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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함께 걷는 신앙 길
이홍규 /씀
나의 신앙생활은 중학교 2학년 때인 1969년에 입교해서 부모님 몰래 담을 넘어 교회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선친은 절을 신축하거나 보수하는 목수 일을 하셨는데 대단하다고 할 정도로 불교의 신심이 깊으셨고 모친은 남편의 뜻이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르는 순종형의 주부셨다. 그러니 가족 중의 한 사람이라도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가정 분위기였다.
선친은 한번 일을 나가면 2년이고 3년이고 절에 묵으면서 일을 마쳐야 돌아오곤 하셨기 때문에 교회에 가기 위해 눈치를 보는 때가 많지 않았지만 모친이 항상 가정을 지키고 계시면서 내가 교회로 나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문소리를 내면서 버젓이 대문으로 출입하지 못하고 밤에 몰래 담을 넘어 교회에 다닌 것이다.
낮에는 틈나는대로 총포사(예화 산탄공기총)에 들러 총도 판매하게 되었는데 어느날 도산면 갈망개에서 총이 고장났다는 연락이 왔다. 고성읍에서 통영군 도산면까지는 12km이고 도산면에서 산길로 두 시간을 더 걸어가야 갈망개인데 그 길을 혼자 나섰다. 도산면까지는 버스로, 나머지는 걸어서 두 시간 정도 걸려서 고장난 총을 받아 다시 걸어서 도산면까지 오니 막차는 이미 떠났고 주변은 어두움으로 깔려 깜깜해졌다. 그러나 나는 고성 집을 향해 걸었다. 집까지 찻길이긴 하지만 산을 세 개씩이나 넘어야 했고 곳곳에 무덤도 보이는 곳이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 한 맺힌 귀신이 나타나 전화를 빌려달라 해 전화를 걸었다는 곳도 무서움 없이 지나왔다. 동산의 노래를 크게 부르면서 정신없이 걸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걷는 느낌이었다. 새벽 세 시쯤 집에 도착하자 기진맥진하여 쓰러진 채로 잠이 들었다.
입교할 당시에는 가정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통일교회에 대한 반대가 심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내가 학생회장이 되어 몇몇 학생을 이끌고 성미사업도 해가며 전투경찰 위문도 가고 따르는 학생 수가 많아지자 수업시간에 윤리선생이 나를 일으켜 세워놓고 이 녀석이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이단교회의 신자라며 조롱하는 둥 반대가 심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모든 억울함을 마음속으로 삭히고 집에 왔다가도 다시 홀로 교회에 가서 밤이 새도록 하늘 앞에 엎드려 울면서 기도드렸다. 그 후로 나의 진심을 이해하는 학생들이 한두 명씩 찾아와 전도됨으로써 우리 교회와 인연이 맺어졌다.
1976년 2월 10일 군에 입대하면서 병영생활이 시작되었다. 병영생활을 시작한 3개월 후부터 협회본부에서 우편으로 통일세계를 보내주었는데 그것을 보고 이단교회 나간다고 고참병들의 핍박이 심했다. 밤에 조용히 불러내어 나에게 몽둥이찜질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어떤 때는 남몰래 화장실 건너편 공터에 가서 홀로 조용히 기도하기도 했다. 몇 달 후부터는 고참병의 마음이 변했는지 주일날 시내에 있는 우리 교회를 나가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1982년 10월 14일 6000가정 축복을 받았는데, 축복을 받기 전인 1979년 초부터 청파동 2가 9의 1번지 구 본부교회에서 약 7년간 철야기도를 했다.
처음에는 김재산 권사님이 기도 중에 ‘식구들이 정성의 탑을 쌓아야 한다.’는 계시를 받고 식구들에게 권했고 나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청하셨다.
나는 며칠을 고민 끝에 동참하기로 결심했다. 당장 기간은 정하지 않았는데 권사님이 ‘7년은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하셨고 그 이후 7년 동안 기도가 이어졌다. 0시부터 04시까지 하늘과 사탄의 싸움이라 생각하여 잡담도 하지 않고 기도가 끝날 때까지 찬송과 기도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7년 동안 나는 김재산 권사님, 홍학실 권사님과 함께했는데, 옥세현 어르신, 신옥순 순회사님 등 본부교회 권사님들도 중간 중간 참여해 주셨다. 거기에서 나는 이분들을 닮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다. ‘신앙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기복신앙이 아니다.’ 생각하고 언제나 뜻을 위한 마음으로 기도에 임했다.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과 참부모님, 그리고 앞장서서 뜻을 받들어 나가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먼저 생각했다.
매일같이 철야를 할 때면 속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몸은 뜨거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은혜가 넘칠 때에는 새벽 4시가 지나는 줄도 모르기가 일쑤였다. 때로는 어르신들이 간증으로 교회 초창기의 심정을 일깨워주었다.
1980년 초에는 김재산 권사님과 전세금을 합해 교회 주변 2층집을 단독으로 임대하여 제단을 만들어 놓고 매일같이 그곳에 함께 거주하면서 밤에는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낮에는 그곳에서 정성을 이어갔다.
김재산 권사님과 기도할 때면 예수님도 찾아오셨고 참아버님께서는 늘 영적으로 찾아오시어 앞자리 오른쪽 의자에 앉아계셨다. 영계에 계신 유효원 전 협회장님도 수시로 찾아오셨고 통성기도를 할 때는 나의 몸 전체를 불덩이로 만들었다.
7년간의 철야기도는 6천가정 남자 동원 때에도 계속되었다. 낮에는 사업팀에 가서 일을 했고 밤에는 교회에서 철야기도가 이어졌다.
철야기도를 이어나가던 중에 국제연수원(용산구 한강로의 세계일보 사옥에 있었음) 매점에서 재일거류민단의 정시동 사무총장을 만나서 일본에서 1000여 명의 조총련 지도자를 초대하여 교육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교육대상자 명단을 달라고 해서 사무총장 사모로부터 1,200명 정도의 명단을 받아 매일 밤 기도하면서 그들이 하늘 앞에 협조하고 모두 뜻 앞에 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한때는 기도를 통해 안수의 능력도 부여해 주어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나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사람도 손만 대면 회복되는 은사의 힘도 보여주었고 어느 때는 기도 중 몸이 하늘로 치솟는 체험도 하게 하는 등 영계에서 기도를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후 성전 중심의 기도는 산기도로 이어졌는데 7일 간의 천마산 산상기도는 악마들과 치열한 싸움의 한판이기도 했다.
주위에 산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고 추위로 더 이상 기도를 이어갈 수 없는 환경이 되어도 포기하지 않았고 꿋꿋함을 잃지 않았다. 철야를 할 때는 너무 추워서 뱃가죽의 감각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냉수욕을 잊지 않았다. 힘이 다해 쓰러질 것만 같아도 우리는 중심을 하늘에 두고 기도를 이어갔다.
그렇게 7일간의 산상기도를 마무리하고 다시 본부교회 기도실로 기도드리는 장소를 옮겼다.
1990년 초에 참아버님께서 모스크바대회를 예정하사고 승리를 위해 몸소 심혈을 기울여 기도와 정성을 이어가실 때, 김재산 권사님과 나는 참아버님의 간절하신 심정을 체휼하고 영적인 힘을 더해드린다는 심정으로 본부교회에서 40일 동안 특별정성으로 이어갔다.
흥진님이 성화한 후에는 매년 양력 1월 1일이면 그 분의 충효열사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심정으로 가족이 함께 매년 파주원전 참뱃길에 나서곤 했다. 그러다 어느 때는 길을 잘못 찾아 뱀사골 주변을 한참 동안 헤매기도 했다. 추위는 매섭게 몰려오고 차 안의 스팀(온풍장치)도 고장이 나 작동이 안 되었다. 우리 가족은 그래도 개의치 않고 세계를 넘어 천주를 향해 몸소 골고다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심정으로 7년을 멀다 않고 원전 참배를 다녔다.
진눈깨비가 휘날리고 날씨가 유난히 흐리던 어느 날에는 다리 위 언덕을 지나다가 미끄러졌다.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5인 가족을 태운 우리 차는 두 바퀴를 회전하면서 가까스로 풀뿌리에 걸려 멈추어 섰다. 마침 훈련을 끝내고 귀대하는 부대원들을 인솔하던 중사 계급장을 단 선임하사가 보고 부대로 가서 대형차를 몰고 왔다. 또 어떤 행인이 신고했는지 모르지만 10분 정도 지나서 견인차도 도착했다.
상업용 견인차가 거의 함께 도착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영업하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빨리 부대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임하사가 견인 비용을 감당하기엔 버거운 우리의 형편을 알았는지 고맙게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견인차가 떠난 후에야 우리 차를 끌어올려 주었다. 그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지만 그때는 얼떨결이라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견인해준 부대원들이 떠난 한참 후에야 너무나도 감사해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래는 30m 이상 되는 절벽인데 굴러떨어졌다면 우리 가족 모두는 큰 변을 당할 뻔했는데 하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심을 실감하면서 하늘 앞에 감사드렸다.
교회가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또는 교회의 경사를 앞두고 한 단계씩 정성을 모아 영적인 힘을 보태는 것으로 보람을 찾았는데, 가정 돌보기를 소홀히 하다 보니 나중에는 생활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무렵 청파동에서 전세를 살았는데 집주인이 ‘집이 오래된 일본식 건물이어서 수리를 해야 하니 비워 달라.’ 하면서 돌려주는 전세금을 받아 보관하고 있었다. 때마침 개포동 산 밑에 가건물이 비어 있어서 우선 그곳에서 살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가 ‘강남에 빌딩을 짓는데 건축은 끝냈지만 자금이 부족하여 내부 인테리어를 못했다. 돈을 빌려주면 임대금을 받아 돌려주겠다.’ 해서 보관하고 있는 돈을 모두 빌려줬지만 친구는 건물을 임대도 못하고 다른 부채까지 감당하지 못해 건물은 경매로 넘어갔고 나는 빌려준 돈을 찾지도 못하고 가건물에 계속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서 6년쯤 거주했을 때 옆집에 불이 나서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 급히 주민센타에 신고하고 돌아와 보니 불이 우리 집에 옮겨붙기 시작했고 불길은 더 크게 번지면서 큰 화마로 변해 우리 집까지 삼켜버렸다.
애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펄펄 뛰었고, 내가 즐겨 모아오던 고서적이며 존영이며 우표 한 장까지 남김없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참혹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4남매의 생명을 지켜주심을 하늘 앞에 감사드렸다.
이후로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고심 끝에 ‘내 마음의 병부터 정리하자.’ 결심하고 청평 수련소로 가서 40일 수련에 들어갔고 40일을 연장해서 80일 수련을 끝내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귀가해서는 처음부터 하나씩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기로 하고 최선을 다하는 나날을 보냈다. 어느 여름날 저녁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나에게 다가와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느냐,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보배 중의 보배가 아니냐? 돈은 때가 되면 주머니를 채우는 법, 돈 찾아 달려가지 말고 쉼 없이 기도하라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이다.‘ 하는 암시를 주었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입교 초기에는 선친의 남다른 불심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있었지만 그 정성의 마음이 모르는 사이 나에게 전수되어 나의 신앙생활에 배어나고 있음을 실감했다. 또 필생의 피나는 정성으로 오늘의 진안마이산탑사(鎭安馬耳山塔寺)를 있게 한 이갑룡 선사의 혈통으로서 그 기질을 타고나지 않았나 생각하는 때가 많다.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내가 겪어나가는 모든 일에 때로는 축복으로, 때로는 격려로 하늘이 함께하심을 실감하게 되었고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고 참어머님이 계셨기에 뜻에 대한 불변의 심정으로 오늘도 앞만 보고 전진 또 전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첫댓글 참 아버님 100주년 신앙수기 장녀상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