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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적십자 직원은 경상북도 혈액원에서도 거의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최근 헌혈자의 감소가 두드러져 혈액을 수입해야 해 귀중한 외화를 낭비하고, 수혈자에게 제때 필요한 혈액을 공급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혈액센터를 방문하고 난 후 시마네현 청사를 방문하여 쓰미타 시마네현지부장을 만나 환영을 받았다. 쓰미타 시마네현지부장이 시마네현 적십자사지사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적십자사의 활동이 범국가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방문단은 Sun Lake 트레이닝센터로 다시 이동하여, 본격적인 국제 교환 교류에 의해 일정이 시작되었다. 마쓰에(松江) 지방의 전통 가면극인 '카부라'를 전통보존회에서 공연하며 일본의 문화를 소개하였다. 우리는 제기차기를 시범보이며 한국의 민속놀이를 소개하였으며, 아리랑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일본인들은 아리랑 노래 음이 좋은지, 아니면 익숙한 지 무척 좋아했다. 또 RCY 단원과 JRC 단원 간에 선물을 교환하며 우의를 다졌다.
이것으로 오늘의 일정은 끝나고, 우리는 내일의 일정을 점검하며 취침하였다. 8월 3일 5시 30분경에 일어난 우리는 아침 활동에 참여하고, 아침 식사를 하였다.
오전 활동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보다 많은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3개조로 나누었다. 먼저 1조는 '한국어 강좌'를 맡아 기본적인 한국어를 가르쳤다. 일본 JRC 단원들과 지도교사들의 관심은 대단하였다. 국제 교환 교류로 참가한 우리 방문단에게 간단한 말 한 마디 건네기 위해 그들은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으며, 오후가 되니, '안녕하세요' 등 한국어로 인사를 할 정도였다. 2조는 '한지 공예'를 가르쳤다. 우리나라의 우수한 전통 한지로 컵 밭침 공예품을 만들었는데, JRC 단원들은 자신의 작품을 기념으로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정성들여 만드는 모습이었다. 모두들 우리의 전통 공예인 한지 공예의 매력에 흠뻑 빠져 열심히 만들기에 몰두하였고,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하였다. 3조는 윷놀이를 지도하고 편을 나누어 직접 게임도 하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이렇듯 우리는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고 체험시키며, 한국의 얼을 일본 청소년들에게 심어줬다. 오후 활동으로는, RCY 단원은 일본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문화 교류의 시간이 진행되었으며, 그 시각 지도자들은 이즈모(出雲) 돔구장, 슛사이가마(出西窯) 도자기 생산 현장,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등을 관광하였다.
이즈모 돔구장은 직경 143m, 높이 48.9m의 전천후 스포츠 이벤트 시설이었다. 일본에서 제일 큰 목조 건축이며, 목조 돔으로서는 세계 제일의 높이라고 한다. 이 목조 돔구장에서 야구, 축구 경기가 개최되고, 각종 행사는 물론 공연도 이루어진다. 이즈모시의 문화 공간이자 휴식 공간으로서 주민들에게 개방되어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또한 슛사이가마는 주로 생활용 그릇을 제작하고 있었으며, 일본 도예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있는 민예조(民藝調)의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다. 총 6개의 가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푸른빛을 발하는 도자기가 이 곳의 특징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즈모타이샤는 '복(福)의 신', '인연을 맺어주는 신'으로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하러 온다고 한다.
이즈모타이샤는 이즈모지방 특유의 타이샤 양식을 신사 가운데에서 최대의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본전은 1744년 재건한 것으로 초창기엔 높이 48m인 일본 최대의 고층 목조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다음 호 계속- <노춘오, 대창중 교사> (醴泉新聞2000.10.12)
시마네현을 흔히 '신들의 고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10월을 신이 없는 달, '간나즈키(神無月)'라 부른다고 한다. 이는 일본에 있는 모든 신들이 타이샤(大社)에 모여 회의를 한다는 전승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즈모(出雲) 지방에서는 이 10월을, '신이 있는 달(가미아리즈키, 神有月)이라 부른다.
이 이즈모 타이샤는 일본 신사 중에서도 참례자의 수가 가장 많은 신사 중의 하나이며, 일본 신사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그것은 과거 정치에 의한 규제가 있었던 시대에도, 유일한 예외로 취급되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니혼슈(日本酒) 전시장을 찾아봤다. 보통 니혼슈는 정종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와인을 전문으로 생산 판매하는 타이샤쵸 전시장을 둘러보며 여러 가지 와인을 맛보았다. 시마네현은 멜론, 감, 포도, 무화과 등의 과일의 산지인데, 그 중에서 포도로써 와인을 생산하여 '시마네 와인'으로 불리우고 있는 공장이다. 이즈모 지방에 대한 관광이 끝나고, 우리 지도자들은 다시 Sun Lake 트레이닝센터로 돌아와 RCY 단원들의 활동을 도와주었다.
RCY 단원들은 각 조별로 회의를 하며 저녁에 있을 캔들파이어(candle fire) 시간에 할 장기자랑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캠프파이어보다 캔들파이어를 많이 한다고 한다. 모든 단원이 체육관에 입장하고, '오늘은 안녕,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친구로 있자. 내일을 꿈꾸며 희망의 미래로'라는 글이 단상 정면에 한글과 일본어로 크게 쓰여 있었으며, 멤버대회 마지막 밤의 의식은 시작되었다.
인간 세상에 불이 전해지는 의식을 1부로 시작하였으며, 2부에서는 각 조별로 장기자랑 발표 시간이 진행되었다. 3부에서는 모든 단원들에게 촛불이 전해지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언제나 변함없이 친구로 기억하고, 우리 적십자 단원들은 내일을 꿈꾸며, 희망을 잃지 말자고 다짐하며 캔들파이어를 끝냈다.
오늘의 공식적인 일과는 모두 끝났다. 우리 지도교사들은 일본 JRC 지도교사들과 교육 문제, 청소년적십자단 활동 내용 등에 관한 의견을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모두가 친절하였으며,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나 역시 우리 대창중학교 RCY 활동 지도를 더욱 적극적이고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하였다.
8월 4일 RCY 단원들과 JRC 단원들은 아침 6시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오전 활동은 주로 폐회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단원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동안 일본 JRC 단원들과 많이 친해졌는지 너무나 아쉬워하며, 좀처럼 일본 친구들과 헤어지지를 못했다. 일본 적십자사의 히로시 이와타 사무국장은, "이곳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여러 분이 학교에서, 사회에서 지도자적인 위치로 활동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라고 하였고, 폐회식이 끝이 났다. 폐회식 후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여학생을 만났다. 난 그 여학생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여학생의 장래 희망이었다. -다음 호 계속- <노춘오, 대창중 교사> (醴泉新聞 2000.10.19)
그 여학생은 이번 멤버대회를 통해 자신의 장래 희망은 '복지사'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복지사'란 우리나라에선 '사회사업가'이다. 적십자의 이념인 인도주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장래 희망으로 삼은 것이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회의, 토론과 같은 정적인 활동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던 각종 캠프에 비교하면 재미없을 것도 같았던, 이 번 활동이 이 어린 소녀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재미와 흥미 위주로만 진행되는 우리나라의 RCY활동도 적십자의 이념과 단원으로서의 사회에 기여 방안 등에 대하여 좀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JRC 단원들은 각자 사용하던 방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떠났다.
마지막 공식적인 일정은 RCY 단원들이 일본에서 민박을 하기로 되어 있다. 언제 도착했는지 우리 단원들이 민박하게 될 가정의 가족들이 나와 있었다. 우리 단원들은 한 가정에 2명씩 민박할 것으로 결정되고, 민박 가정으로 떠났다. 단원들이 민박 가정으로 떠난 뒤 우리 지도교사들은 마쓰에시에서 관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학교에서 사회 과목을 지도하는 나는 일본의 자연 환경, 역사, 문화, 산업 등을 직접 접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갑자기 우리 학생들이 생각났다. 하나라도 더 보고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어야지 하는 욕심에 수업과 관계되는 것은 많이 질문도 하였다. 마쓰에(松江) 향토관을 방문하였다. 향토관은 우리나라의 민속관과 같았다. 그 곳에는 우리나라의 유물과 유사한 것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문화가 일본에 많이 전해져 일본 고대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미쓰에성을 해자를 따라 호리카와 유람선을 타고 둘러보았다. 마쓰에시는 마쓰에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마쓰에성은 4년에 걸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영주 호리오 요시하루가 해자로 둘러싸인 구릉 위에 마쓰에성을 1611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나는 마쓰에 성을 좀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시간이 늦었지만 다행히 마쓰에성 안을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었다. 일본 막부 시절 그들이 사용하던 투구, 갑옷, 칼, 활 등 각종 무기류를 전시해 두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유명한 성들의 사진도 전시되어 한 눈에 일본의 주요 성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 성은 전국에 현존하는 12개의 망루 중의 하나로 망루의 크기는 2번째, 높이는 3번째, 오래되기로는 6번째라고 한다. 망루은 5층 6계로 되어 있으며, 가장 높은 망루에서는 마쓰에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었다. 마쓰에성의 해자 북쪽에는 해자를 따라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거리를 볼 수 있는데, 이를, '시오미나와테(見繩手)'라 부르고 있다. 또한 '부케야시키(武家屋敷)'라는 200년 이상 전에 만들어 진 상급 무사들의 주거지를 지금도 잘 보전해 두고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들고 있다. -다음 호 계속- <노춘오, 대창중 교사> (醴泉新聞 2000.10.26)
마쓰에시(松江市)에서는 3년 전부터 해자를 따라 마쓰에성을 관광할 수 있도록 사업을 구상하였으며, 노인 분들을 이용하여 운영하며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마쓰메시에서는 유물 유적을 이용한 적극적인 관광 상품 개발과 운영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마쓰에성을 관광하고 난 후 시마네현 적십자사지부에 모여, 적십자사지부에서 마련해준 석식회에 참석하였다. 적십자사 직원들과 멤버대회에 참가하였던 초중고 지도교사들은 청소년적십자 활동에 관한 것, 학교 교육에 관한 문제 등,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신지코 호수를 내려다보며, 저녁노을을 감상하면서 즐기는 맥주 한 잔은 정말 황홀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우리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의 시간을 이어갔다. 이제 밤이 깊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송강 universar호텔로 이동하였다. 피곤한 몸을 잠에 맡긴 채 깊은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8월 5일 7시 20분 경, 민박을 갔던 모든 단원들이 시마네현 적십자사지부로 모였다. 우리들은 민박한 가정에 감사를 드리며, 히로시마공항으로 떠났다. 일본 민박 가정의 가족들은 짧은 하룻밤을 지냈는데도, 정이 많이 들었는지 헤어짐의 아쉬움을 눈물로 대신했다. 정말 고맙고 고마웠다.
히로시마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약 12시 경이었다. 수속 절차를 끝마치고, 나는 설레임과 아쉬움 속에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많은 프로그램을 보고 배워 RCY 활동을 더욱 알차게 하고 싶었다. 또한 일본의 문화를 배우고, 많은 친구 들을 사귀고 싶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다고는 생각되지만, 그래도 좀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더욱 크다. 다음에 또 해외 활동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번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더욱 알차고 보람되게 활동할 것을 다짐한다. <노춘오, 대창중 교사>(醴泉新聞 2000.11.2)
38. 대창중 RCY 단원, 응급처치법 대회에서 우승함
적십자사에서는 RCY 단원들에게 각종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생명 보호와 구호를 위해 매년 응급처치법 경연대회를 열고 있는 가운데, 대창중학교 청소년적십자단이 2000년 10월 22일 열린 제28회 경북도 응급처치법경연대회에서 영예의 우승을 차지해 상장과 부상을 받았다.
안동적십자봉사관에서 열린 이번 대회에는 응급처치법 강습을 이수한 경북 내 초중고 RCY 단원 34개팀(5명 1개조) 170여 명이 참가해 응급처치 이론과 구조 호흡, 골절, 화상, 찰과상, 삼각건 사용법 등의 실기 경연을 펼쳤다.
대창중학교는 '안전팀'과 '보건팀' 2개 팀이 참가해 이론과 실기 모두 고른 성적을 얻어 경합을 벌이던 점촌고등학교, 안동고등학교를 따돌리고 영예의 1위를 차지했다. 노춘오 지도교사는, "2학년으로 구성된 '안전팀'의 응급처치법도 훌륭했다." 라고 전제한 뒤, "특히 선배인 3학년들로 구성된 '보건팀'의 황규석, 권기득, 김현보, 도규형, 김준철 학생이 평소의 실력을 잘 발휘해 주어 우승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예천신문 2000.11.2)
39. 대창중 학생들, 제1회 경상북도 통계그래프경진대회 입상
대창중학교 2학년 박정근, 김보성 군은 2000년 10월 경상북도에서 주관한 제1회 통계그래프 경연대회에서, '중학생들의 교복 착용'이라는 주제로 출품하여 2000년 11월 4일 장려상을 수상했다.(醴泉郡民新聞 2000.11.27)
40. 재경동문회 창립총회
고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서 현재 세무사로 있는 김문한 동문이 <재경대창동문회보> 제16호(2000.12.1)에서 '동문회 태동 창립총회 역사의 그 날!'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실었다.
"1987년 6월 10일! 6.29 선언을 만들어 낸 그 날,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시민 단체들의 포효와 체루탄의 포화 속에서 눈물을 흘리던 뜻깊은 그 날, 우리 동문들은 재경동문회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암울했던 그 시절 그 때 우리 동문 모두는 재경동문회 창립을 원하였고 외쳤지만 행동으로 앞장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계시던 당시 대창중고등학교 김교용 교장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는 오래 전에 창립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는데, 재경대창동문회는 없어서 교장으로서, 졸업생은 물론 재학생들을 볼 면목도 없고, 각종 모임에서 재경동문회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을 들 수 없으니, 대창의 명예를 위하여 고등학교 1회 졸업생인 '김(문한) 군이 재경대창동문회 창립에 앞장서 줄 것을 간곡하게 당부한다."라고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뜻있는 후배들과 의논하여 고등학교 5회 졸업생인 황중태 동문이 실무를 맡고 많은 후배들의 지원과 협조를 얻어 1987년 5월 10일 재경대창중고등학교 창립총회준비위원장 명의로 700여 동문들에게 발기문을 보내어, 1987년 6월 10일 토요일 오후 5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 '남강가든'에서 동문 52명이 참석하여 발기인총회를, 1987년 6월 27일 저녁 7시 중구 을지로 4가 '아서원' 2층에서 재경 동창 동문 374명과 김교용 교장 선생님 외 은사 13분을 모시고 대망의 재경대창중고동문회 창립을 하였던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그 날! 김교용 교장 선생님께서 격려사를 하시던 중 이제 내 소원 하나를 풀었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자, 400여 동문 모두가 눈시울을 적신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년의 문턱에 선 재경대창동문회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창립 당시 선배의 마음은 비록 재경대창동문회가 늦동이로 출범하였지만 명문 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의 어떤 전통을 수립하여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겠다는 신념 아래 회장 자비로 종로구 인사동 동일빌딩 2층에 독립된 동문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유급 남자 직원(고 7회 임택상)과, 여직원을 두고 동문회 명부 작성, 송년의 밤 준비, 재경 동문들의 관혼상제 챙기기, 다른 동문회와 횡적 종적 연락 사무, 재경군민회와 기타 유관 단체에 동문회 창립을 알리고 동문회 위상 재고를 위하여 화환 및 찬조 등의 업무를 수행케 하고, 이에 따른 경비(창립총회 준비를 위한 모임과 그 부대비용, 임원회 개최 비용, 직원 급료, 사무실 임대료 및 운영 경비 일체 등)도 회장 자비로 운영하였던 당시의 생각은 후배들에게 동문회 운영 경비는 회장이 부담하고, 임원·회원의 회비 및 찬조금은 일정 기간 적립하여 동문회관을 건립하여야 한다는 큰 꿈을 가지고 노력하였으나 아직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지만 언젠가는 그 꿈이 이루어질 날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후배들에게 바라는 바는 선배의 이러한 정신과 뜻을 후배들도 이어받아 좀더 모교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아서 재경대창동문회관을 건립하여 그 회관 임대 수입금으로 동문회를 운영하면 동문 모두가 주인 의식을 가지게 되어 동문회의 발전은 임원의 노력 없이도 스스로 힘이 생기고 발전할 것입니다.
끝으로 선배로서 밝혀두고 싶은 말은, '동문회의 창립 목적은 동문 상호 간의 친목과 동문수학하던 점을 생각하여 타향에서 서로 도우며 힘이 되자는 취지로 창립'되었다는 점을 잊지 마시고 동문회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여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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