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남 시집, <돌탑을 쌓다>(가제), 시평사, 2011.
인연의 시학
맹문재
1.
인연이란 선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후천적인 것이라는 특성은 갖는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이기에 서로의 기대와 의지와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인연은 정적이라기보다는 동적이라는 특성을, 다시 말해 지향성을 갖는다.
물론 인연의 본질에서 원초적인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가령 프랑스의 분자 생물학자로 196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고 파스퇴르 연구소의 소장이자 파리대학 교수를 지낸 자크 모노(Jacques Lucien Monod)는 『우연과 필연』에서 유전 인자를 유전적으로 갖지 않는 생물은 어떤 자극을 주어도 그와 같은 바이러스나 효소를 합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생물의 적응 능력이라는 것은 유전적으로 결정되거나 제한받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바이러스나 효소를 만드는 능력이 유전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억제되어 있으면 바이러스나 효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인간은 측은지심이라는 면에서 볼 수 있듯이 인정이라는 유전 인자를 대부분 가지고 있으므로 본질을 어떻게 발휘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동정하고 이해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인정 깊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인연 인식은 박경남 시인의 시세계를 이루는 토대이자 주제이다. 시인의 시세계는 인연의 시학이라고 할 만큼 가족과 친지를 비롯해 친구, 이웃, 사회적 약자, 자연 대상물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다. 자신과 인연이 된 대상들을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품듯이 끌어안는 것이다. 인연의 대상들을 품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방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공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듯 상대방에게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개울가에 층층이 쌓아놓은 탑,
잔돌 하나 반듯하게 얹어 보려고
주변을 헤맨다
뾰족한 돌, 둥근 돌, 생김새 모두 달라
마땅한 돌 눈에 띄지 않는다
괴기 좋은 돌 하나 겨우 찾아내어
돌탑의 우묵한 틈을 비집고
요리조리 맞추려 땀을 흘리는데
돌과 돌 사이 벌어지는 틈,
비틀비틀 탑 꼭대기가 중심을 잃으려 할 때
긴장한 손이 얼른 탑을 에워싼다
인연 하나 쌓는 일보다
맺어진 인연 잘 지킬 것을
돌탑 쌓으며 깨닫는데
다시 작은 돌 하나 얹으니 탑이 출렁거려
나는 얼른 탑을 꽉 붙잡는다
―「돌탑을 쌓다」 전문
화자는 지나간 사람들이 개울가 쌓아놓은 탑에 자신의 돌을 얹어보려고 시도한다. “돌탑을 쌓”는 일로 “인연”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알맞은 돌을 주변에서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탑 위에 잘 얹힐 수 있는 반듯한 돌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뾰족한 돌, 둥근 돌, 생김새 모두 달라/마땅한 돌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화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주변을 뒤져 마침내 “괴기 좋은 돌 하나”를 찾아낸다.
화자는 어렵게 찾은 돌을 “돌탑의 우묵한 틈을 비집고/요리조리 맞추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 일 역시 만만하지 않다. 돌을 끼워 넣으려고 하자 기존의 돌 사이에 틈이 생겨 “비틀비틀 탑 꼭대기가 중심을 잃”고 쓰려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얼른 포기하고 탑을 손으로 에워싸는데, 탑을 쌓기 위해서는 적합한 돌을 찾아내는 일도 어렵지만 돌을 제대로 끼워 맞추는 일도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화자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돌을 다시 탑 위에 올려놓는다. 그렇지만 “작은 돌 하나 얹으니 탑이 출렁거”리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마저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화자는 “얼른 탑을 꽉 붙잡는다”. “인연 하나 쌓는 일보다/맺어진 인연 잘 지”키는 일이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일을 맺어진 인연을 지키는 일보다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어느 것도 소중한 만큼 힘들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와 같은 모습은 가족을 품는 데서 또한 볼 수 있다.
2.
딸기를 씻어서 몫을 나눈다
유독 눈길 끄는 아기 주먹만 한 놈,
나는 침 한번 꿀꺽 삼키며
순위를 정한다
거동 불편한 팔순 어머니 1순위
남편은 2순위
자고나면 쑥쑥 자라는 아들은 3순위
나는 4순위도 될까 말까
각자의 접시에 담는 동안
먹음직한 딸기 한 알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라고 꾀이는
한 마리 뱀이 되어 꿈틀거린다
달콤한 유혹에
내 얼굴은 그 놈처럼 빨갛게 달아오르고
아차, 하는 순간,
그만 내가 1순위가 되고 말았다
―「1순위」 전문
씻은 딸기를 앞에 놓고 식구들의 몫을 나누다가 화자는 “유독 눈길 끄는 아기 주먹만 한 놈” 앞에서 망설인다. 침을 삼킬 정도로 맛있게 보이지만 마음대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삼강오륜을 사회의 기본 윤리로 삼고 있는 유교주의 문화에 몸이 배어 있어서인데, 특히 결혼한 여성으로서 부위부강(夫爲婦綱)과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적용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거나 부부 사이에는 침범하지 못할 인륜의 구별이 있다는 의미는 언뜻 보기에 평등한 관계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남편이 보다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일을 담당함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아내는 열등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침 한 번 꿀꺽 삼키며/순위를 정”하는데, “거동 불편한 팔순 어머니”가 당연히 1순위이고, “남편은 2순위/자고나면 쑥쑥 자라는 아들은 3순위”이다. 그리고 화자는 “4순위도 될까 말까” 하다.
화자는 그와 같은 갈등 속에서 도리를 어긴다. “먹음직한 딸기 한 알은/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라고 꾀이는/한 마리 뱀이 되어 꿈틀거”는 그 “달콤한 유혹에” 빠진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그만” 화자가 “1순위가” 된 것으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지켜오던 관습을 깨뜨린 것이다. 이 모습은 오랫동안 순응해오던 유교주의 관습을 극복하고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자각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페미니즘의 자각만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화자가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면을 발견해야 한다.
화자가 씻은 딸기의 몫을 나누면서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을 “거동 불편한 팔순 어머니를 1순위”로 삼은 것은 삼강오륜의 차원으로만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더 깊은 의미를, 다시 말해 ‘거동 불편한’ 어머니를 배려한 점을 이해해야 한다. 어머니에게 맛있는 딸기를 먼저 드리려고 한 것은 단순히 삼강오륜을 습관적으로 따른 행동이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인정 인식으로 동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화자의 태도는 가족 관계에서 거의 일관되게 나타난다. “아픈 다리 절룩이”(「우산」)이며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세상을 뜨신(「눈물」) 아버지며, “방 작은 것 탓하지 말고/마음 문 작은 것 탓하라”(「늘어나는 방」)고 또 “몸 성하면 다 살아가는 법이란다”(「어머니의 노래」)고 말씀하신 어머니며, “소금기 풀썩이고 있을”(「자반고등어」) 남편을 품는다. “세상은 당신을 해고할지라도/나는 당신을 해고하지 않을 것”(「해고통지서」)이라고 감싸 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힘든 일 생길 때마다/용케 나타나던 내 언니”(「맥문동」)를 비롯한 가족들도 껴안는다. 삼강오륜의 관습에 몸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가족들을 품는 것이다. 화자의 이와 같은 자세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3.
친구야 축하한다
건강해야 해
분홍 리본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만 말문이 막혔다
젊은 나이에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내 친구
그가 그려놓은
달력 동그라미 일정표대로
그의 남편이 꽃바구니를 보낸 것이다
따스한 덕담인 듯
오색의 꽃들이 도란도란 속삭이는데
온 집안에 향기가 진동하는 순간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 꽃잎에 앉았다 날아가고
축복처럼 눈앞이 환해진다
아!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생일 꽃바구니」 전문
화자의 생일날, 세상을 떠난 친구가 그려 놓은 “달력 동그라미 일정표대로/그의 남편이 꽃바구니를 보낸” 일은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진한 감동을 준다. 아내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친구의 남편도 대단하지만, 살아생전에 화자와 친구가 나누었던 우정 역시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자신이 건강을 잃어 세상을 떠났기에 화자에게 “건강해야” 된다고 진심어린 충고를 전한 그 마음은 깊은 우정의 모습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우정이 소중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점점 물질주의와 비인간화로 심화됨으로 인해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산업사회 이전에는 공동체 의식이 지배했기 때문에 우정도 게마인샤프트적인 것이었지만, 물질 가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게젤샤프트적인 것이다. 근대사회 이전에는 대인 관계가 공동체 의식에 따라 형성되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이기주의와 타산성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우정도 인간적인 유대감보다는 능력이나 이익 여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화자와 친구 간의 우정은 진정한 인연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정은 가족애의 울타리는 넘어선다. 우정은 자신의 의사나 의지와 상관없이 출생과 더불어 귀속되는 가족의 차원을 넘어서는 관계이다. 서로 간에 선택적인 관계로 게젤샤프트적인 특성을 지닌다.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관계로, 이솝 우화의 한 이야기가 잘 말해주고 있다. 두 친구가 여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곰이 나타나자 한 친구는 재빠르게 나무로 올라가 숨었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는 땅바닥에 누워 죽은 체를 했다. 곰이 시체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곰이 냄새를 맡다가 떠나갔는데, 나무 위에 올라갔던 친구가 내려와 곰이 뭐라고 하더냐고 땅바닥에 누웠던 친구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위험에 처한 친구의 곁을 도망치는 자와는 함께 여행하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 대답은 친구가 재치 있게 지어낸 것으로, 결국 참다운 친구란 어려운 상황에서 드러남을 말해주고 있다. 치열한 경쟁과 물질주의가 점점 위세를 떨치는 현대사회에서 참다운 우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진정한 우정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즉 인정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위의 작품은 그와 같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삶을 마친 세계에서까지 친구에게 생일 꽃바구니를 보낸 정성보다 더 깊은 우정이 어디 있겠는가. 이는 곧 화자 역시 친구에게 그만한 정성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구에게 꽃바구니를 선물 받은 만큼 화자 역시 친구에게 인정을 베풀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화자의 그와 같은 인정은 「편지를 쓰다」에서도 확인된다. 학교에서 중간고사를 치르는 중이었는데, 같은 반의 한 친구가 전보로 아버지의 부음을 전달받았다. 그 친구는 전보를 받자마자 울음을 터뜨리고 시험을 포기한 채 집으로 갔다. 나머지 친구들은 잠시 웅성거리다가 다시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했지만, 화자는 그러하지 못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쿵쿵 뛰어 시험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서 화자의 인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화자는 친구의 슬픔과 아픔을 회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화자는 그와 같은 인연 인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품고 있다.
잠실역 지하도 구석자리 한 켠
백발이 성성한 노인
라면 박스 하나로 새 둥지 틀었네
커다란 배낭에다
싸인 펜으로 시커멓게
김문식,
문패도 달았네
나는 노크도 없이
손잡이 없는 문을 당겨
초대받지 않은 그의 집들이 가네
한 평 남짓한 방안
부러진 나무젓가락이
사발면 그릇을 휘젓고
땀으로 예치된 생활정보지 몇 장
잔액이 바닥난 통장처럼 던져져 있네
지폐 한 장 내려놓으며
부자 되세요
차마 말 못하고 돌아서네
몇 걸음 걷다 말고 돌아보니
반쯤 벌어진 그의 마른 입술에
파리 한 마리
두 손 비비고 있네
곤히 잠든 그림자 저 편
빚보증으로 애써 가꾼 둥지 떠나보내고
골방 지키던 칠순 아버지 누워 계시네
―「둥지」 전문
노숙자에게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는 것이지만, 인연의 대상에서 소외되고 있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숙자에게 인연의 정을 베풀지 않는다. 비인간화며 자기 소외가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이고, 또한 만만하지 않는 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 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경쟁시키고 이기적인 존재로 만든다. 많은 정보를 획득하고 기술을 습득하고 이익의 이데올로기에 철두철미할 것도 요구한다. 만약 한 개인이 양보나 조화나 희생 등의 가치에 기웃거리면 즉각 포기하도록 경고한다. 그 대신 적자생존의 원칙을 강력하게 주입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속도로 출근하고 작업량을 채우고 정보를 검색하고 고객 관리를 하고 퇴근한다. 사람들은 현대사회의 명령에 따라 앞만 보고 달린다. 따라서 노숙자에게 인연의 정을 베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잠실역 지하도 구석자리 한켠/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화자의 자세는 소중하다. 현대사회의 요구에 몸을 맞추느라 정신없이 달려가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인연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초대받지 않은 그의 집들이”를 간다. 노숙자가 사는 집이란 “한 평 남짓한 방안/부러진 나무젓가락이/사발면 그릇을 휘젓고” 있을 정도로 남루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곳에 집들이를 가는 일이란 어떤 이익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화자는 기꺼이 가서 “지폐 한 장 내려놓으며/부자 되세요”라고 속으로 빌며 돌아선다. 한 인간 존재로서 인연을 이루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연이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인연 역시 밥과 집의 문제를 토대로 삼고 있는 것이다.
4.
눈이 오는데
단벌옷이 다 젖도록
자꾸 눈이 쌓이는데
눈 숲을 헤치고 철길을 따라 걸으면서
하얀 밥만 생각하는 사람들
폭설에 휘어진 구부정한 등뼈
우묵하게 박힌 충혈 된 눈
한 번에 세 끼를 채워야 하는
목숨 같은 식판 옆구리에 찬 채
거친 숨결로 일제히 외치는
“밥 많이 주소, 밥 많이 주소.”
부평역 앞뜰에
공짜 밥을 먹으려는
노숙인들, 긴 줄을 선다
내일의 몫까지 챙기려는
꽁꽁 언 저 눈빛들,
후끈 덥힐 곳은 어딜까
제 수명 다한 낡은 신발 벗어 놓고
편히 쉴 방 한 칸은 어딜까
기적소리조차 멈추지 않고 가버리는 시꺼먼 레일 위,
그들이 걸어온 발자국을
눈이 자꾸 지우는데,
나는 눈처럼 하얀 밥을 꾹꾹 쌓아 올린다
―「밥 많이 주소」 전문
화자는 “부평역 앞뜰에/공짜 밥을 먹으려는/노숙인들”의 눈빛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밥 많이 주소, 밥 많이 주소.”라는 그들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에이브러햄 매슬로(Abaham H. Malow)의 욕구단계설에서 진단되었듯이 밥은 인간의 욕구 중에서 원천적인 것이다. 밥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그 이상의 욕구는 의미를 상실한다. 매슬로는 옷이나 집이나 성적인 욕구 역시 밥의 욕구와 같은 차원에 놓았지만, 밥이야말로 우선적인 것이다. 밥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나머지 원천적인 욕구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계인 안정에 대한 욕구도,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도, 존경에 대한 욕구도,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도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인연에서는 밥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토대가 된다. “식구들 얼굴 마주칠 때마다/밥 무건나, 어서 밥 무라/현관 들어서는 손님에게도/밥 자셨소? 밥 좀 자시고 가소/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어도/밥 챙기 무꼬 나가그래이, 밥이 보약인기라”(「밥 타령」)는 어머니의 인정이 그 본보기이다.
다른 사람과 깊은 인연을 맺는 행동이야말로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대응하는 모습이다. 인간다운 존재 가치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들은 인연을 무익한 것으로 몰아가는 현대사회에 보다 맞서 나가야 한다. 인연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은 물론 인연의 대상을 넓혀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비탈길에서 아슬아슬 버티는 소나무, 다리 한 쪽이 없는 메뚜기, 길가에 떨어진 비둘기, 먹이를 기대하고 날아드는 외포리의 갈매기, 작은 뿌리를 키우기 위해 캄캄한 장막 속에서 견디는 콩나물, 어린 열매를 발등에 떨어뜨린 뒤 밤잠을 제대로 못 자는 감나무까지 품은 박경남 시인의 인연 인식은 소중하기만 하다.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체적인 것이면서 우주적인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가 진단했듯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연과 필연의 결과이다. 따라서 박경남 시인이 추구하는 인연의 결과는 너무나 분명하다. 착하고 따뜻하고 믿음직하고 아름다운 인연이 우리에게도 다가오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