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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88편에는 고통, 비애, 영혼의 갈등, 칠흑 같은 어두움, 죽음 등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견딜 뿐입니다. 애통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슬픔을 토해낼 뿐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그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만천하에 선포합니다. 그리고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는 표제어를 가진 본 시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한편, “곤고한”(아니 : awnee')은 “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억압된, 고통받는, 비천한” 등의 뜻으로, 이는 시인이 모든 면에서 어려운 입장에 처했음을 의미합니다. 또 “상하여”(아타프 : awtaf')는 “수의를 입히다, 쇠약해지다, 압도당하다, 졸도하다” 등의 뜻으로, 죽은 자처럼 수척해지고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과 시험에 빠졌음을 의미합니다. “토하는”(솨파크 : shawfak')은 “엎지르다, 던지다, 쏟아 붓다“ 등의 뜻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불평 또는 초조한 마음과 근심 등 어려운 상태를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고백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언제였으며, 어떤 어려움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시 어디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여러 차례에 걸쳐 민족적인 위기와 억압을 경험했다는 것을 전제로, 그 서글픈 시기들 가운데 어느 하나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용과 정서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어느 시기에 적용해도 무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시인은 나라와 민족에게 임한 환난과 시험 앞에서 베옷을 두르고, 먼지와 재를 머리에 뒤집어씀으로써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는 개인적으로도 대적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몸도 병들어 고통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자신보다는 나라와 민족에게 임한 고난을 더 안타까워했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국가적인 환난과 시험 속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쓰디쓴 마음의 고통과 고뇌를 진지하고도 감동적인 애가로써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애국자인 시인의 애가에는 비탄(悲嘆) 중에도 소망이 넘칩니다.
자신이 믿고 신뢰하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민족의 회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念願 : 늘 생각하고 간절히 바람 또는, 그런 소원)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하고, 염원을 노래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시인은,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거닐면서 소망을 담아 “시온이여, 너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해가 영원히 지지 않을 것이며 너를 위해 더 밝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라고 외쳤습니다. 탁월한 사람이라고 해서 마음의 소원대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환난과 시험과 위기의 때는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신 배도 물이 차서 가라앉기 시작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만 왜 유독 어렵고 힘든 환난과 시험이 주어지는 것이냐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불 신앙의 사람입니다. 컵이 넘어지면 그 속에 들어 있던 모든 내용물이 쏟아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심한 고난에 직면한 영혼들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억제하지 못하고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때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하나님조차 인정하셨던 욥은 금쪽같은 자식 열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짐승과 재물을 잃었습니다. 몸은 악창(惡瘡)이 들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그를 저주하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이 그에게 닥쳤습니다. 그렇다고 왜 그런 처참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재에 앉아 한탄했습니다. 탄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욥2:10b)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입술로 범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만물을 조성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깊으신 뜻과 섭리에 따라 복을 주시기도 하시고,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의인들에게 재앙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하등 항변할 권리가 없습니다. 축복과 재앙의 수여와 철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리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순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삶을 체념(諦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로운 섭리를 구했습니다.
사실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탄식을 쏟아낼 수 있을 때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시험이 주어졌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신음할 수는 있습니다. 탄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이나 불평 같은 불신앙의 고백만큼은 하지 마십시오. 추호라도 입에 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구원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정말로 힘들고 극한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저 짧게 탄식할 뿐, 할 말조차 잊어버리곤 합니다. 성전에 나아가서도 모든 생각과 뜻과 소원을 담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뿐 다른 어떤 기도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도 이러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모든 것을 잃었다고 판단한 저는 모든 의욕을 잃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여!”라는 외침밖에는 기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외침에는 저의 모든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간절한 소원까지 다 들어 있었습니다. “여호와여”라는 시인의 외마디 부르짖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극한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부를 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기도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여!”와 “내 기도를 들으시고”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른 그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그는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미 완료형으로 쓰이고 있는 “상달케 하소서”(보 : bo)에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고통이 이제는 끝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거기다 “부르짖음”(솨브아 : shavaw')은 “크게 소리침, 외침” 등의 뜻으로, 이는 시인이 정말로 간절히 목놓아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그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구원해 내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시인은, 극한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긍정적인 소망을 놓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깊은 절망 속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만큼 큰 소망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신음까지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최상의 선물을, 최상의 때에, 최상의 방법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를 만나든 용기를 잃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시 시인의 인생은 하나님의 징계 안에서 덧없이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3-9절입니다.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 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여기서 “연기같이”는 갑작스럽게 소멸되고 마는 인생의 연약함과 무상함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는 시인이 고통 속에서 흘려보낸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지극히 의미 없고 부질없이 흘려보낸 무익한 기간으로 여겼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 많은 시간을 고난 속에 흘려보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냉과리”(모케드 : mokade')는 “큰 불, 난로의 석쇠, 불붙은 덩어리, 연소”등의 뜻으로, 영역본들 가운데는 “난로(hearth : KJV)와 용광로(furnace : RSV)”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잠17:22b)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마른 뼈는 생명력이 없고 건강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라는 표현은, 시인의 삶이 마치 장작이 다 타버린 난로바닥 또는 불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잿더미처럼 쇠잔(衰殘 : 몹시 쇠하여 가냘프고 약하다.)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시인의 삶에서는 그 어떤 기쁨의 빛이나 활력의 불꽃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연기처럼 날아가 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그의 몸은 마지막 깜부기불마저 꺼져 버린 난로바닥 같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마치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연기같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음하다 지친 그는 음식 먹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육체는 풀처럼 마르고 시들어 뼈와 가죽만 남았습니다. 마치 외딴 섬에 유배된 죄인처럼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많은 날들을 짝을 잃은 한 마리의 참새처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원수들로부터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조롱과 모욕과 비웃음과 저주까지 받았습니다. 큰 슬픔 중에 머리를 재에 박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습니다. 10-11절입니다.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징계하신 이유는 자신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세 역시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90:7-9)라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징계 곧 불행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극심한 병고나 대적들의 핍박에 직면할 때면, 현상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자신 안에 은밀히 존재하는 죄악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사람들에게서 반드시 보고 싶어하시는 참된 경건입니다. 영적 감수성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밖에서 찾을 때가 많습니다. 형편없는 환경 때문에,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행의 원인은 언제나 자기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경건과 예민한 영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시인은 마치 강한 태풍이 휩쓸어가듯, 하나님의 분노가 자신을 낚아채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지경에 던져 놓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것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마치 석양의 그림자와 풀처럼 시들어 가는 상황 속에서 그저 묵묵히 신음하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랑하신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든 불행의 원인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경건이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복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입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시험을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했던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12-17절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 이에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세상 모든 것들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마치 죽음보다 강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사랑마저도 변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십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뀐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 역시 그렇습니다. 매일 아침은 우리 삶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루는 우리의 관심과 사고의 갈림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등지기에, 믿음을 잃거나 저주에 떨어지기에 충분할 만큼 긴 시간입니다.
마치 태양이 매일 아침 새롭게 떠오르듯, 영원한 하나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게 빛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 징계하신 사랑하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약 성경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폐허가 된 시온의 돌들을 아끼고, 그 먼지 하나에도 눈물짓는 곧 당신과 함께 하는 삶을 간절히 원하는 백성들의 소원을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모든 것을 회복하실 바로 그때, 모든 열방의 왕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을 간절히 사모하는 영혼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극한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시인은 또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풍성한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겠다고 고백합니다. 18-22절입니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여기서 “기록되리니”(카타브 : kawthab')는 “새기다, 묘사하다, 기록하다, 쓰다”등의 뜻으로, 시편 가운데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록하여 보존하겠다고 고백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물론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시22:3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시44:1),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시78:2) 등과 같이 구원 사건의 전승을 언급하고 있는 유사 구절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구절들은 한결같이 구전으로 전하겠다고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역사를 문서로 기록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새롭기 일으키실 다음 세대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성소에서 이 땅을 살펴보신 하나님께서는 갇힌 자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사형 선고받은 자들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捕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행하셨다 하였도다”(시126:1-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바벨론에서 신음하며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불신자인 이방인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마치 죽은 자처럼 살고 있던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시온에서 다시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예루살렘에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그때 그 소리를 들은 열방 가운데 뛰어난 민족들은 곧 이스라엘의 기쁨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해방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때까지 나라를 잃고 포로 잡혀간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다시 나라를 회복한 민족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회상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대사(大事)를 행하셨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고, 죽음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과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온 열방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바로 그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죽음 같은 죄와 저주 가운데서 고통하며 절망하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찬양하십니까?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열방은 과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대사를 행하신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습니까? 자신에게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영원히 기뻐하고 찬양할 뿐 아니라, 온 세상에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3-28절입니다.
“저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시며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년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우리가 이제까지 공부해왔던 시편들은 한결같이 “기승전결”같은 일정한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그 흐름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자신을 중년에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허무하게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구가 삶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에서 나온 것이라고 오해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물론 당시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고난 중에 있었던 시인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지 삶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하여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는 간절한 열망이 깔려 있습니다. 그는 자신은 곧 소멸될지도, 후손들만큼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기를 정말로 간절히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혹시 하늘과 땅을 비롯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다 소멸될지라도, 하나님만큼은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은 물론 후손들까지 영원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영원하신 하나님께 맡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영국의 월터 렐라이 경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었을 때 입궁(入宮)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3년 동안이나 런던 탑에 갇혀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 수감되지 않았던 그는 그곳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세계사를 집필할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 C. 맥퀼킨은 “고난 다음에 성공이 있다. 이것은 고난이 없으면 영광이 없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모든 시냇물이 마르자 논바닥은 입을 쩍쩍 벌리고 갈라졌습니다. 시냇가 주변의 나무들도 하나 둘씩 말라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들만은 여전히 잎이 푸르고 싱싱했습니다. 연구 결과 평소 수분이 부족한 산꼭대기의 나무들은, 부족한 수분을 얻기 위해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가뭄에도 왕성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소 수분이 충분했던 시냇가의 나무들은 땅의 겉 표면에만 살짝 뿌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었습니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유무형의 모든 시험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a)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고난의 때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이 허무하게 끝나버릴 것 같은 고난이 주어질지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절대 불신앙의 고백만큼은 내뱉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뿐 아니라, 자신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