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바이오코드연구소가 소속돼 있는 재)한국지식문화재단 부설 용인고려백자연구소가 오늘부터 흙가마에 불을 때기 시작하여 금요일 4시에 가마를 오픈합니다.
가마 오픈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이니만큼 오실 분들은 미리 댓글 다시고 참석하여 재미난 구경을 하세요.
한편 재)한국지식문화재단은 고려백자가마터와 김대건안드레아성경옹기가마터 두 가지를 유네스코에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사업을 진행합니다.
아래에 양식을 첨부하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서명을 해주시고, 혹시 CMS 후원을 해주실 분들 역시 서명하셔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용인고려백자 세계인류문화유산.hwp
유네스코 회원 양식.hwp
효성CMS자동이체신청서.hwp
<용인고려백자요지>와 <용인옹기가마>를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합시다
- 용인고려백자요지 및 용인옹기가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위원회
- 용인고려백자연구소
- 재단법인 한국지식문화재단
용인고려백자요지와 용인옹기가마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합시다.
1. 용인에는 왕(王)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신성한 기물 <백자>를 10세기인 고려시대 초기부터 생산한 가마터가 남아 있습니다.
용인은 우리나라 백자 산업의 최초 발상지로서 세계 최장(最長)의 <고려백자> 가마터가 국가사적지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연고지이며, 이 가마터는 유네스코에 등재되어야 하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용인서리고려백자요지는
-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가마이며
- 세계 최대의 83미터 최장 가마(중국 최대 73미터)이며
- 9세기 경, 장보고의 국제무역 활동에 따른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산 증거이며
- 10세기 후반~12세기 전반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고려왕실의 전용 기물이다.
2. 용인옹기가마는 김대건 신부 등 용인 지역에 숨어 천주교를 신앙하던 사람들이 은둔지에서 옹기를 굽던 유적으로서 이동면 묵리 등 여러 곳에 산재합니다. 천주교인들은 이 옹기에 필사본 성경을 넣어 이를 지게에 지고다니며 전도하던, 세계 천주교사에 볼 수 없는 <자생 천주교>의 극적인 사례를 보여줍니다.
김대건안드레아가 살돈 이동면 한덕골, 신부유학생으로 발탁된 양지면 은이성지, 그의 주검이 묻힌 미리내성지를 잇는 산마루길, 이 산마루길에서 뻗어나간 골짜기인 운학동, 사암저수지, 김대건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낸 묵리, 고초골 등에 천주교인 은거지와 옹기 유적지가 산재하며, 이는 천주교 역사유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종교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 옹기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천주교인들은 이런 옹기에 필사 성경 귀절을 넣어 가지고
다니며 전도했다.
3. 백자와 청자 제작 기술은 9세기경 해상왕 장보고에 의해 중원에서 한반도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장보고는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완도에 국제무역센터 <청해진>을 세워 군사 1만 명을 주둔시키고, 무역 대사(大使)가 되어 신라, 일본, 중국, 필리핀, 태국, 서역(西域) 등지를 상대로 활발한 국제무역 활동을 했습니다.
장보고는 서기 827년~835년경 인기절정이던 최첨단하이테크 상품인 청자, 중원에서도 막 생산이 시작된 백자를 한반도에서 직접 제작, 이를 국제 무역 시장에 공급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따라서 해상무역센터인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반도 서해안에서 청자와 백자를 생산하는 시설이 집중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런 중에 일반 무역이 가능한 청자는 청해진에서 가까운 강진 등에서 주로 생산되었으며, 백자는 가마 온도가 높아야 하는 등 첨단기술 때문에 용인 등 특정 지역 소수 가마에서만 생산이 가능했습니다.
이후 후삼국시대를 거쳐 서기 918년 고려 왕조가 창업되자 최첨단 기술이 필요하고, 따라서 희귀한 도자기인 백자는 고려 수도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가까운 용인 서리 가마에서 주로 생산, 공급되었던 것이며, 고려백자는 왕실 전용 기물로써 천제(天祭) 및 왕실제사용으로 쓰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청자와 백자는 통일신라시대에 국제무역망을 통해 유통된 첨단하이테크 상품 중의 하나였으며, 9세기 이후 동아시아 여러 나라간의 문화와 문명 교류의 역사적 증거물입니다.
4. 백자는 왕이 사용하던 기물(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종묘재실에서 선대 국왕들에게 올리던 제사의 제기)로서 세자부터는 백자를 사용하지 못하고 대신 청자를 이용했습니다. 이후 사찰과 사대부가에서도 청자를 이용, 청자 수요가 급증, 고려청자가 발달했습니다.
- 왕실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용무늬 청화백자.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는 청화백자만 왕실 전용 기물이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은 고려백자 사용이 금지되어 사용할 수 없고, 거래할 수도 없어 고려시대 도자기 문화는 청자 위주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조선에 이르러 백자가 왕만이 아닌 왕실 기물로 널리 쓰이고, 양반가의 소유가 가능해지면서(이때는 청화백자만 왕실 전용 기물이었음) 왕궁에 가까운 경기 광주의 분원에서 이를 생산해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백자의 역사는 고려초기 즉 10세기에 용인 서리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으며, 용인고려백자는 광주의 조선백자보다 약 5백년 이상 앞서며, 약 1천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5. 용인고려백자연구소는 용인고려백자요지와 용인옹기가마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시민운동을 펼침과 동시에, 용인 고려백자의 도편 분석을 통해 원형을 복원하고, 우수한 고려백자를 재현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입니다.
자랑스러운 용인고려백자요지와 용인옹기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운동에 동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5년 7월 1일
- 용인고려백자요지 및 용인옹기가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추진위원회
- 용인고려백자연구소
- 재단법인 한국지식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