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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유고 제18권 / 신도비(神道碑)
대사성 김공 신도비명병서(大司成金公神道碑銘 幷序)
내가 일찍이 퇴도(退陶 이황(李滉)) 선생께서 지으신 문정공(文正公) 조 선생(趙先生 조광조(趙光祖))의 행장을 읽고 슬퍼했는데, 영남에 가서 대사성 김식(金湜)이 절명한 곳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사람됨을 상상해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대사공의 5대손 참판 좌명(佐明)이 선생의 세계(世系), 학행, 관력, 자식과 현손ㆍ증손을 적어 와서 매우 간절하게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사실 나는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이가 많아 기묘년의 일을 귀로 얻어 들은 바가 있기에 마침내 승낙하고 명을 짓는다.
삼가 가장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식(湜)이고 노천(老泉)은 자이며 성은 김씨로 신라왕의 후손이다. 관향은 청풍(淸風)으로 대대로 청풍사람이 되었다. 휘 대유(大猷)는 고려를 섬겨 시중(侍中)이 되었고 증손 창조(昌祚)도 시중이 되었으니 고려조 내내 공훈이 드러났다.
조선에 들어와 휘 정(瀞)은 전중(殿中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전중이 휘 경문(敬文)을 낳았고, 이 분이 휘 질(耋)을 낳았는데 관직은 태상시 정에 이르렀다. 이분들이 공의 고조, 증조, 조부이다. 부친은 휘 숙필(叔弼)이니 생원으로 예빈시 정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사천 목씨(泗川睦氏)로 세간에서 여자 선비라 칭송하였다.
공은 성화(成化) 임인년(1482, 성종13)에 태어나 젖니를 갈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천품이 영특한데다 목 부인이 엄격하게 가르쳐서 12세에 학과(學課)에서 으뜸을 차지했고 20세에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과거 공부는 그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다.
정암 선생(靜庵先生 조광조)과 더불어 공부하는 벗이 되어 부지런히 학문에 힘써 상하의 이치를 궁구하니 명성이 발 없이도 사방으로 치달아 방방곳곳의 학자들이 많이들 존중하고 받들었다. 당시 공희대왕(恭禧大王 중종)이 어려운 때를 구제하고 형통케 하시어 온 마음으로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을 본받아 훌륭한 인재를 구하는 것에 다급히 하였다.
그 때 총재(冢宰)가 안당(安瑭)이었는데, 아름다운 포부와 재주가 있는 선비는 차서를 두지 말고 마땅히 대접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정암(靜庵), 대사성, 강수(江叟 박훈(朴薰)) 등 몇 사람이 모두 6품에 서용되었고 공은 호조 낭관에 제수되었다. 응교 한충(韓忠)이 진언하기를, “김식은 통하지 못하는 학문이 없으니, 성리학을 진강하는데 그보다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하였다.
얼마 안 되어 지평에 제수하고는 성상께서 좌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김식을 강석에 오르게 하고 싶었는데 오늘 언관의 직책에 둔 것은 이 직임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하였다. 부제학 조광조가 또 진언하기를, “지금의 세상에서 김모 같은 사람을 구하려고 한다면 비슷한 사람도 만나기 어려울 것입니다.”하였다.
성상께서 승정원에 하교하여 한시의 지체 없이 인재를 구하는 책임을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맡기고, 초빙하는 책임을 담당관들에게 맡겼다. 이에 종백(宗伯 예조 판서)과 의정부가 함께 소리 높여 아뢰기를, “주나라의 공령(功令) 제도는 아주 오랜 옛날의 일이고, 그 후의 선발 제도로는 한나라 때의 현량(賢良), 방정(方正), 효렴(孝廉)만큼 훌륭한 것이 없으니 이 제도들을 모범으로 삼으신다면 초야에 버려진 어진 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하자, 성상께서 그렇게 하라고 답하였다. 이때가 바로 기묘년(1519, 중종14) 여름 4월이었다. 천거되어 올라온 자가 백 이십여 명이었다.
성상께서 친히 제왕(帝王)의 치도(治道)에 관하여 책문을 내렸는데, 공의 대책(對策)은 크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면서도 문장이 매끄럽고 글자가 순조로워 각각 그 쓰임에 알맞았다. 먼저 제왕의 큰 근본은 천명(天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거론하고, 다음으로 위육(位育)의 공효를 말하였다. 한 편 중에 소인과 군자의 구분에 대해 더욱 명확하게 기술하였으니, 독권관 신용개(申用漑)가 일등으로 뽑았다.
성상께서 아뢴 것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여 자급을 뛰어넘어 직제학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부제학으로 승진시켰다. 의론하는 자들이 “사유(師儒)의 장(長)에 공만 한 적임자가 없다.”고 말하자 곧 명하여 대사성으로 옮기고 경연 참찬관을 겸임하게 하였다.
통독하는 날에 공이 홀(笏)을 바르게 쥐고 명륜당(明倫堂)에 좌정하자 여러 유생이 차례대로 자리로 나아가서 어렵고 의문 나는 것을 묻고 답하였는데, 근원을 파헤쳐 지엽을 인도하고 핵심을 파악하며 깊은 뜻을 열어 보이고 미묘한 뜻을 드러내었다. 여러 유생이 가르침을 받들고 충심으로 신봉하여 마치 나그네가 돌아갈 곳을 얻은 듯하였다.
이때부터 성균관 유생들은 물론이고 배우는 자들이 먼 거리를 마다 않고 찾아왔으며 간혹 공의 숙소 곁에 집을 짓는 자들도 있었다. 충암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은 소견이 트여 세상에 그의 눈에 차는 사람이 없었으나 조회를 끝마치고 나면 반드시 《대학》을 손에 들고 노천(老泉 김식)을 찾아가서 배웠다고 한다. 공이 성리(性理)에 조예가 깊고 강설을 잘해서 동년배들마저도 존경하고 스승으로 여겼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하루는 성상께서 승선 한충(韓忠)을 보내 성균관 유생들에게 제술(製述) 시험을 보게 하고, 또 중사(中使)를 보내 술을 하사하였다. 이튿날 공이 여러 유생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특별한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성상이 인견하고 또 여러 유생 중 뛰어난 자를 나오게 하여 시험하였는데, 여러 경서를 망라하는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여 모두 어긋남도 없었다.
한충이 아뢰기를,
“많은 선비들이 모두 문(文)과 질(質)을 훌륭하게 겸비하여 참으로 볼만하니, 선생을 제대로 뽑은 효과가 큽니다.”하자, 공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신은 본래 스승이 되기에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근래 성균관 유생들의 기풍이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고 할 수 있으니, 성상께서 문왕(文王)이 편안하셨던 풍속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이때에 문정공(文正公 조광조)은 전해지지 않던 학문을 창도(倡道)하여 치란(治亂)의 도를 밝혀 날마다 성인의 교훈을 아뢰었고, 문간공은 박학하고 잘 기억하여 사령에 뛰어났으며, 대사성공은 사리를 훤히 통달하여 확고부동하게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었다.
자암(自庵) 김구(金絿), 송재(松齋) 한충(韓忠), 복재(復齋) 기준(奇遵), 강수(江叟) 박훈(朴薰) 등도 모두 출중한 인재들이었다. 문질을 겸비하고 뜻과 도를 함께하여 동류들을 서로 추천하고 진출시켜 날마다 달마다 충언을 올려서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 되게 하고 우리 세상을 요순시대처럼 만들고자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런데 간악한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몰래 사악한 흉계를 품고 재앙을 빚어 거짓으로 참문(讖文)을 만들어내서 성상의 총명을 현혹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홍경주(洪景舟), 김극핍(金克愊), 김전(金詮), 성운(成雲) 등 간사한 무리가 교대로 부추겨서 북문(北門)이 한번 열리니, 저들은 식칼이 되고 우리는 도마 위의 생선이 되었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성상의 옷자락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간언한 덕분에 여러 현신들을 사법관에게 다스리게 하여 차례대로 형장을 때리고 유배를 보냈는데, 공은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다. 남곤 등이 재상이 되었을 때에는 한 층 죄상을 더하였다.
공은 정암 선생이 사사(賜死)된 것을 듣고는, “들판을 태우는 불길이 나에게 미칠 것이다.”라고 탄식하였다. 손님들과 함께 애통해하며 술을 마시다 취하게 되었는데 앉아있던 손님들이 서로 모의하기를, “어찌 차마 사람마다 모두 죄 없이 죽게 만들어 참람한 흉적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는가. 등뼈가 튼튼한 노비 장정이 있으니 몰래 업고 도망가서 성상이 깨달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그 계획을 실행하였다. 수십 리를 간 후 공은 술에서 깨고 나서야 여러 사람들이 잘못된 일을 했음을 알았다.
이신(李信)이라는 자는 일찍이 관노(官奴)였다가 공을 좇아 공부한 자이다. 그가 곧장 서울로 들어가 공이 망명한 것을 고하니 의금부에서 뒤쫓아 수색하였다. 공이 아림현(娥林縣 거창)의 고제원(高梯院)에 이르러 석벽에 시를 썼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날 저무니 하늘은 어둠을 머금는데 / 日暮天含黑
산은 비고 절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네 / 山空寺入雲
군신 간의 의리는 천년토록 변치 않으니 / 君臣千載義
어느 곳에 외로운 무덤이 있겠는가 / 何處有孤墳
일부러 종자에게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음식을 마련해 오게 시키고는 상소를 썼는데,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망명한 신 식(湜)은 삼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채 미천한 신하의 충심을 주상 전하께 토로합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그래도 고인이 처신하는데 일정한 법도가 있다는 것은 조금 알고 있습니다.
구차히 살아남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과 절개를 지키는 것이 훌륭한 일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수치를 무릅쓰고 굳이 이렇게 하는 것은 흉적이 장차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할 것을 알기에 보잘것없는 충의(忠義)나마 바치고자 해서입니다. 전하께서는 잠시 살펴주신다면 어찌 신의 마음만을 아시는 데서 그치겠습니까.
심정(沈貞)은 본래 탐욕스러워 만족을 모르는 소인배로 맑은 의론에 용납되지 못하자 가슴에 원한을 쌓고 난을 일으키려는 생각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틈이 없었는데, 조광조가 성상의 인정을 받게 되어 학자들이 모두 추향하고 백성이 칭송하자 드디어 참문을 조작하여 몰래 성상의 뜻을 흔들고, 또 불만을 품은 자들을 모아 마침내 사림의 화를 얽어 만들었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썼다.
“남곤(南袞)과 더불어 많은 무사들을 모았으니 그 의도가 어찌 사림들을 제거하는 데에만 그치겠습니까. 조정은 전하의 조정이 아니요, 바로 심정과 남곤의 조정입니다. 전하의 형세가 외롭지 않겠으며,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신은 이 때문에 참고서 망명하여 간흉들이 전하를 위협하고 핍박하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몸을 일으켜 난국을 구하러 달려가서 전하께서 제게 베푼 세상에 보기 드문 대우에 보답하려는 것이 신의 본뜻입니다. 게다가 신은 전하께서 조광조를 의심하신 것은 본심이 아니며, 저를 벌하신 것도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구구하게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미천한 신의 진정을 깊이 헤아려 그 형세를 잘 관찰하신다면 간흉들의 죄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전하께서 끝까지 깨닫지 못하신다면 조종(祖宗)은 어찌 되며 사직은 어찌 되겠습니까. 이름난 선비를 모두 죽이고도 나라가 존속된 경우는 있지 않습니다.
미천한 제 한 몸이야 불쌍히 여길 것도 없지만 신 때문에 무고한 이에게까지 죄가 미칠 것이니 신은 전하를 위해 영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목을 매어 죽었으니 이때가 바로 경진년(1520, 중종15) 5월 16일이었다. 종자가 옷 속에서 상소를 찾아내어 현감에게 고하자 현감이 위에 보고하였다.
소재한 고을에 명하여 검안하고 마침내 옥에 갇힌 아내를 풀어주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6월에 양주(楊州) 평구역(平丘驛) 위의 금촌리(金村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귀장(歸葬)하였다. 상을 치른 사람은 외종사촌 현헌(玄軒) 목세칭(睦世秤)이었고, 문인 구봉(龜峯) 신명인(申命仁)이 애사(哀詞)를 지었는데 송옥(宋玉)의 〈초혼(招魂)〉을 본떠지었다고 한다.
아, 후세에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선생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처럼 조용히 의롭게 죽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지만 이것은 선생의 마음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서 신발을 잡고 자취를 만드는 것이다. 선생은 충심을 다 바치고 온 지혜를 다하여 임금을 섬겼으나 결국 참소를 받고 죄가 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선한 무리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데 혼자서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살기를 구하였겠는가. 이것은 보통 선비도 좋게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선생처럼 학문이 깊은 분이 그럴 리가 있겠는가.
선생께서 망명한 것은 주운(朱雲)이나 장창(張敞)이 단지 자기 일신을 위해 떠났던 것과는 다르다. 선생께서 여우같은 남곤과 신정이 다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에 잠시 죽지 않고 있으면서 간신의 변란을 대비하고자 한 것이고, 또 성상의 마음이 사화를 후회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상소에 말하지 않았던가. ‘간흉들이 전하를 핍박하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켜 난국을 구하러 달려가겠다.’는 말은 사실 붉은 충정을 쏟아낸 것이다. 전(傳)에서 사어(史魚)가 시신으로 성심을 전달한 것을 칭찬하였는데, 이제 공에게서 그러한 진심을 볼 수 있다. 그 충정이 이와 같거늘 참소하는 흉적들이 성상의 총명을 가렸으니,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27년 후 가정(嘉靖) 을사년(1545, 인종1)에 영정성후(榮靖聖后 인종)께서 거의 임종에 가까웠을 때에 복과(復科)와 복직(復職)을 명하셨으니 선왕의 뉘우치신 마음을 받든 것이었다.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할 때에 아첨꾼 이기(李芑)가 과거 남곤과 심정의 간악함을 본받아 현량과를 폐지하였다.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 원년에 선한 이를 정표(旌表)하고 간사한 자들을 주벌하여 형벌을 엄하게 하시고, 밝게 하교하여 기묘년에 실시했던 현량과를 회복하였으며 남곤의 관직을 추탈하였다. 심정은 중종 때에 이미 귀양 가서 죽은 뒤였다.
비유하자면 해와 달이 가리었다가 다시 밝아지고 여러 음(陰)이 다 하자 양(陽)이 다시 찾아온 것처럼 사문(斯文)이 멸망하려다 다시 진작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대사성 선생이 지하에서 눈을 감게 된 기쁨에 불과하겠는가. 동쪽 한 맥인 우리 도가 우주 사이에서 거의 다시 밝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공은 종계변무(宗系辨誣)에 대해 얼굴을 붉히며 논변한 일로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추록되었고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양관제학 동지경연사 춘추관사 성균관사에 추증되었다.
아, 우리나라 사림의 화는 무오년(1498, 연산군 4)과 갑자년(1540)과 기묘년에 있었다. 유자광(柳子光)이 뱃속에 독을 품고 화란을 즐거워한데다가 교동주(喬桐主 연산군)의 측근에서 맴돌고 있었으니,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군자가 맨손으로 호랑이 수염을 꼬는 격이라 몸이 가루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묘년에는 군신간의 사이가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아 한 마음으로 정사를 의논하여 요순 때와 같은 태평성대가 멀지 않았었는데, 하루아침에 한마디 말로 내몰아 형벌을 받는 처지로 떨어졌으니 이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남곤과 심정의 간악함은 유자광보다 만의 만 배나 더 심하다.
아, 선생이 죽기 전에 남긴 상소를 읽으면 비록 패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임금을 향한 마음과 나라를 일으키려는 마음은 굴원(屈原)의 〈회사부(懷沙賦)〉와 견주어 어느 것이 더 나은지 모르겠다. 하늘의 노련한 눈이 그래도 아직 어둡지 않은 것이 남아 있어 선인에게 보답을 베푸는 도가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크게 행해졌다.
선생의 손자 권(權)은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고 광해군 때 강상(綱常)을 떠받쳤다. 선생의 4대손 육(堉)은 황명(皇明) 갑자년(1624, 인조2)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거쳐 영의정에 제수되었는데 나라를 내 집처럼 걱정하여 세상에서 현상(賢相)이라 일컬었다.
영의정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 좌명(佐明)은 이조 참판을 지냈다. 참판은 아들 석주(錫胄)를 낳았는데, 정유년(1657, 효종8) 사마시와 임인년(1662, 현종3) 문과에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영의정의 작은아들 우명(佑明)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으로 소생인 따님이 중궁의 정위(正位)에 올랐다.
그 밖에 내외 자손이 번성해서 많게는 4백 여 명에 달하니, 선을 행하기를 가히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겠다. 공은 일찍이 문정공과 함께 양근(楊根)의 미원(迷源)에 집터를 잡았는데,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그 뒤로 백여 년 후에 양근의 인사들이 서원을 창건하고 문정공과 나란히 제사를 올렸다. 아림(娥林 거창)의 사람들도 서원을 세우고 공의 충정을 드러내는 시를 지었다.
공의 부인 이씨(李氏)는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손녀이고 영신군(永新君) 이(怡)의 따님이다. 공과 덕을 같이하였고 공보다 40년 뒤에 죽었다.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는데 맏아들 덕수(德秀)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글을 잘하였지만 집안이 어려운 때를 만나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호는 이진자(頤眞子)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둘째 아들 덕순(德純)은 참봉이고, 셋째 아들은 덕기(德器)이고, 넷째 아들 덕무(德懋)는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고, 막내아들은 덕성(德成)이다. 형제가 모두 학문과 행실로 가문을 이었다. 딸 둘은 우후(虞候) 손세눌(孫世訥)과 빈양령(濱陽令) 이언수(李彥脩)에게 출가하였다.
참봉 저(樗)와 판관 증좌찬성 배(棐)는 덕수의 소생이고, 참봉 건(楗)과 계(棨)는 덕기의 소생이다. 충간공(忠簡公) 권(權), 추(樞), 은(檼)은 덕무의 소생이다. 증 영의정 흥우(興宇)는 을유년(1585, 선조18)에 생원, 진사에 합격하고 좌찬성에 추증된 흥록(興祿), 흥효(興孝), 흥제(興悌), 흥신(興信)은 배의 소생이다. 흥서(興緖)는 건의 소생이다. 흥도(興道)는 계의 소생이다. 첨정 흥상(興祥)은 권의 소생이다. 흥진(興進), 흥달(興達), 흥매(興邁)는 추의 소생이다. 흥운(興運), 흥전(興戩), 현령 흥지(興祉)는 은의 소생이다.
영의정(흥우)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바로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김육)과 차남 사의(司議) 정(埥)이다. 흥록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증 영의정 지(址)와 차남 탁(坼)이다. 흥효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현감 해(垓)이다. 흥신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담(埮)이다.
흥서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숙(塾), 기(墍), 근(墐)이다. 흥도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탄(坦)이다. 흥상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별좌 전(㙉)과 현령 경(坰)이다. 흥진의 양자는 준(埈)이다. 흥운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배(培)이다. 흥전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후(垕)와 준(埈)이다. 흥지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타(㙐), 잠(埁), 회(𡑭)이다. 외손과 증손, 현손은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기자가 동쪽에 홍범 전하여 우리 도 시작되었건만 / 父師範東吾道始
적막한 지 오래구나, 오야의 언덕이여 / 寥寥久哉烏冶峙
누가 그 법도를 넓혔는가, 기묘년의 현신들이니 / 孰弘其軌己卯蔚
고요히 임금을 바로잡아 한마음으로 협력하였네 / 靜格細氈有同協
아름답다 대사성이여,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 懿歟大成蛾子術
스승 되어 일침 놓으니 송경 소리 귀에 가득했네 / 師門鍼頂誦盈耳
환한 얼굴 넉넉한 모습, 물속에 돌 던지듯 하고 / 玉色敷腴石投水
성균관 빙 둘러 이곳, 성인의 봉지 견줄 만 했네 / 環橋斯下封可比
집마다 주공 공자 얘기하니 천재일우의 시대라 / 戶談周孔千載一
용에 구름, 범에 바람 따르듯 임금 은혜 두터웠네 / 雲龍風虎恩顧渥
시작은 좋으나 끝이 어렵다는 옛말 있으니 / 始善終難古有說
흉적의 참소가 총명을 가려 천지가 뒤바뀌었네 / 讒賊蔽明天地易
옥돌이 뒤섞여 타는 불길 온 세상에 가득한데 / 玉石同糅鬱攸烈
임금의 마음이 바뀌었으니 공을 어찌하리오 / 太暭渝色奈公何
죽음을 누구에게 양보하랴, 회사부를 본받아 / 死誰與讓則懷沙
충심으로 상소를 지으니 글자마다 눈물이었네 / 肝血爲疏字一淚
묘에 비를 세워 가의 사모한 뜻을 드러내고 / 有樹于泓標慕誼
인조 선조 두 임금 용서하여 원통함 풀어주었네 / 仁宣二廟雷雨雪
공의 일을 크게 밝혀 복과하고 복직하니 / 公事大白科銜復
대궐과 임금 모두 완연히 옛날과 같아졌네 / 粉署黃旗宛如昔
하늘이 선인을 도움은 길이 어긋나지 않으니 / 天所助善久不忒
믿지 못하는 사람은 공의 후손을 보라 / 人如不諶視公后
여러 공으로도 부족하여 왕실의 부인이 나왔고 / 屢公不足京室婦
증손 현손이 사백 명이니 어찌 다 기록하랴 / 曾玄四百曷勝載나의 명 과장이 아니니 어두운 구천에 전하라 / 我銘匪夸詒之昧
<끝>
[註解]
[주01] 대사성 김공 신도비명 : 이 글은 김식(金湜, 1482~1520)에 대한 신도비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
泉)ㆍ정우당(淨友堂)이다.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 즉 명성왕후가 정위에 올랐다는 언급으로 보아, 이 신도비는 1659년 이후에 지
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02] 조 선생(趙先生)의 행장 : 원제목은 〈정암조선생행장(靜庵趙先生行狀)〉으로, 한국문집총간 29집에 수록된 《퇴계집(退溪集)》 권
48에 남아 있다
.[주03] 기묘년의 일 : 1519년(중종14)에 있었던 기묘사화를 가리킨다.
[주04] 공령(功令) : 주나라 때 국가에서 학자들의 성적을 관리하고 관직에 서용하는 법규를 이른다.
[주05] 위육(位育)의 공효 : 《중용장구》 제1장의 “중화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
育焉.〕”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로, 제왕의 덕이 중화를 이루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
[주06] 문왕(文王)이 편안하셨던 풍속 :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에 편안하였던 문왕의 고사를 말한다. 《시경》 〈문왕(文王)〉에 “훌륭한
여러 선비이여, 문왕이 이 때문에 편안하시다.〔濟濟多士, 文王以寧.〕” 하였다.
[주07] 북문(北門)이 한번 열리니 : 기묘사화를 말한다. 북문은 궁궐의 북쪽 문인 신무문(神武門)인데, 기묘사화 때 남곤(南袞) 등이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밤중에 비밀리에 북문을 통해 들어가 임금에게 상변(上變)한 것을 가리킨다.
[주08] 이신(李信)이라는 …… 자이다 : 이신은 원래 낙안(樂安)의 관노였는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이식이 성리학
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기르고 공부하러 왔다. 《隱峯全書 卷13, 韓國文集叢刊 80輯》
[주09] 문인 …… 한다 : 신명인은 〈애송옥사(哀宋玉詞)〉를 지어 김식의 뜻을 밝히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海東雜錄 本朝1》 송옥
(宋玉)은 초나라 굴원(屈原)의 제자로 굴원이 멱라수(汨羅水)에 빠져죽자 〈초혼(招魂)〉을 지어 굴원의 원한을 대신 토로하고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주10] 주운(朱雲)이나 …… 것 : 주운(朱雲)은 서한(西漢) 성제(成帝) 때 괴리(槐里)의 수령으로,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劍)으로 안창후
(安昌侯) 장우(張禹)의 머리를 베기를 청하였다. 성제는 그가 스승을 욕했다고 화를 내며 어사(御史)에게 끌어내리도록 하였는데
주운이 난간을 붙잡아 난간이 부러진 일이 있었다.
성제는 뒤에 주운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 난간을 그대로 두어 직간하는 신하의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주운은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고 향리로 내려가 후학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後漢書 卷67 朱雲列傳》 장창(張敞)은 한 선제(漢宣帝) 때 황위를
물려받게 될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가 무도한 행실을 하자 용감히 간언하여 결국 유하를 쫓겨나게 할 정도로 충직하였다.
그러나 그가 경조윤(京兆尹)이 되었을 때 무고한 사람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는데, 선제가 자신을 삭탈관직 하려함을 알고
급히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漢書 卷76 張敞列傳》
[주11] 전(傳)에서 …… 있다 : 김식이 죽음으로써 임금께 직언의 상소를 올린 것을 사어의 고사에 빗대어 칭송한 것이다. 사어(史魚)는 직
간(直諫)을 잘한 위(衛)나라 대부(大夫) 사추(史鰌)를 가리킨다. 그는 영공(靈公)이 거백옥(蘧伯玉)을 등용하지 않고 미자하(彌
子瑕)를 임용하자, 병들어 죽을 때에 아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창 아래 두라고 하였다.
영공이 조문하러 왔다가 그 이유를 물어 사실을 알고는 거백옥을 등용하고 미자하를 내쫓았다. 《孔子家語 困誓》 공자가 그에 대해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았다.”라고 칭찬하였다. 《論語 衛靈公》
[주12] 복과(復科)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지우고 낙제시켰던 것을 다시 합격시키는 것을 이른다.
[주13] 굴원(屈原)의 회사부(懷沙賦) : 참소를 받고 초나라에서 쫓겨난 굴원이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기 직전에 쓴 시이다.
[주14] 선생의 …… 떠받쳤다 : 1618년(광해군5) 인목대비의 폐모에 반대하여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무안으로 이배된 후 5년 만에 그곳에
서 죽었다. 《潛谷遺稿 卷11 贈大匡輔國崇祿大夫……戶曹參判金公諡狀, 韓國文集叢刊 86輯》
[주15] 소생인 …… 올랐다 : 현종의 정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1651년(효종2)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1659년(현종1)
에 왕비에 책립되었다.
[주16] 아림(娥林)의 …… 세우고 : 경상도 거창군의 완계서원(浣溪書院)으로, 1664년(현종5)에 세우고, 1680년(숙종6)에 사액하였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 거창군》
[주17] 물속에 …… 하고 :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잘 알아듣고 이해했다는 말이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이강(李康)의 〈운명론(運命論)〉
에, 장량(張良)이 《삼략(三略)》에 관해서 군웅(群雄)에게 이야기했을 적에는 마치 물을 돌에 뿌리는 것처럼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
았는데, 한 고조(漢高祖)를 만나서 이야기하자 마치 돌을 물에 던지는 것처럼〔以石投水〕잘 받아들였다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53》
[주18] 회사부(懷沙賦) : 참소를 받고 초나라에서 쫓겨난 굴원이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기 직전에 쓴 시이다.
[주19] 가의(賈誼) 사모한 뜻 : 김식이 훌륭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실의하여 유배되었다가 결국 충심을 토로하고 죽은 것을 가리킨다. 가
의는 한(漢)나라 낙양(洛陽) 사람으로, 문제(文帝) 때 박사(博士)가 되어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고 법도(法度)를
제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켰다. 뒤에 실의하여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었다가 다시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옮겨졌
는데 양 회왕이 낙마(落馬)하여 죽자 가의 역시 상심하여 죽었다. 《漢書 卷84 賈誼傳》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이라나 김하라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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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司成金公神道碑銘 幷序
絅嘗讀退陶先生所撰文正公趙先生狀而悲之。適嶺南。觀金大成所自絶命處。未嘗不垂涕而想見其爲人。今大成五世孫參判佐明 。以先生族出學行歷官子姓玄曾爲書。請麗牲之刻甚勤。絅實非其人。顧食年久。耳剽己卯事者則有之。遂諾而爲銘焉。謹按狀 。公諱湜。老泉其字。姓金氏。新羅王者之后也。著籍淸風。世爲淸風人。有諱大猷。事麗爲侍中。曾孫昌祚亦爲侍中。勳伐之顯。與麗終始。入國朝。爲殿中者曰諱瀞。是生諱敬文。是生諱耋。官卒太常正。公之高曾若祖也。考諱叔弼。生員。贈禮賓寺正。妣泗川睦氏。世稱女士。公生於成化壬寅。未齔而孤。天資穎卓。睦夫人誨之無姑息。十二。冠學課。二十。成晉士。然於擧子業。非其好也。與靜庵先生定麗澤友。磨礱浸灌。上下窮格。名聲不脛而走四方。四方學者多宗之。時 恭禧大王濟屯以亨。一心規姚姒急元凱。其冢宰曰瑭。乃建白以爲懷瑾握瑜之士宜待不次。於是薦靜庵,大成,江叟若而人。俱敍六品。公拜地部郞 。應敎臣忠進曰。金某於學無所不通。進講性理。無出其右者。俄拜持平。上謂左右曰。予久欲使金湜登講席。今置之言責。與其重等也。副提學光祖又進曰。金某求之今世。尠見其倫。上因是下敎政院。以吐哺捉髮責輔臣。以聘招責有司。於是宗伯與政府合颺言曰。姬周功令尙矣。其後選擧。莫如漢之賢良方正孝廉之媺。請用是爲式。庶野無遺賢矣。上曰可。卽己卯夏四月也。凡薦士至者一百二十有奇。上親策問之以帝王治道。公對若不經意。而文從字順。各識 其職。先擧帝王大本本乎天命。次言位育功。一篇之中。尤致意於小人君子之分。讀卷官用漑擢爲第一。 上覽奏大悅。命超拜直提學。俄陞副提學。議者以爲師儒之長無以易公。乃命遷國子。仍參贊經筵。通讀之日。公正笏坐明倫堂。諸生以次就位。難疑答問。疏源導流。破肯䋜。闢奧窔。抉微旨。諸生承戒服膺。如客得歸。由是亡論庠生。來學者不憚遠。或築室公居之旁者有之。沖庵文簡公所見昭曠。眼空一世。而朝罷。必手大學步就老泉學云。公之深於性理善講說。輩儕亦敬而師之。他可知也。一日。上遣承宣諱忠課製類儒。又遣中使宣醞 。明日。公率諸生詣闕謝異數。上引見。又進諸生翹楚者試。橫經待問如鍾。小大不舛。韓忠進曰。濟濟多士咸彬彬可觀。師儒得人之力大矣。公起而拜曰。臣固不足爲師。近觀類學士風。可謂譬昔一變。臣願聖明師文王以寧之風焉。當是時。文正公倡不傳之學。明治亂之道。日進謨訓。文簡公博學強志。嫺於辭令。大成公知類通達。強立不反。表率首善之地。金自庵絿,韓松齋忠,奇復齋遵,朴江叟薰。皆出群之才也。文質騈駕。志同道合。拔茅連茹。日月獻納。無非君吾堯舜。世吾唐虞也。夫豈知奸凶衮,貞潛藏蜮矢。醞釀桑癰。矯誣讖文。熒惑天聰。景舟,愊,詮,雲朋姦交煽。北門一開。彼爲俎刀。我爲魚肉。賴鄭文翼公牽裾泣諫。下諸賢理。次第杖流。公配善山。及衮等爲相。加一層罪案。公聞靜庵先生 賜死。歎曰。燎原之火反我矣。與客痛飮至醉。座客相與謀曰。安忍使夫夫無辜而就死。甘讒賊之心哉。有強脊梁者奴丁足矣。莫如竊負而逃。以待上一悟也。遂行其計。行數十里。公醉乃醒。始知爲諸人之誤也。有李信者。曾墨而從公學者也。直入京告公亡命。金吾踵而物色之。公到娥林縣高梯院。題詩石壁。其辭曰。日暮天含黑。山空寺入雲。君臣千載義。何處有孤墳。故令從者具食遠村。乃草遺疏略曰。亡命臣某。謹再拜稽首吐露微臣寸忱于主上殿下。臣雖無狀。粗識古人行己之有方。非不知偸生之可恥。守節之可尙。必此冒恥而爲之者。見兇賊之將危宗社。欲效區區之忠義。殿下少垂察焉。豈特知臣之情而已哉。沈貞本一貪饕無厭小人。不爲淸議所容。積怨于胸。思欲作亂者久矣。第無其隙。因光祖知遇 聖上。學者同趨。小民稱善。乃造讖文。潛撓上志。又族群不逞。遂搆士林之禍。又曰。與南衮多聚武士。其意豈止於翦除士林而已哉。朝廷非殿下之朝廷。乃貞,衮之朝廷也。殿下之勢。不亦孤哉。不亦危哉。臣故隱忍亡命。而俟奸兇危逼君上。則挺身赴難。以報殿下不世之遇。此臣之素志也。且臣深知 殿下之疑光祖非本心也。罪臣亦非本心。故爲此區區也。殿下深察微臣情素。而觀其勢。則可以知奸兇之情迹。若殿下終始不悟。則祖宗奈何。 社稷奈何 。盡殺名士而國存者未之有也。微臣一身。非所恤也。以臣之故。延及無辜。臣卽爲殿下訣。於是雉經焉。卽庚辰五月十六日也 。從者得疏於衣帶中。以告縣宰。縣宰以聞。命所在驗之。乃釋去內子保宮沒官財。六月。歸葬楊州平丘驛上金村里艮坐原。經紀喪者。表從睦玄軒世秤也。門人龜峯申命仁作哀誄。以擬宋玉招魂云。嗚呼。後世之饒舌者。以先生不能如寒暄之從容就義爲恨。然是未得刺見先生之心。而執履爲迹也。先生竭忠盡知以事其君。卒離譖鋒。罪至罔加。焉有善類俱死。獨蒙媿恥求活。恒士不屑。況先生邃學乎。先生亡命。與朱雲,張敞秪爲一身者異。先生目見衮,貞狐媚。有不奪不厭之心。故欲少須臾毋死。以待奸臣之變。且冀天心之悔禍也。疏中不云乎。竢奸兇逼上。挺身赴難。實寸血之寫也。傳稱史魚以屍達誠。今於公見矣。有忠如此。讒賊蔽明。天乎奈何。其後二十七年嘉靖乙巳。榮靖聖后殆憑玉几。命復科復職。蓋承先王悔心也。及文定垂簾。壬人芑等祖衮,貞故奸。罷賢良科。至隆慶戊辰宣祖初年。旌淑誅姦。嚴乎鈇鉞。明敎復己卯科。追削衮官爵。貞則已於中廟朝竄死。譬如日月旣蝕而復明。群陰剝盡而陽復。斯文將喪而復振。此奚亶大成先生瞑目於地下爲快。吾道東之一脈。庶其昭揭宇宙間哉 。公嘗於宗系卞誣。有血面論。追錄公光國原從。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兩館提學,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於乎。吾東士林之禍。戊午而甲子而己卯也。子光之腹毒樂禍。且環喬桐主股掌間。濯纓諸君子赤手編虎。虀粉。固也。若乃己卯。則君臣際遇如魚有水。都兪吁咈。唐虞非遠。而一朝以單辭驅而內諸歐刀之地。是孰使之哉。衮,貞之奸。浮於子光萬萬矣。噫。讀先生絶命疏。雖盭夫有不下涕者乎。其忠君興國之心。不知屈大夫懷沙賦何如耳。皇天老眼。尙有不眯者存。故報施善人之道。大行於先生身歿后。先生之孫權。官至參判。扶綱常光海朝。先生四世孫堉。以皇明甲子壯元。備歷華要。拜領議政。憂國如家 。世稱賢相。生二男。長佐明。官吏曹參判。生子錫胄。丁酉司馬。壬寅文科。皆壯元。季佑明。淸風府院君。生聖女正位中宮 。其他內外雲仍。多至四百餘人。爲善者可毋怠矣。公嘗與文正公卜築楊根迷原未果。其後百有餘年。楊之人士刱書院。竝文正公俎豆之。娥林人亦立祠而顯詩之。公夫人李氏。孝寧大君𥙷孫。永新君怡女也。與公合德。後公四十年而卒。五男二女。男長德秀。孝友而文。遭家艱隱不仕。號頤眞子。贈吏書。次德純參奉。次德器。次德懋。贈吏書。次德成。兄弟皆以文行世其家。女。虞候孫世訥濱陽令彥脩。參奉樗。判官。贈左贊成棐。德秀出也。參奉楗。曰棨。德器出也。忠簡公權。曰樞。曰檼。德懋出也。贈領議政興宇。乙酉生進。贈左贊成興祿。曰興孝,興悌,興信。棐出也。興緖。楗出也。興道。棨出也。僉正興祥。權出也。興進,興達,興邁。樞出也。興運,興戩,縣令興祉。檼出也。議政二男。卽領議政文貞公。次司議埥。興祿二男。贈領議政址。次坼。興孝一男。縣監垓。興信一男。埮。興緖三男。塾,墍,墐。興道一男。坦。興祥二男。㙉別坐。坰縣令。興進后子。埈。興運一男。培。興戩二男。垕,埈。興址三男。㙐,埁,𡑭。外孫曾玄多不載。銘曰。
父師範東吾道始。寥寥久哉烏冶峙。孰弘其軌己卯蔚。靜格細氈有同協。懿歟大成蛾子術。師門鍼頂誦盈耳。玉色敷腴石投水。環橋斯下封可比。戶談周孔千載一。雲龍風虎恩顧渥。始善終難古有說。讒賊蔽明天地易。玉石同糅鬱攸烈。太暭渝色奈公何。死誰與讓則懷沙。肝血爲疏字一淚。有樹于泓標慕誼。 仁宣二廟雷雨雪。公事大白科銜復。粉署黃旗宛如昔。天所助善久不忒。人如不諶視公后。屢公不足京室婦。曾玄四百曷勝載。我銘匪夸詒之昧。<끝>
龍洲先生遺稿卷之十八 /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