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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부군 가장(先考府君家狀)
부군(府君)의 휘는 임상(琳相), 자는 유옥(孺玉), 호는 민재(敏齋)로 성은 박씨(朴氏)이며 관향은 무안(務安)이다. 무안박씨는 신라시조 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고려의 명신(名臣)인 전주(典酒) 진승(進昇)이 바로 관향조(貫鄕祖)이다. 문오(文晤)의 호(號)는 면남(綿南)으로 지위가 정승에 이르렀으며 면성군(綿城君)에 봉해졌다.
본조(本朝)에 의룡(義龍)의 호는 풍정(楓亭)으로 호조、병조、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개국훈(開國勳)에 봉해져 병산사(柄山柌)에 제향한다. 익경(益卿)의 호는 애한정(愛閒亭)으로 단종[端廟]이 양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와 여러 차례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여 후에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이며, 그로인하여 자손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문룡(文龍)의 호는 매월당(梅月堂)으로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순국하니, 증(贈) 이조참의(吏曹參議)이다. 이는 10세(十世)이상의 현조(顯祖)이다.
5세조 세항(世恒)의 호는 석촌(石村)으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선생에게 배워 학문이 높고 덕을 갖추어 세상의 사표(師表)가 되었으며, 증조 순경(舜慶)의 호는 무은(无隱), 조부 수정(守正)의 호는 성당(省堂)이다.
부친 기준(淇準)의 호는 북암(北巖)으로 온화하고 엄연하며, 따뜻하고 장중하여 언행이 법도에 맞았으며,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壽嘉善大夫)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인데, 남계처사(楠溪處士) 제헌(濟憲)의 따님으로 정숙한 법도가 있었다. 당시에 태봉(台峯) 친정에 문안 갔는데, 북암공이 마침 처갓집에 있었다. 부인이 태산에 관한 꿈을 꾸고 임신하여 고종[上王] 갑자년(1864) 3월 29일 평산리 집에서 부군(府君)을 낳으니, 자태가 청수(淸秀)하고 기상이 활달하며, 총명함이 뛰어나고 기량이 넉넉하였다.
겨우 말을 할 무렵에 서당 아이들 수업하는 소리를 듣고 물이 흐르듯 외웠다. 나가 놀다가도 아이들이 장난하는 것을 보고는 반드시 급히 돌아오며 말씀하기를, “부모님의 경계가 있었다.”하고, 장자(長者) 곁에 있을 때에는 머뭇거리며 돌아가지 않으며 말씀하기를, “부모님이 좋아한다.”하였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먼저《소학(小學)》을 수업하였는데, 신혼성정(晨昏省定)을 배운 대로 하므로 글방선생이 인재로 여겼다. 11세 무렵. 북암공이 고질이 있어 3년 동안 의원(醫員) 치다꺼리를 하느라 집안에는 한 병[壼] 곡식마저 없을 형편이 되어 신을 삼고 나무를 팔아 약을 올렸다.
시탕(侍湯)하는 틈틈이 독서를 그치지 아니하여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하니, 북암공이 말씀하기를, “너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니, 내 병이 나을 것 같다.”하였다. 북암공의 성정은 엄연하고 법도가 있어 일찍이 경계하여 말씀하기를, “사람의 귀함은 학업에 있고, 학업의 귀함은 공을 이룸에 있다.”하였다.
부군(府君)이 받아들여 회간(懷簡)으로 삼고, 족숙(族叔) 죽포(竹圃)선생께 나아가 독서에 피나게 정진[攻苦]하며 침식을 잊다시피 하여 오서오경(五書五經)을 자세히 통달하였다. 이에 가문을 위한 계책으로 과거공부에 매달려 여러 차례 과장에 나갔으나 실패하였다.
족제(族弟)인 교관(教官) 순오(舜五)가 서울에서 내려와 말하기를, “형님의 자질이 아름답고, 학업이 정미하니, 나의 거처에 머물러 있으면 몇 년 안가서 공을 이루고 양명할 계책이 저절로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부군이 정색하며 수긍하지 아니하고 말씀하기를, “옛사람의 ‘선기군(先欺君)’이라는 말이 있거늘, 선비라고 하는 자가 권세가에게 구걸하는 것이 옳겠는가?”하고는 이로부터 벼슬에 뜻을 접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마음을 다하였다.
그때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黙) 선생이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지도[智海]에 유배되었다. 부군이 바다를 건너가 뵙고, 존화양이(尊華攘夷)에 관한 대의(大義)를 다소나마 들었다. 얼마 후에 선생이 역책(易簀)하자 가마복(加麻服)을 예법대로 행하였다.
이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께 예를 표[執贄]하였다. 선생이 한번 보고 극히 칭찬하며 말씀하기를, “자질이 낙천적이며 식견이 이미 정해져있다.”하였다. 인심도심(人心道心)에 관한 16글자를 써주면서 말씀하기를, “이는 천고(千古)의 성현들이 주고받은 심법(心法)이라.”하였다. 다시 “민(敏)”자를 들어 호를 지어주며 민첩한 행실을 권면하였으니, 보살펴 주는 뜻이 실로 보통보다 만 배에서 나온 것이리라.
다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선생에게 예를 표하고 나서 대략이나마 연원(淵源)과 출처(出處)의 정(正)을 알았다. 선생이 남녁의 아끼는 친구[畏友]로 지목하여 글을 주며 칭찬하였다. 민제기(敏齋記)를 지어주며 말씀하기를, “‘민(敏)’이라는 한 글자는 사군자(士君子)가 몸을 다스리는 떳떳한 법으로 면옹이 자신에게서 터득한 것으로써 고한 것이리라.”하였다. 이에 다소간 강구(講究)하고 질의하였는데, 지초나 난초를 찬 것과 같았다.
만족하여 돌아가 함께 배우는 이들에게 일러 말씀하기를, “세상에 사도(師道)로써 자임하는 이들은 대체로 듣고 본 것이 적은 자가 허다하여 강설(講說)하는 바가 틈새의 빛이나 한 모금의 물에 불과하고 얕고 얕아 쉽게 드러나는데, 오직 면암 선생의 충의(忠義) 도덕(道德)의 정(正)과 송사선생의 연원(淵源) 학문(學問)의 공(功)은 본원(本源)의 상류로부터 오지 아니함이 없어 사람들이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다.”하였다.
함께 교유하던 이들은 모두 지역의 알만한 명사들이다. 용서(龍西) 유기일(柳基一)、난와(難窩) 오계수(呉繼洙)、손지(遜志) 홍재구(洪在龜)、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제군자가 그들로 서로 춘추(春秋)로 강(講)하며 의리로써 논하였다. 이로써 갑오년[靑馬 1894]에 동학란[東匪搶攘]을 당하여 온 세상이 휩쓸렸으나, 부군 홀로 부정척사(扶正斥邪)하여 바로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또한 이웃을 물들지 않게 하니, 마침내 저들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을미년(1895) 8월에 변고(變故)가 있었는데, (일본 관헌이) 계속하여 머리를 깎도록 협박하며 제재하는 일이 있었다. 부군이 깊이 회포에 젖어 세상을 근심하시다가 분연히 울먹이며, “시사(時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살아간들 무엇 하겠는가.”하였다.
그때에 면암ㆍ송사 양 선생이 거의(擧義)하여 토복(討復)하고자 각 군에 통문(通文)을 발송하였다. 통문이 본군에 도착하자 부군이 동지 몇 사람과 무성(武城)의 회소(會所)로 달려가 맹서의 말을 지어 말씀하기를, “동방에 오늘 날 한 푼의 인심이라도 있는 자라면 원수와 하늘을 함께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가 없거늘, 하물며 머리를 깎고 원수로 변해야하겠는가. 이 머리칼이 없어지면 양복(陽復)의 조짐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하였다. 다시 진(陣)을 광산관(光山館)으로 옮겨 논의하면서 역시 태연[自若]하게 몇몇 동지들과 죽기로 계획하였다.
갑자기 선유(宣諭)로 의병을 파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나중에는 거의(擧義)한 이들을 체포하는 변고가 있어 송옹이 붙잡히게 되었다. 이에 통한(痛恨)하여 마지않으며 말씀하기를, “선생이 욕을 당하는데, 홀로 태평하게[晏然] 먹고 잘 수 없다.”하고, 갖은 고초[雲雷山水]를 무릅쓰고 달려가 문안하였다.
일찍이 두봉(斗峰) 김병렴(金秉濂)ㆍ본와(本窩) 나유영(羅有英)과 매우 좋게 지내셨다. 어느 날 어렵사리 두 벗에게 말씀하기를, “지도[智海]의 두류(頭流)는 중옹(重翁)의 자취를 겪고 나서 더욱 광채가 나니, 세상에서 동두류(東頭流 지리산)에 비견하며 서토(西土) 사림의 행운이라 여깁니다. 또한 화서(華西) 이항로)는 중옹(김평묵)의 스승이 되고, 노사(蘆沙) 기정진)는 본도의 종장(宗匠)이 됩니다.”하고, 아울러 설단(設壇)하여 비석(碑石)을 세우고 춘추로 석채(釋菜)를 올려 영원히 갱장(羹墻)의 사모를 잇게 하였다.
당시에 영남사람 권(權)、최(崔)의 무리가 노옹[蘆沙]의《납량사의(納凉私議)》와《외필(猥筆)》을 가지고 ‘율곡(栗谷)의 학설을 범척(犯斥)했다.’하여 서로 분쟁이 있었다. 동해(東海) 김옹(金翁)은 노옹 문하의 수제자[高足]로 처음에는 만만 불가하다는 뜻으로 당당하게 배격하여 논하다가 끝내 저들에게 휘둘림을 면치 못하고, 되레 노옹이 잘못되었다 말하여 송옹[松沙]에게 배척당하였다.
부군이 편지로 동해옹에게 고하여 말씀하기를, “노옹은 율곡에 대하여 독실하게 믿고 사모하기를 율곡이 회옹(晦翁)에 대하는 것 같이 하거늘, 어찌 이렇듯 범척(犯斥)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노옹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중옹이 발문(跋文)한 것도 잘못일 것입니다.”하였다. 동해가 끝내 이를 듣지 않으므로 이내 탄식하여 말씀하기를, “이는 실로 우리 당(黨)의 불행이다.”하였다.
적신(賊臣)들이 나라를 팔아 강제로 5조약(五條約)을 체결하였다는 소식에 입을 실룩거리며 무릎을 치고 말씀하기를, “섬 오랑캐와 화친(和親)함은 불가하니 물리쳐야 하고, 국적(國賊)을 용서함은 불가하니 목을 쳐야 가하다”하였다. 이윽고 면옹(勉庵)이 적을 토벌할 계획으로 의병을 소집하자 궐리(闕里)의 회소(會所)로 달려가 일성록(日星錄)에 참여하였다. 얼마 안 되어 그 약조 역시 와해되고, 면옹 또한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구류되었다. 이에 책상을 치며 통탄하여 말씀하기를, “존주(尊周)의 의리는 회복할 기일이 없고, 존초(存楚)의 계책은 바란들 기일이 없게 되었다.”하였다.
병오년(1906)에 면암 선생이 그 섬에서 역책(易簀)하여 구동(龜洞)으로 반구(返柩)함에, 상인은 저자에서 탄식하고, 농민은 골목에서 곡하거늘, 하물며 사림(士林)의 슬픔이야 어떠하였겠는가! 부군이 천리 길을 달려가 통곡하며 가마복(加麻服)을 입고 뇌문으로 제(祭)를 올렸다.
이로부터 문을 닫아 자취를 감추고 후진 교육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계산(溪山)의 작은 서당에 깊이 처하니, 학도들이 운집(雲集)하여 건물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학도들을 대할 때 마다 간곡히 깨우쳐 말씀하기를, “옛사람은 옥중에서도 책을 외우고 배에서도 강(講)하였다. 어찌 세상이 변했다 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겠는가?”하였다. 학도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선생은 온화한 덕기(德器)라. 마치 봄바람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다.”하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에 이르러서도 아끼지 아니함이 없었으나, 정주(程朱)의 여러 서적과 우리 동방제현(東方諸賢)의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에 관한 책을 더욱 심히 아껴 일일이 손수 베낀 것이 거의 수 백 책에 이르러 서각(書閣)에 쌓아 보관하고 있다.
어떤 이가 어려운 성(性)의 이치(理致)를 물으면, 답하시기를, “선유(先儒)의 학설이 이미 자상하고 또한 극진하니, 나 같이 고루한 사람이 어찌 감히 그 간에 이러쿵저러쿵 하겠는가.”하고, 능함을 표현하여 남들과 비교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이로써 당시에 “포백 같은 문장[布帛之文]이요, 숙속 같은 맛[菽粟之味]”이라 칭해졌다.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에 목이 잠기도록 길게 통곡하며 말씀하기를, “저 푸른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리 하는고, 주군(主君)은 이미 치욕을 당하고, 나라는 이미 망하였구나. 오백년 우리 문물이여, 다 짐승에게 들어갔구나!”하였다. 이에 붕우와 교유를 모두 끊고, ‘나의 머리칼을 보존하여 우리 도(道)를 지키겠다[存吾髮守吾道]’는 말을 측은하게 하시며 눈물을 흘렸다.
동지들과 모의하여 강학(講學)으로 풍속과 교화의 의리를 세우기로 하고, 하나의 계를 창설하여 명명하기를, “강회계(講會契)”라 하였다. 계산(溪山)에서 춘삼월(春三月), 반곡(盤曲)에서 추구월(秋九月)이면 학문을 통하여 모이고, 모임을 통하여 강하며, 서로 읍하며 이어가고, 술잔을 들며 즐기니, 잔잔하게 수사(洙泗)가에 비파 타던 풍모가 있었다. 송사 선생이 그 일에 관하여 서(序)하기를, ‘백리 면산에 한줄기 양맥이 돌아온다[百里綿山一線陽復]’는 구절이 있는데, 당시에 이름난 석학(碩學)이 이어받아 기록한 것이다.
신해년(1911)에 북암공의 상을 당하여 격식과 슬픔을 아울러 다하셨으나, 슬픔이 격식보다 더하였으며, 망국의 환란 때문에 예(禮)와 같이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모친상을 당하여 가슴을 치며 울부짖기를, “무슨 죄가 있기에 흉추(凶秋)의 지극함이 이렇듯 심한가?”하고, 거의 까무러칠 지경에 이르렀다. 제삿날에는 미리 산재(散齋)와 치재(致齋)를 하여 종일 관대(冠帶)를 하고, 밤새 잠을 자지 않으며 내게 말씀하기를, “신이 흠향하는 바는 오직 정성에 있고,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넉넉히 하기를 힘쓰기 보다는 차라리 정성을 다해야한다.”하였다. 부모를 위하여 열성으로 묏자리를 구하여 이장[緬禮]하였다.
또한 여러 대 선영의 그 사행(事行)을 기술하여 묘[泉塗]에 표시하면서 불초(不肖)를 돌아보며 말씀하기를, “선조 석촌공(石村公)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선생의 수제자로 학문이 깊고 덕이 높아 세상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그 후로 3세(三世)가 고단하고 문정(門庭)이 부진하여 우리 집안의 문명(文名)이 거의 끊어진 까닭에 석촌공의 문장과 덕업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이 실로 유감이다. 그래 말씀과 행실을 좀이 먹고 남은 종이에서 대략 수습하여 집안에 보물로 간직하니, 마땅히 힘써 가문의 명성이 실추(失墜)되지 않게 하라.”하였으니,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여 두 줄기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두 아우와 오순도순 즐기시고 잠자리를 함께 하며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병진년(1916)에 송사선생이 후학(後學)을 버리자 가마복(加麻服)을 입고 소찬을 행하셨다. 또한 뒤 좇아 제현들이 차례로 떠나감에 책을 안고 은거[蟄伏]하시며 자나 깨나 풍천(風泉)을 읊조렸다. 면옹、송옹 양 선생이 평일에 보살펴주던 후의를 추모하여 마침내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조석(朝夕)으로 참배하며 삭망(朔望)으로 분향한지 이미 여러 해, 기필코 일반 동지들에게 고하여 조두(俎豆)를 받들고 싶은 생각이 가슴속에 간절하였다. 그 후 세상의 변화가 망극하여 곡성의 오강(梧岡)ㆍ고창의 도동(道東)ㆍ함평의 월악(月岳) 등의 사우(祠宇)가 아울러 저들에게 훼철을 당함에 속으로 깜짝 놀라 드디어 중단하여 지사(志事)를 펼치지 못하였으나, 일생의 바람으로 삼았으니, 당시 인사들 중에 사실을 아는 이는 몇 사람 뿐 이다.
어느 날 문인 중에 사진 찍기를 청하는 이가 있었는데, 부군이 불가하다 하며 말씀하기를, “수염하나도 같지 아니하면 곧 다른 사람이라 이미 옛날 말에 있고, 또한 세상[宇宙]이 깜깜하여 몸도 지킬 계책이 없는데, 하물며 그림자를 남기는 것임에야?”하고 단연코 불허하였다.
말년에 평천(平川) 위에 몇 칸 집을 짓고 “평천정사(平川精舍)”라 명명하여 만년[暮年]에 은거할 곳으로 삼았다. 거처한지 해가 못되어 홀연히 세상을 떠나시니, 갑신년(1944) 11월 10일이다. 아, 슬프다. 재앙의 불길이 하늘을 덮쳐 인류가 멸함이여! 초상(初喪)은 절차를 다하지 못하고, 장례(葬禮)는 예와 같이 할 수 없어 다음 달 9일 경오(庚午)에 사는 곳의 안산 선영 아래 정좌(丁坐) 언덕에 권폄(權窆)하였다. 백건(白巾)에 마질(麻絰)을 두르고 상여 줄을 잡고 장례[送終]하는 자가 거의 수 십 인이었고, 뇌문(誄文)을 올리는 이가 길에 서로 이어졌다.
부인은 하동정씨(河東鄭氏)로 그 부친은 무현(武鉉)이다. 근검절약하여 가업(家業)을 이어갔다. 부군(府君)에 앞서 계유년(1933) 11월 12일에 졸하시니, 함평면에 있는 소등리(小等里) 뒤편 팔왕산(八王山) 묘좌(卯坐)에 장사하였다.
1남 1녀가 있는데, 아들은 불초 현풍(炫豊)、딸은 행주(章州) 기우흥(奇宇興)에게 출가 하였다. 손자는 학주(學周)ㆍ용규(龍奎)ㆍ종기(宗琪)ㆍ승주(丞周)ㆍ양규(穰奎)이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아, 슬프다! 선군자(先君子)는 청수(淸粹)한 자질로 중요[喫緊]한 공부를 하여 일찍이 과거공부[功令]를 포기하시고 사문(師門)을 따라 섬겼으며, 일찍이 당시의 바람을 저버리고 덕업에 날로 이르러 사문(師門)에서 배운 것으로 후진을 가르쳤다. 민첩한 자질로 둔한 공을 이루어 밤낮 두려워 경계[乾乾夕惕]하시며, 주리(主理)로 종지(宗旨)를 삼고, 지경(持敬)으로 절도(節度)를 삼아 유행[時華]을 행하지 아니하며 이단[左道]에 미혹되지 아니하였다.
집안이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릴 수 없었으며, 박전(薄田) 몇 뙈기는 죽을 올리기에도 부족하였으나, 처신을 여유 있게 하여 발길은 저잣거리를 밟지 하니 하고, 집은 산업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충효로써 문호(門戶)를 삼고, 문필[文墨]로 전지(田地)를 삼았다. 문장은 간결하되 실질적이며, 평이하되 맑았으며, 일찍이 말씀하기를, “내 응당 마음속의 악을 제거하기를 머리의 때를 없이하는 것 같이 하리라.”하고, 매일 빗질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살폈다.
불행히 세상을 떠나신 이래 풍채가 이미 광중[穸]에 묻혀 언론 역시 고요하고, 오직 전하는 바는 유고(遺稿)가 있을 뿐이다. 금서(禁書)에 대한 화(禍)가 닥치는 것도 아랑곳 아니 하고, 문인 동지들과 그 약간을 수습하여 4책(四冊)으로 나누어 판각(板刻) 기술자에게 부탁하여 일을 이미 마쳤다. 또한 사행(事行)을 기록하고자 붓을 잡고 종이를 마주하니, 풍수(風樹)의 감개가 평일보다 배로 더하여 천지(天地)는 유유하고 산해(山海)가 막막하다. 자세히 보내야하는데, 대강만 수습함을 스스로 면치 못하였다. 아, 슬프다.
先考府君家狀
府君諱琳相。字孺玉。號敏齋。姓朴氏。貫務安。務安之朴。亦新羅始祖王諱赫居世之后。而勝國名臣典酒諱進昇。卽其貫祖。有諱文晤。號綿南。位至政丞。封綿城君。本朝諱義龍。號楓亭。官户兵刑判書。封開國勳。享柄山柌。有諱益卿。號愛閒亭。端廟遜位。棄官南歸。累徵不就。後贈吏叅。子姓仍居焉。有諱文龍。號梅月堂。穆陵役。倡義殉國。贈吏議。此十世以上顯祖。五世祖世恒。號石村。師金農巖先生。學高德備。爲世師表。曾祖諱舜慶。號无隱。祖諱守正。號省堂。考諱淇準。號北巖。和嚴溫莊。言行中規。壽嘉善。妣貞夫人金海金氏。楠溪處士濟憲女。貞淑有度。時歸寧于台峯親堂。而北巖公適在甥館。夫人夢台山而姙。以上王甲子三月二十九日。生府君于枰山里第。姿顏清秀。氣宇宏闊。聰悟絶殊。器量寬弘。才能言。聞塾兒受課。誦之如流。每出遊。見群兒雜戲。必捷返曰。父母有戒。在長者側則遲遲不歸曰。父母所娯。及就學。先受小學。晨昏省定。必如所學。塾師器之。十一歲。北巖公有宿疾。三年刀圭。家無壼粟。捆屐負薪。以供藥餌。侍湯之隙。讀書不撤。以悦親心。北巖公曰。聞爾讀書聲。則吾病若蘇。北巖公性嚴有度。嘗有戒曰。人貴有業。業貴有成。府君受而爲懷中簡。就族叔竹圃先生。讀書攻苦。殆忘寝食。五書五經。詳密淹貫。於是爲門户之計。業於功令。累入塲屋。不利於有司。族弟教官舜五。自京師來曰。以吾兄之質之美業之精。留在於吾居。則不數年而功成名立之策自在矣。府君正色不肯曰。古人有先欺君之語。豈以士爲名而干求於權門。可乎。自是絶意榮途。專心爲己。北巖公性嚴有度。嘗有戒曰。人貴有業。業貴有成。府君受而爲懷中簡。就族叔竹圃先生。讀書攻苦。殆忘寝食。五書五經。詳密淹貫。於是爲門户之計。業於功令。累入塲屋。不利於有司。族弟教官舜五。自京師來曰。以吾兄之質之美業之精。留在於吾居。則不數年而功成名立之策自在矣。府君正色不肯曰。古人有先欺君之語。豈以士爲名而干求於權門。可乎。自是絶意榮途。專心爲己。時重庵金先生。以斥和配于智海。府君涉海拜謁。粗聞尊攘之大義。居無何。先生易簀。加麻如禮。於是。執贄於勉庵崔先生。先生一見而亟穪之曰。天資樂易。識見已定。書人心道心十六字而贈之曰。此乃千古聖賢授受之心法。又擧敏爲號。以勸其敏行。其眷愛之義。實出於尋常之萬萬。又贄見於松沙奇先生。粗識淵源出處之正。而先生以南服畏友目之。贈書而詡之。乃作敏齋記而與之曰。敏之一字。士君子治身之常法。而勉翁以得於己者告之矣。於是。多少講質。佩如芝蘭。充然而歸。語同學者曰。世之以師道爲自任者。率多寡知謏聞。所以講説。不過爲隙光勺水。而淺淺易露。惟勉庵先生。忠義道德之正。松沙先生淵源學問之功。無非自本源上流出來。而非人之所以窺測其涯涘。所與交遊。皆域内知名士。而即柳龍西基一,呉難窩繼洙,洪遜志在龜,吳後石駿善諸君子是也。相與講之以春秋。論之以義理。是以。當靑馬歲。東匪搶攘。擧世風靡。府君獨扶正斥邪。中立不撓。亦使隣里無染。終爲彼輩眼釘。乙未。有八月之變。繼有毀髮脅制。府君深懷世道之憂。念然泣下曰。時事至此。生亦何爲。時勉松兩翁。以擧義討復。發通列郡。通到本郡。府君與同志數三。赴武城會所。因作誓言曰。東方此日。有一分人心者。不無與讎共天之羞。況剃髮而變於讎耶。此髮若亡。則陽復之兆朕永絶矣。又移陣于光山館。論議亦自若。與多少志士爲可死之計。俄而聞宣諭罷兵。後有逮捕擧義之變。而松翁被執。乃痛恨不已曰。先生受辱。不可獨晏然寝食。往候於雲雷山水之中。甞與金斗峰秉濂,羅本窩有英㝡相善。日難於二友曰。智海之頭流。自重翁杖屨之經。益有生光。世擬東頭流。即爲西土士林之幸。且華西爲重翁之師。蘆沙爲本道之宗匠。併設壇竪碑。春秋釋菜。以寓千秋羹墻之慕。時有嶺人權崔輩。以蘆翁凉議猥筆。謂犯斥栗翁。相與紛爭。金東海翁。蘆門高足也。始以萬萬不可之意。堂堂排論。而終不免彼輩之所奪。反以蘆翁謂失。而見斥於松翁。府君以書告翁曰。蘆翁之於栗翁。篤信而尊慕之。如栗翁之於晦翁。安有如此犯斥之事乎。若有蘆翁之失。則重翁之跋。亦非矣。翁終是不聽。乃嘆曰。此實吾黨之不幸云。及聞賊臣賣國。勒成五條。憤悱擊節曰。島夷不可和而可攘。國賊不可貸而可斬。已而勉翁以討賊之計。召集義旅。赴入闕里會。叅於日星錄。未幾。闕約亦解。勉翁又被逮捕。拘留於對馬島。乃擊案而痛曰。尊周之義。可復無日。存楚之計。可望無日。至丙午。勉庵先生易簀于厥島。返柩龜洞。商夫市嘆。農民巷哭。況士林之。以爲如何哉。府君千里奔如。痛哭加麻。文以祭之。自是杜門斂迹。以訓迪後進爲己任。深處溪山小黌。學徒雲集。舍不能容。每對學徒。惓惓開諭曰。古人獄中誦書。舟中講學。豈以世變而忽其學問哉。學徒相顧曰。先生溫溫德器。如坐春風矣。至於百家書籍。無不愛之。而尤酷愛程朱諸書及我東諸賢心性理氣之書。一一手抄。殆至數百勻。蘊閣而藏之。若有人問難之性之理則乃曰。先儒之説。既詳且悉。如余孤陋。豈敢上下於其間。不肯表見其能。而與人爲校。是以當時以布帛之文。菽粟之味穪道之。庚戌。聞無國之報。失聲長痛曰。彼蒼者天。胡爲忍斯。主旣辱矣。國既亡矣。五百我文物。盡入犬羊。於是。多絶朋友之交。以存吾髮守吾道之語。恳恳流涕。乃謀於志同者。以講學樹風之義。倡設一契。命名曰講會契。溪山之春三。盤谷之秋九。文而會。會而講。繼之以相揖。樂之以觴詠。油然有泗上皷瑟之風。松沙先生序其事。而有百里綿山一線陽復之句。當時名碩。繼而述之。辛亥。丁北巖公憂。易戚並盡。而戚勝於易。以無國之憂。葬不如禮。翌年。荐遭内憂。擗踊呌號曰。有何罪逆。而凶秋之極。若是其甚也。幾至乎滅性。當祭之日。前期散致。終日冠帶。通宵不寐。戒不肖曰。神之所享。惟在於誠。不在於物。與之務其腆。寧極其誠。爲考妣熱誠求山。以行緬禮。又數世先塋。述其事行。以表泉塗。顧謂不肖曰。先祖石村公。以金農巖高弟。學邃德高。爲世師表。厥後三世單孑。門庭不振。吾家文名。幾乎絶矣。故石村公文章德業。不見於世。此實有感焉。故畧拾其言與行於蠧蝕殘紙。而珍藏于家。而當勉勵。勿墜家聲。言猶在耳。雙淚濛濛。與二弟怡怡湛樂。聯枕同被。至老不替。丙辰。松沙先生棄後學。加麻行素。又從逐諸賢。次第繼逝。抱書蟄伏。寤寐風泉。而追慕勉松兩先生平日眷愛之厚義。乃奉安位牌。朝夕瞻拜。望朔焚香。已有年所。而意必欲告諸一般同志。以奉俎豆者。切于中矣。厥後世變罔極。谷城之梧岡。高敞之道東。咸平之月岳諸祠。幷被彼輩之所撤。所以愕然于中而遂寝之。以志事未伸。爲一生之願言。當時人士之知其實者。惟二三人而已。日者。自門人中請寫眞。府君不可曰。一髭不似。便是別人。已有古語。亦宇宙黑沉。保身無計。而況遺之以影。斷然不許。末年。築數椽於平川之上。名以平川精舍。以爲暮年藏修之所。而居止未年。奄忽棄世。即甲申至月十日。嗚呼痛哉。禍炎滔天。人類赤滅。喪不能盡節。葬不能如禮。以越九日庚午。權窆于所居案山先兆下丁坐之原。白巾麻絰。執紼送終者。殆數十人。奠誄相屬於道。夫人河東鄭氏。其考武鉉。勤儉節縮。以承家業。先於府君而以癸酉十一月十二日卒。葬在咸平面小等里後八王山卯坐。有一男一女。男即不肖炫豊。女適章州奇宇興。孫學周,龍奎,宗琪,丞周,穰奎餘尚幼。鳴呼痛哉。先君子淸粹之質。喫緊之功。早抛功令。從事師門。早負時望。德業日臻。以得於師門者。教導後進。以敏底質。做鈍底功。用乾乾夕惕。主理爲宗旨。持敬爲節度。不作時華。不惑左道。環堵蕭然。不蔽風雨。薄田數畝。不足以供饘粥。而處之裕如。足不踏城市。居不作產業。以忠孝爲門戶。以文墨爲田地。其爲文章也。簡而實。平而淡。甞曰。吾當去心之惡。如頭之無垢。每日一梳。以省其心。不幸下世以来。儀形既穸。言論亦寥。惟所以傳之者。在於遺稿。不顧禁書禍迫。乃與門人同志。收拾其畧干。分爲四匀。付諸剞劂。役既了。且欲草事行。把筆臨紙。風樹之感。有倍平日。天地悠悠。山海漠漠。自不免遣其詳而舉其槩。嗚呼痛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