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후꾸미(黑田福美)와 귀향기원비
구로다후꾸미(黑田福美, 1956~ )는 20대 초반 어느 날 한·일전 배구중계를 보면서 한국의 배구 선수 강만수(1955~ )의 팬이 되어 강 선수에게 반해버렸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조선인)의 존재는 무시해도 좋다고 의식했는데 어떻게 저런 멋진 남자가 있을까 했던 것이다. 청순한 처녀가 강만수 팬으로서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침내 1984년 11월, 구로다는 한국을 찾았고 남대문 시장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 사람들을 새롭게 보았다. 한국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고, 더구나 일본인보다 더 친근하고 인정 넘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녀는 그 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보통 1주일 동안 머물렀다. 그녀는 독학으로 한국말도 배우고 텔레비전 리포터로서, 작가로서, 라디오방송 디스크자키로서, 한국어 강사로서, 또 한국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이것저것을 소개하면서 지한파로서 자리를 굳혔다.
내가 구로다 후꾸미를 만난 것은 2007년 10월 29일, 오랜만에 고려대학교 교우회관 대회의실에서 그녀의 강연을 주선하였을 때이다. 그 모임에서는 좀 특이한 주제를 다루었다. 초청 강사인 구로다 후꾸미가 일본의 유명한 여배우 이어서라기보다 반전 평화주의자이자이고 한국을 사랑하는 순수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강연 주제는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 말기 자살 특공대원인 가미가제(神風)에 관한 것이었다. 1945년 5월 11일 오키나와 해상에서 25세의 나이로 사라져간 조선 청년이자, 일본 영화인 ‘호타루 가에루(蛍返し / ほたるがえし; 반딧불이 돌아오다)’에서 ‘호타루’의 모델인 탁경현(卓庚鉉)과 구로다의 기이한 인연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줄거리를 대충 이렇다. 1991년 어느 날, 꿈속에서 만난 조선인 청년이 “나는 비행기를 조종한다. 전쟁에 나가 죽는 것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억울한 것이 있다면 조선인이 일본인의 이름으로 죽는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1995년. 요미우리신문에 꿈의 내용을 칼럼으로 쓴 뒤 그 특공대원은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 한국이름 탁경현, 卓庚鉉)일 가능성이 높다는 제보가 있었다. 미쓰야마의 사진을 보고 꿈속의 청년이란 확신이 서면서 그녀는 벽치(癖癡)의 기질로 탁경현의 가계자료(家系資料)와 소학교, 중학교, 교토 약학전문학교의 생활기록부까지 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기이한 인연(?)은 탁경현의 고향인 경남 사천시 서포면 외구리를 찾게 하었고, 드디어 그곳에 행정적이고 감정적인 것까지 얽히고설킨 복잡한 과정을 견디면서 추모비인 ‘귀향기원비’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제막일은 당초 2007년 12월 2일 이었으나 다음해 5월초로 변경하였다.
'귀향기원비'는 사천시 서포면 외부리 체육공원 안에 4.56m 높이로 세워졌는데 위령비가 세워진 터는 사천시가 제공했고, 기원비 건립에 들어간 비용은 구로다 후쿠미가 주선하고, 위령비의 설계 및 제작자는 고승관(전 홍익대 교수)이 맡았다. 사천시는 2008년 5월 10일 '귀향 기원 위령비'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광복회 경남지부와 사천진보연합, 경남 사천, 진주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반대로 제막식은 취소되었고 기원비도 철거하였다(2008.5.13). 철거된 기념비는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법륜사로 옮겨졌다.
구로다가 이러한 활동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게 한 데에는 이 모임에 배석하였던 동경대 교수인 홍종필(洪鐘佖, 1936~ 전 명지대 교수) 박사가 있다. 구로다가 홍 교수를 알면서부터 구로다의 탁경현과의 기이한 스토리는 더욱 확고해지고 구체화된다. 홍 교수를 통해 탁경현의 유족을 만나게 되었고, 오키나와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에 잘못 새겨진 탁경현의 한자이름도 고치게 되었다. 그녀는 오키나와 바닷가에서 주운 산호가 꼭 탁경현의 유골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가져와 오늘도 물을 주고 있단다.
참석자들은 구로다의 강연에 몰입하였고, 간간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까지 흘리는 그녀에게 오직 박수로 힘을 줄 뿐이었다. 그녀의 기이한 평화활동에 나와 너, 한국과 일본, 전쟁과 평화,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 등이 뒤섞이면서 복잡한 감정들이 융합되는 느낌이었다. 오직 그녀의 끊임없는 탁경현 사랑이 두 나라 간에 찢겨지고, 얼룩지고 만신창이가 된 불행했던 한・일간의 응어리를 녹여 내릴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주는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인터넷과 지상을 통하여 많이 알려졌기에 여기서는 줄이기로 하고 강연에서 느낀 새로운 사실 몇 가지를 남기고 싶다.
꿈속의 탁경현 때문에 그녀가 한국어를 독학하게 하였고 1984년부터 NHK의 한글강좌를 지금까지 진행하도록 하였다 ‘한국어’냐 ‘조선어’냐의 30년 가까운 논란에서 ‘한글 강좌’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귀착시킨 것이 일본의 지식인이고 일본사회이라고 하였다. 1984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일본들의 대한관(對韓觀)은 부정적이었다. 지식인은 물론 한국의 왕래가 잦은 비즈니스맨 들이 조센징, 기생 따위로 비하시키고 폄하시키는 부정적 한국관의 숙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명한 여배우이며, 문화인이고, 방송인인 구로다는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한국관을 전파시키고 고정된 부정적 한국관을 긍정적으로 전환시키려고 산더미 같은 역사의 응어리를 어루만지고, 적대적이고 무관심한 감정의 실타래를 풀으려고 험난한 길을 뚫고 나가기 위해 30여년을 바쳐오고 있는 그녀이었다.
시장에서 만나는 아줌마들의 사랑에서 한국의 가정과 정서를 이해하게 되었고, 발전된 서울 올림픽이 한국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구로다가 있었다. 한국을 바로 알리기에는 한류의 영향이 매우 컸다. 일본인들의 한국문화에의 쏠림 현상은 일본사회의 바닥을 파고들었고, 그들의 사시(斜視)를 자각시키었다. 구로다가가 발로 쓴 ‘서울의 달인(達人)’이란 관광안내서는 여러 차례나 개정판을 내었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녀는 불고기만 소개한 것이 아니고 개장국도 소개하였고, 김치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깍두기도 소개하였다. 아리랑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양산도도 소개하였고, 남대문 시장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모란시장도 소개하였고, 서울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충주도 소개하였다.
그녀의 지한활동(知韓活動)은 그동안의 노력을 바탕으로 이제부터 곰삭아지고 넓어지고 높아지는 느낌이다. 한국을 사랑하기에 불행했던 과거를 반성하되 털어버릴 역사의 짐은 털어버리고, 새롭고 밝은 교린의 역사를 맞이하기 위해 그녀가 생애의 고귀한 세월을 바치면서 기울여온 평화주의와 한일선린을 위한 보람찬 노력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이 나만이 아닐 것이다.
* 이글은 원전(‘꿈에 본 한국청년 가미가제’, 고대65동기회/제19차 안암65포럼/ 2007.10.29)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2023.4.20]
<참고자료>
탁경현 위령비 건립에 대한 우리의 입장
민족문제연구소 2008년 5월 8일
육군특별공격대원 탁경현과 사천 출신 태평양전쟁 희생자의 위령비인 ‘귀향기원비’가 일본 여배우인 구로다 후쿠미 씨의 노력으로 경상남도 사천군 서포면 하수종말처리장 일원에 건립되어 2008년 5월 10일 제막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탁경현은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경남 사천 출신으로 교토약학 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육군비행학교에서 견습사관으로 교육을 받은 후 육군항공부대로 배속되어 출격명령을 하달 받고, 당시 24세의 나이로 출격, 1945년 5월 11일 오키나와 해상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탁경현은 철저한 황민화교육하에서 강요된 ‘지원’에 의해 동원되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출격명령에 몸부림치다 젊은 나이에 비극적 삶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탁경현은 황민화교육과 침략전쟁의 희생자인 한편, 무고한 오키나와현민이나 연합군의 관점에서는 가해자인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귀 향 기 원 비 (비 문)
태평양전쟁 때
한국의 많은 분들이
타국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분들의 영혼이나마
그리운 고향 산천으로 돌아와
편안하게 잠드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9년 10월 26일
법향심 구로다 후쿠미
歸 鄕 祈 願 碑
太平洋戰爭時
韓国の多くの方々が
異鄕に無念の死を遂げられました
その御霊なりとも
懐かしき故鄕の山河に帰り
安らかな永久の眠りにつかれますよぅ
心からお祈りいたします
二○○九年十月二六日
法香心 黑田福美
자료: 임무공역(blog, 烏鵲別曲), 조선인 가미카제 조종사 탁경현 위령비, 2012.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