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溪 박희용의 麗陽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6월 30일 화요일 맑음]
녹전 매정리 신암폭포
장마를 앞두고 산천 경계를 휘 둘러보고자 오랜만에 애마를 몰고 나섰다. 녹전에서 점심으로 콩국수를 먹고 갈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매정리를 거쳐 구봉천 계곡 좁은 길을 따라 돌다니 길가에 한자를 새긴 큰 바위와 비석이 보였다. 퇴계 선생이 이 길로 한양을 다녔는데, 앉아 쉬면서 바위에 매달려 턱걸이를 했다고 해서 턱걸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는 말을 예전에 한 번 들었었다. 그러나 이 길로 다니지 않았으니 꾸며낸 말이다.
살펴보니 ‘新巖暴布’라고 각자되어 있고, 오석 시비 뒷면에는 퇴계 선생의 시가 새겨져 있다. 한참을 오르내리며 벼랑 아래를 살펴봐도 물소리는 창창하게 들리는데 하도 숲이 우거져서 계곡이 보이질 않는다. 간신히 숲 사이로 아래를 보니 허여스름한 너른 바위와 계곡이 보인다. 벼랑 위 좁은 산길이라 가드레일이 든든하게 설치되어 있다. 멀리서나마 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 하여 가드레일을 넘어 한 발 내딛다 보니 또 한 발 또 한 발, 비탈을 기다시피 겨우 내려가서 신암폭포를 만났다. 폭포라기보다는 그냥 위 아래 큰 바위 사이를 흐르는 계곡수였다. 그러나 450년 전인 정묘년 1567년의 풍광과 지금은 다를 것이다. 그러니 퇴계 선생이 이 신암폭포를 감상한 시를 여섯 편이나 쓰셨을 것이다.
인터넷을 구석구석 뒤진 끝에 <풍산김씨좌윤공종중> 카페의 <선조의 향기>에서 김정현 씨가 올린 <신암폭포회상록(新巖瀑會賞錄)>에서 퇴계 선생의 시를 발견하였다. 시의 출처는 영천이씨 원천마을 입향조인 간재 이덕홍(1541~1596)의 『간재집』이다. 간재 이덕홍은 농암 이현보 선생의 종손자로서 임진왜란 초기에 상소문에 귀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는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왜란이 발발하자 선조 임금을 모시고 의주로 몽진한 공으로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간재의 첨필을 뺀 신암폭포 소개와 퇴계 선생의 시는 다음과 같다.
1. 신암폭포(新巖瀑布)
녹전면 매정리 담말(또는 담마)에 있다. 무안 박씨(務安朴氏) 부호(富豪)가 긴 담을 쌓고 지냈음으로 담마라 했다고 한다. ‘담 밖 千石․담 안 千石’이란 말이 전해 온다. 신암폭포는 담마 동쪽에 있는 폭포로서 퇴계선생이 제자인 간재와 더불어 유상(有償)하면서 바위에 ‘新巖瀑布’라는 넉 자를 새겼다고 한다. 이 바위는 일명 ‘턱걸바위’라고 하는데 퇴계선생께서 공부하던 가운데 운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바위 전면을 가로 95㎝, 세로 120㎝ 넓이로 다듬은 다음 글자를 새겼는데, 글자의 크기는 대략 40㎝ × 50㎝이다. 오른편에 작은 글씨로 각자를 한 일자(日字)로 보이는 ‘병오삼월일(丙午三月日)’이 새겨져 있다.
2. 신암폭포회상록(新巖瀑會賞錄)
新巖洞名, 在溪上流十許里, 泉石弘所新得而遊玩者也. 甲子年間, 以瀑奇勝, 告于先生, 則先生贈詩二絶, 而越三年丁卯三月初八日, 先生抽身, 獨遊於新巖, 有詩六絶. 其後先生手書此詩, 以與弘, 其有得於水石之趣者如此. 出艮齋先生記善錄.
신암은 골 이름으로 오계상류 10리쯤에 있다. 천석을 덕홍이 새로 얻어서 놀며 구경하던 곳이다. 갑자 연간에 폭포의 기이한 경관을 선생에게 고하자 선생께서 절구 두수를 주었다. 삼 년 뒤 정묘 3월 8일에 선생께서 몸을 빼내어 신암에 홀로 노닐며 절구 여섯 수를 지었다. 그 뒤 선생께서 이 시를 손수 써서 덕홍에게 주었으니 수석에서 얻은 아취가 이와 같다. (간재선생 기선록에 나온다.)
丁卯三月初八日, 獨遊新巖, 六絶.
정묘년 (1567년) 3월 8일 홀로 신암에 노닐면서 지은 절구 여섯수.
日照山花絢眼明, 溪光漠漠柳靑靑. 蹇驢駄病向何處, 泉石招人興未停.
산꽃에 해 비치자 눈이 현란해
막막한 시내 물빛, 버들은 푸르다.
절룩 나귀 병자 싣고 어디로 가는가?
천석이 불러서 흥이 다함 없구나.
亂山深入水洄洄, 野杏溪桃處處開. 逢著田翁問泉石, 回頭指點白雲堆.
산에 깊이 들자 물은 굽이치고
들살구 물복숭아 곳곳에 열렸네.
전옹을 만나 천석을 물으니
고개 돌려 가리키는 곳 백운이 쌓였네.
白白奇巖矗兩層, 雲泉吼落湛成泓. 我來正値春三月, 紅綠紛披鳥喚噟.
백색의 기암이 이층으로 솟아
구름 샘 떨어지는 곳 깊은 못 이뤘네.
내가 마침 오니 시절은 삼월 봄날
수목은 얼룩달룩 새는 응답하네.
杜鵑花發爛霞明, 翠壁中開作錦屛. 滿耳泉聲仍坐久, 洗來塵慮十分淸.
두견화는 하명에 가득 피었고 (노을 속에 환하게 피니)
취벽에는 비단 병풍 펼쳐졌네. (푸른 암벽은 비단 병풍 두른 듯)
온몸에 샘 소리 그대로 오래 앉아 (귀에 가득한 물소리 그대로 오래 앉아)
속된 생각 한 점 없이 깨끗이 씻네.
搜勝誇傳自李君 幾年魂夢繞山雲. 朅來卻恨無幽伴, 君在山西不及聞.
이군은 경치 좋다고 과장되게 자랑해서
몇 년간 꿈속에 구름산 꾸었던가?
와서 보니 그윽한 벗 없음 한되나
산 서쪽에 있는 그대 듣지 못하겠지.
造物雄豪辦此奇, 千秋方得我來時. 莫將名字題崖石, 猿鶴雲間創見疑.
조물주는 호기로워 기이함 만들어
천추에 바야흐로 내가 오게 되었네.
명자를 바위에 제명하지 말거라.
구름사이 원학이 비로소 의심하리.」
안동시에서 운영하는 디지털안동문화대전에는 다음과 같이 신암폭포를 설명하고 있다.
[명칭유래] 녹전면 매정리 담말 동쪽에 있는 폭포로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 처음 발견하였다고 전해진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제자 이덕홍과 더불어 놀면서 바위에 ‘신암폭포(新巖瀑布)’라는 넉 자를 새긴 뒤로 신암폭포로 불리고 있다. 또한 이황이 제자들과 공부했다고 하는 이 바위는 턱걸이를 할 수 있다 하여 일명 ‘턱걸바위’라고도 한다.
[현황] 신암폭포는 두 글자씩 세로로 새겨져 있는데, 글자가 새겨진 바위 밑에 상하 두 개의 폭포가 있다. 글자는 바위를 가로 95㎝, 세로 120㎝ 넓이로 다듬어 두 글자씩 세로로 새겼는데, 글자의 크기는 대략 40㎝×50㎝이다. 오른쪽에는 작은 글씨로‘병오삼월일(丙午三月日)’이라 새겨져 있다. 병오년은 1546년(명종1년)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안동관광정보센터(http://www.tourandong.com). 유교넷(http://www.ugyo.net)
그런데 [명칭유래]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제자 이덕홍과 더불어 놀면서 바위에 ‘신암폭포(新巖瀑布)’라는 넉 자를 새긴 뒤로 신암폭포로 불리고 있다‘와 [현황]에서 ‘오른쪽에는 작은 글씨로 ‘병오삼월일(丙午三月日)’이라 새겨져 있다. 병오년은 1546년(명종1년)으로 추측된다.‘가 문제이다.
1567년 퇴계 선생이 홀로 신암폭포를 찾은 날에 간재 이덕홍은 출타하여 함께 하지 못했다. 아마 간재에게 미리 날짜를 통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에 퇴계 선생은 신암폭포에 가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신암폭포‘ 낙 자를 새길 시간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병오년을 1546년이라고 추측하면, 간재 이덕홍이 6세 때이다. 퇴계가 이 시를 쓴 때가 1567년이고, 퇴계 67세, 간재 26세이다. 바로 뒤에 있는 다른 바위에는 ‘退溪先生遺囑’(84쪽)이라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에 비해 2021. 12. 16 자로 블로그 <태자봉>에 게시된 <녹전초등학교 마을 카렌다>의 ‘퇴계 선생이 다녀가서 시를 읊은 신암폭포가 있고 1906년에 새긴 신암폭포 각자와 1920년에 새긴 퇴계 선생 유촉명이 남아 있습니다.’가 더 사실에 가깝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1906년이 병오년이다. 1546년 병오년이 아님은 확실하고, 다음 병오년은 1606년인데 임란 직후라 각자 할 여유가 없었다. <녹전초등학교 마을 카렌다>에서 각자가 1906년, 퇴계 선생 유촉명을 1920년에 새겼다고 하는 것을 보면 각자와 유촉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지역민으로부터 증언을 들은 것 같다. 시비는 세운 때를 찍지 못했다. 다음에 가서 확인하겠지만, 상태를 보니 근간에 세운 듯하다.
이야기가 번져서 장황해졌는데, 후세를 위해서라도 건립 연도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계속해서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신암폭포 각자가 언제 새겨졌는가에 대해 세 가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계는 퇴계와 간재 이덕홍이 유상(遊賞)한 폭포를 사림에서 추상(追賞)하기 위해 지역의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육우(六友) 박회무(朴檜茂), 구재(鳩齋) 김계광(金啓光), 학정(鶴汀) 김추길(金秋吉), 우헌(寓軒) 류세명(柳世鳴) 등이 유계(儒稧)인 <新巖契>가 만들어진 1664년 2년 후인 1666년 병오년이다. 계의 조성 기념으로 각자했을 수가 있다.
둘째는 1895년 의병 해산 후에 신암폭포 아래 은거한 동은 이중언 선생이 선조인 퇴계와 간재를 기념하기 위해 1906년에 각자했을 수도 있다.
셋째는 <녹전초등학교 마을 카렌다>에 근거한 1906년 병오년이다.
<녹전초등학교 마을 카렌다>는 경북교육청연구원이 2020년 ‘우리 마을 이야기 쓰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발행한 『우리 녹전마을 이야기』 에 있는 녹전면의 문화 유적 소개를 근거로 했다. 그런데 <녹전초등학교 마을 카렌다>는 『우리 녹전 마을 이야기』 의 ‘신암폭포’ 소개에 없는 ‘1906년에 새긴 신암폭포 각자와 1920년에 새긴 퇴계 선생 유촉명이 남아 있습니다’를 넣었다. 담당 교사에게 전화해 보니, 원천에 있는 학부형 우씨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1906년의 근거를 찾았다고 안심했는데, 어어지는 선생님의 말씀이 “2023년에 별세했습니다”였다.
<녹전초등학교 마을 카렌다>에는 『우리 녹전마을 이야기』 에 없는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바로 위의 <매정리 마애석불>을 소개하면서 <용운사>라는 절을 지을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갈현리가 봉화군의 군 소재지가 봉성이었을 때 예안의 선성현과 오가는 주요한 통로였다는 이야기도 들어있다. <녹전초등학교 마을 카렌다>를 만들 때 참여한 학부형이 지역 문화 유적에 관심이 깊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일단은 <녹전초등학교 마을 카렌다>의 1906년과 동은 이중언 선생이 신암폭포 아래 은거한 년도가 같은 시기인 것이 중요한 맥이다. 그러나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백여 년 전의 역사를 후학들이 추측하거나 재단하는 것은 매우 난해한 일이다. 있는 자료와 구전 자료 등을 취합하여 최대한으로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방법밖에 없다.
투구봉, 만리산, 응봉산, 파리봉 등 600고지들로 둘러싸인 신라리에서 시작하는 물줄기들이 모인 구봉천이 고지에서 평지로 흘러내리며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태자리를 거쳐 온 마의태자가 한때 자리 잡은 곳이 신라리이다. 이웃 안동은 이미 삼태사로 대표되는 친왕건 토호들에 의해 장악되었으므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더 깊은 금강산 쪽으로 갔다고 한다. 태자리에는 고려 광종 5년 954년에 김생이 쓴 태자사 낭공대사비가 있었는데, 비석은 고향을 떠나 지금 국립박물관에 있고 귀부 밑받침만 풀숲에 묻혀있다.
신암폭포는 타곳의 유명한 폭포에 비해 작고 낮다. 그러나 간재와 퇴계 선생을 위시한 인근 지역의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퇴계 선생의 12대 손인 동은 이중언 선생은 대과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됐으나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의 이권 침탈을 목도하고 낙향했다. 은거 중이던 선생은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자 이중린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웠으며, 의병부대 해산 후 신암폭포 아래에 은거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단식하다가 27일 만에 순국하였다. 동은 이중언 선생의 어록비가 독립기념관 시어록비 공원에 서 있다.
지금 신암폭포는 깊이 숨겨져 있다. ‘新巖暴布’ 바위와 시비가 없다면 과객들은 저 밑에 퇴계 선생, 간재 선생, 동은 선생의 애국애민의 뜻이 만고에 울리는 유서 깊은 폭포가 있음을 전혀 모른다. 사적지로 개발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그래도 역사적 의미를 환기하기 위해선 많은 사람이 방문할 수 있도록 잘 다듬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