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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제니시스」 혹은 배신의 미학
며칠 전에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란 영화를 봤다. 1984년, 그러니까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처음 나온 「터미네이터」의 다섯 번째 버전인 셈인데, 여기에 다시 원조 터미네이터 아놀드가 나왔다. 아놀드는 오스트리아 독일어가 모국어라 그 억양이 매우 강한 배우이다. 이것이 영어에도 그대로 드러나 애를 먹었다고 한다. 할리우드 배우로서는 당연히 큰 약점이었지만 어차피 아놀드는 세련된 언어로 점수 딸 생각은 없는 배우였다. 그는 몸이 받혀주는 액션이 최상 최고의 무기였다. 터미네이터는 그런 아놀드에게 바로 최상의 맞춤형 액션이었던 것.
아놀드는 처음부터 일체의 감성을 거두고 강철 같은 몸과 무심의 눈빛으로 모든 것을 압도했다. 그런 아놀드가 터미네이터 5탄에서는 아주 유머러스한 할아버지 터미네이터로 돌아왔다. 30년의 세월이라 어쩔 수 없는 변신이었다고 한다. 내부는 기계지만 외피는 사람의 피부를 이식한 T-800 모델이기 때문에 머리도 피부도 노화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인간 아놀드의 생물학적 현실을 위해 고안한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물론 액션의 질은 크게 변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재현된 것 같았다. 아놀드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뭔가 예전 같지는 않았다.
I'm old, not obsolete. 늙었지만 맛이 간 것은 아니다.
늙은 터미네이터가 종종 겸연쩍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자,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핵심 화두이다. 세월이 흘러 그의 외피는 늙었지만 기계이기 때문에 힘과 에너지는 여전히 쓸만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불변의 사실은 주인(사라 코너)을 보호하도록 프로그래밍된 터미네이터의 충성심이다. 몸이 산산이 부서져 작동이 멈추는 순간까지도 주인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작동한다. 이것이 괜스레 우리의 눈시울을 젖게 한다. 뭐, 괜스레는 아닌 것이, 세상에 기계보다 못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에서 은근히 눈시울이 젖어오기 때문이다.
요즘 대한민국 정치계에 ‘배신’이라는 말이 큰 화두가 되고 있다. 잘 아는 대로 박대통령이 유 모씨를 필두로 국회의원들을 향해 ‘배신의 정치’라는 분노의 일갈을 던지면서이다. 박정희 시절부터 배신의 정치학에 치를 떨어온 게 박근혜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그가 ‘동물의 왕국’을 즐겨 보는 이유가 동물은 배신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개를 키워보면 충견이라는 단어에 고개가 절로 끄떡여진다. 물론 인간사에 배신은 정치권의 화두만은 아니다. 심지어 종교계에도 배신은 큰 이슈가 되어 왔다. 일찍이 바울은 신앙의 초심을 배신하는 것만큼 나쁜 일은 없다고 경고하곤 했다. 단테도 배신을 가장 큰 죄로 간주하여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배치하는데, 특히 예수를 배반한 유다나 시저를 배신한 부르투스가 여기서 고통을 받고 있다. 배신의 악덕과 대척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지조와 충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에 최고의 미덕으로 찬양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만간 완벽한 일편단심 충성을 일상에서도 쉽게 볼지 모른다. 인공지능의 세대가 곧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 변치 않고 배신하지 않는 T-800 같은 로봇이 현실화 될 것이라고 한다. 단순히 생활의 편리를 제공하는 정도의 로봇을 넘어 섹스봇(Sexbot)까지 제품화될 것이란다. 과연 남녀관계, 더 나아가 인간관계에서 긴 트라우마의 스토리를 만들어온 배신의 역사가 종말을 고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면 좋기만 할까? 아닌 것 같다. 배신이 없는 인간사, 배신이 없는 역사, 배신이 없는 시간, 무슨 재미로 견딜 수 있을까? 그것은 변화와 반전이 없는 평면적인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니체는 에덴동산의 완벽한 질서, 그래서 너무나 지겨운 평탄을 깨트린 것은 바로 창조주 자신이었다고 했다. 즉, 신은 스스로 뱀이 되어 나무 밑에서 이브의 배신을 유도하므로 참을 수 없는 불변의 세계를 변화무상으로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이로서 신은 신 존재에서 탈피하는 스릴을 만끽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배신이야 말로 선과 악을 초월하여 스릴 넘치는 드라마를 여는 동인이 된다. 기실 에덴동산 이전에도 역사는 배신의 스토리로 기록되고 있다. 창세기 이전의 세계를 주도한 것은 천사들이었는데 그 우두머리가 루시퍼였다. 그는 어느날 부하 천사들을 이끌고 창조주인 신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배신을 한 것이다. 루시퍼는 반역죄로 영계에서 추방당하는데, 이후 그는 배신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피조물인 루시퍼의 배신을 사전에 몰랐을까? 알았다면 왜 사전에 막지 않았을까?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그러한 배신이 창세기를 열어 구약의 드라마를 전개하게 했다는 점이다.
신약으로 와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다만 파란만장한 2천년 기독교 역사란 게 가능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의 수제자 유다의 배신을 전제로 한다. 이단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유다의 배신은 다분히 기획배신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야말로 진정한 희생양이라는 다소 위험한 논리도 나온다.
헬레니즘 쪽을 봐도 올림포스의 신통기는 배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신들의 우두머리인 제우스는 아내(헤라)를 심심하면 배신하여 수많은 배다른 영웅을 탄생시켰다. 흥미진진한 그리스 신화는 바로 이들의 이야기이다. 배신의 달인 제우스가 배신이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요컨대, 배신은 신들을 가장 신답지 않게 변모시키므로 변화무상한 미학적인 현상계를 가능하게 했다. 이로서 신은 참을 수 없는 적막으로부터 벗어나고.
언젠가 인간의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터미네이터처럼 제작자의 뜻을 완벽히 순종하는 로봇을 만들지도 모른다. 의문은 그러한 로봇에 인간이 온전히 만족할까 하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배신이라는 요인을 프로그램에 집어넣는 제작자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게 예측 가능한 곳에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창조가 그랬듯이. 생명 존재에게 심심함은 그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누가 말했던고. 태초에 심심함이 있었다고. 터미네이터 5의 공식 명칭은 「Terminator Genisys」이다. Genisys, 창세기기Genesis의 변형이다. 요즘 장마로 인해 망상엘 못 가서 그런지 자꾸 망상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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