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다시 정리하겠지만 (장유정교수책 내용을 참고로 함)
인천은 그중에서도 부평은 대중음악의 메카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 조약이후에 1883년 개항이되고 일본인 미국선교사 등 외국 사람들이 당시 제물포(인천의 예전명칭)로 들어왔고 전라도 충청도 사람들도 먹고살기 위해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인천에는 사이다 공장이 있었고 성냥공장이 많았다.
서영춘이 불러서 유명해진 사이다 송(song)처럼 사이다 공장이 들어섰고
구전가요인 성냥공장송(너무 야해서 생략함)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전국의 생산량의 70%의 성냥이 인천에서 생산되었다고함,
구한말 일제강점기는 이처럼 어느 도시보다 먼저 과거와 신문물이 혼재하는 도시가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부산과 아울러 대중가요의 메카가 된 것이다.
당시 제물포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밥먹고 담배필때 빼고는 흥얼거리며 노래를 했다고 한다.
인천출신 대표적인 가수는 박경원이다 그러나 이전에 1930년대 40년대 최고 여가수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에 버금가는 가수가 있었으니 인천출신 이화자이다. 이화자는 출생과 사망 가족관계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기생으로 인천권번에 소속되었다는 일부의 기록을 통해서 추정하건대 인천출신인 것 같다. 이분이 부른 노래는 60넘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초립동"과 "화류춘몽"이 있다. "짝사랑" "사막의 한" 노래로 유명한 고복수님이 말하기를 이화자 노래는 남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깊은 애절함이 있었다고 한다.
몇년전 전국노래자랑 30년결산 왕중왕전에서 우승한 여자분도 인천이 주소지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번 선거때 이상한 놈이 나타나 이부망천이라 했는데
음악에 있어서 대중가요발전의 산실이 인천 (예전엔 동인천,제물포,부평이 인천의 중심임)입니다.
추신 : 기생들의 애절한 삶을 나타낸 노래는 이화자의 "화류춘몽"외에도 김영춘의 "홍도야 울지마라", 심연옥의 "사랑에 속고 돈에울고" 등이 있습니다. 1930년대 40년대 일제강점기에 "화류춘몽" "홍도야 울지마라" 노래에 심취하여 한강철교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다 합니다.
심연옥과 백년설이 부부사이고 고복수는 황금심과 부부이고 그아들은 고영준이며 백설희는 황해와 부부사이이며 그의 자식은 전영록이며 전영록 딸은 전보람으로 티아라의 멤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