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수(壽) 81세
전기(傳記)에 왕자(王者)는 ‘여일인(予一人)’이라고 칭한다고 하였는데 일인(一人)은 지극히 적은 수효이다. 백성을 억조(億兆)라고 하는데 억조는 지극히 많은 수효이다. 잠깐 사이에 일월성신이 돌고 돌아 음과 양이 변화하여 억조의 후예되는 자들이 점차 떨어져나가 혹 열에 하나도 전해지지 못하였다. 종사(螽斯)와 초료(椒聊)처럼 천하에 가득 찬 자들은 태반이 한 사람의 여예(餘裔)이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있다.
신명이 걸출하여 타고난 품성이 참으로 보통 사람보다 아주 뛰어나 이익과 은택이 생민을 크게 보우하고 또 근기(根基)를 북돋아 주니, 아, 아름답구나. 가만히 생각해보고 일찍이 이상하게 여긴 것은, 가락국의 수로왕(首露王)은 바닷가 한 모퉁이에 치우쳐 거주하면서 위령(威靈)이 수백 리의 밖에 벗어난 것도 아니요, 지위의 존귀함도 일인이 아니요, 이익과 은택이 생민을 크게 보우한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미추홀(彌鄒忽)이나 감문(甘文) 장산(萇山) 같은 무리도 실로 일찍이 접경을 하여 왕을 칭했으니 피차가 등(滕)과 설(薛)처럼 소국이었는데, 그 후 2천 년 사이에 연기나 구름처럼 사라지고 없어져 후손들이 알려지지 않아 일개 서민의 집안과 똑같이 묻혀 버렸지만 오직 가락(駕洛)의 한 성씨만 오랠수록 더욱 번성하여 거의 중국 선성왕(先聖王)의 후예들과 비등하다.
위에 있는 사람은 공훈을 쌓고 대대로 벼슬을 하여 고관대작의 빛나는 문벌이 되고, 다음으로는 또한 서민이 되고 청빈한 가문이 되어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각사(各司)에 서도(胥徒)가 되고 열읍(列邑)에 조예(皁隷)가 되고, 글 읽는 자, 밭가는 자, 짐을 진 자, 수레를 탄 자 등에 이른다.
무릇 산과 바다, 들에서 나오는 것과 인개(鱗介), 부갑(莩甲), 주기(珠璣) 같은 물건과 금, 은, 구리, 쇠, 대, 나무로 만든 기물로 김해 김씨의 집안에 들어가 김해 김씨의 몸을 봉양하는 것들을 헤아려 세어 두루 알 수가 없다. 《주역》에 이르기를 “큰 과일이 먹히지 않는다.”라고 했고, 또 말하기를, “옛 덕을 먹는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연유가 없이 그렇게 되겠는가.
더욱 마땅히 칭송할 것이 있으니, 김해씨(金海氏)가 인물이 나지 않을지언정 나면 반드시 수립한 것이 특별하게 뛰어나서 세상의 운세의 승강에 관여가 되었다. 신라 때에는 각간(角干)이 삼한(三韓)의 형태를 만들어서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입었으니 오히려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조선에서는 탁영(濯纓)의 필법과 삼족(三足)의 경행(經行)과 부수(副帥) 학성(鶴城)의 무공과 근래 갑봉(甲峯) 상국(相國)의 지조 등이 모두 이러하다. 그리고 기술할 만한 명덕(名德)들은 모두 손꼽아 셀 수가 없다. 하찮은 내가 이것으로 수로왕의 신명을 상상해보고 역사책의 글에 빠진 대목이 많음을 탄식한다.
중국인은 말하기를 “예를 잃었으면 초야에서 구한다.”라고 했는데, 우리나라는 역사에서 잃어버린 것을 왕왕 족보에서 찾는다. 오늘날 김해씨의 족보는 가락국(駕洛國)의 역사책이런가. 내가 들으니 족보에 수록된 것은 겨우 네 개 파(派)라고 하는데 이는 대저 등림(鄧林) 가운데 몇 그루가 우뚝하게 솟은 것이리라.
만약 ‘신명(神明)의 복록과 은택이 이 책에 모두 실렸다.’ 한다면 이는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상국(相國)의 현손(玄孫) 제운(濟運) 씨가 그 족인(族人) 낙진(洛鎭)을 시켜 나에게 글을 청하니 나는 말하기를 “족보에 글이 있는 것은, 하나는 선대를 칭송하여 진술함이요, 하나는 자손들을 권면하는 것이다.
내가 그대 집안의 족보에 대하여는 칭술하기는 다하지 못한 바가 있고, 권면은 감히 하지 못할 바가 있다.”라고 하였다. 비록 스스로 혼미한 정신을 다하고자 하더라도 장차 무엇을 손에 가탁하여 적을 것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누차 사양을 하고나서 이와 같은 말을 썼다. 을축년(1865, 고종 2) 동지 다음 날에 쓰다.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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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金海金氏族譜序
傳記有之。王者稱予一人。一人至寡也。黎庶曰億兆。億兆至夥也。少焉天星旋轉。九六乘除。爲億兆之後者。漸次剝落。或十不一傳。螽斯椒聊。充溢區埏者。太半一人餘裔。其故可知也。神明首出。稟生固已絶異於恒人。利澤大庇。生民又從以培壅根基。嗚呼休哉。竊嘗異夫駕洛首露。海堧偏據。威靈不出數百里之外。尊非一人也。澤不大庇也。同時彌鄒忽,甘文萇山之比。固嘗接壤稱尊。彼滕我薛。二千年間。烟消雲空。苗裔無聞。與匹庶家戶。同其堙沒。獨駕洛一姓。久益蕃衍。殆與中州先聖王之裔埒。上焉者積功累仕。爲簪纓顯閥。次亦爲庶爲淸。散處坊曲。乃至胥徒于各司。皁隷于列邑。讀者耕者。負者乘者。凡山海田野之出。鱗介莩甲珠璣之實。金銀銅鐵竹木之器用。入金海氏之家。奉金海氏之身者。不可數計而周知。易曰碩果不食。又曰食舊德。是豈無自而然哉。尤有當誦言者。金海氏有無作。作必樹立特達。軒輊世運。新羅角干。範圍三韓。民到于今受其賜。尙乎無以議爲。我 朝濯纓之筆。三足之經。行副帥鶴城之武。近時甲峯相國之秉執。皆是也。若其名德可紀。指不勝僂。眇眇以此像想首露之神明。歎息乎史文之多闕也。中州人言禮失而求諸野。東國史失。往往求諸譜。今日金海氏之譜。其駕洛國之汗靑歟。吾聞譜之所收僅四派。此蓋鄧林中數株挺然者耳。若曰神明祿蔭。盡載是編。則用錐指地哉。相國玄孫濟運氏伻其族人洛鎭。謁文於正鎭。正鎭曰。譜之有文。一則稱述。一則勸勉。吾於子之譜。稱述有所不盡。勸勉有所不敢。雖欲自竭昏眊。將何藉手。是以屢辭而後爲之說如右云。旃蒙赤奮若陽復翌日。<끝>
노사집 제19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