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란서에 어떤 여자가 있었습니다.
혼자 사는 여자인데,
하얀 돼지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하여튼, 요즈음 서양에는 독신녀들이
애완용 동물들을 많이 키우고 있다는데,
어떤 여자는 강아지,
어떤 여자는 고양이,
심지어 어떤 여자는 뱀을 데리고 살기도 한답니다.
이 여자는 돼지 새끼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산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 돼지 새끼와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고,
목욕탕에서 같이 목욕하고,
침대에서 같이 자면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돼지 생일이 되자,
그녀는 생일 선물로 프랑스에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도 못하는, 영화배우들이나 바르는
굉장히 비싼 "스와르-빠리"라는 향유,
저는 불어를 잘 몰라서 발음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향유를 큰 맘 먹고 사 왔습니다.
이제 틈틈이 돼지를 우유에 목욕시켜서
스와르-빠리를 발라주곤 했는데,
어느 날 이 여자가 돼지를 두고
멀리 여행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참 섭섭하지만 돼지야, 미안하다.
내가 빨리 다녀올께. 잘 있거라.”
먹을 음식도 식탁에 다 차려놓고,
목욕물도 따뜻하게 해서 목욕탕에 받아 놓고,
시트도 침대에 깔아 놓는 등
모든 준비를 해 놓고 여행을 갔습니다.
떠나기 전에 돼지 몸에다
스와르-빠리를 다른 때보다 더 많이 발라 놓았습니다.
여행을 가서도 여전히
‘우리 돼지가 어떻게 지낼까?’하는
생각 때문에 일이 손에 안 잡혔습니다.
그만큼 이 여자는 돼지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집에 돌아와서
돼지를 찾아도 돼지가 없었습니다.
목욕탕에도 없고, 주방에도 없고, 침대에도 없고,
거실에도 없어요. 이 여자는 울상이 되어서
‘내가 괜히 돼지를 혼자 놔두고 갔구나! 내가 나빴어
.’ 뉘우치는 맘으로 돼지를 사방으로 찾아보았습니다.
정원에 나가서도 찾아보았습니다.
나무 밑에도 없고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나중에서야 보니까 더러운 하수구에
드러누워서 꿀꿀거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돼지가 그렇게 귀한 스와르-빠리를 바른 몸으로
그 더러운 하수구에 누워 있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돼지야, 빨리 나와.”
그러나 돼지는 세상에서 제일 평안하고
즐겁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올 생각을 안 했습니다.
성경에 ‘돼지 코에 금고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돼지 가죽에 스와르-빠리’였습니다.
여러분, 돼지는 근본적으로 추한 것을 좋아하는 짐승입니다.
그런 돼지의 성품은 바꾸지 않고
껍데기에다 스와르-빠리가 아니라 무엇을 발라 놓아도,
돼지는 다시 더러운 곳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속은 바꾸지 아니하고
겉만을 고데하고 파마하고, 아모레, 쥬단학, 타미나, 새로본을
덕지덕지 바르고, 킹텍스, 골덴 텍스로 두르고
다이아몬드 보석반지를 끼고 걸고 해도 우리 속이 더럽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빠질 수밖에 없고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돼지를 우유에 목욕시키고, 스와르-빠리를 바르고 기저귀를 채워서,
침대에 재우는 것은 돼지에게는 고달픈 일입니다.
돼지는 차라리 하수구나
구정물에서 뒹구는 것이 훨씬 편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마음에 죄가 있다면,
나가서 술 먹고 놀고 죄를 짓는 것이 더 편하지,
이글을 보는 것이 고달픈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시간 참석하는
예배시간이 지루해서 못 견디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배 드리는 것이 행복하면 왜 한 시간이 지루합니까?
하도 지루해하니까 설교시간이 점점 짧아져서 요즈음은 20분 설교,
15분 설교가 등장하고 있는 판입니다.
서울에는 1부 예배가 인기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주일 날 예배에 안 가고 놀러가면
교통 사고 난다 하더라.’며 겁이 나서 예배를 보긴 봐야 하니까,
1부 예배라고 7시 정각에 시작해서 7시 50분에 마치는 시간에 참석합니다.
차 뒤 트렁크에 야외용 가스 레인지니 불고기니 가득 싣고 말입니다.
“얘들아, 오늘 용인 자연농원에 놀러 가자.”
“아빠, 좋아요.”
1부 예배에 참석하는 동안 아이들은 자가용 안에 있지요.
아이들은 차 안에서 기다리며 예배가 빨리 끝이 안 난다고 야단입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배가 짐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앉아서 ‘우리 목사 설교 참 길게 하는구먼.’ 하는 생각이나
하다가 예배가 끝나면 새장에서 새가 해방되듯이,
“후다닥” 나가서 차에 시동을 걸고 “부-웅” 갑니다.
그런 분들이 예배에 관심이 있습니까?
나가 노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까?
예배보다는 노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속을 바꿔야 합니다.
속을. 예수님은 종종 그 당시의 종교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않았느냐?
너희 속은 더러운 것 으로 가득찼다.”
이 말씀은 그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 여러분도 죄를 씻지 못했다면 동일하게 그런 사람들입니다.
마음속에 죄의 성품이 가득차 있는데 세례 받으면 됩니까?
죄가 가득차 있는데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됩니까?
안 됩니다. 그것은 돼지털에 스와르-빠리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가면 교인, 밖에 나가면 세상 사람이지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간절하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고 바깥으로
예수 잘 믿는 표시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장로님, 미안합니다만, 장로님은 죄 용서 못 받습니다.”
“예? 장로는 죄 용서 못 받아요?
성경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있어요. 죄는 누가 용서받는지 아십니까?
죄인이 용서받습니다.
예수님이 장로님의 죄를 씻었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장로님이라도 죄 용서 받으려면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님도 죄 용서 받고 싶으면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죄 용서함 받기가 쉬운 사람이 있고,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 자기에게 나타낼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
‘자기는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참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거나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체면차리는 사람은
죄 용서 받는 데서 거리가 수천,
수만 리 멀어져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돼지털에 스와르-빠리를 바르듯이
바깥으로 꾸미기를 잘 합니다.
교회 봉사하는 일은 잘 합니다.
청소도 하고, 유리창도 닦고,
어린아이들 신발장도 정리해 주고,
교회 내의 학생회, 청년회에 일이 있으면
어렵지만 물질로 뒷받침도 해 주고,
또 길거리에 나가서 아이들에게 예배당에 나오라고 전도도 잘 합니다.
그런 것은 잘 하는데,
“마음을 열어 놓고 죄인이 되어서 죄 용서함 받으라.”
하면 그것은 싫어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도시마다 저녁에 보면 십자가가 참 많이 보입니다.
예배당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헌금해서 비싼 땅에다가 비싼 건물로 멋지게 예배당을 짓습니다.
그 화려한 예배당은 교인들의 뜨거운 눈물과 간절함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하라고 하면 잘 하는데,
“죄를 씻으라.”고 하면 그만 슬슬 피해 버립니다.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주님에게 힘이 겹도록 연보한 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씻지 않고 연보한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금식하고 철야기도 한 사람들은 많은데,
죄를 씻음 받은 사람들은 많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말한 줄 아십니까?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너희가 내 앞 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 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 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 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0-15)
이사야는 강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사야서는 구약 어느 성경보다도
죄 사함에 관한 이야기를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4장 22절, 53장 등 여러 곳에서 죄를 씻는 이야기를 하는데,
죄를 씻기 전에 십일조 내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죄인이 드리는 것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