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운없는 선수.
이름 : 김병수 출생 : 1970년 11월 24일 학력 : 고려대학교 경력 : 1988년 ~ 1992년 국가대표 2002년 포항 스틸러스 코치 데뷔 : 1993년 JFL(일본 실업축구 리그) 코스모석유 입단
현재는 k리그 포항스틸러스의 코치로 있다고합니다. 제가 아는 축구감독 몇몇분은 항상 김병수와 김종부 선수를 안타까워했습니다. 둘 다 유럽에서 태어났으면 지금쯤 세계최고의 선수로 기억됐을거라고.
또 축구협회 임원 경력많은 축구전문기자,한창 고종수 선수가 천재라고 불렸을 때와 박주영
선수가 천재라고 불렸을 때, 김병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있던 글을 그대로 갖고와봅니다.
김병수라는 축구선수를 아시나요...한 세기에 나올까말까한 축구선수 모르시는 분이 많이 계신것 같아서 올립니다(퍼온자료)
박제 剝製 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1937년. 진달래 흐드러진 4월의 봄날. 천재 시인 이 상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남아
시를 쓰지 않기로 하고 떠난다. 떠나지 않는 질병을 안고 형체도 없어진 폐를 남긴 채
레몬 향기를 맡으며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그는 알을 깨고 비상하기 직전 날개를 접어야 하는
슬픈 운명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며 아무도 가보지 못할 지평에 혼자 다다른 최고 지성의
글 만을 남기며 봉우리를 떠났다.’
천재는 요절한다.
천재가 요절하는 이유는, 천재는 사회를 수용할 수 있어도 사회가 천재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재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에 가까운 것이다.
한국 축구에 있었다는 요절한 천재의 신화를 믿는가. 이상 처럼, 짐모리슨 처럼, 제니스조플린처럼, 너무나 짧은 만남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환희와
슬픔을 남긴 채 젊은 날 홀연히 떠난 천재 축구 선수의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믿는가.
한 때 우리 곁에 천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오늘의 시련을 잠시나마 진통하고,
미래를 향한 소망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믿음으로 필자는 오늘 병상에 누워있는
한국 축구에게 그가 죽인 ‘천재’에 대한 기억을 속삭여주려 한다. 아직도, 천재의 흔적이 남아있는
몇 몇 현역 선수들을, 거친 그라운드에 그대로 방치하며 스스로 ‘자연사’ 시키고 있는 한국 축구에게
천재를 수용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 주어, 천재는 방치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지금이라도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 축구에는 ‘천재’라고 표현되는 선수가 꽤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 하는 ‘천재’는
단지 정상급의 실력을 칭송하는 표현의 하나로 사용되는 ‘천재’가 아니라 말 그대로 ‘天才’, 남보다
몇 걸음 더 앞서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찾고 갈고 닦는 사람, 그리고 천재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겪는 방황, 좌절에 상처를 받고 이겨나가는 끝내 산화하는
그런 천재를 말하려 한다.
김. 병. 수. 그는 한국 축구의 안타까운 그리움이다. 천재로 태어나서 천재로 살다가 천재로 죽어간 그는 한국 축구의 가장 아픈 기억으로 지금 남아있다.
한국 축구가 그를 처음 만나고 감격의 포옹을 나눌 때 그는 이미 시한부 운명의 불치병을 앓고 있었던
‘떠나가야 할 사람’이었다. 첫 만남부터 불구의 몸을 가진 그 천재는 우리에게 기쁨을 준 만큼 아픔을,
희망을 준 만큼 절망도 남겼다. 첫만남 후, 한국축구는 불치병을 확인한 후에도 끊임없이 구애 하며
매달렸다. 병상에 누워 있는 그에게 다가가 ‘이 병만 나으면 다시 보자…’는 약속을 남기며 그가 떠나는
길을 다시 되돌아 보며, 다시 되돌아 보며…… 기약 없는 재회의 약속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는
결국 축구 선수로서의 짧은 삶을 끝내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은퇴 시 누군가가 내뱉은 한 마디. ‘
그의 은퇴로 인해 한국 축구는 50년이상 후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정말 천재였는가.
일반적으로 스포츠 계의 천재들은 그들 생애에 이루어놓은 업적을 가지고 평가 되어진다.
그러나 김 병수는 특이한 예외의 경우이다. 그가 축구 선수 생애를 통해 이룬 것은 올림픽 대표팀 경력
몇 년과 일본 2부리그에서 4년간 100게임 정도 출장 70골 따위가 전부다. 이러한 ‘업적’은 ‘
한국 축구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의 업적으로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축구인들이 천재의 화두를 얘기할 때면 아직도 같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얘기한다. 몇 몇 선수들이 선수 시절의 ‘과업’을 통해 천재로 분분하게 평가되지만, 김병수 그는 아무
과업 없이도 한국 축구사의 유일무이한 천재로 일치되게 평가되고 있다. 무엇이 그를 천재로 평가
했을까. 아마도 그를 천재로 평가하게 한 것은 기록으로 남는 ‘업적’이 필요 없을 정도로 높았던
본능적인 재능과 끝없는 노력, 그리고 천재의 운명인 열띤 방황과 좌절. 그 짧고 뜨거웠던 축구
인생에서 그가 보여준 패스 하나. 슛 하나. 몸 동작 하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는 패스의 길을 내며 불가능할 것 같은 슛을 성공시키며 전체 경기를 단숨에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의 플레이를 보고 어느 누가 천재에게 주는 박수를 치지 않을 것인가. 필자 같은 범인에게도
‘천재를 평가할 자격’은 없어도 ‘천재에게 감동할 본능’은 주어졌으니…
축구의 왕.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은퇴하기 까지 늘 소속팀에서 ‘왕’이었다. 부상으로 인해 몇 개월을 그라운드를
떠나 있어도 여전히 동료들은 그의 출전을 '게임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여겼으며,
감독들은 그의 출전을 '시합을 이길 수 있는 가장 차원 높은 고등 전술'로 믿어왔다. 그는 수 많은 부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했다. 축구를 그만 두어야 할 운명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노력하기 때문에 탁월한 것이 아니라, 먼저 탁월하기 때문에 노력할 수 밖에 없는 천재의 숙명을
가지고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한국 축구 천재의 신화. 천재의 신화를 믿으려 하는 사람은 우선 그 신화 속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편 - '거짓말 같은
이야기'- 들을 먼저 믿어야 한다.
강원도 산골 꼬마와 실업 축구팀 감독. 강원도 산골 초등학교 6학년 꼬마 아이는 ‘축구를 너무 잘해’ 혼자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된다.
친구집에서 얹혀 지내며 서울 미동 초등학교에서 축구를 하던 그는, 신동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당시 최고 실업팀이었던 포항제철 축구팀 감독 한 홍기씨의 마음을 사로잡아, 어머니와 함께 포철 축구단
숙소로 거주지를 옮긴다. 산골 아이는 최고 실업 축구팀 숙소에서 훈련하며, 선수단 아파트 숙소 주변
잔디밭에서 공을 차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부상으로 훈련을 쉬었지만 시합은 항상 주전. 경신고등학교 재학 시절. 발목 부상으로 훈련 조차 못하고 매일 매일 쉬고 놀기만 했던 김 병수는
시합이 있을 때면 감독의 ‘특명’을 받아서 단 일주일간 훈련을 하고 경기에 출전한다. 발목의 통증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그는 결승골, 결승 어시스트를 수시로 기록하며
1년넘게 합숙 훈련한 동료들 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을 한다. 경신 고등학교 동료 선수들과 감독은
그의 출전을 승리를 위한 가장 확실한 필승 전략으로 믿는다. 그 시절, 부상으로 출전을 망설이는
그에게 감독이 남긴 명언 하나…‘오른발이 아프면 그냥 왼발 하나로만 차…’
훈련도 못하는 부상 선수. 올림픽 대표팀 발탁 I 90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김삼락 감독은 부상 중인 김병수를 올림픽 대표에 발탁하여 선수촌에서
합숙하게 한다. 부상으로 인해 팀 훈련에도 참가 못하는 선수는 그저 쉬면서 합숙만 한다. 당시
올림픽 대표 크라머 총감독은 부상으로 훈련도 못하는 선수를 대표팀으로 발탁한 것에 대해
못마땅하지만 연습 경기에서의 그의 플레이를 보고 완전히 반해 버린다. 그를 처음 만난 감격의
한마디 “내 축구 인생 50년 동안에 처음 만난 ‘천재’다…”..(아 잠깐 껴들어서 아직도 감이
안오시는 분들을 위해.. 크라머 그의 축구인생 50년 중에는 미셸플라티니, 요한 크루이프, 반 바스텐,
게르트 뮐러 등이 있었다. 그 중 김병수를 최고로 꼽았으니 이제 감이 오는가)
부상이 재발한 선수 월드컵 대표팀 발탁 II 90년 월드컵 국가 대표팀 이 회택 감독은 주위 사람들의 열렬한 권유로 인해 뛰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던 선수, 한편으로 부상으로 더 유명한 선수를 탐탁치 않았지만 일단 대표팀으로 발탁한다.
잠시 부상에서 재활했던 김병수는 코리아컵을 뛰며 이 회택 감독을 완전히 사로잡았지만 다시 부상
재발, 결국 대표팀을 포기하려는 그에게 남긴 이 회택 감독의 절박한 바람과 약속… ‘수술만 해라.
수술만 하면 너는 무조건 이탈리아로 데려갈 것이다..’
부상으로 축구를 쉬고 있던 선수. 월드컵 대표팀 발탁 III 대학 졸업 후 부상으로 축구를 떠나 완전히 쉬면서 방황하던 그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스포츠 신문에
난 월드컵 대표팀 선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난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94년 월드컵
대표팀 김 호 감독은 한번도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예전부터 경기를 통해 확신했던
천재 선수를 다시 찾기 위해,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의 이름을 대표팀 명단에 무조건 올린다. 그는
타워호텔에서 있었던 대표팀 소집식에 참석하자마자 김 호 감독을 찾아 자신의 '부상'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감독을 ‘설득’하여 간신히 대표팀을 탈퇴 한다.
늘어진 양쪽 발목 인대, 무릎 고장, 만신창이의 몸으로 뛴 10년 보통 선수들은 발목 인대가 0.1~0.3인치 늘어나도 경기에 지장을 줄 정도로 아프고 발목에
힘을 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김병수는 첫 수술 당시, 발목 인대가 0.9인치나 늘어난 중태였다.
그 정도의 부상이면 발목의 힘이 지탱되지 않아서, 발목을 질질 끌면서 달릴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또한 발목을 삐어도 통증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다. 그러한 부상을 고교 시절 처음 입었던
그가 첫 수술을 하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넉넉치 않은 환경으로 인해 고교 시절 제대로 된 치료 조차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는 해야 할 수술을 계속 미뤄야 했다. 결국 주위의 도움으로 경찰 대학에서
첫 수술을 했지만, 수술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야 그나마 수술 다운 수술을 받았다.
총 5번의 수술. 수술 후에도 완전치 않은 무릎과 발목으로 인해 그는 진통제를 맞아가며 4년간
일본 2부리그에서 선수로 뛴다.천재라는 것은 무엇보다 고통을 참아내는 뛰어난 능력이라고
말하듯이 그에게 있어서 부상은 어쩌면 그가 천재임을 확증 시켜주는 상황 설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천재 선수 김. 병. 수. 신화 처럼 내려오는 그에 관한 숱한 이야기들.. 거짓말이지만 믿을 수 밖에 없는 한 천재의 일화들… 그와의 날카로운 첫 키스의 감동을 간직한 사람들에 의해 아직도 입으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추억의 단편들… 고종수 선수가 존경하는 윤정환 선수. 윤정환 선수가 존경하는 최문식 선수. 최문식 선수가 가장 존경하는 김 병수… 그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어떠십니까... 김병수 선수가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지단,베컴을 능가하는 축구선수가 됐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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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좀 긴 글이지요? 그리고 테니스가 아닌 축구 얘기라 조금 낮설지 않으신지? 시간 있으실 때 끝까지 읽어 보세요^^ 요즘 우리나라 돌아가는 것을 보면, 서민 = 김병수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글퍼집니다. .....모두들 뜨거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