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험
2021년 11월 7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3:1-5
(3: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3: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3)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3: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가 진짜 복음을 받아드렸다고 소문을 기뻐하면서 확인차 디모데를 보냅니다.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었는지 아니면 거짓으로 받아들었는지는 환란이나 시련을 받을 때 이해하는 시험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은 맨처음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시험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대해서 나름대로 대처하게 마련입니다. 그 대처하는 방식을 통해서 그 사람이 성령받은 성도인지 아닌자가 판가름됩니다. 성령받은 자는 세상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기존의 일반인들이 말할 수 없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마태복음 10:20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변화에 대해서 성령받은 성도만이 다른 의미로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성도들이 하는 복음적 말을 못 알아듣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조상이 아담이 범죄했을 때, 선악과 과실이 유혹거리가 아니라 이제는 그 선악지식을 지닌 본인이 자신에게 유혹거리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이런 식으로 인간의 마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의 삶의 환경에 짐승이 주도권적으로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7:4, 8에 보면,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짐승이 사람의 마음을 갖고 나타났으며 사람의 말을 하게 됩니다.
이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짐승의 형상, 악마의 모습은 볼 수가 없고 그냥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말의 관계로 국가나 민족을 이해하게 합니다. 국가에 복종하고 민족의 정서를 따르는 것은 곧 개인이 개인의 가치를 따르는 것의 일관된 활동입니다. 즉 악마는 인간들에게 ‘네 자신에게 충실하라’고 부축입니다.
이미 일반인에게 자기 자신보다 더 매력적이고 소중한 대상은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 사명감으로 살아갑니다. 악마는 이것을 긍정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과의 소통에게 일반인들은 별로 막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 취지는 평소에 자신이 자신을 관리하면서 느꼈던 정서,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성경 해석은 그런 식으로 풀리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3:2-3에 보면,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3:6에 보면,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을 받지 아니한 자는 이미 죽은 자들이요 시체같은 존재입니다.
인간들이 이처럼 출생부터 악마의 시험과 위협에 노출된 것은 그들의 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 자체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도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성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악마가 통치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악마는 먼저 예수님에게 어떤 시련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겁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4장에서 악마로부터 광야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이때 악마는 예수님에게 말씀을 들이대면서 시험했습니다. 악마가 거론한 성경 말씀이 시편 91편에 나옵니다. 처음부터 그 내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여기서 악마는 제안합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으로 보호받은 대상자가 바로 ‘성공한 예수님 당신’이라는 악마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해석을 다릅니다. 마태복음 20:22-23에 보면,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마시게 되는 그 십자가라는 쓴 잔에 말씀 완성에서 새로운 나타나야하기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인간형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더 이상 기존의 자아에 집착하거나 매달리거나 전부가 아닙니다.
성령받은 새로운 피조물은 압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경우는 일체 행운이요 복의 선물이다’는 것을 말입니다. 전에는 악마의 사주를 받아 내가 나를 지켜야 하지만 새로운 재피조물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나타난 자들입니다. 이들 성도를 통해서 세상에세 활약하는 악마의 정체를 밝히게 됩니다.
이점을 너무나도 잘 아는 악마는 복음을 알게 된 새로운 피조물에게 달려들어 환란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도리어 기뻐합니다. 결국에는 웃습니다. 이제 죽는 것도 자신에게 심각한 일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압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설치는 자신을 보고 ‘저게 죄야. 마귀모습이야’지적할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마저 가져서 이용하려는 그 의도가 자신의 옛 사람에게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이제는 성령의 안목에서 고백할 수가 있게 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결국 분노하지 않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21-11-07 17:33
11강-데살로니가전서 3장 1-5(시험)21110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3장 1-5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1-5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디모데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디모데라는 사람의 그 일함의 가치와 의미가 드러나려면 디모데라는 사람과 일반사람과의 차이점을 알아야 돼요. 디모데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땅의 지배자가 사람들을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디모데에요. 쉽게 말해서 성도는 마귀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쓰임 받는 존재가 성도입니다.
정치싸움이나 하고 돈이나 벌려고 자기 밥이나 먹고 살려고 사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라 이 세상이 어둡게 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마귀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은 성도가 아니면 몰라요.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모든 시험을 이긴 사람이에요. 악마가 주는 유혹을 이긴 사람이 디모데입니다.
그 사람을 파견하는 거예요. 이상적인 성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이미 시험을 이겼기 때문에 일반인이 보는 세상과는 다릅니다. 일종의 전문가라 할 수 있어요. 말씀의 전문가, 복음의 전문가라 할 수 있어요. 우리의 싸움은 세상 속에 있는 악마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세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데살로니가 교회한테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느냐?” 하니까 “예, 복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 너희한테 이제 고난이 일어날 거야. 미리 예고한다. 고난이 일어날 거야. 환란이 일어날 거야.”라고 미리 예고 했었어요. 복음 전할 때.
그러고 난 뒤에 아테네에 와서 소식 들어보니까 과연 사도바울의 예언대로 심한 학대와 핍박과 환란이 예수 믿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는 그 사태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이야기했지? 분명히 이야기했다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환란이고 핍박이고 고난이 온다고 내가 이야기했기에 이런 환란과 고난이 왔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잘못 믿었나? 내가 믿지 말아야 될 분을 믿었나? 안 믿어도 될 분을 내가 믿었나? 왜 사는 게 이렇게 불쾌하고 불편하고 답답하지? 그러면 내가 예수 믿지 말까? 내가 종교 하나 취미로 했는데 그 취미 이참에 그만둘까?’라고 그런 일이 생길까 싶어서 사도바울이 가는 게 아니라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아테네에서 파견한 거예요. 거리는 한 200킬로 정도 됩니다.
그렇게 파견해서 축하한다는 의미로 보내는 겁니다. 네가 복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하여 환란과 핍박을 받은 것을 내가 너에게 축하하러 보내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뭐냐 하면, 행운이다, 그 말이지요. “다행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너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경우가 행운이고 이게 바로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성도한테는 굳이 행운이 아닌 경우가 없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고 행복 복이에요. 따라서 그 모든 것이 행운이고 복이 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따로 나의 목표는 설정될 이유가 없어집니다. 내 인생의 목표가 없어져요.
왜냐하면 이것저것 골라잡지 않더라고 일어나는 모든 일이 행운이기 때문에, 벌써 세상 사람 같으면 인간이 그것 얻어야, 그걸 쟁취해야 나는 행운인데, 일반인 같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인데, 그 행운의 결과를 모든 순간순간 다 부어주니까 굳이 내가 내 인생의 목표를 세울 이유가 하등 없지요.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비 오면 비 맞고, 눈 오면 눈 맞으면 되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어떤 힘든 일이 생길 때 짜증 나고 그럴 수가 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여러분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끝에 가서 그냥 피식 웃으면 됩니다. 죽을 때 웃으면서 죽으면 돼요. 아, 내가 지난 날 살아온 것도 웃을 일이고, 남은 90까지 사는데 나는 뭐 한 60이나 70, 조기에 죽는다면 조기에 일찍 죽는 그것도 행운입니다. 죽는 것도 이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에요. 죽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일반인과 성도의 차이점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이러한 고난, 오늘 본문 단어로 하면 시험한다는 것인데 오늘 본문 5절에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그 시험한다, 힘들게 한다, 할 때 그 시험을 유발시키는 그 배후 인물이 있을 거예요. 그 배후 인물이 마귀고 성경 구약에서는 그걸 짐승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비로소 성도가 되게 되면 성경을 볼 자격이 구비가 되는 겁니다. 성도가 아닌 이상은, 성령이 아닌 이상은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일단 성령 받았다 치고 그렇게 간주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제가 남을 심판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일단 통으로 갑니다. 그냥 다 갑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되든지 관계없이 나는 다 성령 받았다 고 성경을, 구약의 짐승 나오는 대목을 보겠습니다.
다니엘 7장 4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옵니다.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이렇게 죽 나와요. 첫째 짐승, 둘째짐승. 셋째 짐승, 넷째 짐승이 나온다고요.
다니엘은 이런 계시를 받고 난 뒤에 묻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여러분이 중요하게 알아야 될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도가 되게 되면 일반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해야 돼요. 이게 성도의 특권이면서도 성도의 자부심이에요. 성도가 되면 일반인도 알아듣는 말을 하면 안 돼요. ‘네가 사람이냐? 그러면 내가 이제부터 네가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할게.’ 이래야 성도끼리만 통할 수가 있어요.
제가 지금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방금 읽었던 것이 바로 다니엘 7장 이야기잖아요. 다니엘 7장의 성경책에 나오는 내용 그것은 하나님께서 누구 들으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누가 듣느냐? 사람 들으라고? 아니에요. 성도가 들으라고, 성도가 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들으라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짐승의 이야기를 일단은 일반인이라고 치고 한번 해석을 해보세요. 이게 해석이 안 됩니다. 일반인이라고 치고. 그러면 성도가 된다면 성도는 여기서 해석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아, 다니엘 7장의 짐승, 이 이상한 이야기,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짐승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해석합니까, 라고 묻고 싶으면 조금만 기다리세요. Just a moment, 조금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 보고 편지래요.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라고 되어 있고 3절에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이렇게 해서 너희에게 주어진 이 사도, 나 바울의 말은 문자로 푸는 것이 아니고 영으로 풀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에 죽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문자로 풀면 왜 안됩니까? 문자로 푸는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3장 6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죽은 자라야 이 성경말씀을 문자로 풀어요. 과학적으로 풀고 고고학적으로 풀고. 예수님은 키가 몇 센티고, 예수님이 실존 인물이냐, 따지는 그것 전부다 죽은 자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동영상이 있었으면 좋겠다. 예수님이 하신 것 그대로 찍어서 보여주면 우리가 믿겠다. 이게 바로 이미 시체가 된 자들, 죽은 자들이 하는 짓이에요. 이게 문자입니다.
영은 인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인간이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영이에요. 그래서 영으로 사는 사람은 성경을 볼 때 영으로 해석하게 되고요. 영뿐만 아니에요.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영에 있는 사람은 매사가 자유롭다는 겁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매사가 자유롭다는 것을 제가 설교 초반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도한테는 모든 경우가 행운이다.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모든 경우가.
제가 여러분이 성도라고 일괄해서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그게 여러분의 얼굴로 동의가 되어야 돼요. 심지어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영에 속한 대표적인 사람이 구약에 등장하는데 그게 모세입니다. 모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되어 있어요. 같은 인간인 줄 알았는데 모세가 시내산 내려오니까 해같이 빛나서 일반인과 상종을 못해서 모세쪽에서 수건, 타월 있잖아요, 태광타월 비슷한 것, 수건을 얼굴에 쓰고 이야기했습니다. 레벨이 달라서. 영의 인간과 육에 속한 인간이 달라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은 전해야 되겠고 얼굴 맞대면 그들이 눈부셔서 보지를 못하니까 모세가 수건으로 가리고 겨우 말만 통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했었습니다. 모세가 해같이 빛나는 이런 경우가 모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3절에 보면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되어 있어요. 해와 같이 빛나리라.
여기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이나 그리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인간의 출처를 두 군데로 나눠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문자로 시작하는 인간, 문자로 시작하는 인간은 태어나도 죽어요. 그다음에 영으로 시작되는 인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문자로 해서 시작되는 인간은 그 본처가 마귀, 짐승으로 되어 있어요. 출발점이.
그런데 영으로 시작하는 출처는 해와 같이 빛나는 것, 본래의 자리가 영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인간을 둘로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성도인 사람과 성도 아닌 사람과 그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뭐냐? 디모데는 이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에요.
설교 처음으로 가서 다시 하겠습니다. 디모데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사람이 있다는 그런 희한한 일이 있어 가지고 “정말 복음을 받아들이면 출처가 다르기 때문에 마귀에 속한 나라가 이 세력이 반드시 너희들을 지목해서 미워하고 핍박하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사도바울이 내가 미리 예언했거든.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 그렇다면 진짜 그런지 내가 디모데 보내볼게.”
진짜 너희가 복음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사기치다 그런 것 말고, 복음으로 인하여 진짜 핍박과 환란을 받으면 ‘세상에 야, 진짜 이 복음이 실제상황이구나.’ 이렇게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차 디모데를 보낸 겁니다. 디모데가 와야 이걸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왜? 디모데는 시험을 벗어났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성도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뻐할 일이지요. 그러면 그들이 받는 시험에 왜 사도바울이 기뻐하느냐 하면, 복음을 아는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 복음을 아는 사람이 받는 시험은 옛날 아버지를 떠나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만 홀로 받았던 그 시험과 동일한 시험과 환란을 받기 때문에 특이한 존재로 사도바울은 알고 있는 겁니다.
모든 새사람, 새로운 피조물의 시작은 예수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예수님만 같아라. 추석 명절만 같아라, 하는 말이 있지만 그냥 예수님만 같아라. 예수님의 복제, 이걸 아주 어려운 말로 해서 이 시대에 ‘예수님의 보존작용의 반복’ 예수님의 보존작용의 반복, 또는 예수님의 보존작용. 이미 예수님은 떠났다고 하지만 지금 예수님은 살아 있다는 그것을 계속 유지해나가는 현상, 그게 바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성령이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당하는 시험을 같이 당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현상, 그러한 고난이 왜 일어나냐 되는가? 일어나야 이 세상은 짐승, 악마가 통치하는 어두운 세상인 것이 티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람하고 싸우는 정치적 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탈레반하고 싸우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마귀의 존재와 더불어 싸우는 거예요. 마귀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차원에서 싸우는 겁니다. 이미 승리하고 싸워요. 이미 성령받은 성도는 모든 것이 행운이고 모든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꿇릴 것이 없습니다.
반면에 짐승에 속한 사람, 성령을 받지 않고 성경을 봐도 문자로 보는 사람한테는 모든 것이 추위 타요. 바들바들 떱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막 떨어요. 수전증처럼 손을 막 떱니다. ‘아, 이거 혹시 실패하면 나는 죽는데, 나 이거이거 하면 나는 망해.’ 그게 뭐냐? 그런 관점에서 아까 언급했던 다니엘 해석해 보겠습니다.
4절과 8절의 해석을 하게 되면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그다음에 중요해요.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사람의 마음을 받았다는 거예요. 짐승인데 안에 사람 마음 들어 있다는 거예요. 짐승인데.
그리고 8절에 봐도, 이건 네 번째 짐승이지요.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여기는 사람의 눈이 있고 사람의 말을 합니다. 사람의 입이 있고 거기서 큰 말이 나오는 거예요. 명령이 나온다 그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국가 또는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국가, 나라인데 국가, 나라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건 사람들의 집합체에요. 그런데 다니엘에서는 그걸 ‘네 눈에 사람으로 보이냐?’ 그게 짐승이고 마귀의 종으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영적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이에요. 국가를 볼 때 짐승의 나라로 보고 마귀의 나라로 봐야 된다는겁니다.
뭐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 “아,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이거 전부 국가 위주잖아요. 짐승이 말을 한다는 것은 짐승이 인간들에게 제시한 바가 있다는 거예요. 꿈과 희망을 제시하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법은요, ‘절대로 너는 너를 위해서 사용하라’ 이거거든요. 너는 너를 위해서 사용하라.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악마가 인류 최초의 조상인 아담에게 선악과를 보면서 유혹하게 만들었어요. 그 때는 인간이 유혹대상이 아니고 선악과가 유혹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귀가 부추겼지요. 부추겨서 여자가 먼저 탐욕의 과실을 따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선악과가 유혹의 대상인데 그다음부터는 뭐냐? 선악과 따먹은 내 안에 선악과가 들어와 버리니까 내가 계속 잘되는 나이어야만 해요. 남한테 뒤떨어진 나는 싫고 남한테 지는 나가 싫어요. 잘되는 나, 그 때부터 내가 나에게 유혹의 대상이 된 겁니다. 내가 나한테 반해버린 거예요. 내가 나를 못 놓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인간은 악마의 시험에 빠졌어요. 왜냐하면 내가 나한테 반해버린 거예요. 남이야 죽든 말든 관계없어요. 내가 잘되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선악과 따먹었고 내가 나에게 유혹거리니까 나올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무엇이 나한테 이익이냐, 그것만 따지는 겁니다.
나한테 이익되는 그것이 선이기 때문에 나한테 손해되면 무엇이든지 악이기 때문에. 선악과는 따먹었고, 내가 나에게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니까. 내가 나에게 목표가 되고, 덩달아 넓히면 내 가정이 목표가 되고, 내 직장이 목표가 되고, 내 교회가 목표가 되고, 내 나라가 잘 되어야 되고,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하거든요. 이게 바로 시험에 옴팍 빠진 상태에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여러분도 잘하시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잊을 수가 없지요. 왜? 주기도문이니까. 주기도문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13절에 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런 기도를 한다는 자체가 “야, 인간들아. 너희는 지금 너 혼자 놀고 있다고 생각하지? 이 세상에. 이 세상에 그냥 혼자 있다고 생각하지? 아니야. 네가 시험받는 것이 아니고 시험에 둘러싸여 있어.”
너는 태어난 자체가 이 세상의 악마의 압박감 속에서, 그 안에서 태어난 거예요. 어느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나 관계없이, 제일산부인과, 무슨 산부인과 관계없이 이 땅에 태어났으면 이미 악마의 시험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태어나서 1년 되니까 돌잔치 한다고 금가락지부터 시험이지요. 돌 된 아이 앞에 돈 놓고, 실 놓고, 마이크 놓고, 청진기 늘어놓고요. 이것은 뭐 돈 놓고 돈 먹기도 아니고요.
거기에 성경책 놓는 사람 한 사람도 못 봤어요. 잘못해서 성경이라도 집을까 겁을 내는 거예요. 만약 애가 울면서, 칭얼거리면서 안 하려고 하면, 마이크 쥐어주는 것은 주로 딸한테 여자 아나운서 되라고 마이크를 쥐어주는 거니까요. 실 쥐는 것은 오래 살라는 뜻이고요. 그다음에 청진기는 의사 되라는 것이고. 돌 때 청진기 만진 애들이 의사 다 될 것 같으면 우리나라 의사 차고 넘치겠습니다. 환자보다 의사가 더 많겠어요. 막 돈 잡으라고 하고요.
옴팍 마귀의 유혹을 날 때부터 뒤집어썼어요. 완전히 소나기 맞듯이 어린애들부터 악마의 시험에 옴팍 뒤집어 썼어요. 아버지의 소원이 나의 소원 되어 버렸어요. 타인의 욕망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의 구미에 맞춰야 돼요. 나라는 존재는 없어요. 나는 이미 그 악한 세대의 복제품이기 때문에 따로 나라는 것을, 나라는 원천을 찾을 수가 없어요. 너도 그렇게 살고 나도 그렇게 사니까 표준이 없어요, 표준이. 자기 욕망대로 살고 자기 위주로 살면 그게 인생 사는 것으로 알아요. ‘아, 누구나 그렇게 사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주기도문에서 13절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렇게 죄에 빠지지 말게 해달라 하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시험? 유혹? 무슨 유혹? 뭐가 유혹인데? 나는 빠진 적이 없는데?’ 빠진 적이 없으니 주기도문 할 수도 없지요.
악마의 유혹은 이겁니다. 너는 너로부터 끊지 말라는 거지요. 항상 너를 생각하고 너만 생각하라는 겁니다. 최종적으로. 너로부터 이별하지 말라. 끊어지지 말라.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영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게 되면 그 기도내용이 뭐냐 하면, ‘다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가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문자로 이걸 봐가지고 ‘시험 유혹에 떨어지지 말게 하옵소서.’
그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내가 너무 힘들게 인생 살지 않게 하옵소서’ 그런 식이에요. 주님의 뜻은 뭐냐? 너는 너에게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너 자체가 시작점이라고 생각하지? 아니야. 너 자체가 시작점이 아니야. 너는 너의 시작점이 어디인 줄 네가 몰라.”
왜? 태어나면서 악마가 만들어준 그런 환상적인 인간상 속에서 모든 사고방식이 수입이 되었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의 원래 만들어진 내 모습은 없어요. 몰라요. 처음부터 아담자체가 유혹의 범벅이가 된 채로 태어났고 우리는 그 아담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아담 속에서 아담의 복제물로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에 하나님이 원한 인간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일러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자기는 멀쩡하다고 생각했지요.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뭘 가르쳤느냐? 너의 원천을 가르쳐 줬어요. 네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알려주는 거예요.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 하는 그 이야기가 나와요. 마태복음 20장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예수님께 부탁을 하는겁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치맛바람으로 해서 자기 아들의 목표를 하나는 주의 왼편 또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앉게 해달라, 이렇게 했어요.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 들으라는 듯이 너희들의 진짜 자리를 예수님께서 알려주는데 22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그 마시는 쓴잔이 새로운 피조물이 출발하는 그 자리에요.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님의 피에서부터 새로 만들어져야 돼요. 예수님의 아픔과 서글픔과 고난과 죽음, 거기에서 지금까지 생각도 못한 천국의 백성이 거기서부터 탄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에요.
기존의 인간들은 전부 타락한 첫 번째 아담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 원천이 뭔지 모르고 그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살아오면서 악마가 말을 하니까, 짐승은 말을 하니까요,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어요,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그 짐승이 갖고 있는 마음에 사적인 마음들은 전부 다 거기에 현혹될 수밖에 없고 굴복될 수밖에 없지요.
예를 들어 북한에 김정은이 있는데 부하들, 신하들 있잖아요. 북한이야 뭐 종교단체니까 그 밑에 부하들이 있잖아요. 부하들이 김정은한테, 겨우 40이나 됐나 하는 그에게 굽신거린다고요. 개인적으로 만나면 말 놔야 될 대상인데 말도 높이고 위대하신 장군님, 이러고 있다 그 말이지요. 왜 그럽니까? 나이가 곱빼기로 많은 80 넘은 할아버지도 김정은한테 꼼짝 못하는 이유가 뭐예요? 참 이상하잖아요.
그것은 기존의 나를 못 버려서 그래요. 이걸 살리는 것, 내가 나를 살리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못 살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시험든 거예요. 시험은 남보고 욕하지 마세요. 우리 본인이 자기 자신을 못 놓는 거예요. 안 잃어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왜? 이게 나에게 전부니까. 이것 잃으면 다 잃는 거니까. 북한에 있는 김정은 신하보고 내가 이야기 했지만 오늘날 우리 자신들 보고 이야기해 보세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성경이 고마운 것은 바로 그러한 경우들을 성경에서 제시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잘못되게 생각하는지를 제시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집에, 그들 남매가 사는 집에 예수님께서 뒤늦게 들이닥치는 그 장면이 나와요.
오빠가 아플 때 불렀는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오빠가 죽고 난뒤에, 장례 치르고 난 뒤에 갔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1장 22절에서 마르다가 예수님 붙들고 화를 냅니다. “내가 일찍 오시라 했는데 늦게 오셔서 오빠 죽었습니다. 오빠 죽고 난 뒤에 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따진 거예요. 예수님에게.
마르다는 왜 예수님에게 분노합니까? 왜 화를 냅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분노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교회 나온다고 주님께 분노 안 합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간사하게, 얄팍하게 찬양의 빌미로, 찬송의 빌미로, 헌금을 빌미로 해서 주님 앞에 지금 따지려는 것이고 주님 앞에 분노하고 화를 내는 하나의 태도를 보여주는겁니다.
‘이렇게 봉사해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나오시기에요?’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왜 우리는 주님께 따집니까? 따지는 이유가 뭐예요? 이걸 요한복음 11장이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마르다 마리아의 말을 대신한다면요, 예수 당신이 뭔데 우리 오빠를 건드리냐, 그 말이에요. “당신이 뭔데? 하나님이면 다가? 다야? 하나님이면 다고 메시아면 다야? 왜 우리 오빠를 건드리냐.” 그 말입니다. 막 울면서 대들었어요. 울면서.
그게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딱 우리 모습 아닙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든 우하나님이든 내 것 건드리면 인간은 분노하게 되어 있고 화내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짐승으로부터 시작한 짐승의 새끼, 짐승의 자식입니다. 예수님이 독사의 새끼, 뱀새끼라고 하셨으니까요. 독사의 새끼, 뱀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그대로 여실하게 다 드러낸 겁니다.
영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런 육적 인간의 적실함을 다 폭로당하는 절차가 필요해요.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을 알았다 하니까 도대체 믿기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이 온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이게 그냥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누구나 다니지요. 복 받으려고.
그게 아니고 성령이 온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령이 온다는 것은 인간이 못 듣는 이야기가 내 입에서 나온다는 그것이 성령이에요. 남들이 못 알아먹는 이야기를 자기도 어느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알아듣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게 나에게 손해일까, 그게 이익일까’를 따질 수 있는 그런 거리를 인간은 말로 주고받아요.
“재해지원금 타 먹었어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권사님, 이말 못 알아듣습니까? 재해지원금 타 먹었어요? 이거 못 알아들어요? 알아들어요. “요새 손님 좀 옵니까? 코로나 모임제한 풀리고서.” 이 이야기가 못 알아듣습니까? “밥 먹었어요?” 이거 못 알아들어요? 세상에, 그 말 하나하나가 이게 악마로부터, 이게 시험으로서 나온다는 사실을 세상에 누가 알았겠습니까? 인간의 원천을 전혀 인간은 몰랐던 겁니다.
주님의 쓴잔에서부터 나오려면 그 쓴잔 안에 우리와 그리스도가 함께 시작점이 돼요. 함께 시작하는 점이 돼요.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우를 하나님은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내 인생이라는 게 없지요.
왜? 주님의 일로서 내 인생 살아가는데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되면 이 세상이 왜 악마가 지배하고 있고 악마가 어떤 식으로 설치고 있는가가 눈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자기 백성을 통해서 이 세상에 악마의 세계를 보여주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4절에서 46절까지 읽어보면요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지옥이지요 영원한 지옥)에, 의인들은 영생(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리라”라고 하는 그 기준, 그 기준이 바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신 자기의 작은 자, 소자입니다. 바로 성도에요.
이게 성도의 가치입니다. 출생지가 태어난 곳을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다르게 만들었어요. 짐승 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짐승이 가는 그 영원한 곳으로, 짐승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짐승이 가야 될 영원한 지옥 불에 함께 가게 조치하십니다. “너 짐승 말 잘 들었잖아. 가거라 같이. 같이 가거라.”
요한계시록 20장에 그 내용이 나오거든요. “같이 가거라.” 그리고 주님부터 시작한 인간은 “주님이 계신 나라로 가세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때는 존댓말로 “가세요.” 하고 보내버립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존작용, 반복되는 보존작용이에요.
성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들을 수 없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너희 속에 성령이 하는 말을 할 것이다. 너는 하나의 스피커고요, 마이크고요. 네 안에서 너를 마이크로 사용해서, 스피커로 사용해서 성령께서, 주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너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 말은 문자로 세상의 눈에 보이는대로 사는 사람들은 도통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하는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도 참 신기하지요. 신기하다고 해주세요. 참 신기하지요. 사도바울이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데살로니가 동네에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는 겁니다. “네가 한번 확인해 봐라. 네가. 이게 구라인지 진짜로 그들이 복음 때문에 핍박받는지, 안 그러면 돈 때문에 핍박받는지 가봐라. 진짜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지 안 그러면 그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용하기 위해서 알아듣는 말만 하고 살면서 성도라고 우기는지, 구라를 치는지 한번 확인해 봐.” 분명히 시험이 온다고 했으니까 진짜 그 시험이 그 시험 맞는지 확인해 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주는 이 시험의 원천은 뭐냐? 마태복음 4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시험받는 장면이 나와요. 마태복음 4장 보기 전에 야고보서 1장 3절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22장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서 이삭을 바치게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 분명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시험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야고보서 1장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시험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의도냐 하면, 제가 아까 언급했습니다.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행운이고 모든 것이 복이기 때문에 따로 시험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이 말이지요. 심지어 죽는 것도 시험이 아니고 죽는 것도 복이에요. 성도 안, 성도 자체 안에서는. 그러나 성도가 불신자와 있을 때는 이게 시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보 요약 봤지요. 중간쯤 보면 베드로전서 5장 8절 9절 나와 있잖아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그러니까 이 마귀가 성도를 자기 손아귀에서 주님한테 빼앗긴 것을 알아요. 그러니까 마귀가 특정 존재를 노리고 들어가는 겁니다. 영적인 존재, 성령받은 존재를 노리고 계속 압력을 가하는 거예요. ‘네 인생 네가 책임지는데 네 인생을 네가 왜 그렇게 가볍게 보느냐? 네 인생은 네가 애쓰고 설쳐야 겨우 밥 먹고 살아.’ 이런 식으로 계속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악마가 하는 일이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에게 압력을 가하거든요. ‘너 그렇게 살면 죽어. 오래 못 살아. 열심히 해야 너 살 수 있어. 너도 살고, 네 가정도 살고, 네 나라도 살고, 네 교회도 살아.’ 이게 악마가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평생토록 너무나 절감하며 느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를 알아요.
‘그래.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돼.’ 이걸 여러분 못 알아듣습니까? 이말을? 선생님이 애들보고 “너 공부 못하면 출세 못해.” 이 이야기를 학생들이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 들으면 IQ 50 이하에요. “샘요! 그거 무슨 말입니까?” “너 못 알아듣겠나? 성적이 좋아야 취직 잘된다 그 말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IQ가 50 이하든지 아니면 성도든지 둘 중 하나에요. 출세가 유혹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성공이 유혹거리가 안돼요. 성도한테는.
뭐 그런 희한한 인간이 다 있습니까? 그 희한한 인간이 저와 여러분이기를 바랍니다. 교회 비우라 하면 안 하면 돼요. 뭐 그게 고민입니까? 집주인이 그만 나가세요, 하면 우리 여기서 각자 헤어집시다, 헤어지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끊임없이 마귀가 우리가 알아듣는 이야기를 계속 하는 거예요. ‘네가 예전에 잘 알아들었잖아. 그래서 나한테 벌벌 떨고 있었잖아. 내가 다 아는데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다 알고 있어. 다 알고 있어. 그래서 네가 주님을 붙잡아야 살 수 있어. 붙잡아야!’ 이게 바로 마르다가 실수한 거예요. 주님을 붙잡으려고 한 거예요. 우리가정 잘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한 겁니다.
그때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최민수의 유명한 명대사에요. “이렇게 하면 …… 생각했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방금 한 것은 최민수 버전으로 해본 거고요. “이렇게 하면 가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내 여자니까.” 이 대사입니다. 주님을 이렇게 하면 가질 수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무슨 보물처럼 여기고.
어디 그렇지 않은 교회 가보세요. 있습니까? 모든 교회 교인들이 그것 때문에 열심내고, 봉사하고, 선교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교회 자체가 전부 다 짐승의 단체에요.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 세상 전체가. 다시 이야기할게요. 내가 유혹체라니까요. 내가, 내가 나한테 유혹체에요. 다른 사람은 싫어도 나는 내가 좋아요.
그러나 이것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알아듣는 이야기인데 성도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공부한 중에서 하나의 명언을 찾아내라면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명언은 딱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자로 되어 있는데 그게 뭐냐? ‘영구없다’ 에요. 내가 나한테서부터 헤어진 거예요. 내가 나와 이별한 거예요. 내가 없는 거예요. 내 가정도 없고, 내 교회도 없고, 내 나라도 없고, 나도 없어요.
‘너 그렇게 하면 죽는다.’ 내가 없는데 뭘 죽어? 내가 없는데. 이게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시험을 마태복음 4장에서 먼저 체험을 했지요. 이것이 약간 길더라도 오늘 설교의 모티브니까 여러분이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거예요. 마귀가 시험한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일부러 예수님에게 가라고 지시를 했고요.
6절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는 빼놓고요. 돌이 떡 되게 하라는 그런 이야기는 빼놓고. 6절에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성경 말씀에 있잖아. 성경 말씀대로 너에게 실행이 되어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잖아.”라고 마귀가 예수님에게 말씀 가지고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시험했던 겁니다.
말씀까지 동원했는데도 이게 시험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악마가 인용한 그 성경 말씀을 찾아가겠습니다. 좀 길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시편 91편 보겠습니다. 1, 2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할 때 여기 ‘나’가 누구냐 하는 거예요.
악마는 시편 91편에 나오는 그 나, 하나님께 보호를 받는 나가 악마는 말하기를 바로 너라는 겁니다. 이게 문자로 보는 거예요. 시편 91편을 보는 사람이 여기 나오는 나라는 것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할 때 그 하나님에게 보호를 받는 당사자가 바로 너라는 겁니다. 이게 악마의 소리에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요. 왜? 성경보는 이 노동, 이 노동이 나에게 이익을 주니까.
성경해석, 성경 공부가 나에게 이익을 주니까 이것은 다 나 잘되도록 하는, 내가 잘되겠다는 나 자체가 유혹이니까, 나 잘되기 위해서 성경 봤으니까 그 혜택과 보상은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 생각은 뭐냐? 성경 보는 내가 성경의 그 나라는 것으로 마귀 생각을 하잖아요.
그다음에 3절과 4절, 약간 길지는 하지만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이렇게 죽 나오는 것은 너를 보호한다는 이야기고요. 7절에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이걸 읽는 사람들이 “주님이여, 여기서 저 빼주세요. 저 아닙니다. 저는 이런 혜택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사람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에서 나온 이야기에요.
그다음에 나오는 마귀가 인용한 대목, 9-12절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악마가 인용한 대목은 이겁니다. 악마는 말씀이 무서워서 근처도 안 간다.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악마가 성경말씀 가지고 우리에게 시험하러 유혹하러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은 누굴 이야기하느냐? 멀쩡한 예수님 보고도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러면 여기서 시편 91편의 나는 누구냐? 자기를 버려야 될, 쓴잔을 마셔야 될 그 예수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마귀는 광야에서 뭐라고 하느냐? 예수님 당신이 잘돼야 남들도 잘된다는 식으로 잘된 예수, 멋진 예수, 성공한 예수, 훌륭한 예수, 일 잘하는 예수를 마귀는 예수님에게 유혹으로 제시한 겁니다. 성경해석, 영으로 본다는 말은요, 신비로운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의 내용을 품은 것은 다 영이고 십자가 내용 빠진 것은 다 육이 되는 겁니다. 죽어 마땅함이 나오면 영의 이야기고요, ‘나 조금 더 살아야 돼’ 가 나오면 전부 다 마귀 이야기에요. 우리 교회 부흥 이야기하면 마귀 이야기고요, 오늘로 헤어집시다, 하면 영의 이야기에요.
얼마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동안 집착하고 집요한지 상상도 못 할 정도입니다. 악마의 힘으로 우리는 그동안 끌려다녔기 때문에 그 악마의 힘에서 풀려나온다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예수를 믿든 뭘 하든 구원되지 않습니다. 뭘 해도, 피를 믿어도 구원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는 나에게서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게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것은 성령이 왔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오니까 나와 떨어져서 주님과 하나가 된 나가 떨어지지 않는 나를 볼 수 있는 안목이 발생 된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그러니까 내가 신앙생활 제대로 못한 것도 행운이에요. 왜 그게 천국의 모습이기 때문에. 내가 순간순간 예수 안 믿는 것도 그것도 행운이에요. 왜? 천국의 안목으로 그것이 발각되기 때문에. 내가 이런 모습이고 내가 죄인의 괴수라는 것을 천국의 안목을 가진 성령이 와야 비로소 나 자신이 이것 밖에 안 되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하지요. 대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삼성라이온즈를 응원합니다. ‘야, 이번에 정규리그 2등인데, KT 이겨서 1 등 해야 되는데, 곧 코리안시리즈 하는데.’ 하세요. 대구라는 지역, 내 고장, 내가 태어난 지역을 못 버리는 이것이 시험입니다. 그렇게 응원하세요. 일본하고 한국하고 월드컵 한다면 일본 이기라 하는 사람은 맞아죽어요. 한국이 이겨야 돼요. “아~ 대한민국!” 해서 이겨야 됩니다. 대한민국 응원 해야 돼요. 왜? 우리의 본성이 그러니까.
그런데 그 본성이, 느긋하게 저게 바로 마귀 들렸던 내 모습이라고 웃으면서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이제야 아멘, 이 나온다. 여러분, 주님하고 아는 사이하고 사랑하는 사이하고 다릅니다. 가룟 유다,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령 받은 사도들은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같은 말이에요.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으니까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를 미워하라고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지시를 했으니까 이제는 웃으면서 우리 자신을 미워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나로부터의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