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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34 - 마지막 강의 1
S#1. 캠퍼스 중앙로 / 이른 아침
아직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인 이른 시간.
뻐엉 뚫린 중앙로 길을 달려오는 자전거 한대. 낡은 자전거를 탄 최교수다.
S#2. 건물 앞 주차장
학부 건물 앞에 즐비한 자전거들. 그 옆에는 자동차를 세우게 되어있는 주차장이 있다.
최교수가 자전거를 타고 들어서더니 주차장 가운데, [명예교수]라고 푯말이 되있는 자리에 자전거를 세운다.
학생들 자전거와 비교되는 구식 자전거. 뒷자리에 가죽가방을 끈으로 잘 묶어 놓았다.
최교수가 끈을 풀어서 가방을 빼려고 하는데 끈의 매듭이 잘 안풀린다. 교수의 눈이 어두워서 매듭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 것.
순찰하던 백곰이 다가온다.
백곰 : 출근하시는 길입니까? 교수님? 상쾌한 아침입니다.
최교수 : (흘끔 보고) 별로 상쾌하지는 못한 아침인 듯 합니다만... (끈을 푸는 것, 계속하는..)
백곰 : 끈이 안 풀립니까? 제가 해볼까요?
최교수 : 내가 묶은 매듭이라 내가 풀 수 있어요. (여전히 안 풀리는데)
백곰 : 교수님. 저는 학내의 안전을 책임지고, 크고 작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최교수, 할 수 없이 물러나서 백곰이 하도록 놔둔다.
뭉툭한 손가락으로 매듭을 푸느라 낑낑대는 백곰.
백곰 : 매듭은... 풀어지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풀어져야 되는데...
이빨로 풀어보려고 끈을 물어뜯는 백곰.
최교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목시계를 본다.
백곰 : (슬슬 열이 오른) 먼저... 들어가십시오. 가방은... 제가 연구실로... 갖다 드리겠습니다.
최교수 : 가방에 강의재료가 들어 있어요.
백곰 :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백곰, 허리춤에서 스위스 군용칼을 꺼내더니 최교수가 말릴 사이도 없이 끈을 잘라 버린다.
진땀을 훔치며 가방을 최교수에게 건네주는 백곰.
백곰 : (칼을 접으며) 끈은 새로 구해 드리겠습니다.
최교수 : 알렉산더가 매듭을 잘라서 대왕이 된 얘기 들어 보셨소?
백곰 : 알렉산더요?
최교수 : 꽁꽁 묶인 매듭을 풀어야 왕이 된다는 신탁이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매듭을 풀려고 도전했다가 실패했는데
알렉산더는 칼로 쳐서 그걸 끊었다오.
백곰 : (못 알아듣지만) 네에... 그래서 대왕이 됐군요. 과연...
최교수 : 그건 반칙입니다.
백곰 : 네?
최교수 : 신탁은 매듭을 풀라는 것이니까 알렉산더가 한 짓은 규칙 위반이 되는 셈이에요.
백곰 : (자기 칼을 한번 보고)
최교수 : 불량한 교훈을 남긴 셈이지. 반칙을 해도 빠른게 좋다는 거니까.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엉킨 매듭을 보면 풀기도 전에
끊어버리려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건물로 가며) 그럼 수고하시오.
백곰, 끊어진 끈과 자기 칼을 보다가 최교수를 한번 더 본다.
가죽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천천히 걸어가는 최교수.
S#3. 복도
경진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다. 답답한지 점점 빨리 달린다.
S#4. 동아리방
민재와 정태가 앉아서 각자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바쁜듯 들어선 경진이 의자를 빼서 털썩 주저앉으며.
정태 : 안녕.
경진 : (들은 척도 않고) 이민재. 너 물리과목 하나 들어라.
민재 : (계산하던 것 놓치고) 수강신청 끝난지가 언젠데..
경진 : 비선형 동역학. 그거 석사학사 연계 과목이니까 들어놓으면 대학원 가서두 좋아. 알았지? 너 들어.
민재 : (어이없어 대꾸도 않고 다시 문제를 푸는)
정태 : 비선형 동역학이면 우리 2학년때 들었던 거잖아.
경진 : 그래 넌 들은거니까 다시 안들어두 돼.
정태 : 가만있어봐. 그 과목이면 니가 F학점 받았던 거 아니냐?
경진 : 그래 내가 대학 전과정을 통털어서 유일하게 F 받은 바로 그거다. 정태 넌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A 받았잖아.
정태 : 너 재수강할거야?
경진 : 할거야.
정태 : 설마 최일한교수님꺼 듣겠다는 거 아니지?
경진 : (불퉁하게) 바로 그 교수님꺼 들을거다 왜.
정태 : 웬일이냐. 너 그 교수님 땜에 밤마다 악몽 꾸고 그랬잖어.
경진 : 아직도 가끔 악몽 꿔. 그래서 이거 해결봐야 돼. 이민재, 안 들을거야?
민재 : (문제를 풀며 정태에게) 너 이 수식, 디락방정식으로 폴었냐?
정태 : (경진에게) 너 그 과목 안들으면 졸업이 안되냐.
경진 : 아니. 지난 이년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기 때문에 듣는거야. 이민재!
민재 : 내가 왜 니 복수극에 말려들어. 관둬. 꿈 깨.
경진 : 알았어. (발딱 일어나 나가며) 이거 누굴 잡아넣어야 되지.
경진이 나가고, 민재는 정태가 풀어놓은 연습장을 기웃거리는데.
정태 : 웬만하면 같이 들어주지 그래.
민재 : 내가 왜.
정태 : 최교수님 그 과목, 이번에 강의 신청한 애들이 별로 없나봐. 수강신청자가 여덟명이 안되면 강의개설이 안되잖아.
민재 : 최교수님이 누군데.
정태 : 최일한 교수님 몰라? 정년퇴직하고 지금 명예교수 하시는 분. 랩도 없고, 딱 강의 하나 하는 건데.
그나마 개설이 안되면 학교에서 하실 일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
민재, 그제야 생각해보더니 경진이 나간 문을 돌아본다.
S#5. 박교수 연구실
문이 열리며 같이 들어서는 지원과 진수. 들어서다가 찡그려 본다.
박교수와 남희가 연구실을 발칵 뒤집어놓다시피하고 뭔가를 찾는 중이다.
진수 : 저희 왔는데요.
박교수 : 오오 어서 와 지원양. 그 근처 좀 찾아봐. 진수군. 이쪽 찾아봐.
지원 : 뭘 찾아요?
박교수 : 남희양. 그 쪽에 없으면 아래 서랍을 찾아보라구.
남희 : 여긴 벌써 찾아봤는데요. 이쪽에 두신 거 확실해요?
박교수 : 하아. 이상하네. 이것들이 발이 달렸나. 어디루 도망간거야.
남희 : (진수, 지원에게) 겉에 카오스라구 써진 디스켓 열두장. 역시 카오스라고 써진 자료들..
근데 교수님. 확실히 카오스라고 써놓으신 건 맞아요?
지원 : (근처의 자료를 뒤적이다가) 이것두 카오스에 대한 논문인 거 같은데요.
박교수 : (후다닥 받아 보더니) 맞어. 이거야. 좋았어. 이 일대를 샅샅이 뒤져봐. 유유상종. 비슷한 녀석들끼리 함께 숨어있을거야.
(자료를 옆에 놓더니 근처를 뒤지기 시작한다)
남희 : (자료 파일의 겉표지를 보며) 여긴 그냥 C라고만 써있잖아요.
박교수 : 그래? 왜 C라고만 써놨을까. (여전히 찾는)
진수 : (테이블 위에 정리된 책자들을 훑어보며) 저희들을 부른 게 이것 때문인가요?
박교수 : (갑자기 똑바로 서더니) 아참. 자네들을 부른 이유 먼저 설명해 줘야지 내가 말이지. 일년 동안 발표할 최소논문편수가
있다는 걸 깜박 잊어먹었지 뭐야. 그래서 지금부터 벼락치기를 해서 이달 안으로 하나 발표해야 돼.
지원 : (못마땅한) 벼락치기로 논문을 쓰신다구요?
박교수 : 엄밀히 말하면 벼락치기는 아니야. 석달 전까지는 이거 열심히 준비하고 있던건데.. 그만 깜박 중간에 잊어먹은거야.
남희 : 중간에 다른 거에 관심을 두셨거든. 생명공학 연구실에 가서 한달쯤 구경하셨고.
박교수 : 구경이 아니야. 나도 실험에 참가했어.
남희 : 반도체 프로젝트를 맡은 담에는 아예 반도체 공정에 들어가 사셨고.
박교수 : 자네들도 한번 들어가 봐봐. 엄청 재밌어.
남희 : 아무튼 그래서 니들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거야.
지원 : 논문 주제가 뭔데요?
박교수 : 혼돈시계열에서 추출된 비선형 변수를 응용한 퍼지제어론.
진수 : 혼돈 이론이면 보통 물리학이나 수학에서 다루지 않나요?
박교수 : 오우 노우. 인공지능에서도 카오스가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구. 여러분은 데이터를 가지고 비선형 변수를 추출해주면 돼.
아주아주 재밌을거야. 나한테 감사하게 될거라구.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며) 여기 박스가 하나 있는데.
남희양. 이거 열어봤어?
남은 진수와 지원. 한심한 기분이다.
S#6. 복도
경진과 민재가 걸어오고 있다.
경진 : 첫시간에 덫을 놓고 기다리는 거야. 토끼 한 마리가 걸릴 때까지.
민재 : 토끼?
경진 : 그래. 그리곤 덫에 치어서 괴로워하는 토끼를 보면서 계속 질문 하는거야. 토끼군. 지금 괴롭습니까? 얼마나 괴롭습니까?
내 질문에 대답을 해보세요.
민재 : 니가 그 토끼였다는 거야?
경진 : 재작년 봄학기의 경우에는 나였어. 그리고 내가 피를 흘리고 다 죽어가고 있을 때 마지막 선물을 줬지. F!
민재 : (멈춰 서더니 어이없어 웃고) 교수님이 정신병자라는 얘기야?
경진 : 아님 내가 정신병자인거지. 난 그 학기 내내 꿈을 꿨어. 눈만 감으면 최교수님이 날 말끄러미 보면서 묻는거야.
민경진구운우운우운. 대답을 해보세요우요우요우..
민재 : 그런데 다시 듣겠다고? 너 대단하다. 훈장이라도 줘야겠어.
경진 : 내가 충고하는데, 절대로 교수님하고 눈을 마주치지 마. 잘못해서 니가 토끼루 걸리면 내가 너무 가슴이 아프니까.
민재 : 토끼로 걸리면 어떻게 되는데.
경진 : 일단 한 학기 내내 집중적으로 질문을 받게 되는거지. 근데 걱정 마. 이번 학기에는 어떻게든 내가 토끼가 될거니까.
그리고 토끼가 사냥꾼을 잡아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말거니까. 으샤! (주먹을 흔들어보는)
민재 : (보다가) 아무튼 이거 하나만 알아둬. 들어가봐서, 수강생이 여덟명 이상이면 난 빠질거야. 알았지?
S#7. 최교수 강의실
최교수가 강의실의 학생들을 주욱 둘어보더니..
최교수 : 모두 여덟명이군요. 출석을 부를 필요도 없을 거 같고.
강의실에는 정말 여덟명의 학생들만 이리저리 앉아있다.
최교수 : 바로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돌아서더니 칠판에 Noise라고 적으며) 자연에서 측정되는 신호나 관찰되는 현상 중에는
불규칙한 양상을 나타내는 수많은 예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규칙적이지 않고 불규칙한 양상을 보이는
신호를 본다면, 그 신호가 혼돈인지 잡음인지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최교수, 안경을 밀어올리더니 출석표를 주욱 손가락으로 짚는다.
출석표에는 여덟명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최교수 : 김성진군.
성진 :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다)
최교수 : 만약 혼돈이라면 어떻게 규칙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성진 : 저어.. (괜히 앞의 책을 뒤적거리는..대답 못하고)
최교수 : 박동수군.
동수 : (역시 고개 숙인 채 일어나는.. 역시 대답 못하고)
최교수 : (출석표를 주욱 짚어나가며) 이민재군.
민재 : (일어선다. 좀 황당한 얼굴)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최교수 : 다른 학생들은 앉아도 좋습니다. (전혀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민재를 보며) 구체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군이 뇌파실험을 하는 당사자라고 합시다.
민재의 옆에 앉은 경진 초조해서 민재와 최교수를 번갈아본다.
최교수 : 뇌파실험으로 얻은 불규칙한 데이터를 가지고 이 데이터가 노이즈인지
아니면 뇌세포들이 서로 작용해서 얻은 데이터인지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민재 : 어.. 글세요. 그건..
경진 : (얼른 손을 들고 일어서더니) 질문 있습니다.
최교수 : (무표정한 얼굴로 경진을 보다가) 질문 받겠습니다.
경진 : 지금 이 강의실에는 처음으로 비선형 동역학을 배우러 온 학생이 대부분입니다. 우선 비선형 동역학에 대해서
개념 정의부터 해주시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합니다.
최교수 : (천천이 민재를 보더니) 학생은 앉아도 좋습니다.
민재 : (앉는데.. 벙..하다)
최교수 : 공부란 여러분 자신이 하는 겁니다. 강의실에서 할 수 있는 건. 여러분이 하고 있는 공부가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확인을 하는 거지요. 내 강의 시간에 들어올 때는 최소한 여러분의 의견을 가지고 들어와야 됩니다.
그게 학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경진 : 알겠습니다. (앉으려는데)
최교수 : (출석부를 보더니) 민경진군.
경진 : 예? (다시 일어나면)
최교수 : 뇌파실험으로 얻은 불규칙한 데이터를 가지고 어떻게 그것이 노이즈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가 있지요?
경진 : (후다닥 앞의 노트를 들춰본다) 그건..
민재가 옆을 보면, 경진은 깨알같이 쓰여진 노트를 들춰보고 있다. (2학년때 경진이 깨알같이 받아쓴 노트들이다)
경진 : 음.. (찾아냈다) 로렌츠가 처음 시도한 방법대로 Return Map이나 Po incare Map을 떠봅니다.
만약 그러한 측정신호가 노이 즈였다면 Return Map이나 Poincare Map에 어떤 규칙성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최교수 : 그러한 방법은 결정론적인 방정식으로 기술되는 저차원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겁니다. 복잡한 고차원계에서 나타나는
혼돈을 그러한 Map을 써서 규칙성을 찾으려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지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은 3차원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3차원보다 고차원적인 Map은 볼 수가 없는데?
경진 : (이제 자신이 생겨서 최교수를 똑바로 보며) 그러한 문제 때문에 그렇게 얻은 고차원적인 Return Map이나
Poincare Map에서 리아푸노프 지수나 프랙탈차원 등을 계산해서, 그 신호가 노이즈 인지 혼돈인지 구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값들로 피실험자가 어떤 병적 증상을 보일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경진, 당당하게 최교수를 본다.
최교수, 아무 말없이 잠시 경진을 보고 있다가..
최교수 : 지금 보고 읽은 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경진 : ... 2학년때 노트인데요. 죄송하지만 교수님께서는 제가 2학년 때와 거의 똑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최교수 : 군의 대답도 내가 2년 전에 말해준 것과 똑같았습니다. 불행하게도 군은 지난 2년동안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거 같군요.
군의 머리는 외우는데에만 쓰이고 있어요. 어째서 머리를 사고하는데 쓰지 않는겁니까?
경진 언뜻 말이 막혀 서있는데.
최교수 : Return Map과 Poincare Map에 대해서.. 오태호군.
태호 : (일어서면)
최교수 : 설명해보겠습니까?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경진, 앉지 않고 최교수를 빤히 보고 있다.
민재, 경진을 잡아당겨 앉게 한다.
S#8. 복도
민재가 어슬렁거리고 오며 앞서 가는 경진을 보고 있다.
경진은 혼자 약이 바싹 올라서 뭔가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다.
경진 문득 어느 방문 앞에 서더니 빤히 방문에 붙은 종이를 들여다본다.
민재도 옆에 서서 보면, 최일한 교수 연구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앞에 종이 한 장이 붙어있는데.
[워드작업을 도와줄 아르바이트생 1명 구함. 영어실력 우수자 요망. 물리학과 명예교수 최일한]이라고 적혀있다.
경진 : 이거, 아르바이트생 구한다는 공고, 붙은지 일주일쯤 돼. 한명 구한다는데 아직도 못 구한거야.
당연하지. 누가 이 방에 들어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겠어. 안그래?
민재 : 너 좀 지나치게 신경 곤두세우고 있는 거 아냐?
경진 : (민재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 아까 봤지? 내가 너무 대답을 잘해서 할말이 없으니까, 궁색한 소리 하는 거 봐.
뭐? 군의 머리는 외우는데만 쓰이고 있어요. 어째서 사고하는데 쓰질 않는 겁니까?
민재 : 난 랩에 가봐야되는데 계속 혼자 떠들래?
경진 : 제자가 자기보다 앞서는 꼴을 못 보는거야. 그래서 새싹부터 밟는게 취미생활이다 이거야.
민재 : 그럼 나중에 보자.
민재 먼저 가버리는데.
경진 : 내가 외우는 것 밖에는 못한다구?
민재와 반대방향으로 몇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공고문을 다시 본다.
보다가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간다.
S#9. 박교수 랩
지원이 컴 앞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 앞에 놓여지는 종이커피잔.
돌아보면. 진수가 놓아주고 자기 자리로 가고 있다.
지원, 조금 미소짓고 커피를 들어 마시는데,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경진.
경진 : 구지원.
지원 : 웬일이야.
경진 : (얼른 옆으로 와 붙으며) 너 아르바이트 필요없니? 워드 작업을 해 주는 건데. 물리과 최교수님이 구하구 있거든. 그래서..
진수 : (자기 컴 앞에서 작업하며) 지원이 누난 더 이상 아르바이트 못합니다.
지원 : (진수를 보는)
경진 : 못하다니.
진수 : 지금도 충분히 많아요. (여전히 이쪽은 보지도 않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 할 시간 없어요.
경진 : (진수를 보고 지원을 보고) 못해?
지원 : ...지금은 좀 힘들어.
경진 : 그래? 그럼.. 수고해.
경진 나가버리고.
지원 : (진수에게) 언제부터 내 스케쥴을 관리해주기로 했니?
진수 : 그냥 옆에서 보기 짜증나서 그래요.
지원 : 뭐가.
진수 : (모니터를 보며) 겉으로는 얼음장같은 얼굴을 하고선 누가 부탁을 하면 다 들어주고 있잖아요.
박교수님, 이 일도 못한다고 할 수 있었는데.
지원 : 그게 너하구 무슨 상관이야.
진수 : 말했잖아요. 옆에서 보기 짜증나서 그런다구. (그제야 손 놓고 지원을 보더니) 내가 불편해서 그래요. 됐어요?
지원 : (보는)
진수 : 한시간 반 있다가 저녁 먹으러 나가죠.
지원 : 정진수.
진수 : 헤논계에서 b 파라미터를 반영해볼건데.. 0.01단위로 변화시켜보면 될까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니터를 보는)
S#10. 동아리방
경진이 들어서는데, 대욱과 자현이 요란하게 감탄하고 있다.
실내에는 컴 앞에서 의자를 돌려앉은 정태와. 테이블 쪽의 자현. 대욱. 경진, 침대쪽으로 가며..
경진 : 안녕.
자현 : 어 안녕. 야야 정태한테 아무거나 좀 물어봐봐. 이건 계산기야. 인간 계산기.
경진 : (그냥 침대에 털썩 앉고)
대욱 : 가만있어봐 형. 그럼 48의 제곱은?
정태 : (잠시 생각하더니) 2304.
대욱 : (후다닥 계산기를 누르는데)
자현 : (계산기를 들여다보더니) 우와 맞잖아.
대욱 : 어떻게 한겁니까?
정태 : 뭘 어떻게 해. 계산을 한거지.
자현 : 거짓말. 그럼 좀 더 어려운 거.
대욱 : 어려운 거.
자현 : 1 나누기 1.73.
정태 : 음.. (골똘이 생각해본다)
자현과 대욱, 정태를 바라보고 있다. 경진도 정태를 돌아본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정태 : 0.578
자현 : 맞을 수가 없어. 인간이 이걸 맞출 리가 없어. 대욱아 빨랑 계산 해봐.
대욱 : (계산기를 눌러대고)
경진 : 너 다 외운거지?
정태 : 내가 미쳤냐? 그걸 다 외우게.
대욱 : 맞았다. 맞았어. 0.5780어쩌구 저쩌구..
경진 : 그럼 어떻게 한거야? 48의 제곱을 어떻게 알았어?
정태 : 생각해봐. 50의 제곱은 얼마야. 2500이지? 그 담에 48하고 차이인 2에다 100을 곱해서 빼봐. 그럼 2300이지?
여기서 더 정확 한 값을 알고 싶으면 2를 제곱해서 더하면 되지. 그러니까 2304.
자현 : (완전히 감탄해서 대욱을 돌아보더니) 너 뭔 말인지 알겠냐?
대욱 : 물론 모르지.
정태 : 이게 파인만식 계산이야. 그 사람은 숫자를 이해하고 있다구. 무조건 계산하는 게 아니라 숫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거야.
이거 아주 재밌어.
자현 : 나누기는 어떻게 계산한건데?
정태 : 1.73은 3의 제곱근에 가까운 수잖아. 그러니까 1 나누기 1.73은 3의 제곱근의 3분의 1이 되야만 한다구. 알겠지?
대욱 : 아 모릅니다. 그러지 말구 문제 하나만 더 풀어봐요. 예?
정태 : 야야야 지금 원숭이 재주피우게 하냐? 고만 해애.
자현 : 하나만 더. 이번엔 진짜 어려운 거.
아이들 떠드는 동안, 경진 말없이 정태를 보며 자기 생각을 하고 있다.
S#11. 캠퍼스 / 밤
어두워진 캠퍼스...
주욱.. 보다가 어디선가 작게 들려오는 클래식 선율.
S#12. 최교수 연구실 앞
방문에는 여전히 아르바이트 학생을 구하는 공고문이 붙어있고. 음악이 좀 더 크게 들린다.
공고문은 위쪽 한귀퉁이가 떨어져서 접혀있다.
S#13. 최교수 연구실 내부
단촐한 꾸밈의 연구실. 낡은 컴퓨터 한 대. 책상 위 고물 라디오에서 클래식이 흘러 나오고 있다.
방구석에는 낡은 냉장고도 있고 온 사방이 자료와 책으로 넘쳐흐르고 있다.
최교수, 돋보기를 쓰고 컴퓨터 옆의 자료를 들여다 봤다가 모니터를 봤다가 한다. 마우스를 움직이는데 잘 먹지 않는다.
마우스를 뒤집어 훅훅 몇번 불어보는 최교수. 커서를 적당한 위치에 놓고 자판을 두드린다.
자판에 얼굴을 바짝 대고 한글자 확인하고 누르고 모니터에 뜬 글자를 확인하고.... 시력이 좋지 않은 탓이다.
눈가를 몇번 짓눌러 보는 최교수.
S#14. 이교수 랩 / 밤
랩 식구들이 둘러앉아서 보쌈으로 야식을 먹는 중이다.
만수, 쌈을 만들다가 돌아보면, 좀 떨어진 곳에 민재가 앉아서 책을 들여다 보고 있다.
만수 : 야야 이민재. 먹을 땐 좀 먹어가면서 해라. 어? 자 아..
민재, 얼결에 만수가 입에 넣어주는 쌈을 먹고 씹느라고 괴로운데..
정태 : 민재가 팔자에 없는 물리과목을 듣느라구 고생 중이잖아요.
만수 : 물리 뭐? 내가 도와줘?
정태 : 비선형동역학이요.
중희 : 설마. 최교수님꺼?
정태 : 바로 그거요.
중희 : 민재야. 니가 뭔가 괴로울 때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아무거나 수강 신청을 해버린 모양인데. 더 늦기 전에 빠져나와라. 어?
명환 : 맞어. 중희 니가 그 교수님 강의를 들었다구 했지?
중희 : 말두 마십쇼. 그게 강읩니까?? 이건 완전히 말고문에 질문고문이죠. 게다가 학점은 얼마나 짠데요.
저 그거 C 받는 바람에 다음 학기 장학금도 놓쳤어요.
명환 : 설마 그거땜에 놓쳤겠냐. 원래 못 받게 되있었겠지.
만수 : 민재야 들었지? 너 아무래도 그거 취소하는 게 낫겠다.
민재 : 정태 넌 2학년때 그 과목 A 받았대매.
중희 : 무엇이? 최교수님 과목에 A? 너 절루 가. 나 너같은 인간하구 사귀고 싶지 않어.
정태 : 나 그 교수님 좋았는데.. (이상하다는 듯) 리포트나 시험 답안지를 돌려줘서 보면요. 일일이 빨간 펜으로 밑줄 그어서
하나하나 교수님 생각을 써주곤 했어요. 그러기 쉽지 않잖아요.
명환 : 근데 최교수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다고 하든데.
민재 : 그래요?
명환 : 어. 그 교수님이 자정 전에 연구실을 비는 법이 없는 걸루 유명한데. 요즘은 일찍일찍 퇴근을 하신대.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셔서 그런가.
민재 : (생각해보는..)
만수 : 아이구 중희 선배 혼자만 다 먹네. 남들 얘기시켜놓구 혼자 다 먹어.
S#15. 건물 앞 / 밤
진수와 지원이 나서고 있다. 진수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 지원을 막으며.
진수 : 기다려요. 차를 갖고 올게요.
지원 : 그냥 걸어갈래. 맨날 걸어다니던 길인데 뭐.
진수 : 누나 자꾸 그러면 열등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기숙사까지 갈 차에요. 그냥 편하게 타요.
진수, 먼저 급히 가고.. 지원 서서 기다리다가 문득 한곳을 본다.
거기 최교수가 자전거 옆에 앉아서 자물쇠를 여느라고 애쓰고 있다.
지원 조심스레 다가서서.
지원 : 안녕하세요.
최교수 : (힐끗 돌아보고 그저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열쇠를 구멍에 넣으려는데 잘 안되고 있다)
지원 : 제가 해봐도 될까요?
최교수, 생각하다가 열쇠를 지원에게 내민다.
최교수 : 그럼 부탁합시다.
지원 그려 앉아 열쇠를 금방 연다.
열쇠와 줄을 들고 일어서 건네려다 보면, 최교수는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닦아보고 있다.
지원 : 저..댁이 어디신지 후배가 차를 가지러 갔는데 모셔다 드리라고 할까요?
최교수 : (지원이 들고 있는 줄과 열쇠를 받아들며) 그거 압니까? 인간은 몸이 편해질수록 머리가 점점 무디어지게 되있어요.
인간 문명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차를 몰고 오던 진수, 급히 차를 세운다. 그 앞을 비틀거리듯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최교수.
진수의 시선인 차안에서의 시선으로 저 앞에 지원이 최교수를 배웅하듯 똑바로 서있고. 지원의 시선을 따라 진수 돌아본다.
최교수는 어둠 속으로자전거를 달려가고 있다.
S#16. 여자 기숙사 전경/ 밤
그 위로 들리는 경진의 목소리.
경진 : (E) 잘 안보이신다구?
S#17. 경진/지원의 방
침대에 앉은 경진. 책을 챙기는 지원.
지원 : 어. 눈이 잘 안보이시는 거 같앴어. 그 교수님, 워드일을 해줄 학생을 구한다고 했지? 아마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
모니터 글씨가 잘 안보여서 말이야.
경진 : 흐음.. (생각해보는)
지원 : 니가 지원해보지 그래. 그 아르바이트.
경진 : 내가? ...하. 내가?
지원 : 용돈 필요없어?
경진 : 용돈이 왜 필요해. 이 학교엔 학생이 6천명도 넘고. 그 중에 내가 아는 친구가 100명은 넘고.
그러니까 난 이쁜 얼굴로 얻어먹으면 되는데.
지원 : 어이구.. (세면도구를 챙기는)
시간경과.
방안에는 어둠이 깔려있고. 지원이는 자기 침대에서 자고 있다.
경진, 자는 듯 자기 침대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러더니 어두운 허공에 대고..
경진 : 내가? 내가 왜? 내가 바보냐?
S#18. 최교수 연구실 앞 / 낮
손이 불쑥 나오더니 공고문을 냉큼 잡아떼 버린다. 경진이다.
경진, 심호흡을 하더니 문을 노크한다.
S#19. 최교수 연구실 내부
최교수, 종이 한 장을 집어서 건네준다. 그 앞에 서있는 경진이 어처구니 없는 얼굴이 되서.
경진 : 시험...을 친다고 하셨습니까?
최교수 : 그래요. 내 돈을 받고 내 일을 도와줄 사람을 구하는 건데 당연한 일 아닙니까?
경진 : (벙해서.. 주머니를 뒤져 볼펜을 꺼낸다)
최교수 : 우선 거기 앉고.
경진 : (털썩 의자에 앉고)
최교수 : 먼저 단어실력을 알아볼까요.
경진 거의 기계적으로 종이에 볼펜을 댔다가..
경진 : 학과 학번 이름도 적을까요?
최교수 : 몰론입니다. 시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S#20. 석학의 집
마이클이 한쪽 구석에서 테이블을 치우고 있다.
외출복 차림의 미순이 카운터를 나온다. 배웅하러 따라서는 진영.
미순, 마이클이 일하는 것을 불안하게 본다. 쟁반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인 컵과 접시들.
미순 : 아... 이거 당최 불안해서 맡기고 갈 수가 있나.
진영 : 그래두 가보셔야죠. 둘도 없는 친구분이람서요.
미순 : 노처녀한테 혼수준비 거들어달라는게 친구가 맞긴 하냐?
진영 : 가구랑 이불... 예쁜걸루 골라 주세요. 여긴 저한테 맡기시구요.
미순 : 가자니 불안하고 안가자니 우정이 울고... 야, 마이클.
마이클 : 예스 맴. (하고 돌아보다가 쟁반위 컵이 와장창 쏟아진다) 오 마이 갓.
진영 : (달려가며) 마이클! 괜찮아요? (손 봐주고) 어머! 옷이 다 젖었네. (마이클의 옷을 행주로 닦아주는데)
마이클 : 진영. 나 괜찮아요. 나 강한 싸나이.
미순, 가자미 눈이 돼서 둘이 하는 꼴을 지켜보는데 지민이 팔랑거리고 들어서며.
지민 : 경진이 언니 여기 안왔어요?
미순 : 안왔다. 오늘은 제발 아무도 안 오면 고맙겠어.
지민 : 어머 미순 언니 멋진 옷 입으셨네. 선 보러 가요?
미순 : 선 같은 소리 하구 있네. (성질 나서 안으로 들어가고)
지민 : 경진이 언니 어디 갔지? 천체 망원경 보여준다구 했는데.
진영 : 천체 망원경이면 밤에 별 보는 거 아니에요?
지민 : 후후.. 낮에 딴 것두 볼 수 있댔어요. 아이 어디갔지? (하며 다시 나가는)
마이클 : 지민. 뭐 마시고 가. 돈 내고 마셔야지. 그래야 우리도 장사하지.
S#21. 최교수 연구실
여전히 낮은 소리의 클래식이 들려나오는 가운데. 경진이 열심히 적고 있다.
최교수, 넌지시 지켜보며 단어를 부르는 중.
최교수 : 시계열. (잠시 틈을 뒀다가) 끌개.... 위상공간...
경진 : 잠깐요. 잠깐만요. (중얼거리며) 끌개... 어트랙터...(attractor) 위상공간... 페이즈 스페이스...(phase space)
최교수 : (잠시 기다렸다가)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
경진, sensitivity on initial condition이라고 쓴다. 다 쓰고 최교수를 바라보는 경진.
경진 : 다 썼는데요.
최교수 : 됐어요. 한번 봅시다.
종이를 받아 훑어보는 최교수. 경진, 조심스레 방안을 둘러본다.
최교수 : (종이 놓으며) 지금부터 일할 수 있습니까?
경진 : 지금 당장이요?
최교수 : 미리 말해두지만 나에겐 이 논문이 아주 급합니다. 학생이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줬으면 하는데요. 오늘은 어떤가요?
경진 : 오전에 수업 끝났으니까 오늘은 종일 괜찮습니다.
최교수 : (컴퓨터 쪽으로 앉으며) 우선 이 리스트부터 정리를 하면 됩니다.
경진 : (다가서 컴퓨터를 만지며) 와. 요즘도 이런 컴퓨터가 있구나. 여긴 골동품 가게 같아요.
(돌아보며) 저 냉장고는 10년, 라디오는 한 20년 쯤 된건가...? (하다가 최교수 보고) 아, 교수님은 빼구요. 죄송합니다.
최교수 : 대단히 시끄러운 학생이군요.
경진 : 전 필요한 말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해주는게 문제에요.
최교수 : 주위 사람들 판단이 옳아요. 그리고 난 수다스러운 학생은 질색입니다. 그럼 부탁합니다.
최교수, 자리에서 일어나 나간다.
경진, 멀뚱히 있다가 마우스를 클릭하다가 살그머니 일어서더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일종의 경외감과 호기심으로..
책장의 책들도 살펴보고, 문쪽을 힐끗거리며 교수의 책상위도 슬쩍슬쩍 뒤져본다.
그러다가 고물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려본다.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고 현대 가요가 들려나온다.
경진, 음악에 맞춰서 몸을 좀 흔들어보다가 다시 다이얼을 돌리는데. 앗. 다이얼이 그냥 빠져버린다.
당황해서 다시 집어넣어 맞추려고 애쓰는데.. 제대로 되지 않고..
급한 김에 다이얼을 박으며 쾅쾅 때리는 순간. 계속 지직대는 소리만 들린다. 그러더니 조용해진다.
경진, 라디오를 들어 흔들어본다. 조용한 라디오. 난감하다.
S#22. 동아리방
문이 벌컥 열린다. 경진이 안을 들여다보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다.
경진, 괴롭다. 가슴에는 고물 라디오를 안고 있다.
S#23. 이교수 랩
명환과 민재는 각자 작업을 하고. 이교수 주변으로 중희와 정태가 둘러 서서 지시를 듣고 있고.
만수가 디스켓을 들고 돌아서다가 보면, 문이 빼꼼 열리면서 경진이 안을 들여다본다.
만수 : 어이 도깨비. 웬일이냐.
이교수와 민재네도 돌아본다.
경진, 당황해서 얼른 이교수에게 인사를 한다.
이교수 : 왜?
경진 :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얼른 문을 도로 닫아버린다. 다들 자기 작업으로 돌아가는데. 민재 생각해보다가 일어선다.
S#24. 이교수 랩 앞 복도
경진, 라디오를 끌어안고 벽에 기대서 초조해하는데, 민재가 나온다.
민재 : 또 뭔 일 냈어?
경진 : (애처롭게 보더니) 엉.
민재 : (경진이 끌어안고 있는 라디오를 보더니) 그건 뭐냐.
경진 : 고장난 고물 라디오. 당장 고쳐야만 되는 애물단지.
민재 : (수상쩍게 경진을 보며 라디오를 받아 보는)
경진 : (뽑혀진 다이얼도 건네준다)
민재 : 이거 어디서 난거야?
경진 : 최교수님꺼.
민재 : 뭐?
경진 : 나 최교수님 아르바이트 하기로 했거든.
민재 : (새삼 경진을 보는) ..니가?
경진 : 어. 근데 일 시작한지 3분만에 사고쳤어.
민재 : (한심하지만 라디오 안을 들여다본다) 이건 부속 구하기도 어렵겠는데.
경진 : 어떻게 좀 해줘봐.
민재 : 최교수님 아르바이트는 왜 시작한거야?
경진 : 그냥.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뭐 그런 생각에.
민재 : (경진의 얼굴을 살핀다)
경진 : (얼굴을 피한다)
민재 : (다시 경진의 얼굴을 본다)
경진 : 왜애.
민재 : (피식 웃더니) 아냐. 이건 두고 가. 이따 밤에 봐줄게.
경진 : 밤에? 지금은 안되고??
S#25. 최교수 연구실
최교수가 들어선다. 안에는 아리아가 나지막하게 들려나오고 있다.
최교수가 보면 경진이 컴퓨터 앞에서 열심히 타자를 쳐대고 있다가 교수를 보더니 일어선다.
최교수 : 일어설 거 없어요. 계속해요.
경진 얼른 앉아서 다시 타자를 치는데, 눈은 최교수를 따라가고 있다.
최교수, 구석의 차탁으로 가서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잔 두 개에 따른다.
경진 : (얼른 일어서며) 제가 하겠습니다. 어떤 차로 드릴까요.
최교수 : 제발 일을 할 땐 집중을 해주세요. 아주 미세한 변수가 최종적으로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는지 배우지 못했습니까?
경진 : 네. (다시 앉아서 타자를 치는.. 그러나 여전히 최교수에게 신경이 가있다)
최교수 티백을 찻잔에 넣다가 문득 멈춘다. 경진의 타자 속도가 느려진다.
최교수 천천이 돌아서더니 한곳을 본다. 경진의 손이 아주 멈춘다.
최교수가 바라보는 곳에 신형 라디오가 놓여져있고. 그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경진 벌떡 일어서더니.
경진 : 실은 교수님의 라디오를 좀 손볼까하구요. 전문가에게 잠시 맡겼습니다. 그 전문가는 지난 3년 내내 실험실에서 A를 받은
전자과 학생입니다. 내일이면 훨씬 더 생생한 음질의 라디오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최교수 : 민경진군.
경진 : 죄송합니다. 미리 허락을 구했어야 했는데. 제가 원래 생각과 동시에 실천을 하는 게 습관이 되서요..
최교수 : 군은 언제나 종달새처럼 떠들고 웃어대는군요.
경진 : 아.. 그야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이왕이면 웃고 살자.. 그래서..
최교수 : 그건 군의 어두운 속마음을 숨기기 위한 방어자세인가요?
경진 : (미소가 굳어지며) ..예?
최교수 : 나는 군의 속마음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내 앞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차를 마저 타며) 그리고 라디오는 고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건 수명이 다 되면 물러나는 게 자연법칙이지요.
경진, 말 못하고 보고 있다.
최교수는 천천이 티백을 찻잔 속에서 흔들고 있다가 힐끗 안경 너머로 경진을 보고.
최교수 : 지금은 쉬는 시간입니까?
경진 털썩 주저앉아 다시 모니터를 본다. 이제 미소는 없이.
S#26. 건물 앞 / 밤
걸어나오는 경진. 혼자 털레털레 걸어오다가 문득 서더니 혼자 하하 웃어본다. 어쩐지 자기 웃음이 어색하다.
잠시 생각해보다가 다시 하하 웃어본다. 여전히 맘에 안든다.
좀 더 생각해보고는 이번에는 씩씩하게 팔을 흔들며 걷는다. 걸으며 아하하 웃어본다.
S#27. 경진/지원의 방
경진 씩씩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지원이 스웨터를 걸쳐입고 있다.
경진 : 아아니 야심한데 처녀가 밤마실을 나가는 것이냐?
지원 : 박교수님 연구실. 논문 땜에 바쁘시거든. 전산과 애들 몇이 도와 드리기로 했어.
경진 : (배낭을 던져놓고 침대에 털석 주저앉으며) 돈 많은 과는 다르네. 애들이 몇 명씩 붙어서 교수님 논문 도와주고.
지원 : 갑자기 왜 시비야.
경진 : 난 나 혼자거든. 우리 교수님 논문 도와주는 유일한 학생.
지원 : 결국 아르바이트 하기로 했구나. 논문 주제가 뭐야? (책을 챙기든가 디스켓을 챙기며)
경진 : 짧은 혼돈시계열에서 비선형 동역학적 발산성을 추출하는 알고리즘.
지원 : (손이 멈춰 생각하더니) 우리 교수님꺼랑 중복되는 거 아닌가.
경진 : 전산과 교수님이 카오스 이론은 왜 하신대.
지원 : 인공지능하고 연관된 내용이 많잖아. 박교수님, 여러 방면으로 욕심도 많은 분이고.
고차원 혼돈계까지 데이터를 적용시킬 생각이신가봐.
경진 : (침대에 앉은 채 가벼운 운동을 하며) 최교수님 논문은 신경쓸거 없어. 그냥 소일거리같은 거라구.
지원 : 소일거리?
경진 : 책임지고 맡은 랩도 없지, 지도할 학생도 없지. 그래서 남는 시간에 심심해서 쓰시는 거야.
지원 : 세상에 심심해서 연구를 하는 학자는 없어.
경진 : 넌 무지하게 바쁘게 살았구나?
지원 : 무슨 소리야?
경진 : 심심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하는 모양인데. 마땅히 할 일이 없는거 만큼 괴로운게 없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경우는 딱 두가지인데 말야. 하나는 정말 재미있어 미치겠어서 하는 경우.
또 하나는 죽도록 심심한데 도대체 할 게 없을 때야.
지원. 피식 웃고 문가로 가서 신발을 신는다.
경진 기지개를 켜며 뒤로 벌렁 드러눕는다.
지원 : 다녀올게.
경진 : 안녀엉.
지원이 나가고 난 뒤. 경진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는다.
경진 : 고차원 혼돈계까지 적용시킨다구? (지원이 나간 문을 다시 돌아본다)
S#28. 이교수 랩 / 밤
정태는 컴퓨터 앞에, 민재는 테이블 위에 라디오를 뜯어놓고 안을 살펴보고 있다.
정태 기지개를 켜다가 돌아보고는.
정태 : 잘 되가냐?
민재 : 라디오 조립해봤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정태 : (의자를 밀어 옆으로 오더니) 경진이 그 녀석 말야. 사실은 최교수님을 좋아하는 거 같지 않냐?
민재 : 어. 안그래도 그런 의심이 슬슬 들고 있는 중이다.
정태 : 2학년때 그 강의 들을 때도 좀 이상했어. 경진이 그거 아주 열심히 공부했거든.
수업 들어갈 때마다 무슨 전투에 참전하는 애같이 그랬다구.
민재 : 근데 왜 F를 받은거야?
정태 : 결석 몇번하고. 학기말 고사를 안 봤거든.
민재 : 왜.
정태 : 내가 아냐. 나중에 왜 시험을 안 봤냐구 물었더니 여행을 갔대.
민재 : 여행을 가?
정태 : 그래. 워낙 미친 놈처럼 횡설수설하길래 물어보다 말았어. 그리구 나서 경진이 교환학생으로 나간 거잖아.
민재 : 흠.. (생각해보는)
정태 : 뭔가 여러 가지루 수상하지?
민재 : 그래. 근데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너 테스트 결과는 정리 다 했어?
정태 : 아니.. (의자 끌어 컴으로 가며) 인제 시작이다. 아이구우..
정태 다시 일을 시작하고, 민재는 라디오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해본다.
S#29. 박교수 연구실
회의대형으로 둘러 앉은 박교수와 남희, 지원. 각자 복사물을 한 장 씩 넘기며 들여다 보던 중.
진수는 한쪽 구석에서 커피를 타고 있다.
박교수 : 최교수님이 논문을 준비하신다구?
지원 : 교수님 논문 주제하고 비슷해요. 짧은 혼돈 시계열에서 비선형 변수를 추출가능한 알고리즘을 연구하신대요.
박교수 : 어라. 그럼 진짜 비슷하잖아.
진수 : (커피잔 차례로 놔주며) 드세요.
박교수 : 탱큐.
진수 : (지원 잔 건네며) 설탕없이 프림 하나죠?
지원 : 어. 고마워.
진수, 지원 곁에 앉는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던 박교수, 고개를 주억거리며.
박교수 : 조만간에 최교수님 찾아 뵙고 조언을 구해야겠는걸? 아주 배울게 많을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만나뵙기 싫어.
남희 : 왜요?
박교수 : 나 학부때 그 교수님 강의 들었거든. 하두 구박을 당해서 으으.. 무서워.
남희 : 초창기부터 연구하신 분이죠? 최교수님.
박교수 : 그러엄. 80년대 초에 비선형 동역학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할 무렵에 바로 입자물리에서 전공을 바꿔서 유학까지
다녀오셨다구. 같은 물리계통이라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지. 자네들이라면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선뜻 전공을
바꿀 수 있겠어?
남희 : (웃으며) 전 자신없어요 교수님.
진수 : 너무 비합리적이잖아요.
박교수 : 그렇지? 그러니까 남희양. 내가 쉰이 다 되서 전공을 바꾸겠다고 하면 말려줘. 알았지?
남희 : (괜히 수줍어서 웃더니) 그때까지 모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할게요.
S#30. 박교수 랩 / 밤
문이 빠꼼 열리더니 경진이 안을 들여다본다. 안에서 문을 노크해보며.
경진 : 핼로. 구지원. 있냐? 아무도 없어요?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이 보이다가, 한쪽에서 의자를 붙여놓고 자던 마이클이 부시시 일어나며.
마이클 : 어우 켱진이 누나. 지금 몇시야?
경진 : 너밖에 없어?
마이클 : 모두 미팅하고 있어. 마이클은 힘들어서 쉬고 있어.
경진 : 그래.. 그럼.. 니네 컴퓨터 좀 들여다봐도 되니?
마이클 : 들여다봐. 뭘 들여다볼건데?
경진 : 니들 지금 연구하는 논문.
마이클 : 그건 지원이 누나 컴퓨터 보면 돼. 저거야. 그럼 굿나잇. (다시 누워버리고)
경진, 그 컴퓨터 앞으로 가서 부팅을 시킨다.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얼굴이다.
S#31. 캠퍼스 전경 / 낮
식당 앞에 드나드는 학생들 보이고..
S#32. 교수식당
박교수와 서교수가 식판을 들고 오다가 박교수가 한곳을 보더니 이크해서 얼른 서교수 뒤로 숨는다.
서교수, 그쪽을 보면 최교수가 혼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다.
서교수 : 최교수님이잖아.
박교수 : 그냥 저리루 가자.
하는데, 서교수는 먼저 최교수에게로 가면서..
서교수 : 안녕하시지요.
최교수 : 아 예...
서교수 : 즈이 여기 앉아도 될까요.
최교수 : 앉으세요.
박교수 : (뒤에서 초조해하다가 최교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공손히 인사하고 옆에 와 앉는다)
서교수 : 논문 얘기 들었습니다. 그 연세에 그렇게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신다니 젊은 저희들이 부끄럽습니다.
최교수 : 학자가 할 수 있는 게 연구 뿐인데, 그걸 신기하다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서교수 : 아.. 그런 뜻은 아니구요. (당황)
박교수 : 실은 저도 요즘 논문을 하나 쓰고 있는데요. 그게 교수님이 연구하시는 거랑 비슷한 거 같아서요.
최교수 : 그래서요.
박교수 : 저어.. (무슨 말을 해야되나 쩔쩔매며) 시간이 좀 촉박하긴 하지만 사랑스런 제자들이 나서서 도와주고 있거든요.
최교수 : 본인의 연구를 위해서 제자들의 시간을 뺏고 있다는 겁니까? 아르바이트도 아니고 도와준다는 형식으로요?
박교수 : 아니 그건 아니구요. 그냥.. 에.. 실은 연구내용에 대해서 여쭤봐도 되는지.. 가끔 막히는데가 있어서요.
이 말씀을 드릴려구 했는데..
최교수 : 박교수.
박교수 : 예 말씀하세요.
최교수 : 학부때 내 강의에 세 번 결석을 했었지요?
박교수 : 제..가요?
최교수 : 머리가 좋은 사람들의 약점은 지구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 좋은 머리로 일분일초를 아껴보세요.
그 이상한 귀걸이 하는 시간을 연구에 투자하면 학생들의 도움이 없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식판을 들고 일어서며 서교수에게) 그럼 많이들 드세요.
서교수와 박교수 엉거주춤 일어서서 배웅을 한다. 최교수가 가자 다시 앉으며.
박교수 : 거봐. 내가 합석하기 싫다 그랬지. 난 저 교수님 앞에만 오면 무조건 혼난대니까.
서교수 : 근데 논문 얘기는 뭐야.
박교수 : 딴 생각말고 열심히 논문을 써서 경쟁해보자.. 대충 이런 말씀을 하고 가신 거 같은데? (밥을 떠먹는)
서교수 : (어이없어 웃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원..
S#33. 건물 앞
경진이 달려오고 있다. 등에는 커다란 가방이 매달려 있고.
민재와 정태가 나서다가 경진을 보고 어이 부르는데. 경진은 손만 흔들어보이고 안으로 달려들어간다.
S#34. 최교수 연구실
경진이 숨가쁘게 들어온다. 최교수, 노기띤 표정으로 앉아있다.
경진 : 교수님. 오늘 날씨가 아주 좋은데요.
최교수 : 내가 어제 부탁한 자료가 반밖에 정리가 안되어 있더군요.
경진 : 저기... 어제 밤엔 좀 바빠서요. 그래서 수업끝나자마자 달려왔는데요.
최교수 : 학생에겐 이 논문이 별거 아닌거 같지만 내겐 매우 의미있는 작업입니다. 내 연구를 망칠 생각입니까?
경진 :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최교수 : (노기를 가라앉히며) 빨리 부탁합니다. 기다리고 있을테니.
경진 : 네....
경진, 컴퓨터 앞에 앉는데 입이 한댓발 튀어 나왔다. 옆에 자료들을 쌓아놓고.. 타자 칠 준비를 하며 옆을 흘낏 보면..
최교수는 돋보기 안경을 만지며 저널을 읽고 있다.
S#35. 여학생 기숙사 앞
경진이 지쳐서 터덜터덜 걸어온다.
계단을 올라가려다 보면 자현이 한쪽에 걸터앉아 만두를 먹고 있다.
경진 : 뭐해?
자현 : 룸메 기다리고 있어. 방키를 두고 나왔거든.
경진 : 사감 언니한테 열어 달래지.
자현 : 벼룩도 낯짝이 있지. 야. 이번 달만 벌써 몇번째인지두 몰라.
경진 : 나두 점심 굶었거든.
자현 : (아까워하면서 하나를 내민다)
경진 : (옆에 걸터앉아 먹어가며) 추자현.
자현 : (꾸역꾸역 씹으며) 왜?
경진 : 니네 과에 두들겨 부술만한 폐차 있어?
자현 : 무엇이?
경진 : 그런거 있잖아. 스트레스 해소하려구 자동차 두들겨 부수는거. 그럴만한 차 있냐? 야구배트는 내가 구해올게.
(만두로 손을 뻗는데)
자현 : (얼른 만두를 감추며) 그거 내가 제일 혐오하는 짓거리야. 아니, 열심히 세차하고 광내면서 타고 다닐땐 언제고
폐차됐다고 스트레스 푼다면서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그건 자동차를 모독하는 행위야. 배은망덕한 짓이라구.
근데. ...무슨 스트레스?
S#36. 경진/ 지원 방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경진과 자현.
지원은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 하는 중이다.
자현 : 우리 과에도 그런 노교수님이 한분 계셨어. 이 분이 아주 고집불통에 벽창호였지. 피해가려구 피해가려구 해도
전공수업마다 걸려가지고 내가 몇 학기 고생 좀 했다. 내가 우리 오빠들만 아니면 벌서 보따리 싸갖구 집에 갔을거다.
경진 : 확 사표낼까 하다가도 어째 비겁한거 같아서 말야.
자현 : 암. 그런건 졸장부나 하는 짓이지. 치사한거야. 인간이 한번 한다고 했으면 끝장을 봐야지. 그게 인간이지 암.
경진 : 그래서 목하 고민중이다. 이 사태를 어찌 할 것인가... 지원아. 애들이 다 너보구 머리 좋다든데... 뭐 뾰족한 수 없을까?
지원 : (일하며) 특별한 방법을 찾으니까 안떠오르는거야.
경진 : 그럼?
지원 : 그거 논문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라구 했잖아.
경진 : 응.
지원 : (돌아보며) 그럼 교수님이 논문을 빨리 끝내도록 도와드려. 그래서 빨리 해방되면 되잖아.
경진 : 야아.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냐? 최교수님 연산프로그램, 그거 곰팡이가 필 정도라구.
한번 계산하는데 두시간은 걸리는거 같어.
지원 : 그렇게 오래 걸려?
경진 : 니네건 어때?
지원 : 8분. 길어야 10분이야.
경진 : (벌떡 일어나며) 너, 그 프로그램 구해줄 수 있어?
지원 : 어렵지 않아. 지금 이 작업. 박교수님 프로그램으로 하는 거야.
경진 : 정말? (반색하고 가서 컴퓨터를 본다) 와... 이건 정말 빠른데..? 이거 카피하려믄 박교수님 허락 받아야겠지?
지금 어디 계시니?
지원 : 조금전까지 연구실에 계셨어.
경진 : 오케이. 빨랑 전화해 봐봐. 아이구 좋은 거. 당장 갖다 깔아야지. 지원아. (갑자기 껴안으며) 오래 살아라. 오래 살아서
시집도 잘 가고 애도 많이 낳아라. 알았지?
지원 : (괴로와서 피하는)
자현 : (머리 긁으며) 괜찮을까?
경진 : (돌아보며) 뭐가?
자현 : 그런 교수님 타입을 내가 좀 아는데.. 그런 분들은 앞뒤가 꽉꽉 막혀가지고 있는 건 자존심 밖에 없잖냐.
그런데 후배 프로그램을 빌려쓴다.. 이건..
경진 : 괜찮아. 모로 가도 서울만 된다잖냐. 게다가 빨리 갈 수 있다는데 뭐가 문제여.
지원아. 나 지금 연구실로 가 있을테니까 FTP로 보내줘. 응?
서둘러 나가는 경진.
S#37. 최교수 연구실
최교수, 마악 컴퓨터를 부팅하는 중. 노크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고 처장이 상체를 들이민다.
처장 : 아이구. 이거 혹시나 했더니만...
최교수 : (일어나며) 처장님. 들어오십시오.
들어오는 처장.
처장 : 여태 퇴근안하고 뭐하고 계십니까?
최교수 : 앉으시죠.
처장 : (앉으며) 논문 준비하신단 얘긴 들었습니다. 그래도 연세가 있으신데 너무 무리하시면 안되지요.
최교수 : 이젠 나이 얘기를 들으면 섭섭해지는군요.
처장 : (온화한) 명예교수직은 말 그대로 명예직 아닙니까. 후학들을 지켜보시는 걸루 충분하지 않겠어요?
최교수 : 전 아직 학교를 경로당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처장님.
처장 : 하하...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구요.
최교수 : 처장님도 언젠가 정년퇴직을 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직 연구 할건 산처럼 쌓여있는데 남은 달력 세면서
조바심나는 기분 말입니다.
처장 : 평생 이루어놓으신 성과들을 생각하세요. 연구결과나 논문들, 최교수님께 배운 제자들...그거 아주 값진 것들 아닙니까?
최교수, 희미하게 웃으며 모니터를 돌아보다가 얼굴이 굳는다. 그러다 벌떡 일어선다.
처장 무슨 일인가 보는데..
마침 노크소리와 함께 들어서는 경진. 처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경진 : 처장님 계셨군요. 차를 준비할까요.
처장 : 어허 좋지요. 녹차 될까.
최교수 : 민경진군.
경진 : (차탁으로 움직이다가) 네?
최교수 : 이게 뭡니까?
경진 : 아아. 그 프로그램이요. 그게 (의기양양) 그러니까. 제가 전산과 박교수님께 허락을 얻어서 이 출력프로그램을
카피했습니다.
최교수 : 그래서요.
경진 : 원래 프로그램에 있던 자료를 새 프로그램에 옮겨 심었습니다. 새 프로그램은 변수 대입에 따른 각각의 계산을 약 8분만에
뽑아낼 수 있거든요. 그럼 한번 계산할 때 마다 한시간 52분은 절약하는 셈입니다.
최교수 : 몇 분이 빨라지냐고 물은게 아닙니다.
경진 : 네?
최교수 : 어째서 내 허락도 없이 함부로 이런 짓을 한겁니까?
경진 : 전 교수님 논문 결과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나올 수 있도록 도와드리려는 마음에...
최교수 : 내가 워드작업과 자료정리 외에 군에게 부탁한 것이 또 있었나요?
경진 : (조금씩 억울해지는) 아뇨..하지만 교수님도 이전 것보다 이게 몇배나 더 우수한 프로그램인지,
보면 바로 알수 있으시잖아요.
최교수 : 문제는 어느 것이 더 우수한 것이냐가 아닙니다. 난 내 프로그램과 계획에 따라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경진군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차질을 빚었다는 거에요. 다시 원래대로 복구시키려면 꼬박 하루가 걸립니다.
경진군은 잘 모르겠지만... (잠시 쉬고) 하루는 내게 아주 귀중한 시간입니다.
경진 : 그럼 굳이 복구할 필요 없이 그냥 이대로...
최교수 : 경진군도 매듭을 끊는 쪽이군요. 그게 편하고 빠르니까.
경진 : 네?
최교수 : 이제 그만 가보세요. 군은 해곱니다.
경진 : 교수님...
최교수 : 그동안 일한 보수는 계좌에 입금하지요. 나가봐요. (처장에게) 미안합니다. 학생과 잠시 얘기가 있어서요.
처장 : (민망하지만) 아 예.. (뭐라 말 못하는)
경진, 최교수를 원망스럽게 보다가 배낭을 둘러멘다.
최교수 : (다시 앉으며) 아까 어디까지 말씀하셨었지요?
처장 : 아 ..그게.. (경진을 보면)
경진은 문을 열고 나가고 있다.
S#38. 동아리방
민재가 수리가 끝난 라디오를 들고 들어선다.
안에는 대욱과 지민, 마이클이 로봇을 수리하고 있다가 분분이 인사하고.
민재 : 어째 니들만 있냐. 진수는?
대욱 : 요즘 박교수님 연구실에 가서 살잖습니까. 덕분에 저만 죽어나고 있습니다.
민재 : 마이클 너는 직속 스승님 안도와드리냐?
마이클 : 오. 박교수님 나한테 피졌어. 처음 콜햇을 때 진영씨 도와준다고 안갔더니 피졌어. 박교수님 피돌이.
민재 : 그쪽도 바쁘게 돌아가는 모양이네.
지민 : 오빠 그거 무슨 라디오야? 그거 라디오 맞지?
민재 : 아참 경진이 못봤니? 이거 줘야 되는데. 최교수님 방에 있나.
지민 : 경진이 언니 그 교수님 아르바이트 짤렸어요.
민재 : 뭐? 왜?
지민 : 나두 잘 몰라요. 무슨 프로그램을 새루 깔았다가 혼났다구 하던가?
암튼 아까 여기 와서 총알 빗맞은 코뿔소처럼 씩씩대다 갔어요.
대욱 : 원래 나이든 교수님들은 좀 고집이 세잖습니까. 경진선배가 좀 오바센스한거 같든데...
민재 : 그래에?
민재, 고개를 갸웃하다가 밖으로 나간다.
마이클 : 혀엉 어디 가. 우리 저녁 사주고 가.
민재 : (나가며) 코뿔소 구경간다. 총알 빗맞은 코뿔소.
S#39. 교내 휴게실 복도
두리번거리며 오던 민재. 옆에 휴게용 칸막이가 있다.
민재가 칸막이 너머를 기웃거려 보면 거기 경진이 불퉁해서 다리를 테이블에 올리고 앉아있다.
민재 : 어이 코뿔소. 해고당했다며.
경진 : 불난데 아예 선풍기를 틀어라.
민재 : (옆으로 와 라디오를 내주며) 자 수리비는 어떻게 계산할까.
경진 : (갑자기 라디오를 번쩍 들더니 내팽겨칠 자세)
민재 : 어어. (해서 얼른 라디오를 뺏는다) 야 임마. 라디오가 무슨 죄냐.
경진 다시 묵묵히 앉았다. 민재 그 옆에 앉아서 라디오를 툭툭 털다가..
민재 : 어이 무슨 생각해?
경진 : 복수.
민재 : 치이.. (웃는)
경진 : 아니. 전에는 농반진반이었는데 이젠 확실해졌어. (벌떡 일어난다) 가자.
민재 : 어딜 가.
경진 : 지금 몇시지? 수업에 들어가는거야. 복수는 정정당당하게 쟁터에서 하는거지.
먼저 가버린다.
민재 : 야 임마. 이 라디오는 어뜩할래.
경진은 뒤도 안보고 가고 있다.
S#40. 강의실
최교수, 칠판 가득 판서하고 있다. 카오스 이론에서 중요한 어떤 수식의 전개과정이다.
민재, 필기하다 말고 경진을 본다. 턱을 괴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 경진. 민재, 불안하다.
판서를 마친 최교수. 분필을 놓고 칠판 끝으로 가서 학생들이 필기하는 동안 잠깐 기다린다.
최교수와 시선이 마주치면 자세를 바로 앉는 경진.
최교수는 예의 그 무표정한 모습. 학생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다.
최교수 : (칠판 가리키며) 이것은 군집 생태학에서 특정 지역의 전체 개체수 변화과정을 모델화한 메이의 병참 방정식입니다.
이 방정식을 토대로 카오스 이론의 구체적인 특성을 살펴 봅니다. 우선 이 병참 방정식은 Xnext=rX(1-X)로 주어집니다.
경진 : (손들며) 질문 있습니다.
최교수 : (말이 잘려서 불쾌하다) 아직 질문받는 시간이 아닙니다.
경진 : 굉장히. 아주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최교수 : (쳐다보다가) 좋습니다. (기다린다)
민재, 걱정되어서 본다.
경진, 벌떡 일어서더니.
경진 : 교수님께서는 여전히 2년전의 강의내용과 똑같은 강의를 하고 계십니다. 이 수업 첫시간에 제가 그 문제를 지적하자,
교수님께서는 저보고 2년동안 발전한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교수님은 제가 예측한 그대로 강의를 하고 계십니다.
(자기 노트 들어보이며) 2년전 강의노트랑 100% 같거든요.
최교수 : 민경진군. 요점을 말해주겠습니까?
경진 : 저희가 공부하는 과목은 비선형 동역학입니다.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 결과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는 이론을
다루고 있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강의는 철저하게 예측 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학생인 우리들이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최교수, 가만히 교탁을 짚고 서서 경진을 바라본다.
대답을 기다리는 경진.
최교수 : (잠시 기침하고) 방금 민경진군의 발언은 일부 철학자나 호사가들의 주장과 별다를 바 없군요.
카오스 이론이 결정론이나 인과율을 파괴한다고 생각합니까?
경진 : 그건 아니지만... 불가지론의 침투를 허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시스템의 초기 조건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으니까
예측불가능한 것은 사실 아닌가요?
최교수 : 카오스 이론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면 이 학문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믿는 거지요?
경진 : (잠시 버벅대는) 부분적으로는 예측 불가능해도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모델화가 가능한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섭니다.
최교수 : 좋아요. 학생은 스스로 답을 가지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측을 포기하고 대신 카오스의 구조를 찾아냅니다.
건물로 예를 들자면... 어느 건물이 몇층이며 몇 평짜리인가를 알아내는걸 포기하는 거죠. 대신 그 건물이 어떤 구조로
지어졌는지, 어느 지점이 강하거나 약한 구조인지 알아낼 순 있습니다. 내가 이번 학기 동안 가르치려는 것은
그 건물의 구조를 찾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적용과 발전은 여러분이 해야할 몫이지요. 이제 내 교수법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습니까?
경진 : (조금 볼 멘) 저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최교수 : 계속 답을 알고 있으면서 질문을 던지는군요. 그럼 민경진학생이 생각하는 답은 뭡니까?
경진 : (망설이다가) 교수님은 자신이 없으신 겁니다.
민재 : (낮게) 야, 민경진.
최교수 : (조금씩 힘들어지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요?
경진 : 이런 진보적인 학문을 한다는 것은 모든 과정이 도전이고 경쟁입니다. 그런데... 제가 곁에서 지켜본 교수님은
답답할 정도로 낡은 방법론만 고수하고 계셨습니다.
최교수 : 그래서요?
경진 :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이 학문의 새로운 흐름, 다양한 접근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으신가 보다... 하구요.
최교수 : 내 교수법과 연구방법에 카오스 이론을 적용해보자는 거라면.. (조금 나서며) 나는... 난...
최교수, 강단 옆으로 나오다 현기증을 느끼며 교탁을 짚는다. 그리고 정신을 잃으며 스르르 쓰러진다.
놀라는 경진.
민재 : (뛰쳐나가며) 교수님!!
민재와 남학생 두엇이 달려나가 최교수를 부축한다.
최교수, 의식을 잃은 상태.
민재, 다른 학생의 도움으로 최교수를 부축하며 일어서다 경진과 시선이 마주친다.
경진, 얼이 빠진 듯 아까의 자세와 표정 그대로 최교수를 쳐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