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안간/최윤정 수필가
마당이 넓고 장독대가 많은 집에 셋방을 살았다. 주인집이 꽤 부자여서 담이 높고 대문 단속이 철저했다. 여기서 사는 동안 엄마는 일하러 나갈 때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단칸방에서 가지고 놀 만한 건 책뿐이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었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희망을 걸어보겠다는 듯 푼돈이 생기는 족족 책을 사줬다. 더 찢어질 것도 없는 궁색한 살림에 다섯 살 무렵 혼자 글을 깨치고 셈을 하는 아이는 부모가 고된 생활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일곱 살 무렵 엄마가 할부로 위인 전집을 샀다. 전래동화와 동아대백과사전도 들였다. 한꺼번에 많은 책이 생겨서 그저 좋았다.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혼자여도 괜찮았다. 책을 읽다가 마당에 나가 놀기도 했다. 우물에 돌을 던져보거나 물을 길어 올리기도 하고, 몰래 주인집 장독 뚜껑을 열어 장을 손가락으로 퍼먹기도 했다. 그래도 책 읽는 것이 제일 재미있었고 마당에서 잠깐 딴짓을 하는 것은 다음 책을 보기 위한 전조에 불과했다.
동화책을 읽다 한 단어가 내게 최초로 온 순간을 기억한다. ‘별안간’이라는 단어는 무슨 뜻일까. 문장 안에서 어림잡아 이해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사전은 없고 물어볼 어른도 없었다. 어린 나는 혼자 곰곰 생각했다.
별의 안간이라니. 얼마나 밝고 푹신한 말인가. 빛의 아름드리 안쪽으로 눈부신 마당이 있고 엄마의 품처럼 포근한 바람이 간간이 부는 곳일까. 손톱만 한 흰 아기별 꽃이 만개한 나무가 있는 곳. 우물에서는 언제나 따뜻한 물이 길어지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앞 머리칼이 흔들릴 때 아기별 꽃이 우수수 떨어져 날리는 곳. 별의 안간에서는 모든 것이 부드럽고 온화하여서 겨울이 와도 엄마는 새벽에 부러 일어나 연탄을 갈지 않아도 될 것이다. '별안간'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무한히 환하고 따뜻하다는 뜻일까.
한 계절 동안 이 단어를 가지고 놀았다. 한낮 마루에 앉아 눈을 감고 고개를 들면 눈꺼풀 안까지 주홍빛으로 들어차던 태양의 힘. 작고 동그란 이마로 뛰어내리던 빛의 아가들. 정수리를 빙빙 돌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면 습자지처럼 얇은 현기증이 일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세상이 있었다. 섬광이 이는 하늘을 눈 꼭 감아 가두면 나의 안간은 작고 빛나고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운 별이 되었다.
내 안에 별의 안간을 들이고 많은 것을 담았다. 정말로 재미있었던 이야기들과 이미 죽은 사람들의 이름. 피라미드의 신비와 마당 감나무, 바닥에 떨어진 풋감들. 우물 옆에 만개한 작약과 손으로 툭 치면 흩날리던 노란 꽃가루. 어느 날의 빗소리와 국 냄비에서 터지던 거품, 시큼한 냄새 그리고 마을 구판장 외상장부에 적힌 내 이름. 나는 자주 눈을 감고 내 안간의 것들을 들여다보며 보살폈다.
어느 해에는 외할머니집에서 지냈다. 할머니는 또래보다 마르고 왜소한 나를 안쓰러워했다. 이것저것 주는 대로 받아먹고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지냈지만 대체로 엄마를 기다리며 보내는 날들이었다. 해가 저물면 어린 나로서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쉬 잠들지 못했다. 뒤척이는 손녀의 턱밑까지 무거운 솜이불을 당겨 덮어주던 손길, 할머니는 거친 발로 내 차가운 발을 비벼주었다. 이불에 밴 군불 냄새를 맡으며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그 품에서 까무룩 잠이 들어 도착한 노구의 안간은 앙상했지만 성긴 울타리에서 박하 향이 났다. 옛날 옛적의 산골을 누비고 구름을 타고 선녀가 되어 천국에서 놀았다.
장독대에 붙은 달팽이는 손가락으로 툭 치면 제 안간으로 머리를 숨기고 톡 떨어졌다. 소금물에 담가 둔 풋감은 꼭지 안으로 별의 안간을 들여 노랗고 달콤하게 삭아 갔다. 우물에 고개를 박고 부른 노래들은 길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우주까지 흘러갔을까. 고추장에 손가락을 푹 찔러 넣고 붉은 안간의 맛을 쪽쪽 빨아먹으며 나는 커갔다.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깨면 아빠와 엄마는 입을 벌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허술히 열린 안간에서 고단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한 번씩 알아들을 수 없는 우주의 언어를 뱉었다. 너무나 피곤해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이 단칸방으로 돌아와 몸을 뉜다는 사실. 악착같이 한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는 사실. 무방비상태로 열린 두 사람의 안간에서 여전히 온기가 있고 익숙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또래보다 조숙하고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는 것이 되바라졌다거나 건방지단 평가로 돌아왔지만 괜찮았다. 내게는 가지고 놀 책과 어찌 되었든 집으로 돌아와 한 이불을 덮고 잠들던 두 사람이 있었다. 밤이면 엄마가 나를 안간에 들여 재우고, 낮에는 세상의 안간들이 요람이 되어 나를 돌봤다. 살펴보면 여기저기 반짝이던 별의 안간들이 밤이나 낮이나 수두룩 했다.
후에 사전에서 '별안간'은 '갑작스럽고 아주 짧은 동안'이란 뜻인 걸 알았음에도 이 단어를 만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순식간에 따뜻한 곳으로 건너갔다. 별안간 도착한 곳에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누운 할머니가 있었다. 이제는 엄마도 그 곁에 누워 있다. 가슴에서 무언가 뭉클한 것이 비집고 나오려 할 때 우리는 우리가 품은 별의 안간이 있어 오래도록 뜨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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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가 뽑은 좋은수필-61] 한혜경 '별의 안간'에는 사랑의 꽃이 핀다
최윤정 수필가 '별안간'...'한국산문' 2월호
"길을 잃어 절망에 빠지려 할 때 /그대의 다정한 음성이 나를 다시 부른다"
에밀리 브론테는 <상상력에게>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삶이 힘겹더라도 상상력이 함께하니, 상상력은 "인간 근심의 확실한 위무자"라고 읊었다.
이 시처럼 최윤정의 <별안간>은 한 외로운 아이에게 상상의 세계가 얼마나 환하고 따뜻했는지, 아름답고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더 찢어질 것도 없는 궁색한 살림", 부모는 일하러 나가고 아이는 하루 종일 단칸방에서 혼자 지낸다. 하지만 책을 좋아해 책만 있으면 혼자여도 괜찮았다. 어느 날, 동화책을 읽다가 "별안간"이란 단어를 마주한다. 사전은 없고 물어볼 어른도 없었던 아이는 혼자 곰곰 생각한 끝에 "별의 안간"이라고 해석한다.
단어의 명확한 의미는 원활한 소통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단어의 바른 뜻을 묻는 시험에서라면, 아이의 해석은 오답이다. 그러나 상상의 세계에서는 오답과 정답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 "밝고 푹신한 말"에서 "환하고 따뜻"한 세계를 상상하고 행복해하면 되는 것이다.
빛의 안쪽으로 눈부신 마당이 있고 포근한 바람이 간간이 부는 곳, 아기별 꽃이 만개한 나무가 있는 곳, 우물에서는 따뜻한 물이 길어지고 바람에 아기별 꽃이 날리는 곳, 그리고 엄마가 새벽에 연탄을 갈지 않아도 되는 곳. 이 풍경은 아마도 현실과 반대이리라. 특히 따뜻한 우물물, 새벽에 연탄을 갈지 않아도 될 온화한 겨울을 상상하고 있으므로, 엄마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더 나아가 아이는 자신의 안에 "별의 안간"을 들이고 많은 것을 담는다. 그리고 외할머니 집에서 지낼 때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쉬 잠들지 못"하던 아이를 품어주던 할머니, 삶을 일구느라 고단한 부모의 "온기가 있고 익숙한 냄새"가 곁에 있었다. 엄마가 없는 낮에는 세상의 안간들이 "요람"이 되어 돌봤기에, 아이는 "괜찮았다"
훗날 "별안간"의 사전적 의미를 알게 되지만, 작가에게는 여전히 "별의 안간"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순식간에 따뜻한 곳으로 건너"가게 하는. 이로써 이 글은 객관적 사실을 기준으로 명확하게 나누고 재단하는 세계와 달리, 모든 것을 품는 세상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 세계에서는 고된 현실을 잊을 수 있으며 때로 가슴 속에서 "뭉클한 것"이 비집고 나오기도 한다고 알려준다. 아울러, 간간이 "별의 안간"을 상상할 수 있다면, 상상을 벗 삼을 수 있다면, 삶이란 바다를 건너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 세계로 이끄는 등대 불빛과도 같다고 하겠다.
◆ 한혜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명지전문대 명예교수, 계간수필 편집주간 △<계간수필> 수필 등단(1998) △<한국문학평론> 평론 등단(2002) △평론집 <상상의 지도> <시선의 각도> △글쓰기 이론서 <말 글 삶> <생각 글 말-내 안의 가능성을 보다>△수필집 <아주 오랫동안> <시간의 걸음> <이상한 곳에서 행복을 만나다>(4인 공저) 등 △제12회 윤오영수필문학상(2025)
첫댓글 아름다워요. 오늘 밤에는 창을 열고 눈을 크게 떠볼 생각입니다
^^
마음 따뜻하게 울릉이는 별의 안쪽을 만나서 사월이 밝아 옵니다 오월에 피어날 무수한 어린이가 꿈을 읽듯 책장을 넘깁니다.
경주의 보물입니다 ~~ 축하드립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