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광야진군 40년과 가나안 정복 본문 : 목 차
I. 서론
II. 문제제기와 방법론 :
광야의 표현들, 광야의 위치, 광야방황인가 아니면 광야진군인가,
광야 40년의 의미; 광야생활의 초기자료와 후기자료
III. 본론
A. 출애굽 후 광야길
B. 광야체류와 의식주 문제
C. 광야체류의 부류와 공동체
D. 광야진군과 가나안 정복
E. 광야의 정복자들과 그의 적들
IV. 결론
I. 서론
우리는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했던 것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다음 광야로 들어갔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이 시내반도에서 이곳 저곳으로 유랑하면서 모세를 따랐으며, 하나님에 대한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했던 기간으로서 광야생활을 알고 있다. 민 14,33에 보면 이스라엘이 반역한 죄로 인해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 오랜 준비를 위해 치러야 했던 광야방황 40년은 신학적인 성찰에 치중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역사적-지리적인 측면에서 다루어 몇가지 불분명한 기존의 인식들을 시정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 구약에서는 출애굽 사건이란 틀 안에서 부정적인 심판기간으로 해석되는 반면, 몇몇 예언자들은 광야전통에서 광야 40년을 이스라엘 역사의 이상적인 시기( Eine ideale Zeit )로 회고하고 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부정적-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이런 양 측면은 상반적이라기 보다는 보완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광야방황만 아니라, 광야체류의 중요성이 고찰되며, 시내반도 전체보다는 가데스를 기점으로 했던 진 광야와 에돔 근처의 아라바 광야에서의 체류 그리고 막연한 광야 40년이 아니라 가데스와 에돔 사이에서 38년이란 긴 세월의 준비들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나안 이주」보다 「가나안 공격」이란 표현이 적절하다는 견해를 나타내며, 이웃 백성을 두렵게 했던 광야군대의 막강한 세력을 종합적으로 서술하겠다.
II. 문제제기와 방법론적인 이해
광야행군/진군 40년이란 제목 아래에서 몇가지 문제들이 제기된다. G. 폰 라트가 지적한 신앙고백(Credo) 신 26,5-9에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광야체류" 없이 곧장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추수감사제를 지킨다( 폰 라트, 구약성서 신학 1권,1976(1969), 허혁 역, 129이하). 그러나 구약 오경서에 보면 이스라엘의 광야체류는 역사적으로 출 15,22-19,1.2절과 민 10,11-21,20에 서술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 1,6-2,25에서 광야체류는 반복해서 요약되고 있다. 이와비슷한 광야체류 이야기는 전승사적으로 출 19,1-민 10,10절에 "시내전승 단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런 광야체류 전통은 독자적인 위치를 가진다. 수 24에 보면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바다기적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오랫동안 광야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나온다(시 136,16 참조)( G. 폰 라트, 상게서, 284). 이스라엘은 광야의 어느 지역들을 지났으며, 어떤 광야들에서 체류하였을가? 이에 대해서 오경서는 한두번 고유지명을 언급하고, 그 다음부터는 일반적으로 "광 야"로 칭하고 있다. 민 33,1-49에는 광야도시들의 포괄적인 지역들이 언급된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는 주로 오래된 자료들이 있지만, 민수기에는 나중에 추가된 부차적인 지명들의 나열이 나온다( M. 노트, 민수기, 260-261 참조). 이스라엘의 광야체류와 관련해서 우리는 "광야 40년"과 "광야 도시들" 그리고 구체적인 광야들이 어느 곳인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광야로 들어가기 전 어느 바다를 건너서 광야에 도달했는가를 살펴야 하겠다. 위에서 우리는 출애굽 전통 옆에 독립적인 "광야전승과 전통"을 알았다. 광야체류는 40년을 버틸 수 있는 광야지역과 도시들과의 불가피성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추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야로 들어오기전, 애굽인들 앞에서 기적적으로 건넜던 바다는 어느 곳인가를 함께 물어야 할 것이다.
III. 본론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 후에 광야로 들어간 사건은 이미 모세/이스라엘 백성과 애굽의 바로왕 사이에서 대질을 통해서 시작된 바 있었다(출 5,3.8.17) : "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야웨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야웨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 하나이다." 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운동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는 것이나, 정치적인 독립을 위한 첫 걸음이다. 고로 이스라엘인들은 치밀한 사전 계획과 준비가 있었다.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향을 택하여 가장 안전하게 다수의 무리가 집단적으로 탈출할 수 있을가가 최대의 과제였다. 지금까지 연구발표된 것은 3 가지 방향의 출애굽 경로들이다.
첫째는 지중해 멘잘레(Menzaleh) 호수를 건너 질루( Zilu, Tjaru) 해안 도시를 따라 쓴물호수 쪽을 거쳐 수에즈 만이 있는 홍해바다가를 지나 신광야( Wilderness of Sin)를 거쳐 남동 쪽 시내산 호렙산에 머문 후 아카바 만 의 에지온 게베르( Ezion-geber) 항구도시를 지나 "가데스 바르네아"에 도착하는 경로이다.
둘째는 지중해 멘잘레를 건너 팀사(Timsah) 호수 주변에서 "수르" 광야를 지나 북쪽 시내 산 제벨 헬랄( Jebel Helal)에 머문 다음 아즈몬과 하자르 앗다르를 지나 가데스 바르네아(므리바)에 도착하는 경로이다( H.G. May, Oxford Bible Atlas, 1974, 2판, 58-59 쪽).
셋째는 이스라엘인들이 비돔(숙곳에서 약간 남서쪽에 떨어진 도시)에서 출발하여 지중해안 시르보니 호수를 건너 블레셋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방향을 남으로 꺾어 가데스 바르네아에 도착하는 경로이다( 출 13,17-18.20). 이에 대하여 출 14,1-2.21-29에 상세하게 서술되고 있다. S. Herrmann은 위에서 언급한 지중해 연안에서의 바다기적을 받아드렸고( S.헤르만, 이스라엘 역사, 92-93 쪽과 각주 53을 보라), 기적이 일어났던 바다를 3 군데를 가설들로 소개한다 :
1. O. Eissfeldt를 따라 지중해의 시르보니 호수;
2. W. Helck( ThLZ 97, 1972,182 쪽) 는 현재 수에즈 운하 지역에 있는 쓴물호수를 갈대바다의 기적의 장소로 말한다;
3. 베두인 전통에 의하면 제벨 함만( dschebel hamman) 지경의 홍해 바닷가를 기적의 장소로 보는 견해이다.
그럼에도 이런 전통은 틀린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곳에는 갈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 위에서 고찰한 내용을 종합해서 보면, 바다의 기적이 일어났던 장소는 지중해( 멘잘레 호수나 시르보니 호수( O. Eissfeldt, Baal zaphon, Zeus Kasios und der Durchgang der Israeliten durchs Meer, 1932) 또는 현 수에즈 운하 지역 쓴물 호수(갈대바다) 두 개의 지역으로 압축된다. 마소라 히브리어 본문(출 14,16.21)에 보면, 기적이 일어난 바다를 고유지명 없이 단순하게 "바 다"로 불르고 있다. 말하자면 히브리어로 얌(yam) 또는 얌 수프( yam suph, 갈대바다)이다. 칠십인역도 얌과 일치하여 탈랏사(바다)로 번역하였다. 예를 들면 출 14,16.21 : 메손 테스 탈랏세스; 에피 텐 탈랏산으로 기술되어 있다. 신약 사도행전 7,36에 보면 "엔 에뤼트라 탈랏세" 홍해 바다 안에서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스테판의 설교이다. 그러나 고전 10,1-2에서 사도 바울은 "바다 가운데로 지나갔다"고 표현하고 있다( N. Aland, Novum Testamentum Graece, 1979, 26판, 340.456 쪽을 보라).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서 "갈대바다"라는 표현은 칠십인역에서 "홍해바다"로 번역되었다(출 15,4 :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얌 수프(갈대바다, 마소라)가 칠십인 역에서 "헤 에뤼트라 탈랏사"(홍해)로 번역되었음이 밝혀졌다.
얌(바다) 옆에 제 2의 바다기적의 장소인 얌 수프, 갈대바다가 칠십인 역에서 "홍해" 바다로 번역된 것은 오역인가? 아니면 번역자가 알고 수행했던 표현이었던가 ?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고찰해 둔 현 수에즈 운하 지역의 쓴물 호수인 갈대바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칠십인 역 번역자가 쓴물호수 갈대바다를 희랍어로 "홍해바다"로 표현했던 것은 지역과의 관계를 세심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 2가지 관점이 가능하다 :
1. 고대 사람들은 넓은 호수를 "바다"로 불렀던 사실이다.
2. 히브리인에게는 쓴물호수가 헬레니즘 시대에는 수에즈 만 홍해를 지척에 둔 홍해와의 근접함으로 인해 홍해와 연결해서 불러졌을 가능성이다.
이런 번역자의 상상과 그런 지역사람들의 특유한 명명을 수용한 데서 왔던 불확정성에 기인했던 오해였을 가능성이 컸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맞는다면, "홍해바다"는 홍해와 가까왔던 갈대바다에 일치시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 수에즈 운하는 홍해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고대 사람에게도 언젠가는 홍해와 지중해를 관통해서 해양경로를 단축시켜 실리를 추구하려는 꿈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쓴물호수 갈대바다는 고대인의 꿈이 담긴 홍해와 지중해(대해)와 동일한 바다로 불러졌을 것이다.
A. 출애굽후 광야길 애굽인의 추적을 두려워했던 이스라엘인들은 한시 바삐 애굽영토를 벗어나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광 야 로 빠져나가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어느 방향을 잡아 광 야로 나아갔던가 ? 광야체류에 대한 광야전통에 보면 이스라엘인들은 시내산 호렙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더러는 심판받고, 더러는 구원을 얻어 모세를 따랐다고 한다. 그리고 가데스에 모여 군대를 준비해서 에돔과 동부 요르단 쪽으로 공격해서 올라갔던 부류 그리고 다른 한편은 네게브에서 직접 유다 남부로 돌입해서 북상했던 부류가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북부방향과 남부방향의 두 개의 커다란 광야진군의 경로를 말할 수 있다.
첫째방향은 지중해 연안 시르보니 호수를 건넌 다음 블레셋으로 진군을 포기하고 수르광야를 지나 가데스를 거쳐 미디안 광야를 지나 북상해서 모압 땅 비스가로 향하는 길이다( 출 13,17;14,1-2.16.21-22 등), 그 다음은 숙곳에서 출발 멘잘레 호수를거쳐 수르 광야를 관통하면서 시내 산(제벨 헬랄)에 머문 다음 가데스 바르네아를 지나 호르마 까지 올라 갔다가 진광야로 내려 오는 과정( 출 15,22;16,1;민 33,11)이다.
둘째방향은 남부방향이다. 멘잘레 호수 혹은 갈대바다를 건넌 후 시내반도 신광야로 내려와 호렙 산에 머물다가 다시 북상하여 가데스 쪽으로 가는 과정이다(출 15,22-27.16,1;17,1;민 33,11.12 등을 참조).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광야진행은 출애굽 서술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출 15,22-19,2; 민 10,11-21,20에 서술되어 있다. 그 옆에 민 33,1-49에는 거류지 목록이 상세하게 추가되어 있다. 그러나 가데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장소는 확실하게 국한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오경서 JEP에 흩어져 있는 지명들을 연결하면 다음과 같은 여행 지명 안내기가 드러난다 : 바알자폰 비하리오트(출 14,2 P); 바다(출 14,2.16), 갈대바다(출 15,4.5-22, 여기서는 바다와 갈대바다가 한데 섞여 있다. JEP). 수르광야(출 15,22 J), 마라(출 15,23 J ); 엘림(출 15,27P); 신광야( 라호대쉬 하셴니, Sheni, 출 16,1 P); 라피딤(와디 레파이드, 출 17,1 P); 마사와 므리바(출 17,7 J); 시내광야( 미드바르 시나이, 출 19,1.2 P); 바란광야( 민 12,16 P; 13,3 JE); 가데스( 민 13,26 ,과일이 맺는 땅), 호르마(민 14,45JE); 가데스( 민 20,1 P, 미드바르 친(진) ), 호르 산(민 20,22 P), 호르마 (민 21,3 JE); 여기까지 우리는 개별적인 도시 보다는 여러 광야들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수르광야, 신광야, 시내광야, 바란광야, 진광야 등이다. 이런 광야들은 열흘 내지는 달포 정도 걸리는 여행길에 불과했다(신 1,2; 왕상 19,8 참조). 또는 석달이 걸리는 길이다(출 19,1). 잠시 지나가는 체류지이다. 그 옆에 중요한 광야가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하겠다. 그것은 진광야 동남쪽의 아라바 광야( The Arabah) 이다. 이곳은 에돔 주변지역이다. 호르 산(민 21,4 P); 오봇, 이에 아바림(민 21,11), 세렛 골짜기(민 21,12), 아르논 건너편 브엘(와디 에트 테메드(민 21,16), 맛타나( 마데바의 남동 쪽, 민 21,19); 그 다음으로는 모압지대를 통과해서 비스가 산 쪽 나할리엘, 바모트(민 21,10-20, P)이다. 이런 지역들은 강들과 냇물들을 끼고 있는 지대이다. 숲과 강물, 초원지대와 실과 나무들이 울창한 곳이다. 결코 물 한 방울 없는 광야가 아니라, 사람들이 쉬고, 예배하고, 먹을 것이 있는 고장들이다. 서부 팔레스틴 보다 비옥하고 나무가 많은 동부 요르단 지대이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지 않은 땅이기에 이곳은 광야이지, 결코 물없는 토박한 들판은 아니었다. 오아시스, 목초지가 있는 지역이다. 민 33장은 P자료로서 매우 상세한 여행 거류 목록을 가지고 있다. JE 와 D 자료가 광야체류지를 역사적인 서술로 보존하고 있지만, 개별적으로 결합되지 못한 지역저통에 제한된다. 이런 자료들 옆에 D 자료는 광야전통을 최초로 입증하고, 모순없는 지명들을 열거하고 있다(신 2,7;8,2.4; 29,4; 수 5,6 등등). 이런 내용은 나중에 느 9,21;시 95,10절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암 2,10;5,25에서 광야 40년도 아모스의 것이 아니라 신명기적 역사가의 편집층이라 할 수 있다.
B. 광야체류와 의식주 문제 우리는 광야에서 체류하는 이스라엘인들이 광야 오아시스에서 만나를 모아서 먹고 남겼던 일, 신 광야 일대에서 뫼추라기를 줏어 담아서 양식을 삼고, 마라와 므리바에서 생수를 터뜨려 마신 일 그리고 아라바 광야와 가데스 근처에서 실과와 양식을 얻었던 일, 광야체류 가운데 의복과 신발을 공급받았던 일(신 29,5)을 알고 있다. 이들은 자연 가운데서 일용할 양식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이 농사를 짓거나 양떼들을 길렀거나 또는 장사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어떤 방법으로 양식과 필수품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바다를 건넌 후 가데스 까지 오는 동안은 한두달의 기간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광야체류 38년 혹은 40년은 장구한 세월이었다. 출애굽의 1-2세대 아이가 어른이 되어 공동체의 책임을 지는 성인될 수 있는 세월이요, 출애굽 당시 성인들이 노인이 되어 70-80세의 고령으로 죽음을 당하는 년수이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세대교체나 그들의 장기체류는 사건중심과 회고적으로 서술될뿐 어느 장소와 지역에서 어떻게 보내졌는가에 대해서는 상술하지 않고 있다. 신 29,1-8에서 폰 라트는 광야의 전투자와 전사를 언급은 해도 헤지지 않은 의복과 구멍나지 않은 신발에 대한 주석은 하지 않고 있다( G. 폰 라트, 신명기, 178-179 쪽을 보라). 아마도 광야의 이스라엘인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자연 가운데서 비상양식이나 대용식을 구한 것이다 : 만나,뫼추라기와 생수( 출 16,4.11-12.16-21; 민 11,31-32; 신 8,3-4 등); 둘째는 이웃 주변의 적들을 공격하여 그들의 가옥과 물품을 약탈하는 방법이다 : 아말렉인들과의 싸움( 출 17,8-16), 네게브 지역의 가나안 사람들과의 전투( 민 21,1-3), 모세가 미디안 다섯 왕들을 쳐 죽임( 에위,레겜,수르,후르와 레바: 민 31,7-12), 아라바 광야에서 오봇과 이예 아바림 그리고 세렛(냇가) 골짜기를 쳐서 진을 쳤다(민 21,10-12). 이 후에도 이스라엘 전사들은 모압과 바산으로 쳐 올라가서 땅을 점령해서 지파들에게 나누어 주는 역사가 있었다(민 21,13.19-20.27이하.33-35 등을 참조). 그런 지역은 참나무가 울창하고, 목초지와 살찐 가축들(신 32,14;암 4,1;겔 39,18;신 33,22;사2,13;겔 27,6 등을 참조)이 풍부하였다. 이와같이 광야체류 기간의 생활은 하나님이 자연과 진군하는 여정 속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이 부족하지 않게 주는 분으로 고백된다. 결코 원조를 받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 부족들과의 화친이나 종속 내지 타협이 아니라, 공격과 전투 그리고 탈취행위로 나타났다. 이런 행위는 훗날 사울에게 쫓겨 광야생황을 해야만 했던 다윗에게도 비슷하게 반복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체결했던 야웨 하나님은 전투자였다. 호렙에서 율법을 가지고 출애굽 백성과 만나시는 하나님은 광야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삿 5,1-5, 특히 4-5절 : 야웨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산들이 야웨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 앞에서 진동하였도다.)에서 하나님은 자연의 위력을 행하시며 세일(가데스)-네게브와 아라바 광야(에돔 들)- 신 광야(시내 남부)에서 활동하셨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폭력이 아니라, 심판이요, 만행이 아니라 자유이다. 잠시 지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회적인 자기 합리화가 아니다. 여러 가능성 가운데 선택과 결정이다. 따라서 출애굽 백성은 광야에서도 그 때 그 때의 결단이 요청되었다. 이런 행위는 집단을 형성하면서 조직과 준비 그리고 목표를 세워 충분한 기간을 필요로 했다. 실제로 그런 광야에는 어떤 부류들이 머물고 있었는가 ? 그들 집단의 지도자는 누구며 어떤 신조와 신앙을 요구했는가 ?
C. 광야체류의 부류와 공동체 출애굽 부족은 주로 가데스에서 에돔 주변 사해 근처 세렛 냇가를 건너기 까지 38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필요했다(신 2,14). 팔레스틴 문명지대 근처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지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에돔과 모압이란 동부 요르단 국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백성의 내부갈등과 위험들이다(출 16;33,1-6.12-23;민 11-17;25,1-9; 신 1,12-18;1,22-33.34-46). 어려운 역경 때마다 하나님이 승리를 체험케 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겁이 많고 불안했고 서로 반목 불화하여 안전한 체류지를 심판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렸다(겔 20;시 78;106 참조).
그러나 다른 한편 광야는 절제,검소 그리고 겸손을 배우는 정토(청결한 땅)으로 해석된다(렘 2,1-3;호 11;신 8,3-4). 여기서 우리는 팔레스틴 밖에서 출애굽 부족이 하나님을 만났던 사건을 구약전승이외 다른 역사적인 문헌을 통해서 알아 볼 필요가 있겠다. 우선 이스라엘인은 출애굽 당시 히브리인으로 불렸다. 권리가 없고 생명의 보장이 없는 외국에 거류하는 약자들은 애굽 땅에서 강적 바라오의 힘을 꺾고 구출했던 "야웨" 하나님을 중심해서 광야공동체를 형성 했다. 문명국에서 탈출해서 토박한 땅으로의 이동은 아브라함에게서 출발했었다(창 12). 유리하는 아람인들의 이동은 신 26,5에도 증언되고 있다. 이들은 한 동안 그들의 하나님을 갖고 일정한 지역에 체류했었다. 그러나 구약전승은 JE 자료들이 고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왕국과 분렬왕국의 정치적인 경험을 겪은 후에 그들의 기구와 전문적인 술어를 빌려서 고대의 사건을 기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출애굽 사건과 가까웠던 시대의 역사자료나 증언이 있다면, 그런 것을 끌어내어 확인하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S. Herrmann에 의하면 야웨 공동체의 초기 역사를 에집트의 문헌에서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누비아의 솔레브에서 바로 통치 아래서 이방백성과 도시 명단에 "야웨의 샤수인들의 땅"이 나온다. 이것은 서기전 1402-1364년 아메노피스 시대의 것이다. 그 때 이미 팔레스틴 남부에 Jhw 의 표시의 샤수인의 영토가 인증되고 있다. 이는 출애굽 사건 전에 시내반도와 그의 주변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자취를 보인다. 에집트 문헌은 잠시 체류하는 부족들이 세일산에 거주했던 역사를 말하고 있다. 그들은 광야에서 전투하는 생활을 영위했다. 후대에 발견된 나바트인들의 고유 명사 가운데 에베드 에히브( bd hjw )가 발견된다. 이는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 있으리라"( 에흐에 hjh ) 일치한다. 광야의 지파들은 인종적인 친속관계를 가지고 야웨에게 결속되었다. 야웨의 자기표명(출 3)은 에집트에서 탈출한 샤수족의 이동과 연결되고 있다. 지역적으로 그런 근거는 시내반도의 신광야와 세일산 근처 아라바 광야와 연결된다. 구약에서는 가데스 전승이 이런 사건들을 가지고 있다. 가데스는 광활한 오아시스 지역이요, 남서쪽에서 북동으로 쇄도해 오는 지파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병참지였다. 가데스를 거점으로 그 주변 진광야, 아라바 광야 그리고 네게브 지역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공동적인 운명을 호흡할 수 있었다. 이런 부류들 안에 지도자가 있었는 데, 구약은 그를 모세라고 증언한다. 그는 하나님 산에서 미디안의 산신을 만났다. 이제까지 조상의 신들과는 다른 측면을 가진 법의 하나님을 체험했다. 개별적으로 보면 차이들이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구약의 율법의 전통은 세일 산 부근 유목민 부류의 법에 가까웠다. 이는 이른바 출 20,23-23,19의 계약서(책)에 반영되고 있다. 이런 것과 관련해서 모세가 계시(율법)를 받았던 산, 하나님 산이 그의 권위적인 역사성을 갖고 거룩한 산이 되었던 것이다. 출 24장은 산지성소의 주기적인 축제, 제사공동체의 회식 그리고 제물헌납을 확인시키고 있다. 따라서 야웨는 거룩한 산의 신이었다. 이런 하나님은 더 이상 조상의 신은 아니지만, 그들과 뚜렷한 연결성을 갖는다. 광야의 부류는 나라없는 유랑민이 아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법을 통해서 그들의 통치자가 된다. 그들의 하나님은 세일광야에서 나타났지만, 그런 지역에 얽매이시지 않는다. 에집트에서 나온 부류는 광야의 부류들과 합류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합류의 구심점은 야웨의 활동에서 나왔다.
광야의 부류는 광야에 오래 머물을 수 없었다. 그들이 나아가야 할 땅은 정치적-역사적인 공백의 터가 아니다. 이미 나라의 영토,경계, 문화와 종교가 있었다. 그래서 광야의 부류는 미래의 존재를 불러내는 하나님을 알고, 굳어진 역사와 문화를 향해 도전하면서 두 방향으로 나누어 북동으로 진군한다. 제일 먼저 갈렙은 유다 남부 네게브 쪽으로 북상한다. 그는 유다 영토에 발을 붙인다. 다른 한편 모세는 독자적으로 에돔 남쪽에서부터 동부 요르단으로 향해 모압 쪽으로 올라간다. 그에 대한 전투보고는 민 20-21장에 상세히 진술되고 있다. 갈렙과 남부 지파들은 겐족,오트니엘인, 예르하멜리터 그리고 시므온 지파들이다. 그들은 훗날 유다 지파 안으로 흡수된다. 이들은 네게브 남부에서 곧 바로 유다 영토로 침투했다. 이상을 종합하면 출애굽 부류와 세일 산 광야일대의 샤수족들은 야웨의 땅의 거류자들로서 유목민의 법을 자기들의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준수하면서 동부 요르단 주민들을 향해 전투를 벌렸다. 그들은 두 갈래의 방향으로 진군했다: 하나는 가데스 지역에서 남서부 유다로 향했고, 다른 하나는 에돔-모압 고지대에서 동부 요르단과 중서부 에브라임 산맥을 타고 진군했다.
D. 광야진군과 가나안 정복 우리는 이미 앞에서 출애굽 부류는 역사적-지리리적으로 광야의 유랑이나 방황이 아니라, 광야체류자들이요, 시내반도 전체를 막연히 배회했던 것이 아니고, 가데스를 병참기지로 확보하면서, 주로 진 광야,에돔 근처의 아라바 광야 그리고 네게브 지역에 체류하면서 38년이란 긴 세월을 보냈던 것으로 알게 되었다.그들의 40년 체류지를 지도로 그린다면, 에집트와 아라비아 반도 사이에 있는 시내반도 북동 쪽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다른 작은 시내반도의 모형, 화살 촉 모양의 지역을 보게된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잠간 야웨 하나님을 만나 법을 받고, 야웨의 백성, 즉 야웨의 샤수족이 된다. 출애굽 사건 후 그들은 가나안 정복을 위해 또 다른 가데스의 전통을 형성했다. 출애굽 세대의 군사들이 죽고 광야세대의 군대가 조직된 것을 신명기는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광야에서 사는 동안 때로는 이방의 종교와 문화에 젖어드는 나약함이 있었지만, 그 때, 그 때마다 야웨의 법으로 처리 심판되었다. 그들은 주변 부족들에게 손을 벌리고 도움을 청하거나,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야웨의 백성으로 항구적으로 야웨에게 의존하면서 의식주를 해결했다. 외적으로 보면 그것은 전투행위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은 문명국으로 이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피난민으로 광야에 난민촌을 형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향/고국이 현재 있지는 않지만, 미래의 약속된 땅을 향해 현재도 싸우고 있는 부류였다. 본토민에 섞여 살면서도 그들의 행정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광야공동체를 가지고 대질을 벌렸다. 광야부류 공동체의 종교와 지도자가 있어 자기들의 집단을 통어하였다. 여기에 종교와 정치의 불가분성이 있다. 주변 부족의 왕들은 원조자나 협력자가 못된다. 그들은 광야부류의 불안한 "적 수"일뿐이다. 그래서 광야 체류자들은 전투행위가 삶의방식이었다. 정치적인 평화가 있어야 야웨를 믿는 생활이 보장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출애굽 부족의 가나안 땅에서의 생활을 "땅의 정착", "땅의 입주/이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땅의 점유", "땅의 정복"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누구든지 밖에서 어느 사회와 영역에 들어 가면, 법적으로 그 지역의 법을 따르고, 지시를 받는다. 그 지역의 법에 강제되거나 간섭을 받는다. 그러나 후자는 기존 지역의 법과는 관계없이 자기들의 독자적인 법에 따라 자기들의 권리와 권한을 수행한다. 따라서 우리는 광야체류의 모세부류는 이미 시내 산에서 야웨의 법을 받은 "계약 백성"이라는 주장이 다른 부족의 법을 떠나 독자적인 공동체를 가지고,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독립/자주성의 확언을 인식하게 된다. 고로 이스라엘인들은 가데스에 야웨제단을 설치하고, 지파체제를 조직하여,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놓았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두 갈래의 방향으로 공격하면서 땅을 차지한 것은 분명히 "가 나 안 정 복"이었다.
E. 광야의 정복자들과 그의 적들 광야부류 이스라엘인들은 때로는 자연재앙들 불뱀피해와 염병( 민 21,5-9; 신 8,15-18; 계속해서 민 16을 보라)으로 죄값을 받았다. 이방신을 숭배한 일로 심판되었다( 민 25,1-18).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도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지체없이 보복과 벌을 받게되었다. 이것은 그러나 약 속의 땅으로 가는 과정에서 구원사에서 겪어야 했던 하나님의 매였다. 하나님의 교육과정이었다. 그것을 통해 광야부류는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백성으로 거듭났다. 그들의 죄는 궁극적인 파멸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게되는 계기가 된다. 적들 앞에서 그들은 고된생활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가 더 심각했다. 매 순간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일러주는가를 의식해야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를 중심해서 그들의 방향을 잡아 나갔다. 모세는 종교적인 지도자만은 아니다. 광야를 헤쳐 나가는 과정은 외적으로 군사적인 전투행위를 요청했다. 그래서 광야부류의 장정들은 가족을 안전지대에 두고 선두에 서서 광야주변 적들과 부딪혀 교전을 하면서 생명을 바쳤다. 그들은 아말렉인들과 싸워 승리했다( 출 17,8-16). 산지의 적들 헷족, 여브스 족, 아모리인들 그리고 해변의 가나안 인, 요르단 가의 가나안인들과 싸웠다( 민 13-14). 때로 그들은 에돔인들 앞에서 피하여 길을 돌아 가야했다(민 20,14-21). 네게브의 가나안인 아랏의 왕과 가나안인을 공격했다( 민 21,1-3). 그들은 아모리인 왕 시혼을 쳤고, 아르논에서 부터 얍복 강 까지 점령하고, 헤스본과 그의 모든 촌락에 거주했다( 신 29,5.7-8 참조). 그들은 야셀을 점령(민 21,31), 바산의 옥을 쳐서 에드레이(Edrei)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민 21,34-35). 이런 혁혁한 전공은 주변의 적들을 무력하게 했다. 특히 모압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의 많음을 두려워 했고, 십볼의 아들 모압 왕 발락이 제사장 발람에게 이스라엘의 저주를 부탁했다( 민 22-24,31). 그러나 발람은 이방의 사제로서 야곱을 해할 점술을 찾지 못했다( 민 23,23). 그는 점술을 쓰지 못했다( 민 24,2). 오히려 발람은 광야의 이스라엘을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 민 24,3-6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8-9절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암사자와도 같으니 ... 라고 칭송하고 축복한다. 이방인 눈에도 광야의 이스라엘은 아름다운 천막촌과 병영을 세웠고, 그 수자가 많고, 힘이 강하고 용맹과 사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민 24,2 참조). 이스라엘은 그 동안 하나님의 속을 무진히 썩혔음에도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않고, 그의 반역을 탓하지 않는다 (민 23,21). 광야부류는 하나님을 왕으로 알고, 하나님은 영으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다( 민 23,21;24,2). 고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앞세우고 그의 힘을 통해 에돔과 세일을 차지했고(민 24,18), 아말렉인과 가인을 물리쳤다(민 24,20-21). 광야의 군대, 모세와 이스라엘은 동부 요르단 전쟁에서 백전백승을 거두었다. 이런 승전은 그들로 하여금 "모 압 계 약"을 수립하게 했다(신 29,1-29). 이는 광야부류가 호렙에서 세운 계약과는 다른 것이다. 광야를 지나 이미 모세와 그의 부류가 모압 땅에서 승전을 확인하고 지도자로 부터 어린 아이들에 이르기 까지 평등하게 하나님 앞에서 세운 계약이었다. 이 계약은 내용적으로 다른 신들의 숭배를 철저히 거절한다(신 29,15-18). 이방민족의 신앙은 독초와 쑥의 뿌리와 같고, 저주와 멸망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계약은 이스라엘인, 이방인 그리고 현재 없는 후대인들을 위해서 맺어진 것이다(신 29,15). 광야의 군대는 마치 훗날 앗수르의 군대처럼 영양공급을 충분히 받고, 사기가 왕성하여 주변 약소국들을 무력하게 했다( 사 5,26-29를 보라).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모진 시험을 받는 가운데 절제된 겸손의 양식 "만나와 뫼추라기"로써 배를 불려야했고, 하나님의 법으로 교육을 받았다(신 29,11-13). 광야군대가 이제 여리고로 들어갈 때, 그 곳 사람들은 광야부대의 힘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 수 6,20 "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였다. " 광야부대의 막강한 군사력은 이미 서부 요르단 주민들에게 위협적이었고, 헷족, 아모리인, 가나안인, 브리스인,히위인, 여브스인들과 그의 왕들은 이스라엘 광야군대를 맞아 전투준비를 했다(출 3,17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한 땅들이 수 9,1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광야군대를 두려워 했다(수 9,9-10;10,1 기브온인과 예루살렘의 여브스족 아도니세덱). 아모리 족속 다섯 왕들 예루살렘 왕, 헤브론 왕, 야르믓 왕, 라기스 왕, 에글론 왕이 두려워 막게다 굴애 숨었다가 여호수아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수 10,5.16-27). 서부 요르단 주민들은 광야군대 앞에서는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 수 10,21). 광야부류는 광야진군 40년 동안 심판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시내반도 북동지역에 체류했고, 오아시스와 냇물, 초원지대와 실과 나무와 참나무 숲이 있는 곳 그리고 살찐 가축이 방목되고, 견고한 원주민의 도성이 있는 지역에서 인구를 증가 시켰다. 그들의 천막촌은 질서가 있고, 청결했다. 집단촌을 형성했다(민 24,5). 하나님의 계약과 율법으로써 교육되었다. 주변 민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보고 모압계약을 세워 서부 요르단 전투와 정복을 준비했다. 그들의 승전기록들은 동부와 서부 요르단 백성들과 왕들을 두렵게했고, 동시에 무력하게 했다. 모세의 죽음 후에도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들은 광야군대를 이끌고 서부요르단을 정복했다.
IV결론
시내광야 40년의 방황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알고, 그렇게 설교를 하고 듣던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내용을 역사비평적으로 검토하면서 "광야진군 40년"을 새로운 시각으로 고찰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항 불순종한 죄로 유형기간을 보내고, 출애굽 세대가 전부 죽어야 했던 심판의 땅 광야, 먹을 것이 없고, 거처할 장소조차 초라하며, 유랑객으로서 무력하게 고생 고생하다가 겨우 여호수아의 악전고투 끝에 가나안에 들어와 그들과 섞여 사는 역사로 끝나는 이스라엘인의 운명으로 보아 왔다.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겔 20자에도 나온다. 그러나 그런 심판의 역사는 크게는 구원사라는 틀과 구조에서 일부분이요, 하나님의 인격적인 교육의 현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앞에서 우리는 출애굽 전통과 따로 광야전통의 독립성을 보았다. 출애굽시 이스라엘은 지중해 멘잘레와 시르보니 호수 또는 갈대바다에서 기적을 만나 바다를 건넜음을 알았다. 그리고 "홍햬"라는 표현은 칠십인 역에 있는 것이고, 그것은 칠십인 역 역자가 히브리어 얌수프(갈대바다)를 거대한 홍해의 만이라는 지리적인 근접성에서 단순히 홍해라고 명명했을 가능성도 음미했다. 거대한 홍해 가까이 있던 쓴물호수(갈대바다)를 홍해에 붙여서 홍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 다음 광야의 역사는 출 15,22-19,1;민 10,11-21,20에 기술되었으며, 그 사이에 시내전승 단락이 포로후기에 추가되어 삽입된 것(출 19,2-민 10,10 부분)을 전승비평적으로 보면 원래의 역사서술과 후기의 부연부분을 분별해서 별 문제 없이 광야진행의 사실을 다룰 수 있다. 광야의 체류지, 광야체류 기간, 광야에서의 구체적인 생활상들, 광야의 군대와 적수들 그리고 가나안 정복과 점유가 개별적으로 다루어졌고, 역사적-신학적으로 개념화 되었다. 광야체류지는 가데스를 거점으로 해서 애굽 냇가를 벗어난 광야, 에돔 국경과 네게브 영역 그리고 아라바 광야의 에지온 데베르 지역까지 뻗힌 영역, 시내반도 북동지역의 화살 촉 형태의 지대가 광야체류지였다. 광야체류 기간에서 시내반도에서의 진행과 모압 공격기간을 2년을 잡고, 주로 38년은 가데스에서부터 사해 남쪽 제렛 냇가를 건넜던 기간 38년에 집중된다(신 2,14). 광야생활에서 광야부류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하나님 백성이되는 독립국가를 선포한다, 즉 강대국 애굽과 적수 국가 가나안 민족 사이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통치자)으로 알고, 지도자 모세를 세웠다. 이제부터 그들은 망명자, 피난민 또는 이주자가 아니다. 그들의 힘과 공동체를 형성해서 타의 간섭을 배제하고전투의 대열을 조직했다. 아이들, 여자들, 병약자와 나그네 그리고 가축 떼는 안전한 곳에 두고 각 성읍을 약탈하여 전리품들을 나누어 썼다. 그들이 체류하는 곳은 물과 수목, 과실 나무와 초원이 있고, 제물을 바치는 제단 그리고 질서정연하고 깨끗한 천막촌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군대는 영양고급을 충분히 받고 사기왕성한 우수한 전투부대였다. 특히 그들의 허물의 사함을 받고, 반역행위를 없던 것으로 여김을 받을 만큼 하나님과 화해가 성립되고, 자유하는 몸이 되어 정신적인 부담이 없어졌다. 그들은 강대국 군대처럼 이웃 적수들에게 위협적이고, 직접 싸우지 않고도, 적을 궤멸할 수 있었다(수 6,20 비교). 지면을 덮을만큼 큰 수를 이룬 대군으로 동부와 서부의 백성들과 왕들을 두렵게 하였다. 결국 그들은 40년의 광야체류를 마치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국가를 위해 가나안 정복을 성취하여 조상의 하나님과 모세에게 소명을 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냈다. 출 3,17의 말씀이 수 9,1에서 여호수아에게서 이루어졌다. 광야체류 40년 광야진군을 계속했던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장정 군대와 백성이 광야의 아말렉인, 가나안인, 에돔,모압,암몬과 바산인을 두렵게 하면서 싸워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가나안 도시를 하나 하나 점유해 들어 갔다. 광야시대의 이런 막강한 군사력과 전투력은 다윗제국을 이룩했던 반면, 기원전 8세기-6세기에는 강대국 앗수루와 바빌론에 맞서려고 하다가 포로의 운명을 자초했다. 그래서 신명기적 역사가(Dtr.)는 바빌론 포로 공동체에서 그들의 과거역사를 성찰했고, 외국생할을 또 하나의 광야생할로 받아들였다. 이때 시내전승단락의 내용이 원래 광야 역사속으로 추가가 되어 편집되었다. 모세시대 애굽포로에서 벗어나 광야로 나온 것과 포로기 시대 앗수르와 바빌론으로 잡혀 온 생활 그리고 페르샤시대 해방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국하는 역사에서 「광야시대」는 「역사성찰의 본보기」로 자리 매김을 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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