에서 가장 주된 관심사는 죽은 자를 명당에 안장(安葬)하는 것이다. 그런데 명당에 대한 관념은 죽은 자가 안주(安住)할 내세보다는 후손에게 복을 끼치는 데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풍수설화의 사자(死者)는 살아 있는 후손을 위해 기여하는 존재이다.
[은가위] 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지고 명당을 찾아다니던 청년은 산 속에서 만난 여인의 말대로 어머니의 시신을 연못에 넣고, 그 여인이 주는 은가위와 편지를 받아 가지고 대가를 찾아간다. 대가의 주인은 그가 딸의 무덤에 넣은 은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도굴범으로 여겨 죽이려다가 딸의 편지를 보고, 딸의 무덤으로 가서 제를 지내며 그에게 축문을 읽으라고 한다. 그 때 묘가 갈라지며 여인이 살아나 그와 혼인하여 잘 산다. 이 이야기에서 여인은 물 속 명당에 그의 어머니를 넣게 하여 그 어머니가 저승에 가서 안주하게 하고, 젊은이가 저승에 가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신이한 능력을 지닌 자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이승의 삶이 그리워 무덤을 가르고 나와 젊은이와 혼인하여 행복하게 산다. 이 이야기의 밑바탕에는 현세를 중시하는 세계관이 깔려 있다.
[자료 4]에서는 주인공이 지관에게 명당을 잡아달라고 부탁하니, 지관은 명당을 잡아 주면서 '사자생손하여 삼정승이 날 자리'라고 한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그 자리에 부친을 안장한다. 그 결과 세 아들이 장가간 첫날밤에 죽었는데, 세 유복자가 정승이 되고, 그 아들들은 판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손자를 보아 대를 잇고, 벼슬을 하여 가문을 빛낼 수 있다면, 세 아들을 잃고, 세 며느리가 과부가 되는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삼정승 육 판서가 나는 명당] 이야기에서 세 아들은 자기들이 죽는다는 말을 듣고서도 그 자리에 아버지를 모신다. 세 아들은 삼 정승 육 판서가 난다면 자기들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이들 두 이야기에는 가문이 영구히 지속하면서 영화를 누리게 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나타난다. 가문의 지속과 영화는 현세에서의 일이므로, 이것 역시 현세 중심적 세계관의 표현이라 하겠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풍수설화에는 행복 추구에 대한 집념,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에 대한 보상, 선의 승리에 대한 믿음, 운명과 의지의 조화, 현세 중심의 세계관 등의 민간의식이 나타난다.
5. 맺음말
명당은 땅속을 흐르는 생기가 모인 곳인데, 그 곳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발복한다고 한다. 이런 명당을 얻으면 금시 발복하기도 하고, 긴 시간을 두고 그 효험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명당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는데, 우연히 명당을 얻기도 하고, 덕을 쌓은 뒤에 명당을 얻기도 한다. 또 동물의 보은으로 명당을 얻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선행에 따른 보상의 성격을 지닌다. 권력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은 이를 이용하여 남의 명당을 빼앗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꾀를 써서 명당을 차지하거나, 암장이나 투장의 방법을 쓰기도 한다.
명당은 그에 따른 금기를 어기거나 비밀을 지키지 않을 경우, 악을 행한 경우, 더 좋은 자리를 얻으려는 욕심에서 이장하는 경우에 파손되어 명당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또 실수나 과욕, 또는 의도적으로 지맥을 끊어 명당을 파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비보(裨補)하여 명당의 결함이나 미비점을 보완하는 경우도 있다.
명당을 아는 사람은 지술을 익힌 지관인데, 이들은 엄격하고 힘든 학습과 수련 과정을 거쳐서 지술을 습득한다. 이들은 집터나 묘자리를 잘 잡을 뿐만 아니라 땅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예견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가짜 지관은 가난을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지관 노릇을 시작하였는데, 성공하여 재물과 벼슬을 얻는 계기가 된다. 이들의 성공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와 노력, 임기응변하는 재치와 우연에 의한 것이다. 우연의 뒤에는 보조자의 도움이 있는데, 그것은 부지런히 공부하거나 일한 사람, 또는 선을 행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의 성격을 띤다.
풍수설화에는 행복 추구에 대한 집념,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에 대한 보상, 선의 승리에 대한 믿음, 운명과 의지의 조화, 현세 중심의 세계관 등의 민간의식이 나타난다.
풍수설화는 일반 서민뿐만 아니라 양반 계층의 지식인 사이에서도 널리 전해 왔다. 이 설화는 널리 전해 오면서 명당에 대한 인식을 일반화하여, 명당을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리고, 행복 추구의 의지를 강화하고,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보상을 받는다는 의식과 선의 승리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였으며, 운명과 의지를 조화시키며, 현세 중심의 세계관을 갖게 하는 데에도 기여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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