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8] 4/28
2012.4.25 집필/ 본문 소제목 포함 200자 23 매
공산주의와 결별 건국에 참여하다
8월 15일 헌병사령부에서 석방돼 인천으로
사상범예비구금령에 의해 일본군 헌병대에 갇혀 있던 죽산은 광복의 날 8월 15일 오후 석방되었다. 지금의 필동 남산골한옥마을에 있던 헌병사령부 감방 문을 열어준 것이 몽양 여운형이었는데 몽양은 오전에 거기서 가까운 정무총감 관저(현재 한국의 집 자리)에서 엔도(遠藤) 총감으로부터 행정권 인수를 요청받고 급히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리던 참이었다. 상하이 망명시절 그의 동지이자 멘토였던 몽양은 조선공산당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던 그에게 인천을 붙잡으라는 말을 했다. 죽산은 인천으로 갔다.
도산정(桃山町. 현재의 중구 도원동) 집 앞에서 수백 명의 청년들이 그를 기다렸다. 인천 다운타운에서 벌어진 해방 만세 행렬에 끼였다가 몰려온 것이었다. 죽산은 짧고 인상적인 연설로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재빠르게 많은 군중을 동조자로 만들고 규합하는 조직의 명수였다. 8월 20일, 애관극장에서 200명의 대원으로 보안대를 결성해 인천의 주도권을 잡고 닷새 뒤 인영극장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결성식을 열었다. 그와 이승엽이 관계한 인천 양곡업계 인물들 중심이었다. 건준의 지방조직은 인천이 가장 빨랐다.
죽산은 서서히 인천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10월 초, 인천 부윤(府尹. 오늘날의 시장) 간접선거 후보자 7명에 끼였고, 명망 있는 의사인 신태범(愼兌範)의 병원에 입원해 동상으로 끝이 뭉그러진 손가락들을 수술 받았다. 동상은 청년시절 강화군청 사환 일을 하며 처음 걸렸고 혹독하게 추운 신의주형무소에서 악화된 것이었다.
이때 그의 앞길을 막는 것이 있었다. 지난날 공산당 동지였던 박헌영 등이 다시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하이 시절에 모프르(MOPR; 국제혁명운동희생자구원회)의 돈을 제멋대로 썼고, 당원 여자를 버렸고, 강도짓을 했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전향해 이권을 얻어 살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일부 인정할 것도 있지만 터무니없는 누명이 대부분이었다. 자기들이 투옥되고 쓰러지면서도 조공 조직을 부활하려 분투한 데 비해 죽산은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조직만 이끌었고 형무소에서 나온 뒤에 저항하지 않고 유휴(遊休)의 기간을 보낸데 대한 배신감도 있지만 유력한 경쟁자를 매장하려는 박헌영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국내 정세는 건준에서 간판을 바꾼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좌파와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가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대립하고 있었다. 양 세력은 그 해 말에 불거진 신탁통치를 놓고 찬성과 반대로 충돌했고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압박하며 좌익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꺼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죽산은 시국의 흐름을 주시하며 앞날을 예측했다.
연말에 그는 인천협동조합 창립 주도하고 다음해인 1946년 초 인천시세진흥회 에 참가했다. 조합은 간상배들의 매점매석으로 농산품과 공산품 가격이 폭등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거래로 연결하는 일이었다. 시세진흥회는 오늘날의 상공회의소와 비슷한 상공인 기업인 자본가 등이 참여한 우익 성향의 조직이었다.
조공 창단멤버인 그가 우익세력과 손잡은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건국도 하기 전에 조국이 분열할 수도 있어 일제에 부역한 적극 친일분자가 아니면 손을 잡아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 때문이었다. 자신이 어쩌면 다시는 공산당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계산도 있었다. 그는 여전히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인천에서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갔다.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 이끌리듯이 다가왔다. 그 가운데는 창녕조씨 먼 친척이며 명망가이자 재산가인 한의사 조훈(曺勳)도 있었다. 조 원장은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산당과 결별하고 전향하다
죽산은 1946년 2월 좌파 연합체인 민족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 결성을 주도했다. 3월 1일 첫 삼일절, 서울에서는 좌파가 우파가 갈라져 각각 기념식을 열었으나 인천은 그의 노력으로 연합기념식을 열었다. 그는 사회를 맡아 능숙한 진행으로 10만 시민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심었다.
조공 중앙으로부터 다시 비난의 화살이 날아왔다. 그가 인천 삼일절 행사로 존재감이 드러나자 밟아버리려는 것이었다. 미군정과 손을 잡고 돌아간다는 비판 하나가 더 늘었다. 죽산은 박헌영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 우정의 충고를 하고 공개적인 자기비판 기회를 달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거부되었다. 그는 박헌영에게 진심어린 충고와 자기비판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곧장 부치지 못했다. 박헌영과 동지적 우정이 금이 간 상태라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서였다.
3월 중순, 그는 민전 사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복을 입은 미국인 셋과 한국인 하나가 들어왔다. 한국인이 “우리는 인천 CIC(방첩대)에서 나왔소. 명령에 따라 압수 수색하오.”라고 말했고, 미국인들은 서류는 물론 벽에 붙인 포스터와 전단까지 상자에 쓸어담았다. 그는 박헌영에게 쓴 편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도 압수당했다. 사신(私信)이라 내 놓을 수 없다고 거부했으나 소용없었다. 사흘 뒤 그는 일제시 인천 신사(神社)가 있던 답동의 CIC 인천 파견대에 가서 편지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서울 본부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몹시 찜찜했는데 그 편지는 5월 7일,『조선일보』,『동아일보』등 네 개의 우익계열 신문들에 실렸다. 좌익 조직을 분열시키려는 미군정의 공작이었다. 그는 민전 인천지부 의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미강업조합장 자리도 사직했다.
미군정의 공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6월 11일 인천 CIC는 그를 군정 법령 위반으로 연행했다. 열흘 뒤 그는 짧은 성명서를 쓰고 CIC를 나와 귀가했다. 다음날인 6월 23일, 그의 집이 있는 도원동 언덕 아래 공설운동장에서 민전의 시민대회가 열렸다. 거물 공산당원인 여운형 이강국 김원봉 등이 내려와 연설하는지라 많은 시민들이 운집했다. 거기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라는 제목을 가진 죽산의 성명서가 뿌려졌다. 민전시민대회는 타격을 입었고 인천은 물론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신문마다 그의 성명서를 톱기사로 내고 해설을 달았다.
죽산이 전향을 선택한 이유는 그 자신이 안고 있던 내면의 의식과 미군정의 공작이라는 외면적 상황이 복합된 것이었다. 항상 그의 내면에는 마치 꼿꼿이 선 푯대처럼 의지가 서 있었다. 인민이 나라의 주체가 되며 착취당하지 않고 평등하게 권리를 향유하는 국가, 한 마디로 규정해 말한다면 사회민주주의 국가였다. 38선을 경계로 미․소에 분할 점령된 현실에서 조선공산당이 이끄는 급진 혁명노선은 이제 불가한 상황이었다. 비혁명 노선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최선의 현실적 방안이었다.
갈등하는 그를 흔든 것은 CIC의 서신 공개 공작이었다. 그 무렵 좌익의 민전에 맞서기 위해 우익의 이승만 ‧ 김구 ‧ 김규식 등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라는 것이 있었다. 3인이 자기주장이 강해 구심력 약화되어 있었다.
미군정은 이에 실망하여 대안을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찾으려 하고 있었다. 민중에게 큰 인기가 없는 이승만, 지주 자산가 중심의 한민당, 친일파 등 극우 세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중간세력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중간우파와 중간좌파 사이에 협약을 맺게 해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한 후 이를 민주의원과 대치하려 했다. 이 좌우합작위원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조선공산당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그 카드가 죽산의 전향이었다. CIC 공작은 성공했지만 그것은 죽산으로 하여금 평생 몸담아 온 조선공산당을 등지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고 말았다.
변신에 성공해 제헌의원, 농림부장관이 되다
이후 죽산은 인천의 유지들과 활발하게 교유했다. 시인인 함효영, 실업인인 이필상 김성진 배인복 등이었다. 그들과 함께 ‘통일건국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 모임에서 ‘죽산(竹山)’이라는 아호도 지었다. 태어날 때 모친의 태몽에 봉황이 날았고 봉황은 100년에 한 번 땅에 내려오며 고고하게 대나무 열매만을 먹는다고 해서 착안했다.
인천에 기반을 잡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한 그는 서울로 눈을 돌렸다. 그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예리하게 헤아리고 있었다.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국민 5%의 지지밖에 얻지 못하고 있으니 나머지 95% 국민의 지지를 받는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는 옛 동지인 김찬 원우관 임원근, 그리고 이극로와 이동산 등을 만나 의기투합했고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다.
혼란스런 정국 속에서 결국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제시했고 죽산은 그것을 현실적 대안으로 받아들였다. 1948년 5월 그는 제헌의회 의원 선거에 인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먼 친척인 조훈 원장과 통일건국회 동지들이 자금을 댔으나 다른 후보들에 비하면 턱 없이 적었다. 제헌의회에서 그는 헌법기초위원에 뽑혔고 무소속 의원들의 리더로 떠올랐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는 이승만에 의해 초대내각 농림부장관으로 지명되었다. 비상한 돌파력으로 수많은 난관을 헤쳐 나온 뒤에 얻은 빛나는 열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