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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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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전면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에 속한 행정면.
[개설]
매전면은 청도군에 속해 있으면서 용각산은 청도의 중앙을 가로 질러 걸쳐 있으며 이 산령(山嶺)을 중심으로 산동과 산서로 나누어진다. 매전면은 산동에 해당한다. 조선말까지 이사리(伊士里)와(현재 금천리) 두곡리(杜谷里)는 밀양군의 비입지로 청도군내에 있으면서 밀양에 속한 동네였다. 현재의 동창천(東倉川)은 동창(東倉)이 있었다고 해서 동창인데 일찍이 (1500년대)에 박하담, 김대유 두 선생이 관청(官廳)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산동지역의 백성들을 위해서 산동지역에 있던 절을 폐사(廢寺)시키고 그 자리에 창고를 만들어 세곡을 거두어 저장하고 봄에 구휼을 하곤 하였으며 이 곡식으로 장리를 놓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것으로 연명을 할 정도로 삶에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 따라서 동쪽에 창고가 있는 지역이라는 뜻에서 동창(東倉)이 되었고 동창이 있는 지역을 흐르는 내(川) 대천을 동창천(東倉川)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명칭 유래]
매전면은 원래 청도의 역(驛)인 성현역 산하(傘下)에 매전역(買田驛)이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상남면과 중남면을 합해 매전면이 되었으며, 합병당시 종도면의 일부(상평. 하평. 관하. 금천 덕산. 두곡)가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매전면은 1720년에 상남면(上南面). 외종도면(外終道面). 적암면(赤巖面)이었다.
외종도면(外終道面)을 1896년에 동산면(東山面)으로 고쳐부르고 적암면을 중남면으로 개칭하였다. 동산면은 다시 종도면(終道面)으로 개칭한 것이 1906년도이다.
상남면(上南面)은 임곡(壬谷), 아음(牙音), 동당(東堂), 금곡(金谷), 신동창(新東倉), 구동창(舊東倉), 북지(北旨), 용연(龍淵), 온막(溫幕), 호고방(好古方), 동북(東北), 장연(長淵) 12동으로 구성되었다.
외종도면(外終道面)은 덕산(德山), 용암(鎔巖), 임곡(林谷), 신천(新川), 관하곡(館下谷), 하동(下洞)6개 동이었다.
적암면(赤巖面)은 소조전(所造田), 가례(加禮), 건치(巾峙), 지소(紙所), 구미(龜尾), 내동(內洞) 6개 동이다.
적암면을 중남면으로 개칭할 당시 동명은 다음과 같다. 구미(龜尾), 신촌(新村), 용전(龍田), 가례(加禮), 라동(羅洞), 회계(回溪), 지소(紙所), 지전(紙田), 송원(松元) 9개 동이었다.
동산면(東山面)은 하평(下坪), 상평(上坪), 관하(館下), 신천(新川), 두곡(杜谷), 임곡(林谷), 덕산(德山), 금천(錦川)이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남면(上南面)과 종도면(終道面), 중남면(中南面)을 합해서 매전면이 되었고 통합된 동은 아래와 같다.
동산동(東山洞)은 동창(東倉)과 매전(買田)을 합해서 만들어졌고, 면사무소(面事務所)와 경찰관 주재소(警官駐在所)가 있었다.
호화동(好化洞) 호고(好古)와 동화(東化)동을 합했다.
남양동(南陽洞)은 아음(牙音)과 임곡(壬谷), 사곡(沙谷)을 합해서 형성되었다.
장연동(長淵洞)은 길명(吉明), 계당(桂塘), 장수(長水), 고방(考坊), 합산(合山)을 합했다. 온막동(溫幕洞)은 온막(溫幕), 명대(明臺), 원전(院前)을 합해서 만든 동네이다.
예전동(禮田洞)은 가례(加禮)와 용전(龍田)을 합했다.
내동(內洞)은 상내동과 하내동을 합하였다.
지전동(紙田洞)은 지전(紙田)과 지소(紙所)를 합한 것이다.
구촌동(龜村洞)은 구촌(龜村), 덕정(德亭), 라음방(羅音坊)을 합했다.
송원동(松元洞)은 상하건티를 합했다.
용산동(龍山洞)은 용연(龍淵)과 중산(中山)을 합했다.
당호동(堂湖洞)은 옛날 동당(東堂)이다.
금곡동(金谷洞)은 금곡(金谷)과 법이(法耳)를 합했다.
하평동(下坪洞)은 광월(廣月), 모은(慕隱), 추곡(楸谷), 수무(修武), 박곡(珀谷)을 합 한 동이다.
상평동(上坪洞)은 계수(桂樹), 반곡(盤谷), 녹동(鹿洞), 원정자(院亭子)를 합한 동네이다. 금천동(金川洞)은 이사야(伊士也), 가자곡(茄子谷), 장상(場上), 잉애현(仍愛峴)을 합한 동이다.
관하동(館下洞)은 관곡(館谷), 신천(新川), 구미(龜尾)를 합했다.
두곡동(杜谷洞)은 두곡(杜谷), 임곡(林谷), 마지(馬旨)를 합했다.
덕산동(德山洞)은 상·하덕산을 합했다.
1989년에 동(洞)을 리(里)로 고쳐 오늘에 이른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까지 성현역 산하에 매전역(買田驛)이 있었는데 위치는 현재의 매전중학교자리가 그 자리이다.
[자연 환경]
매전면은 청도군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에는 금천면이 잇닿아 있고 서쪽은 청도읍과 경계를 하고 있다. 동남쪽은 밀양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경산시 남천면과 접하고 있다. 용각산 줄기를 접점으로해서 산동과 산서를 나누고 청도읍과 경계를 이룬다. 선의산은 경산과 경계를 짓고 있으며 동북으로는 금천면과 접하고 있다. 금천면에서 흘러온 운문천은 매전면 당호리를 거쳐 동산리를 지나면서 동창천이 된다. 지금은 지도상에 운문천은 없어지고 동창천(東倉川)으로 표기 되어 있다.
매전면은 두곡과 이사리로부터 구촌에 이르기 까지 상당히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으나 전형적인 산골지대이다. 이곳에서 발원하여 동산리에 이르는 계곡을 춘천(春川)이라 한다.
운문에서 흘러온 대천은 동산리 앞에서 합류하여 유천으로 흐르고 있고, 명대리 원앞 들은 산동지역에서는 가장 넓은 면적의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서복이와 당호리 원 앞들 내리와 지전리 구촌까지는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어 동창천의 물은 수리가 안정되게 흐르고 있기에 가뭄을 알지 못하는 지역이다. 그 외 지역은 대부분 밭농사를 짓고 있으며 경제작물로는 대추와 감 농사를 많이 하고 있다. 청도반시의 생산량은 매전면이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다.
[현황]
매전면은 청도읍의 동쪽 곰티재 넘어서 시작되고 금천면과 경계를 짓고 있으며. 2012년 7월 기준으로 면적은 130.04㎢이며. 총1,974가구에 4,082명[남자1,971명 여자2,111명]이 살고 있다. 관내에 남양리(南陽里), 당호리(堂湖里), 금곡리(金谷里), 동산리(東山里), 북지리(北旨里), 용산리(龍山里), 온막리(溫幕里), 호화리(好化里), 장연리(長淵里), 예전리(禮田里), 내리(內里), 지전리(紙田里), 송원리(松元里), 구촌리(龜村里), 하평리(下坪里), 상평리(上坪里), 관하리(館下里), 금천리(錦川里), 덕산리(德山里), 두곡리(杜谷里) 20개 법정리를 두고 있다. 매전면의 면사무소는 동산리에 있고 매전중학교가 동산리에 있다.
매전면 동산초등학교가 동산리에 있으며 문화재는 장연사지에 있는 동탑과 서탑이 보물 제 677호로 지정되어 있고 청도에서는 유일하게 당간지주가 있었던 절터인 장연사지는 동네 전체가 절터와 관련되어있고 사원재(思遠齋)는 장연사의 석조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장연사지에 있는 동탑을 보수할 때 발견된 외사리 장엄구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나무로 만들어진 합이어서 학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동산리(東山里)에는 천연기념물 제295호 매전면 처진 소나무가 있고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인 청도삼족대가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4호는 불령사 전탑인데 불령사 전탑은 문양전(紋樣塼)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이렇게 문양전으로 된 탑은 우리나라에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매전면 지전리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은 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비파형 동검의 출토 남방한계선이 청도군 매전면 지역이다.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은 오례산성 바로 아래 마을에서 출토되어 오례산성과 연결지어 선사시대를 유추하는 학자들이 많다. 매전면에 접근할 수 있는 도로는 청도에서 경주를 잇는 20번 국도(청려로)와 밀양시에서 매전을 잇는 58번 국도가 있으며 동곡으로 가는 도로 선암로는 매전면 남양교에서 갈라진다. 매전면을 각 성씨(姓氏)들의 문중 재사와 정자가 가장 많은 면(面)으로 마을마다 재실 한두 곳이 꼭 있다. 최근에는 매전면 지전에서 송원리를 거쳐 청도읍 원정리를 잇는 도로가 완공단계에 있다.
[참고 문헌]
이중경,『오산지』(1673)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전석봉, 『도주지』(1958)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8)
『청도군지』 (청도군, 1768)
『청도읍지』(청도군, 1730)
『각종지리지』 (조선전기)
『통계연보』(청도군, 2012)
『청도군지』 (청도군청, 1991)
『청도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9)
관하리
[정의]
청도군 매전면에 속해 있는 법정리이다.
[개설]
매전면 소재지에서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관하리(館下里)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구미와 신천과, 관하실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명칭 유래]
관하실 또는 관곡(館谷)으로 알려진 관하리에는 자연부락 5곳이 있다. 덕산리와 이어져 있는 곳은 구미동(龜尾洞)으로 덕산과 두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크게 구부러진 곳으로 마을 이름이 구미라고 하였다. 원정자(院亭子)는 옛날 산동으로 가는 길에 원(院)과 정자(亭子)나무가 있어서 원정자라고 하였다. 상방천(上防川)은 관하실 위쪽에 형성된 마을로 방천을 막아서 물줄기를 돌려 농경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상방천이라 했고, 신천은 옛날 이사리에서 관하 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지금의 형태로 바뀌면서 신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관하실은 관곡(館谷)으로 알려져 있을 뿐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1910년에 만들어진 지도에는 구미와 상방천의 표시는 없다. 1944년에 만들어진 『속오산지』에는 관하와 신천. 구미가 보이고 상방천 기록은 없다. 원정자에 관해서는 지도와 옛 문헌에는 없다. 그러나 현재 원정자라 불리는 장소에 시장과 보건소 등이 있고 개울건너에는 군수의 선정비가 2기나 있어 옛날의 현황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기록 이후의 일이라 여겨진다.
[형성 및 변천]
종도면 사무소가 있었던 관하리는 원(院)과 정자가 같이 있어서 원정자라고 불리는데 관곡(館谷)마을이 있고 나서 신천(新川)이 생겼던 것으로 여겨지나 상방천 등은 농경지를 따라 형성된 마을이라 여겨진다. 관곡리 남쪽 언덕에 고분군이 있어 원삼국시대를 비롯한 토기류가 많이 출토되어 도굴꾼이 한때 이 부근을 휩쓸고 지나갔다. 신천동 쪽에는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큰 절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은 분명하나 옛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인근 골짜기마다 사람이 넘쳐날 정도로 많던 시절 관하국민학교가 생겨서 문명퇴치에 크게 공헌을 하였으나 좀 더 나은 직장을 따라 젊은이들이 모두들 고향을 떠나고 지금은 폐교가 되어 건물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자연 환경]
대왕산과 선의산, 그리고 용각산이 동·서·북으로 높이 솟아 있고 남쪽으로 트여 있는 관하리는 구미와 원정자가 동서로 트여 있다. 경산시 남천면 신방리로 넘어 가는 길이 트여 있는 이곳은 비록 골짜기이기는 해도 비교적 넓은 농지를 보유하고 있다. 높지 않은 산자락에 일구어진 밭은 복숭아와 감나무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덕산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관하천을 따라 상평으로 내려가고 상평으로 통해서 사람들은 이 물줄기와 길을 같이 하며 산동지방으로 나다닌다. 동쪽으로는 상평리와 연계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덕산과 이어져 있다.
[현황]
자연부락이 여기저기 모여서 이루어진 관하리는 2012년 6월 현재 면적 5,356,536㎡이며 총가구수 145가구에 남자 158명 여자 16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원정자에는 보건진료지소가 있어 인근 주민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있다. 관하리는 동으로는 상평리와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덕산과 맞닿아 있다. 마을 뒤 켠인 이사리와 한 골에 있다. 관하리로 접근하려면 청도에서 경산으로 이어지는 20번 국도와 관하리에서 경산 신방리로 통하는 지역 간을 이어주는 관방로를 따라 접근할 수 있다.
관하리에는 경주인 이원(李沅) 선생을 모시는 강모재(講慕齋)와 경주인 이대수(李大壽) 선생을 모시는 추원재(追遠齋)를 비롯한 이진오(李震五) 선생이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우계당(友溪堂)이 있고 철성인 이단(李湍) 선생을 모시는 관하재(管下齋)와 이민(李珉) 선생을 모시는 신천재(新川齋)가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내고장 전통문화』(청도군,1981)
『청도군지』(청도군, 1991)
『대정7년의 지도』(조선총독부, 1918)
『청도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2000)
『통계연보』(청도군, 2012)
구촌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예전엔 적암면(赤巖面)에서 중남면(中南面)으로 다시 매전면(梅田面)으로 변천이 된 구촌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구미동(九尾洞)과 신촌동(新村洞)의 한 글자를 따서 구촌리가 되었다.
[명칭 유래]
구촌리는 오례산성 뒷 편에 있는 마을로 동창천이 심하게 굽이도는 마을이다. 구촌은 구미(龜尾)라고 부르는데 계곡이 심하게 굽이진 곳을 구미라 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신촌과 구미의 머릿글 한자씩 따서 구촌이라 하였다. 동산이라고 부르는 마을은 강의 동쪽 있기 때문에 동산이라 했고 나은방은 남쪽 방위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남방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새로 생긴 마을이기 때문에 신촌(新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정마을은 산 아래 큰 정자나무가 있어서 덕정(德亭)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시대에 적암면(赤巖面)이었으며 중남면(中南面)으로 다시 매전면(梅田面)으로 개칭된 구촌리는 원래 구미(龜尾)와 신촌(新村)이었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구촌으로 개칭된 마을이다. 마을의 형태는 동산(東山)과 덕정(德亭)은 지전리에서 강 건너에 있으며 신촌은 오례산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운문에서 내려온 강물이 충적토를 만들어 강가에 농경지를 만들어 주고 다시 지전리 앞에서 큰 굽이를 이루면서 구촌의 덕정마을 앞에서 크게 굽이쳐 흘러 사촌리로 들어간다. 조선 초기에 수헌 이중경 선생은 강 건너 언덕에 정자를 짓고 오대(烏臺)라고 하였으며 오대구곡가를 지어 운문천을 노래했다.
[자연 환경]
구촌리는 동창천을 깃점으로 했을 때 강 좌우로 나뉘어 있다. 동산이라고 부르는 곳은 강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동산이다. 이곳에서부터 강이 굽이쳐서 덕정 마을과 신촌 등 3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동산은 동창천이 굽이쳐서 흐르는 곳이라서 그런지 마을은 산쪽에 붙어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앞에는 경지정리를 해서 좁은 골짜기임에도 넓은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덕정마을은 청도 땅의 마지막이 되는 곳이다. 신촌마을은 오례산 바로 동남쪽에 높은 봉우리 아래 급경사면에 자리하고 있으며 경작지를 따라 하나둘 모여들어 늦게 마을이 형성되어서 신촌이라 하였고 마을 앞에는 상당히 넓은 경작지를 이루고 있지만 아직 경지정리가 되지 않은 곳이다.
[현황]
3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 되어 있는 구촌리는 2012년 7월 현재 면적5,597,653㎡이며 총가구수 79호에 남자78명 여자 97명이 살고 있으며 신촌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퇴비공장이 있어 마을 경제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동산에서 덕정까지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말끔하게 되어 있고 신촌쪽의 경작지는 아직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오례산 산자락과 동산마을 앞뒤 산자락에 형성된 비탈밭은 감과 대추농사를 많이 짓고 있어 구촌리는 여러 가지 과수 작물을 많이 생산하고 있는 편이다.
인접한 마을로는 북쪽에는 지전리인 절골과 인접해 있고 남쪽에는 사촌리와 맞닿아있다. 동쪽으로는 동창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동창천 건너에는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가 있다. 접근 도로는 58번 지방도를 따라 25번국도와 20번 국도를 연결하는 청매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외길이다.
[전설]
오례산성은 신촌의 뒷산으로 산성(山城)의 축조년대는 알 수 없다. 이 산성은 동쪽에는 구촌과 지전 그리고 북쪽으로는 송원과 서쪽으로는 청도읍 거연리를 아우르고 있다. 삼면(三面)이 깎아지른 절벽이고 서쪽만 경사가 급한 토성으로 만들어져 있다. 지난날 경주박물관 학예사들이 사촌리 발굴현장에서 산성을 답사(踏査)를 하고는 고구려식(高句麗式)의 산성을 본 땄다는 말을 하였다. 이 오례산성에 대해서 전하는 말에는 신라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며 고려 태조왕건과 보양국사의 전설도 이곳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그 때까지만 하여도 경산과 밀양의 군량미를 비축(備蓄)하였던 곳이라 하였으나 세월이 지나 비워졌다가 임란 전에 김성일이 일본에 갔다 와서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전언에 의해서 그 당시 충청도(忠淸道) 방어사(防禦史) 박명현(朴明賢)이 조정의 명에 의하여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경인(庚寅)신묘(辛卯)양년에 걸쳐 수축을 하다가 다하지 못하고 임란(壬亂)을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어 상당히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9,980척(4,6km)이고 높이가 7척이며 성안에 3곳의 개울과 5곳의 저수지가 있고 3곳의 샘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전에 이서국의 패망과 강 건너 마전암(馬轉巖)의 전설은 이서국의 군사들과 신라의 군사들이 마지막 한바탕 전쟁에서 이서국의 군사들이 신라군에게 쫓겨 올 때 어둠이 깔려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말을 달려 마전암에서 급하게 꺾어 돌지를 못하고 앞으로 내딛어 낭떠러지에 떨어져 말과 군사가 함께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마전암(馬轉巖)이 되었다고 하며 이때 이서국의 군사들이 패전을 하고 이서국이 망했다는 전설이 깃들어있는 곳이다.
구촌리에는 인동인 장열(張烈)선생을 모시는 영모재(永慕齋)와 밀양 박씨들의 종사인 동암재(銅庵齋)가 있다.
[참고 문헌]
『청도군 도로명 신주소안내지도』(청도군, 2012.)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정7년 지도』(조선총독부, 1918)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
『청도군지』(청도군, 1991)
『청도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9)
『통계연보』(청도군, 2012)
금곡리(매전면)
[정의]
청도군 매전면에 속해 있는 법정리이다.
[개설]
금곡리는 금과 철광이 나왔다고 해서 금골(金谷)이라 하며 쇠골이라고도 하였다. 담안이라도 불리는 이 마을과 같이 담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곳은 청도군에 여러 곳이 있다. 담안이라고 불리는 곳에는 장인(匠人)들이 살았던 곳인데 그중 금곡리의 담안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다른 지역에는 자기소(磁器所)가 있는 곳이 더러 있다.
버꾸(법이(法耳))마을로 올라가는 계곡 좌우로 철광을 채취했던 곳이 있다. 해방 전. 후로 텡그스텐을 캐던 광산이 있었는데 채산성 관계로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동창천 언덕위에 삼족당 김대유선생께서 별서(別墅)를 지어 후학을 지도하던 곳을 삼족대(三足臺)라 하고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는 우곡(牛谷)은 즉 쇠골이다. 쇠(金)과 쇠(牛)의 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족대 앞에 있는 소를 우연(牛淵)이라 했는데 삼족당 선생께서 거처하면서 우연(愚淵)이라고 바꿨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명칭 유래]
금곡은 쇠실 또는 쇠골이라 하는데 철광맥이 있어서 쇠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이 부근은 이서국 당시와 신라에 복속된 직후에 솔이산현(率伊山縣)이 되었다가 대성군(大城郡)이 되었을 때 소산현(蘇山縣)으로 바꿔진 곳이다. 부근에는 토기편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삼족당 김대유 선생이 칠원현감으로 재직하다 돌아와서 삼족대를 짓고 이곳에서 살다가 여생을 마치고 마을 뒤에 잠들어 있는 곳이다. 마을에는 특별한 다른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 삼족당과 관련된 것이다.
[자연 환경]
토함산(통내산)을 앞쪽으로 두고 청려로 (20번 국도)가 동네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는 금곡리는 동곡재와 어성산을 뒤로 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는 동창천이 흐르고 있어 남저북고(南底北高)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다. 버꾸(법이)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동창천에서 만나서 우연을 이루고 있는 언덕위에 삼족대가 있다. 법이(버꾸)에도 농지가 별로 없고 담안 역시 농지가 없으나 윗마을과 아랫마을에는 산을 개간하여 과수를 전업으로 하고 있다.
[현황]
2012년 7월 현재 면적 8,815,622㎡의 면적에 79세대에 인구는 남82명 여자75명이 거주하고 있다.
청려로(20번국도)가 지나가는 이곳은 매전교 삼거리에서 쇠실과 남양으로 갈려지는 곳이다. 우연(愚淵)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이 이곳을 찾아 해수욕장을 방불케 하는 곳이다. 이곳 우연에는 물속 깊은 곳에 회돌이가 생겨 1년에 한두 명씩 희생이 되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조계종에 속한 청계사가 있어 결손가정의 아동들이 약 20명이 보호되고 있다.
자연부락인 버꾸는 마을은 없어지고 1가구가 염소를 기르며 살아가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매전면사무소가 있는 동산리에서 동곡으로 넘어가는 동곡재 아래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의 본동이라 할 수 있는 담안과 매전교 다리에서 동곡재 쪽으로 가다보면 길 위에 형성된 마을을 아랫마을이라 하고 그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마을이라고 한다.
동창천 언덕위에 삼족대(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가 있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으며. 이율곡 선생의 시편이 남아 있다. 우연에는 물이 깊어 낚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경작지는 논은 없고 비탈밭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토함산(통내산) 뒤편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금곡리에는 김대유 선생의 묘재인 유현재(惟賢齋)와 선생의 별장인 삼족대(三足臺)가 있고
철성 이씨들의 종사인 삼호재(三湖齋)가 있다.
[참고 문헌]
이중경,『오산지』(1673)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내고장 전통문화』(청도군, 1981)
『청도군지』(청도군, 1982)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청도통계년표』(청도군.2012.7)
금천리(매전면)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밀양의 비입지로 오랬동안 있었다가 청도군으로 이관된 마을이다.
[명칭 유래]
금천리(錦川里)는 조선조에는 밀양군 고미면(古弥面) 이사리(伊士里)였다가 다시 고미면이 상동면(上東面)으로 바뀌었으며 1896년 을미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청도군으로 이관된 곳이다.
자연부락으로는 이사야(伊士也), 가자곡(茄子谷), 장상(場上), 잉애현(仍愛峴)을 합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살, 이사야]
금천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이사리는 옛 기록은 이사야(伊士也)로 기록되어 있으며 개울을 중심으로 비탈진 곳에 자리하였으며 동·서로 형성된 마을인데 동쪽은 음지라 하고 서쪽을 양지라 한다.
[가자골]
마을에서 아래쪽을 내려오다 왼쪽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로서 가쪽에 있다고 가자골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당]
옛 기록에는 장상(場上)이라고 표기하였으며 골짜기의 마지막 부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마당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애태]
잉애현(仍愛峴)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이애태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은 아는 사람이 없다.
[형성 및 변천]
옛날의 지명은 이사야로 된 곳과 두곡(杜谷)으로 된 곳이 있으며 밀주지를 편찬할 때 이 두 곳을 따로 적지 않고 두곡으로 또는 이사야로 따로 따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청도군 매전면 금천리로 통폐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 환경]
경산시 남천면 신방리와 고개를 마주하여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천리는 대왕산과 선의산 사이에 있으며 큰 골짜기를 이루고 있으나 경작지가 많지 않다. 마~당 고개를 넘어면 경산의 남산리로 가는 길이 있고 잉애태를 넘어면 경산시 신방리로 해서 경산과 대구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 근래에는 교통이 편리해지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청도지역의 생활권이 되었으나 보행으로 다닐 때에는 경산이 생활권이다 싶이 했다. 남쪽으로는 관하리가 있으며 골짜기 내에는 비탈밭과 농경지가 있기는 하지만 논농사에는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대부분 감 농사에 의존하는 편이다.
[현황]
마을이 길과 계곡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가운데 자연부락으로 있는 이사리는 동서로 계곡을 사이에 두고 음지와 양지로 마을이 나뉘어져 있으며 2012년7월 현재를 중심으로 면적7,073,700㎡이며 총가구수 106가구에 남자112명 여자118명이 살고 있다. 예전엔 논농사를 중심으로 살았으나 지금은 감나무 밭으로 바꾸고 감 수확이 가정경제의 주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마을에는 감 말랭이를 크게 하는 집이 몇 집 있다. 접근하는 길은 20번 국도(청로로)중에 관하실에서 시작되는 관방로(경산 신방)가 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인접한 자연부락으로는 남쪽으로는 관하리가 있고 동쪽과 서쪽은 온통 산으로 점철되어 있는 산골 오지이다. 산너머에는 경산시 남천면 신방리가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정7년 지도』(조선총독부, 1918)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
『청도군지』 (청도군청, 1991)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8)
『청도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89)
『마을지명유래지』 (청도문화원, 1996)
『통계연보』(청도군, 2012)
남양리
[정의]
청도군 매전면에 속해 있는 법정리이다.
[개설]
남양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아음동, 임곡동을 합해서 남양리라 하였다가 1952년에 1.2동을 나누어졌다. 1리는 상바위, 서복이, 굴밭, 골마, 안골, 사곡 등 6개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2리인 임실(壬谷)에는 큰마, 아랫마, 점뒤, 동편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칭 유래]
[상암(象巖)]
동창에서 남양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산비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코끼리 바위가 있어서 상암이라고 한다.
[율전(栗田=밤밭)]
동창천의 옛 들을 앞에 두고 있으며 마을 입구 들판에 방천이 완벽하지 못했던 예전에 강가에 밤나무를 많이 심어 방천을 대신했고 밤나무 밭이 되어서 밤밭이라고 했다고 한다.
[서복(鼠伏) ]
1리의 중심마을로 길가에 위치하고 있다. 서복(鼠伏)은 뒤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 들이 아무리 가물어도 흉작을 모르는 들이다. 그래서 쥐가 두지(뒤주) 앞에서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고 이름 붙이고 마을 앞 바위를 쥐 바위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븨기는 물이 빠지지 않는 논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에서 유래 된 것이다. 운문천에서 내려오는 강바닥의 높이가 현재의 논바닥 보다 높다. 그리고 남양천에서 내려오는 물도 역시 아래를 막아 주기 때문에 들은 항상 늪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시븨기를 한문으로 기록하면서 서복이라고 했다.
[사곡(沙谷)]
1리 가운데 가장 깊숙이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지금은 정자나무 쪽으로 모두 이거하고 있지만 1982년 폭우가 있기 이전에는 안쪽에 있었고 사곡이란 사기(沙器)그릇을 만들었던 곳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마을 안쪽에는 3곳에 사기요지가 남아있고 사기편과 도지미(받침)가 많이 남아있다.
[애암(牙音)]
지금은 아음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옛 지명에는 애암(崖巖)으로 표기 된 것을 볼 수 있다.
[임실(壬谷)]
큰마. 즉 임실의 가장 중심마을이다. 아랫마와 점뒤 마을보다 크기 때문에 큰마라고 불리고 있다.
점뒤 마을은 원래 당목이 있는 안쪽 골에 있었으나 해방 후 시국이 어지러울 때 지방에 자생한 공비(빨갱이)들을 피해서 지금의 동리로 옮겨오면서부터 점(옹기)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 환경]
남양리는 금천면과 인접하고 있는 곳이다. 여러 개의 자연부락이 합해져서 형성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 붙여진 이름이 남양리이다.
마을 앞쪽으로는 운문천이 굽이치는 곳에 위치한 시븨기가 있고 뒤쪽엔 구만산이 높이 솟아 있다. 마을입구에 마을회관이 있으며 대안학교가 서서히 성장하고 있다. 남양리는 오봉리를 지나서 형성된 임실 쪽의 마을과 서복이(시븨기)를 깃점으로 해서 형성된 서복이 있고 서복이 앞쪽의 길로 해서 들어가는 남양길을 따라 골안으로 들어가는 아음 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서곡지가 있는 아음마을의 길을 따라 넘어 가면 장연리 장수골 마을로 들어가서 장연사지 앞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현황]
골골마다 자연부락이 있어 여러 곳의 마을이 한 마을이 되었으며 면적 넓고 가옥수가 많아 인구도 많은 편이다. 2012년 7월 현재 면적 12,836,645㎡ 184세대에 남자196명 여자 201명이 거주하고 있다. 동쪽은 구만산이 높이 솟아 밀양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남쪽으로는 구만산 줄기를 따라 매전면 장연리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서쪽은 매전면 동산리와 동창천을 경계로 하고 있고 북쪽은 오봉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접근할 수 있는 도로는 선암로에서 들어오는 길이 있고 남쪽인 장연리에서 임도를 따라 넘어 갈 수 있으나 오지 중의 오지이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교남지』(청도편, 1935)
『청도군지』(청도군.1991)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각종지리지』 (조선전기)
내리(매전면)
[정의]
청도군 매전면에 소속된 법정리이다.
[개설]
赤岩面에서 中南面이 되었다가 1914年 地方行政區域統廢合때 羅洞, 回溪洞을 合하여 內洞이 되었다가 1954年에 다시 1, 2洞으로 分洞이 되었다.
[명칭 유래]
애미각단 안마을을 합해서 羅洞이라 하였으며 1914년 이전에 중남면일 때는 면사무소가 있었던 동네이다. 1리인 라동을 바깥 내동으로 부른다.
회계동은 마을 앞을 흐르는 내(川)가 산을 감돌아 나가기 때문에 개천이 돌아 나간다는 뜻에서 회계라고 한다. 이 마을은 안동 권씨와 경주최씨가 고려 때 개성에서 조정의 화를 피해서 내려와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성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 말을 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형성 및 변천]
1720년 경 적암면(赤巖面)에서 1896년 행정구역개편 때 중남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매전면으로 합쳐졌다.
[자연 환경]
억산의 지맥이 구만산에서 뻗은 육화산 아래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동창천 안쪽에 자리한 내리는 계곡사이에 형성된 마을로 안마을과 바깥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2012년 7월 현재 면적 6,667,925㎡ 이며 내리는 1, 2리로 나누어져 있다. 총 세대수 87가구에 인구 남자73명 여자 95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안쪽과 바깥쪽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경작면적은 논은 별로 없고 주로 비탈진 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추농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인접한 마을로는 남쪽은 밀양시 상동면 과 접해 있고 동쪽은 육화산이 솟아 있는 산등을 경계로 밀양과 접해 있다. 서쪽은 동창천을 경계로 구촌리와 경계를 짓고 있으며 북쪽은 산을 경계로 장연리와 접해 있다.
내리에는 경주인(慶州人) 최수필(崔守弼) 선생을 추모하는 벌산재(閥山齋)와 안동인(安東人) 권상중(權尙中) 선생을 모시는 적암재(赤巖齋)가 있으며 의흥인 예신겸(芮愼謙) 선생을 모시는 황강재(黃岡齋)와 의흥인 예덕기(芮德基) 선생과 예서필(芮瑞苾) 선생을 모시는 춘장재(春莊齋)와 김해인 김봉환(金鳳煥) 선생을 모시는 경동재(景東齋)가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교남지』(청도편, 1935)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청도군지』(청도군청, 1982)
『각종지리지』(조선전기)
『통계연보』(청도군, 2012)
향토사학회보(1998. 답사보고서)
당호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매전면 금곡리와 금천리 사이에 있으며 동창천의 우연(愚淵)을 안고 있어서 당호리이다.
[명칭 유래]
당호리(堂湖里)의 원래 명칭은 동당(東堂)이다. 호(湖)는 삼족당 김대유 선생께서 우연에 정자를 짓고 삼족대라고 했으며 우연(牛淵)을 우연(愚淵)으로 고쳐 불렀다. 우연(牛淵)은 소못이고 소못은 금곡(金谷)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해지는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당이란 삼족당 선생께서 계시는 동쪽에 있어서 동당(東堂)이라고 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상남면이었던 당호리는 동창천을 따라 생긴 경작지를 경영하고자 하기 위해서 하나둘 모여서 살아온 마을이며 윗 동당과 아랫 동당이 개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 건너에도 몇 집이 있으나 마을을 이루고 사는 것이 아니고 경작지를 중심으로 했다가 지금은 식당을 경영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몇 집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의 한부대장이었던 박경윤 선생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으며 첫 싸움에서 창(槍)한번 들어보지도 못하고 왜군의 조총에 의해 무너졌던 곳이지만 이곳으로부터 시작해서 의병들의 활약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을 뒷산에는 의성산성을 쌓고 의병들이 활약했으며 종내는 청도지역에는 왜병들이 접근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연 환경]
대곡산 자락에 동창천을 마주하고 앉은 당호리는 강시불(강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구에 비해 넓은 면적의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다. 운문천이 넓은 면적으로 내려오다 삼족당이 있는 언덕에서 크게 굽어 지나간다. 산의 끝 부분 바위에 마주치면서 큰 호수를 이루고 다시 내려가는 곳부터가 동창천이다. 운문천의 넉넉한 물줄기는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이다. 경작지는 윗 동당에서 아랫 동당까지 강변에 형성되어 있고 경지 정리가 말끔히 된 곳이다. 강폭은 넓지만 마을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별로 넓지 않고 또 마을은 일부러 들어가지 않으면 지나칠 일이 없을 정도로 양지바르고 한적한 마을이다.
[현황]
윗 동당과 아랫 동당을 합한 당호리는 2012년 7월 현재를 기준으로 면적 2,667,695㎡이며 총 가구수 39호에 남자 42호, 여자 46명이 거주하고 있다. 강가에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이곳은 여름이면 피서인파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다. 동창천 가운데에서 시작이 되는 이곳에는 다슬기가 많아서 봄부터 가을까지 다슬기 잡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인접한 마을로는 서쪽으로는 매전면 금곡리와 삼족대를 사이에 경계를 이루고 동으로는 남양리와 접해 있다. 북쪽에는 금천면과 접해 있는 오롯이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운문천이 흐르고 다리를 건너면 선암로를 따라 매전면 소재지와 금천면으로 가는 길이 유일하게 접하고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삼우정실기』(삼우정실기 편찬위원회. 200?)
『십사의사록』(선암서원. 17
『청도군지』(청도군, 1991)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대정7년 지도』(조선총독부, 1918)
『통계연보』(청도군, 2012)
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8)
덕산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곰티재 아래 형성된 덕산리는 외종도면에서 종도면으로 속했다가 동상면으로 바뀌었으며 2차 행정구역 통폐합 때 매전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명칭 유래]
덕산리는 윗 마을과 아랫 마을로 형성되었다가 자연부락이 행정구역 통폐합 때 덕산으로 합했다. 덕산이라는 이름은 높은 산 아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여러 곳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부락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송정리와 새각단. 곰태. 개정자. 고총리. 밤실. 이 있다.
송정리는 옛날 청도에서 곰티재를 넘어 산동지역을 갈 때 이곳에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송정이라고 했으며 송정리의 윗마을에 새로 생긴 마을을 가리켜 새각단이라고 불렀다. 곰태는 곰티재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재 이름과 같이 곰태마을이다 곰태또는 곰티는 전설과는 달리 굼티기 즉 후미진 곳이라는 뜻이다 골이 깊고 숲이 우거지면 으슥한 지역이라 곰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하고 있다. 개정자는 사촌(沙村)이라고도 부르는데 개정자란 좋은 것을 빼고 나쁜 것을 말할 때 개자를 붙인다. 예를 들면 먹을 수 없는 가죽을 개가죽 이라 부르듯 송정리와 가까워서 정자는 있어도 정상적이 아니라는 뜻으로 개정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밤실에는 밤나무를 많이 심어서 밤골 또는 밤실이라고 불렀다.
[형성 및 변천]
동상면(東上面)과 상남면(上南面) 중남면(中南面)을 합해서 매전면(梅田面)으로 하였는데 덕산리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었으며 자연부락은 모두 6곳이 있다. 옛날의 발자취를 답사해보면 가는 곳마다 절과 암자가 있었던 곳이 많이 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현지에는 옛 터가 남아 있고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덕산이 있는 이곳의 옛 이야기 중에 곰티재의 전설은 꽤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곰티재로 다니던 옛 길은 덕산에서 운산으로 넘나드는 길이었으나 왜정시대 신작로가 생기면서 부야리 골짝 쇠실로 해서 넘나들었다. 자동차가 통행이 많아지면서 현지의 길로 다시 왕복 2차선으로 만들어 졌었다. 겨울이 오면 눈비로 인해 얼음이 얼면 곰티재는 음달이라 사고가 많아 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던 곰티재 터널이 2013년을 완공목표로 지금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자연 환경]
선의산과 용각산 사이에 생긴 골짜기가 두곡리를 거쳐 덕산리로 내려오고, 곰티재에서 내려온 물도 덕산리에서 만난다. 여기에서 생긴 충적토가 경작지가 된 곳으로 골짜기에 비해서 넓은 면적이 경작지이다. 양쪽 골짜기 좌우로 일구어진 밭은 비탈밭을 이루고 있고 덕산리는 3거리로 산동에서 청도로 가는 20번국도가 있고 옛날 두곡리를 거쳐 성현으로 가는 길이 있으며 산동으로 가는 길 몫이 덕산리이다.
[현황]
동쪽에는 옛 중산리에 오션힐스 컨트리클럽의 골프장이 최근에 들어 영업을 하고 있고 남쪽은 용각산 지맥인 곰티재가 높이 솟아 있는 남쪽은 청도읍 운산리와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용각산이 높이 솟아있다. 북쪽에는 관하리와 서북쪽에는 두곡리가 있으며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계곡 변에 위치한 덕산리는 20번국도(청려대로)변에 있고, 6곳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12년 7월 현재 면적6,366,705㎡이며 총가구수98호이고 남자107명 여자103명이 살고 있다. 넓은 면적의 비탈 밭을 가꾸며 복숭아와 감나무 그리고 자두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길가에는 농산물을 직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현재 산동인들의 숙원사업이었던 곰티재 터널이 완공단계에 있다. 덕산리에는 감 막걸리 공장이 특허를 내어 현재 영업 중에 있다.
덕산리에는 철성 이씨 문중의 종사인 필유재(必有齋)가 있고 파평인 윤종충(尹宗忠) 선생을 모시는 태안재(泰安齋)가 있으며 성주 도씨들의 재사인 덕원재(德源齋)가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정7년 지도』(조선총독부, 1918)
『청도군지』 (청도군청, 1991)
『청도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9)
『통계연보』(청도군, 2012)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
동산리
[정의]
청도군 매전면에 소속된 법정리이다.
[개설]
매전면 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파출소와 농협이 있는 소재지 이다.
옛날 이서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 산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원이 있었던 곳이다. 마을 뒤에는 토함산이 있어 옛 이름은 솔이산성(率伊山城)이 뒷날 소산현(蘇山縣)으로 바꿔 부르던 곳이기도 하다.
[명칭 유래]
<동창(東倉)>
동창은 신동창과 구동창이 있다.
동창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조선초기에 박하담 선생과 김대유 선생의 권유로 옛 절을 창고로 만들어 곰티재 동쪽에 있는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 세곡(稅穀)을 보관하였다가 이른 봄에 구휼에 사용하였으므로 동창(東倉)이라 하였던 것이 구동창(舊東倉)이다. 뒷날 창고의 자리를 옮겨 신동창(新東倉)이라 하였고 행정구역 개편 때 동산리라고 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신기마을과 매전 쇳골안이 합쳐진 마을이다.
<신기마을>
신기마을은 하평리에서 동산리로 가는 길 오른쪽 등성이에 형성된 마을이다.
<매전마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이 있었던 곳으로 매전역(買田驛)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매전중학교가 자리한 이 곳은 오랫동안 역촌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의 매전면은 이 이름을 따고 한자로 매전(買田)을(梅田)으로 바꿔표기 한 것이다.
<쇳골안>
지금은 동산기도원이 있는 부근이다. 이 곳은 지금은 학명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마을에 옛날에 자철이 생산되었기에 쇠골안이라고 부른다고 하나 동산기도원 바로 앞에 토기요지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바위에 성혈이 새겨진 곳이 5곳이 있다.
[형성 및 변천]
이서국 당시에 솔이산성으로 시작하여 신라 때에는 소산현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매전역이 있었으며 조선 초기에 박하담, 김대유 선생의 권유에 의해 사창(社倉)을 마련하여 산동지역 백성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두 분의 사후에 사창(司倉) 옆에 향현사(鄕賢祠)라는 사당을 지어 두 분을 향사 하였다. 황희 정승의 손자 황응규가 군수로 와서 도대체 어떤 분들 이길래 사창 옆에 사당을 지어 향사를 지내느냐고 지역의 부로(父老)들에게 물으니 지역의 부로들은 박하담, 김대유 선생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런 분이라면 당연히 향현(鄕賢)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박하담 선생의 장구지소였던 신지리에 있는 선암사(仙巖寺)를 없애고 선암서원(仙巖書院)을 지어 두 분을 모셨다고 한다.
[자연 환경]
토함산(土含山)(통내산)을 배산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은 동쪽으로는 동창천이 흐르고 있고 서쪽으로는 관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산2리 마을 뒤에는 효양산이 높이 솟아 있다. 마을 앞에는 들판이 펼쳐저 있어서 생활의 터전을 만들고 있다. 토함산 앞자락(남쪽) 낮으막한 곳에는 산지를 개간하여 계단식 밭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 동창이 있어 이 앞을 흐르는 천(川)을 동창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현황]
2012년 7월 현재를 기준으로 면적은 5,140,725㎡이며 총 240세대에 남자 224명 여자 137명이 거주하고 있다.
매전면사무소, 매전우체국, 매전중학교, 동산초등학교, 매전파출소, 매전보건소, 매전농협 등이 모여 있는 동산리는 매전면의 중심지이다.
옛 신동창(新東倉)이 있었던 자리는 매전농협 농기구 수리센터가 자리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295호 동산리 처진소나무가 있다. 처진소나무 옆에는 군수 송요경의 비석이 옛 징검다리 시작점에 있으며. 그 아래 운수정이 있다.
20번국도(청려로)와 58번지방도의 갈림길이 있어 3거리를 형성하고 있는 매전면의 중심지이다. 동산기도원과 청도동산의원이 있다. 동산리에는 운수정이 있는데 두 곳이 있다. 하나는 고성 이씨들의 소유인 운수정(雲水亭)과 다른 하나는 밀양 박씨들의 소유인 운수정(雲水亭)이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교남지』(청도편, 1935)
『청도군지 (청도군, 1768)
『각종지리지』(조선전기)
『통계연보』(청도군, 2012)
두곡리
[정의]
청도군 매전면에 속해 있는 법정리이다.
[개설]
두곡리는 외종도면(外終道面) 에서 동상면(東上面)으로 다시 종도면(終道面)으로 이어지다가 1931년에 매전면(梅田面)에 편입되었고 두곡(杜谷)과 임곡(林谷)을 통합(統合)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명칭 유래]
조선시대에는 밀양군 고미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청도로 이관된 마을이다.
1. 디실
두실이라고도 하는 이 마을은 선의산과 용각산의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 아주 두메산골이라는 표현을 한문으로 해서 두곡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2. 숲실
두곡리에서는 큰 마을 다음으로 큰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전은 임곡동으로 독립된 마을이었다. 두곡리의 큰 골짜기 중의 하나인 암자골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3. 중각단
각단이란 한 마을의 동네에서 약간 떨어진 곳을 일컫는 말로 가운데 있다는 뜻이 된다. 암자골에서 양지바른 이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아랫마을과 암자골의 중간에 있다고 해서 중각단이라 한다.
4. 절골
옛날에 절이 있어서 절골이라고 부른다는데 지금은 2가구가 살고 있으며 옛터는 모두 비어있고 시누대가 점령하고 있다.
이 절골 안쪽에 “말마리” 라고 해서 경산시 남천면 하도리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몇집이 살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고개만 있을 뿐 산을 넘나드는 사람도 집도 없어진지 오래이다.
5. 암자골
숲실 안쪽에 선의산 아래쪽에 암자가 있어서 암자골이라 불렀다는데 암자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농지로 바뀌었다.
암자골은 선의산과 용각산의 중간에 있어 해방전후로 해서 지역의 빨치산 때문에 마을을 비우고 현재의 숲실 옆 새각단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이 마을에는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로 통하는 고갯길이 있다.
[형성 및 변천]
청도군 임내면서도 밀양의 비입지였던 이곳은 청도군으로 편입되면서 외종도면에 다시 동상면으로 이어지다가 종도면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매전면으로 편입된 마을이다. 이 마을도 청도의 유수한 마을과 같이 여러 개의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자연 환경]
용각산과 선의산 중간에 불쑥나온 산괴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비교적 높은 지대에 형성된 마을이면서 밭농사보다는 다락논을 중심으로 논농사를 많이 하는 마을이다.
[현황]
2012년 현재 두곡마을은 총면적8,689,748㎡에 세대수 90가구, 남자85명 여자80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은 서쪽인 용각산에서 발원한 물이 마을을 거쳐 덕산리에서 곰티재에서 내려온 물과 합수되어 상평으로 내려간다. 서쪽에는 용각산이 높게 솟아 있고 서북쪽에는 선이산이 높게 솟아 있다. 남쪽과 북쪽은 산이 있어서 골을 이룬다. 동쪽으로는 덕산리가 있어 그야말로 두메산골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을은 산골 깊숙이 자리잡은 마을답게 아직은 개발이 되지 아니한 자연부락의 형태로 남아 있는 마을이다.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창녕에서부터 청도와 경주를 잇는 20번국도(청려로)가 유일하며 최근에는 덕산마을 앞에서 우회도로로 들어오는 길이 새로 생겼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밀양지』(밀양문화원, 1987)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8)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교남지』(청도편, 1935)
『청도군지』(청도군, 1982)
『청도통계년보』(청도군, 2012)
『각종지리지』(조선시대 군지 및 읍지)
북지리
[정의]
청도군 매전면에 속해있는 법정리이다.
[개설]
조선 후기까지 상남면에 소속된 마을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매전면으로 편입되었다.
[명칭 유래]
북지란 뒷마을이라는 뜻이 된다. 이 마을은 명대서원이 있었던 곳에서 뒷마을이기 때문에 북지(北旨)가 되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북지에는 조탑(造塔)골이 있다. 조탑골은 마을에서는 조오탑골이라고 하는데. 그 곳에는 기와를 굽었던 기와굴이 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 용산리에 있는 불영사의 전탑인 문전(紋甎)이 만들어진 곳이 이 마을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골짜기 이름이 조탑(造塔)골이고 조탑골 에는 기와를 구웠던 옛터가 마을 앞에 아직도 남아 있다. 탑을 만든 곳이기 때문에 조탑골인데 그 옆에는 지금은 입석으로 만들어 놓은 돌이 있다 이 돌도 마을 앞길을 넓힐 때 옮겨놓은 것인데 이 상석(上石)을 옮기려고 들어 올리니까. 그 안에는 돌도끼, 돌화살촉 등 선사시대의 유물이 나왔다고 하며 그래서 하부에 있는 것들은 당시 발굴한 곳에서 가져가고 상석은 지금의 자리에 세워 두었다.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이 돌 앞에 정월달이면 정성을 들이기 위해 음식을 차려두고 비손을 한다.
[전설]
임진왜란 때 어떤 부부(夫婦)가 난(亂)을 피해 이별을 하면서 난(亂)이 끝나고 나면 이 바위아래에서 만나자고 하고는 헤어졌었는데, 난(亂)이 끝나고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아내가 이빨로 손가락을 깨물어 바위에다 무심(無心)이라는 글을 쓰고는 동창천 강물에 뛰어 들어 운명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엄청나게 지난 지금도 그 바위에 막걸리를 붓고 손을 비비면 그 글이 새겨졌던 그 자리에는 알콜을 피에 묻혔을 때 부글거리듯 부글부글 끓어오른다고 하며 그 자리를 무심디미라고 한다.
[자연 환경]
효양산을 뒷 배경으로 하고 동창천이 앞을 흐르는 언덕 위 동도렸한 골짜구니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앞산은 자미산이 마을 앞을 가로 막고 있으며 58번 지방도가 마을 앞으로 해서 명대리로 넘어 간다. 다락논과 경사진 밭이 주로 경작지로 되어 있어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현황]
2012년 7월을 기점으로 총면적 2,122,925㎡ 46가구에 남자 45명 여자54명이 거주하고 있는 전형적인 마을로 남쪽은 자미산(북두칠성)이 마을 앞을 가로 막고 있고 마을 뒷 쪽은 산을 등지고 동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동쪽에는 동창천을 경계로 호화리를 곁에 두고 있다. 서쪽은 언덕을 경계로 하여 용산리와 이웃하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북지리에는 수법사라는 최근에 만들어진 절이 하나 있으며, 연일 정씨의 선재인 경모재(敬慕齋)가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교남지』(청도편, 1935)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청도군지』(청도군, 1982)
『통계연보』(청도군, 2012)
송원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적암면(赤巖面)에서 중남면(中南面)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매전면(梅田面)으로 편입되었다.
[명칭 유래]
명칭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전하는 말은 없다. 다만 옛날부터 내려오던 이름은 건치(巾峙)라쓰고 건티라고 불렀으며 1832년 청도읍 지도에는 건치리(巾峙里)로 표기되어 있으나 1912년 지방행정 명칭일람에는 송원동(松元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4년의 기록인 속오산지에는 상·하건치(上下楗峙)를 합하고 송원으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윗건티. 아랫건티로 불리던 송원리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었고 그 중간에 있는 마을을 중마라 불렀다. 윗건티인 윗마는 지금 사람이 살지 않는 골짜기로 변해 있고 중마와 아랫건티만 사람이 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행정구역으로 보다는 고개(재)로 더 많이 알려진 건티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중남면(中南面)에서 매전면(梅田面)으로 편입된 곳이다. 산곡 높은 곳에 위치한 건티마을에 전하는 말로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동네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거져 지나가서 건티라 했다는 웃지 못 할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윗마을은 골짜기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직장따라 하나둘 고향을 떠나서 지금은 그 터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자연 환경]
오혜산성(烏惠山城) 배후계곡에 위치한 송원리는 청도에서는 가장 높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계곡과 계곡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논경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지난날 산동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청도에 볼 일이 있을 때는 원정에서 건티재를 통하여 넘나들었다. 서·남·북이 산중의 산이고 동쪽으로만 열려있는 계곡이 깊은 골짜기 위에 자리잡고 있다. 지전리에서 윗건티까지는 약 5km정도이고 본 마을인 아랫건티까지는 약2km가 넘는다.
[현황]
오혜산 높은 곳에 위치한 송원리는 2012년 7월 현재를 기준으로 면적은8,906,816㎡이고 총가구수 50가구에 남자44명 여자 47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산중턱에 자리한 마을답게 논은 없고 대부분 비탈진 밭을 이용하여 감나무를 심고 감 수확이 경제의 주를 이룬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객지에서 공직생활을 하거나 직장을 따라 살고 현지에는 연세많은 어르신들이 살고 있다. 송원리에는 경주 이씨 문중재사인 송강재(松岡齋)가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정7년 지도』(조선총독부, 1918)
『청도읍지』(청도군, 1832)
『청도군지』 (청도군청, 1991)
『청도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9)
『통계연보』(청도군, 2012)
예전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례동(加禮洞)과 용전동(龍田洞)을 합해서 예전동(禮田洞)이 되었다.
[명칭 유래]
용당산 앞 운문천을 끼고 큰 소(沼)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예전리는 원래 용전동(龍田洞)이었다. 용당산(龍塘山) 앞에 큰 소(沼)가 있어서 용이 산다고 용호(龍湖)라 했다가 용전(龍田)으로 바꿨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가례동(加禮洞)과 합해서 가례의 례(禮)자와 용전(龍田)의 전자를 따서 예전동(禮田洞)이라 이름지었다.
[형성 및 변천]
적암면(赤巖面)에서 중남면(中南面)으로 1914행정구역 통폐합 때 매전면(梅田面)으로 편입된 예전리는 1832년 청도읍 지도에는 용전리와 가례리로 따로 따로 표기 되어 있고 운문천 밖에 다른 곳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1912년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예전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8년 대정 7년에 측량을 하고 나서 그려진 지도에는 가례동과 용전동이 표기되고 예전동으로 크게 적혀 있다. 속오산지에는 가례와 용전을 합해서 예전동(禮田洞)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지금과 같다.
[자연 환경]
언덕 위에 자리잡은 용전과 과목정은 운문천을 마주하고 있다. 온막에서 내려온 운문천이 가례를 감돌아 나가면서 큰 소를 이루고 있어 용소(龍沼) 용전(龍田) 용호(龍湖)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용전과 과목정 앞은 바로 강(江)이 임해 있어서 논경지가 전혀 없어 마을 뒤 산비탈에 밭을 일구어 과수 영농을 하고 있으나 가례동은 강 건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앞에 들은 모두 경지정리를 말끔히 마쳤다. 그러나 벼농사에 큰 수확을 기대 할 수 없는 관계로 대부분 대추나무나 감나무를 심어 경제작물로 대체하고 있다. 58번 지방도(청매로)가 남북으로 펼쳐져 매전과 유천을 거쳐 경주나 밀양으로 연결되어 관광지를 연결하고 있다.
[현황]
용전과 들마, 과목정, 가례의 자연부락을 합한 면적이 2012년 7월을 기준으로 5,371,643㎡이며 총가구수 99가구에 남자 86명 여자 10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 마을 역시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고 연치 높은 어르신들이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고 있다.
예전리에는 철성 이씨들의 종사인 경선재(景先齋)가 있고 순흥인 안정률(安正律) 선생의 재사인 용운재(龍雲齋)가 있음을 보면 철성 이씨와 순흥 안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정7년 지도』(조선총독부, 1918)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
『청도군지』 (청도군청, 1991)
『마을지명유래지』 (청도문화원, 1996)
『청도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9)
『통계연보』(청도군, 2012)
온막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상남면에서 매전면으로 편입된 마을이며 상온막과 원전 그리고 당걸마을이 합한 곳이다.
[명칭 유래]
원래의 명칭은 명대동(明臺洞)이였고 당시 만석꾼이 마을 중심에 살고 있었는데 측량을 하고 마을 이름을 어떻게 짓겠느냐는 관리의 물음에 윗마을의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그래서 마을 이름이 온막이 되었다고 하며 온막은 원래 지금의 상온막이 원래의 온막이라고 한다. 그때 왜 명대(明臺)를 숨기고 온막이라고 했느냐 하면 조선 중말(中末)에 하도 활빈당(活貧黨)을 자처하는 도둑이 들끓어서 소문이 나면 도둑떼에게 당할까 봐서 그랬다고 한다. 자연부락으로는 온막(溫幕), 명대(明臺), 원전(院前)과 당걸이 있다.
[형성 및 변천]
상온막은 용연동(龍淵洞)아래 용당산 기슭 중산천(中山川) 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옛 지도에는 명대동(明臺洞)이라 표기하고 온막동(溫幕洞)이라 함께 표기한 것은 원래는 명대동이었는데 통폐합을 하면서 온막이라는 이름을 썼기 때문에 명대동과 온막을 함께 표기했다. 원전은 명대리 뒷산(자미산)에 명계서원(明溪書院)이 있었는데 서원(書院)의 토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원전(院田)이고, 쓰기는 원전(院前)이라 하였다. 당걸은 예전리(용전리)와 경계 지점에 큰 당나무가 있어 당걸이라 하였고 매년 당제를 지내왔으나 지금은 당제도 지내지 않지만 당나무도 없어졌다. 이 온막은 운문천이 가져다준 충적토를 토대로 현재는 산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농경지를 가지고 있고 일찍이 경지정리를 한 곳이다. 명대동에는 조선 임란때 이순신 장군 막하에 있다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고 난 다음 삼도 수군 통제사가된 식성군 이운룡(李雲龍)장군이 태어났고 당신이 직접 심었다는 용송이 있었는데 수령이 오래되어 죽었으며 그 자리에는 기념식수로 은행나무를 심고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곁에는 효자 박윤손의 비석도 함께 서 있다. 원전들 가운데에는 별집바위가 있었는데 경지정리할 때 땅에 묻어버려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이 바위에 성혈이 무수히 많아서 별집바위라고 불렀으며 별집바위 곁에는 해마다 정월보름이면 달집을 지어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였고 그 곁에 자그마한 별집을 지어 달이 오르기 전에 불을 지르는 풍습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진 옛날의 일이다.
원전(院前)마을 안에는 지금도 여러 기의 고인돌을 볼 수가 있고 돌 마다 성혈(星穴)이 있다. 근대화 바람이 불기 전에는 군데군데 고인돌과 고분이 있었으며 지금도 큰 바위돌은 대부분 고인돌이고 거석신앙을 하고 있는 곳에 인가가 많고 생활이 넉넉한 온막에 매전국민학교가 먼저 생기고 시장(市場)이 생겼다. 생활의 터전을 따라 한 집 두 집 떠나 몇 년 전 학교도 시장도 폐쇄되었으며 도로가에 상가가 몇 집 옛터를 지키고 있다.
[활빈당이 가져다준 만석의 선물]
구한말 활빈당이 세상에 득시글거릴 때 청도지역에 운문산을 끼고 활동하던 한세붕으로 추정되는 김창성 일파가 있었다. 그 당시 온막에 부지런하나 가난한 농부가 살고 있었는데 부지런하기를 비할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하도 가난하여 산비탈에 밭을 일구고 새벽에 내외가 거름짐을 이고 지고 밭에 두어 번 갔다내고 오면 날이 새곤 할 정도로 부지런 하였는데 하루는 역시 새벽에 거름을 지고 밭으로 가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 먼동이 서서히 트는 쯤에 어디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서 두 내외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니까. 활빈당들이 여늬 부자집을 털어서 가다가 날이 희끄므리 하게 새니까. 하는 말들이 ‘여기다 숨겨두었다가 어둠이 깔리면 가져가자’하고는 논 뒤에 있는 두엄웅덩이에 엽전꾸러미를 풍덩풍덩하고 집어넣고는 모두 사라지는 지라 두 내외는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아무 말 없이 그 두엄 속에서 돈을 꺼내다가 모두 산비탈 밭에 묻어 두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전과 꼭 같이 생활을 하였다. 당시에는 살기라 팍팍하여 논을 팔려고 내놔도 살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이 부부는 누가 땅만 팔려고 내놨다는 말만 들으면 하다둘 사기 시작해서 만석의 부를 이뤘다는 것이다. 당신은 무식하였으나 부지런한 덕분으로 부자를 이루었고, 자식대에는 부지런히 공부시켜 성균관 진사를 하였으니 고종 때 마지막 진사가 되었다. 이 만석군의 집터는 지금 비어 있고 후손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간 것이 불과 100여년 전의 일이다.
[자연 환경]
용당산(龍塘山)이 불쑥 내밀어 자미산을 뒤로 멈칫하게 한 지형덕택으로 운문천이 장연리 쪽으로 밀려감으로 형성된 원전들을 넓게 마련하였다. 마을은 모두 소하천을 끼고 형성되었으며 경작지는 대부분 운문천을 이용하였다. 원전들은 넓은 곡창지대여서 일찍이 경지정리를 하였으나 벼농사는 경제적 이익이 적은 관계로 서서히 경제적 이익이 많은 과수 쪽으로 돌리고 있어 지금은 많은 전답이 대추밭으로 변해가고 있다. 반면 산비탈 지역의 밭에는 감나무를 많이 심어 감 농사를 함께 하고 있다. 남북으로 트여진 골을 따라 경주와 밀양을 잇는 지방도가 설치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자미산, 용당산과 강 건너 구만산이 높이 감싸고 있어 바람 피해는 없을 뿐만 아니라 운문천이 곁으로 흐르고 있어 한해를 모르고 사는 곳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풍·수·화 즉 삼재가 없는 지역으로 호사가들이 말하는 사람살기에 가장 알맞은 명당지역이라 할 수 있다.
[현황]
매전면에서는 가장 넓은 평지에 자리 잡아 넓은 들로 인해 부자들이 살아온 터전인 온막리는 아직도 많은 세대가 살고 있으나 점차 젊은이들이 떠난 지금 매전초등학교도 2011년을 마지막으로 폐교가 되었고 5일시장도 없어진 온막리는 2012년 7월 현재 면적 4,012,670㎡이며 총가구수 189호에 남자157 여자195명이 살고 있으며 명대서원이 있었던 곳 뒤편 자미산 양지바른 곳에 전원 주택지를 개발하여 현재 13가구가 들어와서 살고 있으며 전원생활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서 새로운 마을을 이루어 가고 있다. 넓은 들은 일찍 경지정리를 마쳤지만 논농사 일모작으로는 경제작물이라 할 수 없어 마을에서는 논을 다시 밭으로 만들어 대추과수로 점점 변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강변 따라 모래밭에 처음 시작한 대추는 이제 반 정도가 대추를 심고 있다. 자미산 서쪽 부분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있어 불상을 만들었다는 곳도 남아있다.
온막의 본동인 명대에는 용헌 선생을 모시는 명대대묘(明臺大廟)가 있고 고성인 이장(李將) 선생의 강학지소인 경의당(景義堂)과 고성인 이광익 선생의 월간재(月澗齋)가 있다.
고성인 이광인 선생의 월항재(月恒齋)재와 의흥인 예시용(芮時庸) 선생의 재사인 경사재(景四齋)가 있어 고성 이씨와 예씨들의 집성촌임을 알 수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전석봉, 『도주지』(1958)
『대정7년 지도』(조선총독부, 1918)
『청도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9)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
『청도군지』 (청도군청, 1991)
『청도문헌고』(청도문화원, 2009)
용산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용산리는 용연동과 용산동, 사현동, 중산동을 합해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명칭 유래]
용산리는 용당산(龍塘山)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고 용당산 서쪽에 신기하게도 4방으로 골짜기가 십자(十字)모양을 이루고 있어서 사곡(四谷)이라 불렀다. 1832년 청도읍 지도에는 용연리(龍淵里)라 하였으며 1918년 일본인들이 측량을 하고 만들어진 지도에는 용연동(龍淵洞)과 용산동(龍山洞)이 있고 중산동(中山洞)과 사현동(沙峴洞)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중산동(中山洞)은 산중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사곡(四谷)은 산의 지형이 십자(十字)모형을 이루고 있어 사곡(四谷)이라 했고 산중에 있는 마을이라 중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새각단은 농경지를 따라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각단이라 하였고 산밑에 음달에 자리잡은 곳은 응달마라고 하였으니 생긴 모양대로 이름을 지었다. 용연동(龍淵洞)은 용당산(龍塘山)에 살던 용이 날아서 승천했다는 전설에 의해서 용연(龍淵)이라고 하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상남면(上南面)에 속한 용산동(龍山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형성 및 변천]
불령사(佛靈寺) 위 골짜기 안쪽에 자리잡은 중산동의 윗 중산과 아랫 중산으로 마을이 형성되어있었다. 40여 가구가 산정(山頂)에 터를 잡아 대대로 살아왔던 중산리는 경작지가 좁은 탓으로 1970년대까지 30여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경제개발과 함께 모두 직장을 잡아 떠나고 터만 남은 곳에 지금은 오션힐스 골프장이 들어서 영업중에 있다. 아랫 중산에는 산골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하나둘 띄엄띄엄 들어와 집을 지어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교통이 불편하고 현대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곡(四谷)에도 아직은 터를 비우지 않고 3가구가 살고 있으며 중산동 중간에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무늬가 새겨진 전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4호)이 불령사(佛靈寺)에 있어 청도가 자랑할 만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보물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지만 여러 번의 도괴로 인해서 역사적인 고증을 거치지 못해서 안타깝게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받아 보호되고 있다.
[자연 환경]
용각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은 유천으로 내려가는 줄기의 중간에 마을이 형성 되어있다. 용산리는 용당산을 마주하고 효양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자리잡은 사깔마을은 문전옥답이 넓지는 않지만 경작을 할 수 있고 마을 앞뒤 비탈진 산은 밭을 일구어 감농사와 대추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은 자미산으로 막혀 있고 마을 뒤로는 효양산이 우뚝 솟아있다. 서쪽으로는 용당산이 낮지 않고 앞만 겨우 틔여 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농사지을 땅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도 평지에는 대추나무를 많이 심어서 경제작물로 하고 비탈진 곳에는 감나무가 많다. 군데군데 복숭아밭을 일구어 부지런히 가꾼 농부들의 땀으로 맛있는 복숭아를 맛볼 수 있다.
[현황]
5곳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용산리(龍山里)는 2012년 7월 현재를 기준으로 면적 9,188,052㎡이며 총가구수 76가구에 남자82명과 여자60명이 살고 있고 옛날 중산동에는 오션힐스 골프장이 들어서 있어 청도(淸道) 세수(稅收)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청도에 하나밖에 없는 전탑이 있는 불령사는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아랫중산에는 산골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마을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
[불령사 전탑]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발견된 신라 때 만들어진 문전(紋甎)에 전혀 손색이 없는 불령사 전탑은 총독부에서 만든 조선 고적도본에 의하면 탑의 형태가 아니고 전(塼)돌을 모아둔 형태였으나 1963년 개인소장의 사진에는 3층으로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몇 년 뒤 도굴범에 의해 무너져 1968년에 다시 5층으로 쌓았다. 최근에 다시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이 탑의 특징은 5구의 불상과 4~5기의 3층 석탑 무늬가 있는 벽돌로 쌓아 올려 탑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즉 길쭉한 벽돌의 면마다 연꽃받침 위에 앉아있는 불상과 석탑의 모양이 서로 교차하여 돋을새김되어 있는데, 이러한 까닭에 이 탑을 ‘천불탑(千佛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용산리 중산에는 밀양인 박응성(朴應成) 선생의 묘재인 운포재(雲泡齋)와 파평인 윤종충(尹宗忠) 선생의 재사인 태안재(泰安齋)가 있다.
[참고 문헌]
『속오산지(續鰲山誌)』(김재화,1944)
『청도군 도로명주소 안내도』(청도군, 2012)
『대정7년 지도』(조선총독부, 1918)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
『청도군지』 (청도군청, 1991)
『청도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9)
『통계연보』(청도군, 2012)
지전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지전리(紙田里)는 적암면(赤巖面) 지소동(紙所洞)과 소조전동(所造田洞)을 합해서 지전동(紙田洞)이 된 마을이다. 적암면(赤巖面)에서 중남면으로 다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매전면으로 편입된 곳이다.
[명칭 유래]
지소(紙所)또는 지수(紙需)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군내에서 가장 많이 관(官)에 딱종이를 공급하던 지역임을 말해준다. 지금도 2리인 소조전동(所造田洞)과 송원리에는 옛날에 사용하였던 딱 나무 밭이 남아 있어 자생(自生)상태로 남아 있는 딱 나무가 옛날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청도군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감영에까지 공급을 했다고 하니 얼마만큼의 종이가 생산되었는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종이를 만든 곳은 지소동(紙所洞)이고 관에다 납품을 한 곳은 지수(紙需)라고 전해 오고 있다.
[지소(紙所)]
1리인 지소는 양지마을, 중마을, 죽촌으로 나뉘는데 각각 따로따로 조그마한 자연부락을 이루고 있어 마을이 형성된 지역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죽촌(竹村)은 대나무 밭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고 양지마을은 마을이 산비탈 양지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마을은 들 중간에 형성되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모두 각각 형성된 모양과 같이 부르는 이름이다.
[2리 부처골]
부처골은 1914년 이전에는 적암면 소조전동이었으나 지전리로 통폐합된 곳이다. 오례산성(烏禮山城)아래에 있는 이 마을은 신작로와 동창천을 끼고 있으며. 오례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 길이 있으며, 한곳은 오례산성 9부 능선 지점에 자연암석으로 된 굴이 있는데 깊이는 약 15m 폭 약 6m의 굴 안에는 사시사철 물이 흐르고 있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산천기도처로 이용되었으며 바로 아래 깎아지른 절벽 (높이 약25m)아래에 절터가 있고 기와와 토기편들이 산포하고 있으며 고려 때 또는 그 이전부터 절이 있어서 부처골이라고 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다른 한 곳은 부처골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오례산성 동쪽 제일 높은 봉우리에 당도하는 길이 된다.
[형성 및 변천]
지전리는 적암면에서 중남면으로 이관되어 오다가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매전면으로 통합되었으며 산동지역에서도 아랫부분에 속한 이 마을은 이렇다할 기록이 없어 구전으로만 어렴풋이 알려진 마을이다. 앞서 마을 이름에서 밝혔듯이 오랜 세월동안 종이를 만들었던 지전리는 선사시대의 유물인 비파형동검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고 곳곳에 고분군이 있어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온 것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이 마을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은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고고관 제 1첫머리에 전시되고 있다.
[자연 환경]
지방도 58번 도로 옆을 따라 흐르는 동창천 언덕에 자리잡은 지전리는 송원리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동네가 펼쳐져 있다. 1리와 2리 사이에서 송원으로 가는 길이 있고 현재 공사중인 도로는 청도읍 원정리와 연결된다.
1리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고 마을 앞에는 송원천이 흐르고 있다. 동창천 천변에 경지정리를 마친 들은 어쩌면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마을의 동쪽은 동창천이 흐르는 건너에 구촌리가 마주보고 있고 서쪽과 북쪽은 높은 산이 가로 질러 있으며 58번 지방도(청매로)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 2리는 오례산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1리와 2리는 논보다는 밭이 많다.
[현황]
오례산성 동쪽 산아래에 자리한 지전리는 여러 곳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12년 7월을 기준으로 면적 3,534,848㎡로 가구 수 97세대에 남자88명 여자105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풍호대(風呼臺)라는 정자가 있었고 바위 언덕위에는 정자와 비석들이 즐비하였었는데 도로확장 공사때 풍호대를 비롯한 바위는 깨어 없어지고 군수 정해상(鄭海尙) 과 서유민(徐有民)의 선정비(善政碑)만 2기가 남아있다. 마을회관 앞 국기 계양대 옆에는 군수 송계백의 선정비가 반쯤 부러진채 세워져 있다. 지전리에는 지전보건진료소가 있으며 의흥인 예덕흥(芮德興) 선생의 재사인 지양재(芝陽齋)가 있어 의흥 예씨들의 집성촌임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교남지』(청도편, 1935)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청도군지』(청도군, 1982)
『통계연보』(청도군, 2012)
『각종지리지』 (조선전기)
하평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1차 행정구역 변경 때 하평리는 평동에서 분할되었다.
[명칭 유래]
옛 이름은 평동(坪洞)이었고 1차 행정구역 개편 때 평동에서 분할되었다. 개편 당시 위쪽에 있는 마을을 상평이라 하고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하평이라 하여 하평리라 하였다. 하평리는 자연부락으로는 몬담과 수무동, 너부리, 가라골, 박곡 등을 합해서 된 동리이다.
∎몬담 또는 모은정
몬담 마을은 신작로를 따라 매전으로 가다가 큰 다리를 건너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은 산비탈을 의지하고 만들어졌으며 원정자와 한 오리(五里) 정도에 약간 못 미치는 마을로 옛날 오리마다 정자(亭子)를 두고 십리마다 원(院)을 둘 때 오리에 약간 못 미쳐서 정자를 두었기 때문에 모은정이라 했다고 전한다.
∎수무(修武)동
수무동은 토함산(통내산)의 산줄기가 마을 앞 등성이를 만들어 마을은 언덕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듯 한데 동네가 마치 숨어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숨어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수무동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6.25전쟁 때는 마을사람들 중에는 난리가 난지도 모르고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산으로 감싸진 마을이다. 옛날 보행으로 다닐 때는 특별히 마을을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마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런 위치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너부리(월촌(月村))
너부리는 산 중턱에 있는 마을로 지명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을 제시하고 있으나 채택할 만한 이야기가 없다. 옛 지명에는 월촌동(月村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가라골(추곡(楸谷))
하평리에서 가장 아랫부분에 자리한 마을이며 가장 가장자리에 있다고 해서 가라골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옛날에는 가죽나무와 개오동나무가 많아서 가라골이라고 했다고 하기도 한다.
∎중방천.
하평리에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서 방천을 하였고 그 방천 안에 있는 마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중방천이라 이름한다.
∎박곡(珀谷)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고 동네가 모두 비어있는 골짜기이지만 1944년까지만 해도 기록에 남을 정도로 사람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형성 및 변천]
매전면과 역사를 같이 한 마을이지만 뚜렷한 기록은 없는 편이다. 동쪽으로 토함산(통내산)이 있어 예부터 이곳은 소산현의 한 부분이나 동산리 쪽에는 선사시대의 유적(고인돌)들이 다소 남아 있으나 이 마을은 뒤쪽에 있어서인지 그런 유적들은 보이지 않는다.
[자연 환경]
하평리는 관하천을 따라 좌우로 형성된 마을이다. 모은정(몬담)이본 동이라 할 수 있는데 비교적 평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수무동은 언덕 위쪽이고 길에서 보면 동네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는 형태이다. 너부리는 광월이라고도 하고 월촌이라고도 하는데 임란 이후에 김해 김씨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와서 월촌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가라골은 하평리의 맨 아랫부분에 있으며 통내산(토함산)을 등지고 형성된 마을이다. 옛날 박실마을은 이제 사람이 살지 않은 빈 골짜기로 남아있다. 하평리는 해마다 홍수 때 개울이 넘치는 수모를 겪어왔으나 2012년부터 제방사업을 하고 있어 넓은 하천을 확보하여 홍수의피해는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라골 마을 위에는 깔딱바위가 곧 떨어질 것 같은 위험을 안고 있어 지나다니는 길손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현황]
관하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은 논농사는 거의 없다. 대부분 밭농사를 짓고 있는 하평리에는 청도군내에서는 가장 많은 감나무 단지라고 할 수 있고 대추농사도 많이 짓고 있다. 하평리는 2012년 7월 현재를 기준으로 면적 9,174,804㎡이며 총가구수 89가구에 남자 77명, 여자 87명이 살고 있다. 농사를 많이 하기 위해 소하천(小河川)을 많이 잠식해서 해마다 큰물이 나면 방천을 넘나들어 수해를 겪었던 곳이었으나 재방공사를 다시 하고 하천을 넓혀 수 지금은 비교적 안정적인 하천관리를 하고 있다. 하평리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08호인 은행나무가 김해 김씨 월촌 종중 재실 밖 언덕위에 있다. 하평리에는 김해인 김명하(金命夏) 선생의 재사인 월강재(月岡齋)와 김해인 김준복(金俊復) 선생의 재사인 은산재(隱山齋)가 있으며 고성인 이광성(李光星) 선생의 재사인 무산재(武山齋)가 있고 고성 이씨들의 종사인 계림재(桂林齋)와 고성인 이기(李夔) 선생의 재사인 용산재(龍山齋)가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전석봉, 『도주지』(1958)
『내고장 전통문화』(청도군, 1981)
『청도군지』(청도군, 1991)
『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8)
『대정7년 지도』(조선총독부, 1918)
『통계연보』(청도군, 2012)
박윤제(청도
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