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통과 연민의 세계
영화 <다음 소희>를 보면서 얼마 전에 시몬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을 읽으면서 중력의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이 세계 내에서의 삶과 이를 초월할 가능성으로서의 신적 은총의 관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일찍이 석가모니는 인간사에 조건 지워져 있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했다. 고통의 원인을 찾아 그 근본적 원리를 해소하는 방향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 것이다. 시몬 베이유의 사유에서 고통은 신의 사랑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적 관점 역시 인류가 역사적 발전 속에서 끌어안고 살아온 세계 속의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이해의 노력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과 신의 전능함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이 세계의 실존적 고통과 맞물리면서 수많은 논쟁과 질문과 답변들을 만들어 낸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앞에는 '악'과 '고통'이 실재하고 있다. 이를 환각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계의 고통은 실재적이고 감각적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소희라는 18세 청년의 죽음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마이스터고라고 이름을 바꾸었지만 취업을 목표로 하는 학교에서 현장실습 제도에 의해 다양한 업체에 졸업 전에 취업하여 나가는 제도가 있다. 오래된 교육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 온전히 성인이 되지 못한 청소년이 산업체에 실습을 나갔다가 사망한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소희는 통신회사와 관련된 콜센터에 실습생의 자격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요즘 이런 직종이나 업무가 외주화 되어 다층적으로 관리되고 고객 응대와 관련하여 감정적인 소모와 실적 압박 등으로 심신이 피폐해지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도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 팀장의 자살과 고발 등이 체계적으로 오도되고 묻히게 된 후 소희 역시 회사의 자의적인 임금 지급과 이중계약서 등의 불합리한 문제들에 대해 분노하지만 무기력할 뿐이다. 학교는 취업률에 목을 매고 있고 아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처우를 당하는지 그 일이 할 만한 일인지 하는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후 관리를 하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이 실습을 포기하고 학교로 복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교육청은 정량적인 학교의 실적을 토대로 예산을 배정하고 여기에 학교는 사활을 걸고 매달리는 것이다.
회사는 외주와 하청을 통해서 최대의 비용 절감과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기에 실적만이 중요하고 업무를 담당하고 상담원이라고 불리는 감정노동자들이 당하는 모욕과 성희롱적 상황 등에 대해서 외면하고 싶어 한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사회적으로도 공론화가 되어 제도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자살한 팀장의 발언처럼 '재수가 없었던 거야'라고 확률적인 불운으로 치부하는 상황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우리 사회 곳곳에 여전히 문제를 드러내어 해결하기보다는 이를 은폐하고 덮으려는 관행적 요소가 완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최근 보도에서 확인하듯 산재가 일어난 기업에서 동일한 유형의 사망사고가 재발하고 있다. 화력발전소에서 제빵공장에서 건설현장에서 조선소 등 곳곳에서 그러하다.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도 빼놓을 수 없는 경우다. 배달노동자의 사망은 교통사고로 간주되지만 거기에는 속도와 배달 경쟁이라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세월호, 이태원,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같이 사회적 재난 관리 능력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도 있다. 채 이병 사건은 안전 관리 차원을 넘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특검을 통해 해결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지금 세계는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3차 세계 대전 중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21세기를 9.11과 같은 테러로 문을 열더니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레바논-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 미얀마의 군부와 시민 간의 내전, 수단 내의 분쟁 등등 지정학적 위기상황들이 빈번하게 분화되어 열전이 진행 중이다. 거기에다 더해 관세와 무역 등의 경제적 갈등이 패권을 다투는 성격으로 흘러가고 있다. 참으로 복잡다단한 세상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소리 없이 흘러나고 있다. 기후 위기는 예측할 수 없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삶의 근본적인 구조를 개선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보이나 국제적인 상황은 그런 전 지구적 합의나 변화를 위한 체계를 도출해 낼 능력과 여유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키클롭스가 지배하는 섬에 갇힌 오디세우스 일행이 외눈박이 거인의 한 끼 식사로 사라지는 운명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불행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찾아내고 분석해서 그 고리의 연관성을 제거할 수 있는 간단명료한 해결책이 있다면 참 좋을 것인데 세상의 상관관계는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하나의 덩굴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네트워크화되고 간접화된 세계의 작동방식으로 인해 문제 해결의 난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가해자는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이기도 하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또 다른 구조에서 을의 입장에 처해 있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렇게 되면 눈먼 악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행운을 비는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비참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눈먼 중력의 법칙 앞에서 무기력하게만 느껴진다.
2. 교육과 노동의 풍경
교육은 바뀔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바꾸어야 할 것인가. 학교가 위험한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교사 역시 학부모와 학생 그리고 교육청 사이에서 일종의 감정노동자처럼 스스로를 느끼고 있다. 자기 효능감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학생 역시 학교에서 자유롭다고 스스로를 생각하기 어렵다. 학업과 친구관계를 조화롭게 관리하고 가족 안에서 진정한 이해에 기반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심신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학부모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 교육이 점점 사회적 선발 과정의 때 이른 기능적이고 결정적인 도구가 되고 있다.
인간을 유희적 존재라고 하기도 한다. 놀이하는 인간. 동시에 인간은 노동하지 않으면 삶을 지탱해 나가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도 대부분 그러하고 사회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런데 최근으로 오면서 1차적인 생산 부문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이 점점 축소되고 있다. 2차, 3차의 사회적 체계와 관련된 분야가 압도적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2008년 금융위기처럼 파생적인 금융상품의 규모가 기초적인 경제 요소의 현실을 덮고 은폐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추세가 지속가능한 것인지에 있지 않을까.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필수적인 식량과 의류, 건축 관련한 산물의 생산과 배분에 관련되지 않은 영역이 이토록 비중이 큰 적이 있을까. 노동이 지니고 있는 생산적 직접성 역시 사라지고 추상화되고 있다. 플랫폼을 형성하고 있는 구조들이 인간의 노동을 단순화하고 기능화하고 있다.
3. 인간 그리고 공동체적 삶
인간의 흔적이 도처에서 지워지고 있다. 인격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사라진 자리에 기능화되고 계량화된 자원으로서의 인간만이 남는다. 소비자로서의 인간은 구매력에 의해 신줏단지처럼 모셔지는 반면 소수의 체계관리자와 자산 소유자를 제외한 사람은 노동력으로 계산되고 대체 가능한 투입 요소로서 평가되며 인격이 아닌 경제학적 투입 요소로 분해되고 정식화된다. 현재의 경제학은 그런 관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 즉 다시 정치경제학적 관점으로 돌아서야 한다. 기능적 경제학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과 심장을 담은 인문학적 가치를 되찾아 융합해야 한다. 노동에서 인간의 얼굴이 드러나야 한다. 얼굴 없는 노동은 극복되어야 한다.
우선 교육에서 인간의 자율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자율성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책임감을 획득하고 준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 인공지능이 지닌 환각적인 오류를 짚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시민들이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기능해야 한다. 체계 즉 메커니즘 속에 숨지 말아야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영화의 초입과 마지막 부분에서 소희는 춤을 추고 있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소희는 일련의 동작을 지속하며 자신의 동작을 영상으로 남긴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 영상을 보고 평가하고 웃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내내 소희의 얼굴에서 밝은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영상 속의 마지막 모습은 웃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형사는 울고 있다. 무엇이 경찰관을 울게 하는가. 그것은 꿈을 지닌 청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희적 존재로서의 인간. 춤을 추고 꿈을 꾸고 삶을 즐길 줄 아는 인간. 그런 인간이 바스러진 현실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목도하고 있다. 구의동 지하철 역에서 스러진 19세 청년 노동자, 빵공장에서 3명이 사망한 상황, 태안 발전소에서 죽은 노동자. 실습생이 잠수작업을 하다 사망한 일들. 외국 노동자들의 죽음 등.
산업재해와 직업 관련 질병들.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 메마른 경제적 관점과 정책을 되돌아보고 거기 인간의 표정을 한 경제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인간의 목숨은 경제적 투입 요소나 산출물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 죽음의 미늘이 달린 노동이 너무나 많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 없이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 없이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태도 변화 없이는 우리 사회가 질적인 비약을 이뤄낼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맹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을 몽둥이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이 다른가? 이 영화 '다음 소희'는 우리에게 이 맹자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정치는 제도를 만드는 일이고 제도는 사회의 공동체의 지향하는 가치가 구체화한 것이다. 영화에서 장학사는 경찰에게 푸념한다. '이제 교육부로 가시렵니까? 어지간히 하시지요?' 그래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 삶은 그대로 남는다. 그대로 남아서 누가 다음 희생자가 될지 제비 뽑기를 하는 의자놀이가 된다. 그리고 시인은 이렇게 노래할 것이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이성복, 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