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세계는 고해(苦海)요, 인간은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왜 인간은 타락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빗물은 깨끗하지만, 땅에 떨어지면 더러워집니다.
지붕이나 수로들이 모두 더러워서 그곳을 통과하는
빗물 역시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들의 삶이라는 것도 그와 같아서 고해에 빠져
전도(顚倒)되어 타락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고해(苦海)란 탐진치(貪瞋癡)의 늪을 말합니다.
맑은 것(純)은 선(善)이라 하고,
탁한 것은 악(惡)이라 구별하여 말하지만
선악이란 구별은 사람의 인식에 따른 구별이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본마음이 선(善)이냐 악(惡)이냐 하는 문제는
예부터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을 믿든 부정하든 모든 종교는
한결같이 사람의 마음이 문제라 보는 것은 동일합니다.
신을 부정하는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인간의 무지(無智: 無明)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지를 벗어나면 선악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선악이 없다면 복도 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일신관의 입장에서는 신의 명령을 어긴 것은
인간이 자의적인 의지의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의 자의적인 의지 또한 신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라고 합니다.
신의 의지를 불성(佛性)으로 바뀌면 문제가 없지만
무신론적 견지에서 보면 참 아리송한 답변이 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중에서 마치 앵무새가 노래하듯 이 말이 회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참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는 업(業)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도(道)의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달마대사의 설법을 듣고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님, 불교는 살생하지 말라는 데 저는 백정입니다.
도축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묻자, 달마대사가 말합니다.
“너는 업(業)을 말하는 것이고, 나는 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업이란 행위를 말합니다. 선한 일도 하고 악한 일도 합니다.
자비 행위도 하고 살생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세속의 법으로 보는 경지입니다.
세속의 법이란 유위법의 세계를 말합니다.
세속의 법을 벗어난 법(무위법)으로 보면
선도 악도 자비도 살생도 그 실체가 없습니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검게 보인다고 하늘이 검은 것도 아니고
하늘의 먹구름이 사라져 푸른 하늘이 보인다고
하늘이 푸른 것도 아닙니다.
하늘은 먹구름이 오고 가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이란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성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이나 먹구름이란 명자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은 있지만 업인(業人)은 없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업이란 인연에 따라 일어나지만, 그 실체(자성)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도(道)의 경지는 업과는 그 경계가 다릅니다.
먹구름이란 인간의 소견(所見)이요, 사념(思念)입니다.
무명(無明)을 말합니다.
인도 야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한 매춘부가 있었습니다. 절세가인이라
찾아오는 방문객(?)이 많았습니다.
그 마을 한 암자에 한 수도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수도승은 심기가 불편했나 봅니다.
그래서 그 매춘부를 불러 “매춘은 곧 간음(姦淫)인데
어찌 너는 그런 사악한 짓을 하는가?” 하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그 매춘부는 말합니다.
“내 직업이 매춘인데 이를 벗어나 살아갈 방도가 없습니다.
나는 매번 손님(?)이 찾아오면 나 스스로 참회하면서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매일 전과같이 똑같은 매춘 행위를 하자
수도승이 참다못해 그 매춘부를 찾아가
“내일부터 네가 사람을 받으면 네 집 앞에
돌멩이 하나씩을 쌓아놓겠다.”하고 돌아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참회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자, 매춘부 집 앞에
쌓인 돌멩이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매춘부는 죽었습니다. 평생을 매춘부로 살았기에
마을 사람들이 조장(鳥葬)을 해버렸습니다.
조장은 장례식 풍습의 하나로
시신을 독수리나 까마귀, 매 같은 조류에게
뜯어먹게 하는 방식의 장례를 말합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그날 같은 시간에
그 수도승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꽃마차에 태워 다비를 거행했습니다.
수도승은 죽으면서도 평생 몸을 절제하고 수행을 했으니 당연히
극락 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옥으로 끌려가고,
매춘부는 극락으로 올라갔습니다.
수도승은 염라대왕 앞에서 이런 불평등한 일이 있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말합니다.
“매춘부의 매춘 행위 때문에 그녀의 육신(肉身)은
당연히 새들의 먹잇감으로 지옥으로 갔지만
그의 영혼은 언제나 매춘할 때도
참회하는 마음을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은 극락으로 간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율법을 잘 지켰으므로
너의 육신은 꽃마차를 타고 다비되었지만
평생을 거기에 묶여 참회할 줄을 몰랐으니
네 영혼은 당연히 지옥으로 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세속의 법에는 죄와 복이 있고, 선악이 있지만
무루의 법에는 죄도, 복도, 선악도 없습니다.
불교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참회(懺悔)한다고 말합니다.
천주교나 개신교를 비롯한 기독교에서는 회개(悔改) 등으로 표현합니다.
물론 참회라는 표현도 쓰긴 하지만 일반적인 말은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懺悔)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크샤마(kṣama)를 음역한 것으로
참(懺)은 먼저 지은 죄악을 들어내는 것이고,
회(悔)는 지나간 일을 고쳐서 앞으로
다가올 일을 닦는 일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참회는 이번 생(生)뿐만 아니라
시작 없는 전생부터 지어온 악업을 뉘우치고
이를 정화(淨化)함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기독교의 원죄론과 같은 개념이 없으므로
그 어떠한 극악한 죄라도 진정으로 뉘우치고 참회하면
그 죄가 소멸하여 구제받는다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
心若滅時罪亦亡(심약멸시죄역망)”이라고 합니다.
경전을 보면 참회의 많은 예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살인마였던 앙굴리말라(Angulimala)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결국은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이야기도 있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이복형제 99명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아지타삿투(Ajithasattu)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전륜성왕과 같은 공덕을 쌓은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에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가령 대문에 못질해도 그 못은 뽑을 수 있습니다.
그 못을 뽑을 수 있듯 참회나 회개로 구원을 받을 수는 있지만
못이 박힌 그 흔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앙굴리말라도 아시타삿투도 업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업(業)은 있었지만, 업인(業人)은 없었습니다.
무엇이 죄와 복인지 그 자상을 알았기에
고락(苦樂)을 벗어난 것입니다. 고락(苦樂)을 벗어나면
지옥과 극락이 다르지 않습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차등이 있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미완의 그 흔적을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의 습기(習氣)라 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음 후에도 이를 멸하기 위해 수행이 따라야 합니다.
선가에서 이를 보임(保任)이라고 하고,
목우행(牧牛行)이라고도 합니다.
깨달음을 얻어 참회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수심결(修心訣)>에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성이 본래로 공적(空寂)하여 佛과 다르지 아니함을
한순간에 깨달음(頓悟)을 얻었으나
이 옛 습기(舊習)를 졸연히 없애기는 심히 어렵다.
그런고로 역경(逆境)이나 순경(順境)에 봉착하면
진희(瞋喜)와 是非가 치연히 일어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여(起滅)
객진(客塵)인 번뇌 망상이 前日과 다름없다.
만약에 반야 지혜로 가공하여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어찌 무명을 대치(對治)하여 대휴헐지(大休歇地: 열반)를 얻으리오.
古人이 말하기를
<비록 佛陀와 동일함을 돈오(頓悟)하였으나 多生의 습기가 甚深하다.
바람은 자도 파도는 오히려 거세고 性理(성품도리)가
눈앞에 드러나서도 망심은 아직 침범한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깨친 다음에 반드시 오랫동안 되비추고 살펴서
망념이 언뜻 일어나면 조금도 따라가지 말고
덜고 덜어서 적연무위(寂然無爲)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끝나는 것이다.
천하 선지식이 깨친 다음에 수행한다는 牧牛行이 이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규봉 스님도, 선오후수(先悟後修)의 깊은 뜻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얼어 있는 연못이 순전히 물인 것으로 알지만
햇빛을 빌어 녹이듯, 범부가 곧 부처인 것으로 알지만
진리(법)의 힘 빌어 익히고 닦아야 (붓다가) 된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 적셔야,
바야흐로 그 물에 씻는 공로가 나타나고,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해
신통과 광명의 작용이 나타난다.” 하였습니다.
“업(業)은 있지만 업인(業人)은 없다” 라는 말은
무자성을 말하지만, 이 또한 지은이는 없지만
그 업(죄업)의 흔적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육바라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어 참회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방일(放逸)하지 않은 마음으로 정진수행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참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당한 노력과 수행이 따라야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하는 마음은 훨씬 수월합니다.
인간의 속성은 무엇인가에 의존하고 싶은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힘든 수행을 통한 무신론적인 교리 보다는
모든 것을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쉽습니다.
중생들이 받아들이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두일미(魚頭一味)를 알지만 식탁에 생선이 올라오면
뼈만 있는 머리보다 살점 많은 몸통으로 손이 먼저 가듯
행하기도 쉽고 편한 쪽으로 선택하고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일요일에 교회나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告解聖事)하고
회개하면 끝나는 것으로 믿고,
월요일에 다시 업을 지어도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일요일이 되면 다시 회개하면 면죄부를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회개(悔改)란
단순히 마음을 바꾸는 것 또는 과거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회한의 감정을 갖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회개는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써
마음과 행동의 완전한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죄나 악으로부터 돌아서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의식적으로 방향 전환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참된 회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참된 회개는 정의나 사랑, 겸손 등의
행동으로 표명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회개의 열매는 구원이고 악으로부터의 구출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지고의 선물인 회개 없이는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삶과 행동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회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깊은 의미에서
참회와 회개를 인식한다면 究竟에는 동일하게 됩니다.
참회는 자의적인 의지로 해탈을 얻지만
회개는 신의 의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신과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란
불교에서 말하는
“심불여중생(心佛如衆生)”이란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정의, 사랑, 겸손 등의 행동으로 표명된다.”라는 말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란 말과 표현만 다를뿐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자의(自意)냐 타의(他意)이냐 하는
생각만 버리고 구경의 의미로 본다면 해탈을 천당으로 말하나,
회개를 열반으로 말하나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신은 일체 만유에 편재한다는 말이나
일체 만유는 무자성이라는 말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신관이냐, 무신관이냐 하는 신관(神觀)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무엇이 구경(究竟)의 의미인가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의 영역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법성(法性)은
언어의 영역이 아닙니다.
유무(有無)로 판단되는 그런 경계의 영역 밖에 있습니다.
불교에서 공(空)이란 말과, 무(無)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있다고 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非有非空이며, 非非有非非空입니다.
有神, 無神이란 말은 사람의 인식에 따른
편의상 붙여진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단지 신의 의지로 치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참회(懺悔)냐 회개(悔改)냐 하는 것은
인간의 무지를 돕기 위한, 근기에 따른 이해를 돕기 위한
한 방편에 불과한 말이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참회나 회개라는 말은
다시 말해서 신관(神觀)에 의한 업(業)과 업보(業報)를
시작과 끝을 가지고 종교의 교리에 메달려 논하기보다는
구경(究竟)에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