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사목회장 선출이 있었지요.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일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짐을 느꼈기에 우리 공동체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려 글 올립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 올 해 마지막 사목회의가 한강에서 있었습니다. 보통 사목회의는 성당에서 합니다. 회의 후 식사를 위해서 에스텔 자매님을 중심으로 여러 분 께서 매번 애써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감사 말씀 드립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 사목회의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자리 배치도 전쟁 중의 '작전 상황실(?)' 처럼 준비되어 있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열띤 토의가 이어졌습니다. 내년 사목회장 지원자가 없기에 제비뽑기를 할 것인가, 투표를 할 것인가를 두고 격론이 이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며칠 전에 읽은 성경말씀이 계속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7,14) (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바로 이 번 주일(19일, 대림4주) 제1 독서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배경이 되는 때는 강대국 아시리아의 위협에 유대 민족 운명이 풍전등화였습니다. 마치 구한말 우리 나라와 같다라고 하면 어떨까요. 당시 왕은 '아하즈'로 어떻게든 주변 정세를 잘 이용해 그 위기를 극복하려 합니다. 그런데, 난데 없이 예언자 이사야는 그러한 노력이 헛되다고 말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확인(표징)을 청하라고 합니다. '국가지도자' 아하즈는 '불확실한 것'에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없기에 이를 회피합니다.
여기서 잠시 자신을 돌아보면,
저 역시 이사야서의 '아하즈'와 마찬가지로 평소에 힘든 과제 앞에 서면
우선 세상의 지혜를 동원할 생각만 했지 하느님께 먼저 도움을 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상황이 되어서야 하느님을 찾고 위안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사야서 말씀이 우리 공동체 상황과 너무나 비슷하게 느껴져서 먼저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힘든 과제를 맞이한 우리 공동체에,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가?"
물론 답은 yes 이지요.^^; 질문과 답이 나오고 나니, 사실 그 이후 일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모든 신자들이 함께하고,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긴다. 즉, 공동체 투표로 마음이 정해졌습니다. 투표를 하면 저도 매우 위험(T-T;;;)한 것을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하느님께 맡기고 그 뒤는 먼저 걱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다들 아시지요.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영광이자 역시 큰 부담이지만 제 일이 아니라 하느님 일이니 특별한 기분이나 감상이 없네요. 그 분 뜻대로 이루어질 뿐.
그런데, 어떻게 제가 평소와 달리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묵상 할 수 있었을까요? 하필 2주 후 주일 복음도 아닌, 1독서를 미리 읽고 그 배경까지 미리 공부해 놓았을까요?
원래 신심이 깊고 성서와 함께 살아서?
음... 엘레나에게 제 평소 실상을 들으시면 많이 실망하실 겁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 한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시지만 말입니다요... -_-;;;
이유는, 가브리엘 신부님께서 제게 2주 후(19일) 예비자 대상 '전례' 교리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전례의 중심인 미사, 그리고 말씀 전례를 설명하기 위해 그 날 독서와 복음을 예로써 묵상하려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뭐, 결과론 입니다만...
만약 제가 예비자 교리 전례 부분을 맡지 않았다면, 굳이 2주 후 독서를 미리 묵상하지 않았다면, 가브리엘 신부님이 예비자 교리 전례 부분을 부탁하지 않으셨다면, 부탁하셨더라도 원래 일정대로 12월5일에 했었다면, 말씀 전례의 1,2독서와 복음과의 관계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복사단 교리 교육 준비하다가 알게 된 것) 복사단을 맡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 역시 금요일 사목회의에서 공동체투표에 반대했을 겁니다. 그랬으면 7:6으로 결과는 정반대로, 제비뽑기로 결정이 났겠지요.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다시 한 번, 우리 공동체 역시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체험하네요. 그리고, 제가 겪은 이러한 체험을 우리 공동체 여러분과 나눔으로써'증거'해야함도 느낍니다.
이사야서에서, '아하즈'가 하느님께 도움 청하기를 회피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확인해 주시듯이
이사야 예언서의 예언 말씀, 즉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7,14)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임마누엘임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성 서에서 ‘천사’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천사는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새로운 길로 인도합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이름을 갖는 사람의 전체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예 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를 희랍어로 번역할 때 쓰여진 것이며, 이 이름은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또 ‘구원’은 ‘죄에서의 해방’, ‘죄에 대한 용서’를 뜻합니다. 모든 인간이 처하는 죄, 구속은 결정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해방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구원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즉 임마누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부터의 구원’은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해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신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음을 직접 보여주는 구원의 징표인 것입니다.
2. 이사야 예언자의 ‘임마누엘’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는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임마누엘’의 예언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 사야 예언자는 유다왕 아하즈에게 ‘하느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청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야훼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하며 표징을 청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피지 않고 ‘나는 표징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야훼를 시험하지 않겠습니다’하는 그의 대답만을 놓고 볼 때 매우 경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 하즈는 시리아와의 전쟁에 있어서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세운 정치적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경건을 가장하며 하느님을 벗어납니다. 즉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에 관한 예언을 합니다.
인 간은 그 누구도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자신의 힘에만 의존하고, 실질적으로 힘을 주시는 하느님을 멀리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죄의 시작입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자유롭고 죄에서 해방된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모으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또한 내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ㅎㅎㅎ 와~ 정말 값지 체험을 하셨네요. 하느님께 감사!! 허허 왠지 점점 더 하느님의 포섭망에 빠져드시는 느낌이... ^^ 맡으신 소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