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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9권 / 묘갈명(墓碣銘)
수충갈성양무공신 자헌대부 평안도 병마절도사 완춘군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의금부사 충양 이공의 묘갈명 서문을 아우르다.[輸忠竭誠揚武功臣資憲大夫平安道兵馬節度使完春君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忠襄李公墓碣銘 幷序]
공의 휘는 수량(遂良)이며 자는 선보(善甫)이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통제사 성뢰(聖賚)의 아들이며, 병조 참판에 추증된 평안도 병마절도사 익형(益亨)의 손자이고, 회의군(懷義君) 철남(哲男)의 증손이며,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5세손이다.
계림군은 명종(明宗) 시대에 무고를 당해 죽었는데 나라사람들이 어진 공자라고 일컬었다. 절도사에 이르러 비로소 무(武)로서 지위가 대장(大將)에 이르렀으니, 부자(父子)가 이어받아 대대로 이름난 가문이 되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숙종 25년(1699)에 무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선전관에 보임되었는데 좋아하지 않아 그만두었다. 부장(部將)을 거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판관(判官),첨정(僉正)으로 옮겼다가 전라 좌도 수군우후(水軍虞候)로 나갔다. 3년 후 들어와서 형조 정랑이 되었다가 또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나갔는데, 장흥 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로 개배되었고 훈련원 정(訓鍊院正)이 되었다.
통제사우후(統制使虞候)로 옮겼다가 또 위원 군수(渭原郡守)로 나갔다. 또 4년 후(1676) 청주진 영장(淸州鎭營將)을 거쳐 들어와서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었다가 마침내 행수 선전관(行首宣傳官)에 배임되었다.
신천(新薦)을 의논하는데, 훈련대장 윤취상(尹就商)이 4촌 아우인 모의 아들을 위하여 공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였으나 공이 따르지 않고 단호한 말로 거부하니 취상이 노하여 공을 불러 매우 꾸짖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감히 나의 조카를 막는가?”하였다.
공이 대답하지 않고 취상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기를, “저는 대장군의 비위를 맞출 수 없으니 어찌 벼슬을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즉시 똑바로 서서 쓰고 있던 관모(官帽)를 벗어서 그 앞에 던지고 태연히 걸어가 버리니 휘하의 선비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걱정을 하였으나 공은 당당하게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경종(景宗) 원년(1721)에 삼화 도호부사(三和都護府使)로서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3개월 후에 북도 절도사로 옮겨 임명되었다. 금상(영조)이 즉위하자 평안도 절도사로 옮겼다가, 좌천되어 다시 북방의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앞서 조익명(趙翼命)이 평사(評事)가 되어 공의 막부에 있었는데 영을 거스르는 일이 많았으므로 공이 병위(兵衛)를 벌여놓고 마침내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그러자 익명이 매우 두려워하여 곧바로 한밤중에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말을 달려 달아나서 면할 수 있었다. 그가 지평이 되어서 사헌부에서 어떤 일로 비판을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익명이 평사로서 원수(元帥)를 욕보이는가.” 하고 이에 하교하여 먼 곳으로 유배시켰다. 공도 이 때문에 부절(符節)을 풀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4년 봄에 청주(淸州)에서 병난이 일어났을 때 절도사 충민 이공(忠愍李公) 봉상(鳳祥)과 중영장(中營將) 충장 남공(忠壯南公) 연년(延年)이 모두 죽으니 기보(畿輔 근기(近畿))가 크게 떨었다. 상이 이에 병조 판서 오명항(吳命恒)에게 명하여 4도도순무사(四道都廵撫使)를 삼고 출사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이 때 공은 마병 별장(馬兵別將)으로 궁성을 수위하고 있다가 그날로 따라서 출정하였는데 노량(露梁)에 이르렀을 때 서자 세춘(世春)이 함께 가기를 청하니 공이 나무라며, “어린 아이가 감히 내 마음을 어지럽히느냐. 나는 죽을 곳을 얻었으니 너는 속히 돌아가 나의 선묘(先廟)를 지켜라.” 하고 즉시 말을 채찍질하여 돌아보지 않고 가니 휘하의 기병들이 감격하지 않음이 없었다.
상이 교리 박문수(朴文秀)를 보내어 가서 출정하는 장사들에게 타이르게 하니 공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들이 군대에서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역적으로 하여금 곧바로 경기(京畿)에 닥치게 하였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하고 인하여 강개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문수가 아뢰니 상이 의롭게 여겼다.
진위현(振威縣)에 이르렀을 때 적의 창끝이 어렴풋이 군문(軍門) 밖에서 오갔는데, 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밤중이 되어갈 때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왔으나 공은 성벽을 굳건히 지키며 군중에게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이에 용맹한 장수 신진소(申震熽)를 보내어 죽기를 각오한 병사 수십 기병을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기습을 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었으니, 바로 가짜 도사(都事) 김성옥(金聲玉)이었다.
안성군에 이르렀을 때 순무사에게 공을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제수한다는 밀지(密旨)가 내려오니, 순무사가 공을 불러서 보내려 하였다. 공이 응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제가 전쟁터에 있으니 소명(召命)이 있다고 해도 병영(兵營)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장수가 와서 교대한 뒤에야 갈 수 있습니다.” 하였다.
순무사가 감탄하고 이에 명령을 내려 다른 장수를 보내었다. 공이 비로소 명을 받았는데 순무사를 보고 개연히 눈물을 흘리며 차마 떠나지 못하니, 순무사가 그 충절에 감동하여 계(啓)를 올려 그를 머무르게 하였다. 박종원(朴宗元)이 청룡산(靑龍山)에 진을 쳤는데 군사가 매우 많았고 불빛이 하늘에 이었으니 군중이 모두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이 불을 밝히고 단정히 장막 속에 앉아 엄숙하게 호령하니 이로 말미암아 전 군대가 비로소 복종하였다. 순무사가 공으로 하여금 싸우기를 재촉하니 공이 말하기를, “적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기병으로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치면 적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하고 이에 군대를 나누어 편장(褊將) 민제만(閔濟萬)에게 주어 산 아래 매복하게 하였다.
해가 막 지자 동북풍이 급하게 불어 공이 깃발을 휘날리며 크게 소리치며 나아가니 적이 마침내 무너졌다. 제만의 군대가 산 아래로부터 좌우로 협공하여 가짜 영장(營將) 설동린(薛同麟)을 사로잡고 종원의 목을 베어 서울에 바쳤다. 죽산(竹山)에 이르러 장령을 바라보니 매우 높고 험준하였다.
공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병법에 ‘먼저 북쪽 산을 점거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백전백승의 병술이다.” 하고, 이에 고개 위에 진을 쳤다. 적군 5백 기병이 고개 아래에 이르러 공의 군대가 이미 험준한 곳을 점거한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도로 달아났다. 평원에 이르렀을 때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였는데, 연기와 먼지가 일어나 앞을 볼 수 없으니 장사들이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공이 드디어 칼을 뽑아 삼군(三軍)에게 맹세하기를, “지금 적을 섬멸하는 것이 이 한판 싸움에 달려있으니 너희 삼군은 각자 용맹을 떨쳐라.” 하였다. 이에 말을 달려 산을 내려가 힘을 다해 싸우니 적이 놀라 흩어지며 서로 짓밟아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인좌를 사로잡았고 빼앗은 치중(輜重)이 산더미 같았다.
공이 영을 내려 이르기를, “감히 사사로이 가지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하였다. 적이 평정되고 나니 상이 남문(南門)에 납시어 수괵례(受馘禮)를 행하고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지방으로 좌천시킨 것은 이모를 너무 몰라서였다. 지금 이모가 능히 큰 공을 이루었으니 조정에서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의 공훈을 책록하고 수충갈성양무 공신(輸忠竭誠揚武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으며 품계를 올려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삼고 완춘군(完春君)에 책봉하였다. 상이 후원에 납시어 말 타고 활쏘기를 명하자 공이 3발을 적중시키니 상이 장려하여 말하기를, “이모가 국난을 막은 용맹은 늙어서도 쇠퇴하지 않았구나.” 하고 특별히 명을 내려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總府都總管)을 가자하였다.
2년 후 포도대장으로 옮겼다가 추천을 받아 3도통제사가 되었다. 어사 이흡(李潝)이 공이 병을 조섭하고 있는 정황을 보고하니 상이 교시하기를, “이제 막 역란(逆亂)을 평정하고서 문을 닫고 깊숙이 들어앉았으니, 어찌 훈신(勳臣)이 몸을 보존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또 3년 있다가 다시 평안 절도사를 제수하자, 일을 말하는 자가 있어 공이 연로하고 무능하다고 탄핵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를 버려야 한다면 염파(廉頗)ㆍ마원(馬援) 같은 사람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공에게 명을 받기를 재촉하였다.
11년(1735)에 창병(瘡病)이 위독하였는데 상이 대열(大閱)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분발하여 말하기를, “내가 무신이 되어서 감히 병 때문에 피하겠는가.” 하며 창병(瘡病) 중에도 일어나니, 자제들이 교대로 간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고 종일토록 말을 달린 탓에 병이 더욱 위독해져서 집으로 돌아와 세상을 마쳤으니 3월 기묘일이었고, 누린 햇수가 63년이었다.
부음이 들리자 상이 조회를 폐하고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를 추증하였으며, 조제(弔祭)를 하사하고 시호를 충양(忠襄)이라 하였다. 그해 윤달 모일에 양주(楊州) 장흥(長興)의 언덕에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공은 신장이 8척이 넘었고 수염이 산신령과 같았다. 기백과 의리를 좋아하고 위기를 당하여는 과감하여 끓는 물과 타는 불도 피하지 않았다. 일찍이 《손오병법(孫吳兵法)》 읽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용병(用兵)은 《손오병법》만한 것이 없으니 장수가 된 자는 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문을 닫고 빈객을 사양하였으며,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장기를 두면서 한 번도 무용(武勇)을 떨친 때의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묻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웃으며 말하기를, “견마지로(犬馬之勞)는 말할 게 못된다.” 하였다. 안성ㆍ죽산의 전투에 있어서 공로가 여러 장수들 중에서 으뜸이었으나, 순무사가 그 아버지의 이름이 공의 이름과 같았으므로 그가 올린 장수들의 전공에는 공의 이름을 꺼려서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의 공로는 3등에 머물렀다. 경대부가 공의 공로가 낮게 매겨진 점을 말하자 공이 답하기를, “신하가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것은 직무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힘을 다해 싸운 덕분으로 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아 깨끗이 한 것이지, 제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경대부가 그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성종(成宗)의 별자(別子)가 18명인데 계성군(桂城君) 순(恂)이 가장 어질었으니 바로 공의 선조이다. 고조 량(諒)은 은양군(恩陽君)으로 대대로 종신이었는데, 그 손자에 이르러 속적(屬籍)이 비로소 끊어졌다. 공의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는 찬(襸)의 딸인데, 공이 귀해지고 나서도 부인이 손수 길쌈을 했으며 현명하다고 일컬어졌다. 76세에 돌아가셨는데 자식이 없어서 공의 종조제(從祖弟 6촌 아우) 경만(慶萬)의 아들 은춘(殷春)을 후사로 삼았다.
은춘은 관직이 통제사에 이르렀는데 이어서 완은군(完恩君)에 봉해졌다.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형(烱)은 무과에 급제하여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고, 차남은 훤(烜)이며, 3남 익(熤)은 무과 선전관이었고, 4남은 영(煐)이며, 장녀는 한경권(韓景權)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어리다.
서자(庶子)는 현(炫)이다. 훤의 아들과 익의 아들은 모두 어리다. 세춘(世春)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아들 위(煒)는 무과 선전관이었다. 앞서 공이 통제사를 할 때 군민(軍民)에게 덕을 베풀었으므로 돌아가고 나서도 군민들이 그리워하여 남문(南門) 밖에 비를 세웠는데, 공이 돌아가신 날 밤에 크게 우레가 쳐서 귀수(龜首)가 밑으로 떨어지니 군민들이 서로 전하여 기이하게 여겼다.
공이 역적 박찬신(朴纘新)과 군중(軍中)에 함께 있었는데, 순무사가 회령 부사를 제수한다는 교명(敎命)에 따라 공을 불러서 제수하려고 했을 때, 공이 진을 떠나가고 찬신이 홀로 3군을 거느렸다면 왕실이 위태롭지 않았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아, 공이 진을 떠나지 않아 결국 큰 환란을 평정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공이 돌아가시고 나서 상이 남문(南門)을 지날 때 공의 집을 오래도록 측은히 바라보았으며, 근신에게 명하여 사당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으니 이는 국가가 공의 충성을 생각해서 은택이 그 가문에 미친 것이다. 올해 봄에 공의 둘째 손자 훤(烜)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돌에 새기기를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화락하신 계림군은 / 桂林豈弟
양도왕의 손자시고 / 襄悼之孫
절도사에 이르러 / 比于節度
우리 서문을 진압하셨도다 / 鎭我西門
용맹스런 충양공이 / 矯矯忠襄
무신의 직책을 이어받아 / 襲武之服
저 북방을 안정시켜 / 殿彼朔方
부월로써 숙정하셨도다 / 鈇鉞其肅
왕이 날랜 군대에 명하여 / 王命虎旅
가서 역적을 치라 하니 / 往討凶殘
공의 머리 허옇게 세었으나 / 公髮皤皤
갑옷 투구 굳건도 하였도다 / 介冑有桓
왕이 시독을 파견하사 / 王遣侍讀
전사들을 위로하시니 / 戰士是勞
공이 눈물 흘리며 머리 조아려 / 公泣稽首
미친 도적 소탕하기를 청하였도다 / 請掃狂盜
그 누가 유언비어를 믿고서 / 孰信流言
그를 북변으로 내치려 했나 / 徙之北徼
3군이 장수를 바꾸었다면 / 三軍易帥
역신들이 기뻐 웃었으리라 / 逆臣讙笑
공이 분발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 公憤欲死
시퍼런 칼날 밟기를 맹세하니 / 誓蹈白刃
새서 내려 머물게 하여 / 璽書留之
진을 떠나지 않았도다 / 得不去陣
우뚝 솟은 저 높은 산 / 高山律律
역적들이 소굴 삼았는데 / 狼子爲穴
공이 창을 휘두르자 / 公奮叴矛
날개 돋친 기병이 4열로 달려 나갔도다 / 羽騎四列
왼편으로 쳐서 신문할 도적을 잡고 / 左擊執訊
오른편으로 쳐서 무리를 포획했으며 / 右擊獲醜
들판으로 말을 달려 / 平原躍馬
그 괴수를 섬멸했도다 / 殲厥大首
한강물 넘실넘실 흐르고 / 漢水洋洋
서울이 길이 맑아졌으니 / 王畿永淸
이에 공에게 작위 내리시어 / 乃錫公爵
충정에 보답하셨도다 / 用答忠貞
공은 많은 복을 받아 / 公受多祉
은혜가 그 자손에게 미쳤으니 / 施及其子
내가 돌에다 새겨 / 我銘于石
군사들을 힘쓰게 하리로다 / 以勖戎士
<끝>
[註解]
[주01] 수충갈성양무공신 …… 이공 : 조선 후기의 무신인 이수량(李遂良, 1673~1735)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보(善甫)이다.
1699년(숙종25) 무과에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마병 별장(馬兵別將)으로 있다가 출
정하여 진위현에서 김성옥(金聲玉)의 목을 베고 승리하였다.
또 청룡산에서 주장 박종원(朴宗元)의 목을 베고 설동린(薛同麟)을 사로잡은 뒤에, 죽산에서 두목인 이인좌를 사로잡는 데 공을 세
웠다. 이에 분무 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완춘군(完春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포도대장ㆍ평
안도 절도사ㆍ삼도수군 통제사 등을 지냈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주02] 성뢰(聖賚) : 이성뢰(李聖賚)로, 《숙종실록》 1년(1675)의 기사에 의하면, 묘당에서 당상관 이상의 무신 30명을 발탁하였는데 그
속에 부친 이익형과 함께 들어있다. 숙종 대에 안악 군수, 통제사 등을 지냈다.
[주03] 익형(益亨) : 이익형(李益亨, 1620~?)으로, 자는 길재(吉哉)이다. 1609년(광해군1) 증광시의 진사과에 합격했으며 1648년(인
조26) 식년시에 갑과 2위[亞元]로 급제했다. 현종 대와 숙종 대에 전라 수사ㆍ회령 부사 등을 지냈다.
[주04] 회의군(懷義君) 철남(哲男) : 이철남(李哲男)으로, 종실로서 광해군 9년(1617)에 종실 19인이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데 회의령(懷義令)으로 참여하였다. 인조 8년(1630)에 정의대부(正義大夫) 회의군에 봉해졌다.
[주05] 계림군(桂林君) 유(瑠) : 이류(李瑠, 1502~1545)로, 자는 언진(彦珍)이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손자로, 성종의 셋째 아들인 계
성군(桂城君) 순(恂)의 양자로 들어갔다. 윤임의 조카가 되는데 을사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인품이 출중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다.
소윤의 일파인 김명윤이 “인종이 병환이 위중하자 윤임이 계림군을 추대하려 한다.”라는 밀계를 올려 대윤이 숙청되었다. 계림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밀고가 있자 안변(安邊)으로 달아났는데 토산(兎山)에서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고 왕위 찬탈의 모함을 쓰
고 군기시 앞에서 능지형을 당한 후 3일간 효수되었다. 선조 대에 이르러 모략에 의한 희생임이 밝혀져 1577년 신원되었다.
[주06] 절도사 : 이수량의 조부인 이익형(李益亨)을 가리킨다.
[주07] 수군우후(水軍虞候) : 조선 시대의 정4품 무관직으로 수군절도사 다음의 직위이다.
[주08] 내금위장(內禁衛將) : 조선 시대 궁궐 수비와 임금의 신변 보호를 담당했던 내금위(內禁衛)의 최고 우두머리 장수이다. 《경국대
전》에서는 종2품직으로 다른 관직에 있는 사람이 겸했으며 정원은 3인이었다. 효종 3년(1652) 내금위가 금군청(禁軍廳)에 속하
면서 정3품으로 바뀌었으며 《속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주09] 행수 선전관(行首宣傳官) : 조선 시대 정3품 당상관으로 선전관의 으뜸 벼슬이다. 문신과 무신을 번갈아 임명하였다.
[주10] 신천(新薦) : 벼슬아치의 후보자를 새로이 천거하는 것을 말한다.
[주11] 윤취상(尹就商) : ?~1725.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동지중추부사 윤천뢰(尹天賚)의 아들이다. 1676년(숙
종2)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양주목사 등 지방관을 역임한 뒤 총융사, 훈련대장 등을 지냈다.
경종 즉위 후 한성 좌윤ㆍ병조 참판 등을 지냈다. 노론ㆍ소론의 대립이 치열해지면서 1722년(경종2) 최홍(崔泓) 등이 세제(世弟)
연잉군을 독살하려는 음모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으나 풀려나왔고, 형조 판서에 올라 김일경(金一鏡)과 더불어 노론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로 인하여 1724년 영조 즉위 후 김일경의 일당으로 몰려 노론에 의하여 탄핵, 파직되었으며 국문을 받고 복주(伏誅)되
었다.
[주12] 조익명(趙翼命) : 1677~1744.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필(士弼),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직장(直長) 조기수(趙祺壽)의 아
들이다. 1705년(숙종31)진사가 되고, 그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지평이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 해안방어를 강화하
기 위하여 연변수령(沿邊守令)은 무신으로 할 것과 변장(邊將)들에게 늠료(廩料)를 넉넉하게 지급하여 방군수포(放軍收布)의 폐
를 막도록 상소하였다.
경종 즉위 후 4년 동안 삼사의 언관(言官)을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 4대신의 옥사(獄事)때 언관직에 있으면서 제지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파직당하였다. 1727년(영조3),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의 변호로 복직되어 보덕(輔德)이 되었으며, 동지사(冬至
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간이 되었다. 늠료는 관비(官費)로 쓸 재화(財貨)이며, 방군수포는 신포(身布)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
는 것을 의미한다.
[주13] 평사(評事) : 병마평사(兵馬評事)를 말한다. 정6품의 관직으로서, 병마절도사의 막하에서 군사조치에 참여하며 문부(文簿)를 관
장하고 군자(軍資)와 고과(考課) 및 개시(開市)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주14] 마천령(摩天嶺) :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주15] 청주(淸州)에서 …… 때 : 1728년(영조4) 3월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말한다.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가 주동하여 영조와
노론을 몰아내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려고 일으켰다. 이인좌가 대원수가 되어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진격하였
다.
[주16] 충민 이공(忠愍李公) 봉상(鳳祥) : 조선 후기의 무신인 이봉상(李鳳祥, 1676~1728)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의숙(儀淑),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이다. 1702년 무과에 급제했고, 1724년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며, 같은 해 영조
가 즉위하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伊)과 훈련대장을 역임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충주에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
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아산(牙山)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주17] 충장 남공(忠壯南公) 연년(延年) : 조선 후기의 무신인 남연년(南延年, 1653~1728)으로, 자는 수백(壽伯), 호는 현암(玄岩), 시
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의령군 남군보(南君甫)의 17세손이다. 이인좌의 난 때 청주영장 겸 토포사로서 싸우다
사로잡혔는데 항복하지 않고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1728년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이듬해에 숭선군(崇善君)에 추봉되었으며, 청주의 표충사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남충장공시고(南
忠壯公詩稿)》가 있다.
[주18] 오명항(吳命恒) : 1673~1728.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 자는 사상(士常), 호는 모암(慕庵)ㆍ영모당(永慕堂),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인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윤겸(允謙)의 현손이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한 뒤에 이조 참의ㆍ대사성 등을 지냈으며,
영조가 즉위한 뒤에는 호조 판서가 되었고, 신임사화와 관련되어 물러났다가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이조 판서에 임명되
었다. 이인좌의 난 때 병조판서 겸 4도순무사로서 분무 공신(奮武功臣)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주-D019] 진위현(振威縣) : 경기도 평택시 동북쪽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주20] 신진소(申震熽) : 1683~?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이명(而明),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707년 별시에 병과로 무과 급제하였
다. 이인좌의 난 때 도순무 군관(道巡撫軍官)으로 공을 세웠으므로,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이 포상을 청하여 가선대부를 가자하여
동지(同知)를 제수하였다.
[주21] 박종원(朴宗元) : 청주진영의 우후(虞候)로 있었는데 이인좌에게 항복하였다.
[주22] 청룡산(靑龍山) : 경기도 안성에 있다.
[주23] 민제만(閔濟萬) : 1672~1732.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인숙(仁叔)이다. 가선대부 경주 영장을 지낸 민후
경(閔後慶)의 아들로서, 이인좌의 난 때 형 민제장(閔濟章)을 도와 전공을 세워 분무 원종일등(奮武原從一等)에 책록되었고, 절충
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주24] 병법에 …… 하였으니 : 《손자병법》에서, “먼저 북산을 점거하는 자는 이기고, 뒤에 이른 자는 패한다.[先據北山者勝, 後至者
敗.]”라고 하였다.
[주25] 수괵례(受馘禮) : 헌괵례(獻馘禮), 즉 전투를 치른 장수가 적장의 머리를 왕에게 바치는 의식을 말한다. 1728년(영조4) 4월에 도
순무사 오명항의 군대가 돌아왔을 때 왕이 숭례문에 나가 헌괵례를 행하였다.
오명항이 황금빛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고 꿇어앉아 적의 괴수 정희량ㆍ이웅보ㆍ나숭곤 세 사람의 수급(首級)을 단 아래에 가져다
놓자 판의금부사 김흥경(金興慶)이 받아서 단상으로 올렸다. 영병조사(領兵曹事) 이광좌(李光佐)가 수급을 받은 뒤, 누(樓)로 올
라와 복명(復命)하였다. 상이 아울러 장대에 매달도록 명하고, 군중으로 하여금 승리한 것을 알리는 취타(吹打)를 연주하도록 하였
다. 《國朝寶鑑 卷59》
[주26] 어사 …… 보고하니 : 《영조실록》 7년(1731) 2월 27일 기사에 의하면, 경상도 암행 어사 이흡(李潝)이 돌아와 도내 수령들의 치
적 여부를 보고하였는데 통제사 이수량은 한가롭게 노는 것을 일삼고 있으니 벌을 주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주27] 염파(廉頗) : 중국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명장으로서 80을 넘긴 나이에도 전투를 치르며 건재하여 노익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인상여(藺相如)와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어 조나라를 지켰으며, 그 공으로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이 위문(尉文)이라는 읍의 땅
을 내리고 신평군(信平君)에 봉하였고, 기원전 251년에 평원군(平原君)이 사망하면서 공석이던 상국(相国) 대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도양왕(悼襄王)이 즉위하여 장군직에서 파면되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의 서북쪽 지역인 대량(大梁)으
로 망명하였다.
[주28] 마원(馬援) : 기원전 14~49. 왕망(王莽)이 전한(前漢, 기원전 206~25)을 멸망시킨 후 후한(25~220)의 건국을 도운 장군이다.
처음에는 왕망의 신(新)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나 결국에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의 신하가 되었다.
35년 화남(華南) 지방의 태수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지금의 북베트남에 이르는 지역까지 중국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했다. 45년에는
북방 국경지대로 파견되어 중앙아시아의 흉노족을 제압하는 데 힘썼다. 마원은 죽은 다음 신(神)으로 받들어졌다.
[주29] 대열(大閱) : 임금이 친히 군대를 검열(檢閱)하는 일을 말한다.
[주30] 손오병법(孫吳兵法) : 중국 춘추 시대 병법의 대가인 손무(孫武)의 《손자병법(孫子兵法)》과 오기(吳起)의 《오자병법(吳子兵
法)》의 합칭이다.
[주31] 순무사가 …… 같았으므로 : 순무사 오명항의 아버지 이름이 수량(遂良)이다.
[주32] 공의 …… 머물렀다 :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신들의 훈호(勳號)를 수충갈성결기 효력분무 공신(輸忠竭誠決幾効力奮武功臣)이
라고 정하였다. 오명항(吳命恒)을 1등으로 삼고, 박찬신(朴纘新)ㆍ박문수(朴文秀)ㆍ이만빈(李萬彬) 등 7명을 2등으로 삼고, 이
수량(李遂良)ㆍ조현명(趙顯命) 등 7명을 3등으로 삼았다. 《英祖實錄 4年 4月 26日》
[주33] 계성군(桂城君) 순(恂) : 이순(李恂, 1478~1504)으로, 자는 수견(壽堅)이다.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成宗)과 숙의 하씨(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후사가 없이 26세로 요절하여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를 양자로 하였다. 계림군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
山大君)의 손자이다.
[주34] 은양군(恩陽君) : 이량(李諒)으로, 계림군의 다섯 아들 중 막내이다. 계림군이 윤원형(尹元衡)의 모함으로 역모의 화를 당했을 때
위의 세 아들은 죽음을 당하였고, 13살의 넷째 정양군(正陽君) 이회(李誨)와 2살의 다섯째 은양군(恩陽君)은 어려서 죽음을 면하
였다.
[주35] 속적(屬籍) : 왕실의 족보이다.
[주36] 은춘(殷春) : 영조 대에 전라 우수사, 경상 좌병사, 안악 군수, 북병사(北兵使), 통제사, 포도대장, 평안 병사 등을 지냈다.
[주37] 공이 …… 때 : 이수량이 102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통제영(統制營)은 경상남도 통영(統營)에 있었다.
[주38] 박찬신(朴纘新) : 1679~1755.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함양, 자는 군술(君述)이다. 1702년 알성시 병과에 무과 급제하였
다. 경종 대에 충청 수사(忠淸水使),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를 지냈고, 이인좌의 난 때 중군(中軍)으로서 난을 평정한 공으로 2
등공신에 책록되고 함은군(咸恩君)에 봉해졌다. 이후 어영대장 총융사(摠戎使) 등을 지냈는데, 1755년(영조31) 나주괘서사건 때
사형 당하였다.
[주39] 양도왕(襄悼王) : 조선 제8대 왕인 예종(睿宗)의 시호이다.
[주40] 절도사에 …… 진압하셨도다 : 이수량(李遂良)의 조부 이익형(李益亨)이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주41] 시독(侍讀) : 조선 시대, 경연청(經筵廳)에 속하여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던 정5품 벼슬로서 홍문관의 교리나 부교리가 겸직하였
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1728년 3월의 시독관은 조현명(趙顯命)이었다.
[주42] 그 누가 …… 했나 : 풍릉군(豐陵君) 조문명(趙文命)으로 보인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고 난 뒤, 왕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여러
훈신(勳臣)들을 인견하였는데 조문명이 왕에게 이수량이 출전했을 때의 그 충성과 용기를 말하고, 자신이 이수량의 사람됨을 알아
보지 못하고 회령 부사가 올라왔을 때 들은 사실을 가지고 왕에게 아뢴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여 이수량에게 사과하였더니 이수
량이 너그럽게 수용한 사실을 말하였다. 《英祖實錄 4年 5月 1日》 <끝>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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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輸忠竭誠揚武功臣資憲大夫平安道兵馬節度使,完春君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忠襄李公墓碣銘 幷序.
公諱遂良。字善甫。統制使贈議政府左贊成諱聖賚之子。平安道兵馬節度使贈兵曹參判諱益亨之孫。懷義君諱哲男之曾孫。桂林君諱瑠之五世孫也。桂林君當明廟世。遭誣死。國人稱爲賢公子。至節度使。始以武。位至大將。仍父子爲世名家。公少英偉。擧肅廟二十五年武科。初補宣傳官。不樂棄去。由部將。遷訓鍊院主簿,判官,僉正。出爲全羅左道水軍虞候。居三年。入爲刑曹正郞。又出爲德川郡守。改長興都護府使。進訓鍊院正。遷統制使虞候。又出守渭原郡。又四年。由淸州鎭營將。入爲內禁衛將。遂拜行首宣傳官。議新薦。訓鍊大將尹就商爲從父弟某之子。令公薦之。公不從。揚言枳之。就商怒。招公大罵曰。君敢枳吾子姪邪。公不答。瞪視就商曰。吾不能媚大將軍。其可仕乎。卽平立。脫所着帽投之前。坦步而去。麾下士。皆爲公懼。而公揚揚不少挫也。景廟元年。以三和都護府使。薦爲咸鏡南道兵馬節度使。居三月。遷拜北道節度使。今上卽位。移平安道節度使。以左遷。仍帥北方。初趙翼命爲評事。在公幕府。違令多。公陳兵衛。欲遂以軍法繩之。翼命大恐。直夜半踰摩天嶺。走馬遁去。乃得免。及爲持平。司憲府以事詆之。上曰。翼命以評事。螫元帥邪。乃下敎流之遠方。公亦以此解符歸。四年春。淸州兵變。節度使忠愍李公鳳祥,中營將忠壯南公延年。皆死之。畿輔大震。上乃命兵曹判書吳命恒。爲四道都廵撫使。出師討。時公以馬兵別將。衛宮城。卽日從征。次于露梁。庶子世春。請俱往。公叱曰。竪子敢亂吾心邪。吾得死所。汝速歸守吾先廟。卽策馬不顧而去。麾下騎無不感激。上遣校理朴文秀。往諭出征諸將士。公叩頭言曰。臣等待罪行間。使逆賊直逼圻甸。此臣等之罪也。因慷慨泣下數行。文秀以聞。上義之。至振威縣。有賊鋒隱隱往來陣門外。公不爲動。夜將半。飛矢四集。公堅壁。戒其軍中毋妄動。乃遣驍將申震熽。帥敢死士數十騎。間道襲之。斬其首。卽僞都事金聲玉也。至安城郡。有密旨下廵撫使。授公以會寧府使。召公而歸。公不應曰。吾臨陣。雖有召命。不可離次。侍他將來代。然後乃可歸矣。廵撫使爲之嗟歎。於是下令遣他將。公始受命。見廵撫使慨然流涕。不忍去。廵撫使感其忠節。啓留之。朴宗元屯靑龍山。兵甚盛。火光屬天。衆皆懼。不知所出。公明燭端坐帳中。號令嚴肅。由是一軍始帖伏。廵撫使令公趣戰。公以爲賊衆我寡。以奇兵乘其無備而擊之。賊可破也。乃分兵。授其褊將閔濟萬。伏於山下。日且入。東北風急。公揮旗大譟而進。賊遂潰。而濟萬兵從山下。左右夾攻。禽僞營將薛同麟。斬宗元首。獻于京師。至竹山。望見獐嶺甚高峻。公喜曰。兵法。先據北山。此百戰百勝之術也。乃以兵陣于嶺上。賊五百騎至嶺下。仰視公兵。已據險。大驚還走。至平原。擊牛犒軍。煙塵起不見其際。諸將士不肯前進。公遂拔劒誓三軍曰。今滅賊在此一戰。汝三軍其各鼓勇。乃躍馬下山力戰。賊驚散。相與蹂躪而死者。不可勝數。禽李麟佐。輜重委積如山丘。公下令曰。敢有私取者斬。賊旣平。上御南門。行受馘禮。下敎曰。向者外遷。不知李某甚矣。今李某能成大功。朝廷豈不愧乎。冊公勳。賜輸忠竭誠揚武功臣號。進階爲嘉義大夫。封完春君。上御後苑。命騎射。公中三矢。上奬諭曰。李某禦侮之勇。老而不衰。特命加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總府都總管。居二年。遷捕盜大將。薦爲三道統制使。御史李潝言公養病狀。上敎曰。新定逆亂。閉閤深坐。豈非勳臣保重之道邪。又三年。復拜平安節度使。有言事者。劾公以年老無能。上敎曰。年之高者如可棄。安用廉頗,馬援哉。趣公受命。十一年。病瘡且革。聞上大閱。卽奮曰。吾爲武臣。敢以疾辭乎。(果밑에衣)瘡而起。子弟交諫。卒不聽。終日馳驟。疾益篤。及歸而卒。乃三月己卯也。享年六十三。訃聞。輟朝。贈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賜弔祭。謚曰忠襄。以其年閏月某日。禮葬于楊州長興之原。公身長八尺有餘。鬚髯若神。好氣義。臨危果敢。雖湯火。有所不避也。嘗喜讀孫吳兵法。語人曰。用兵莫如孫吳。爲將者。不可以不讀也。平居杜門謝賓客。終夕飮博。一不言揚武時事。人有問者。輒笑曰。犬馬之勞。不足稱也。當安城竹山之役。功冠諸將。而廵撫以其父名與公同。其所上諸將戰功。輒諱公名而不書。故公功居於三等。卿大夫稱公之屈。公謝曰。人臣效死社稷。是職也。賴諸將驅馳之力。廓淸國亂。吾何功焉。卿大夫多其不伐。成廟別子十八人。惟桂城君恂最良。公之先也。高祖曰諒。恩陽君。世爲宗臣。至其孫。屬籍始絶。公夫人羅州羅氏。襸之女也。公雖已貴。而夫人手自紡績。以賢明稱。年七十六卒。無子。以公從祖弟慶萬子殷春爲後。殷春官至統制使。紹封完恩君。有子四人女二人。子長曰烱。中武科价川郡守。次曰烜。曰熤。武科宣傳官。曰煐。女長適韓景權。次幼。庶子曰炫。烜之子與熤之子。又皆幼。世春武科。子煒。武科宣傳官。初公爲統制使時。有德於軍民。及旣歸。軍民思之。爲立碑於南門外。公卒之夕。天大雷。龜首下墜。軍民相傳以爲異。公與逆賊朴纘新。同在軍中。廵撫使以會寧府使敎命。招公以授之。公如去陳。而纘新獨將三軍。則安知王室之不危也。嗚呼。公不去於陳。卒平大難者。豈非天邪。公旣卒。上過南門。望公家。惻然久之。命近臣賜祭于廟。是國家思公之忠。而恩澤及其家也。今年春。公次孫烜。以狀請銘於石。銘曰。
桂林豈弟。襄悼之孫。比于節度。鎭我西門。矯矯忠襄。襲武之服。殿彼朔方。鈇鉞其肅。王命虎旅。往討凶殘。公髮皤皤。
介冑有桓。王遣侍讀。戰士是勞。公泣稽首。請掃狂盜。孰信流言。徙之北徼。三軍易帥。逆臣讙笑。公憤欲死。誓蹈白刃。
璽書留之。得不去陣。高山律律。狼子爲穴。公奮叴矛。羽騎四列。左擊執訊。右擊獲醜。平原躍馬。殲厥大首。漢水洋洋。
王畿永淸。乃錫公爵。用答忠貞。公受多祉。施及其子。我銘于石。以勖戎士。<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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