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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해전인 청일전쟁의 해전과 러일전쟁때 러시아를 격파한 쓰시마 해전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로 이어지는 다섯 단계 해전 중에서 “고대 해전” 인 살라미스, 포에니, 악티움
해전은 “노를 젓는 갤리선” 이 주축이었으며.... “충각작전” 으로 적의 배를 들이받은 후 “적의 배에 올라
육박전” 을 전개했고, 두번째 “중세 해전” 중 초기 레판토해전은 갤리선에 대포를 실었지만 육박전이 위주
였던 반면에 후기인 칼레 해전은 갤리선은 소수고 범선에 대포를 장착해 “포 사격으로 승부” 를 가렸습니다.
세 번째 “근세 해전” 으로는 미국이 독립하게 되는 체사피크만 해전 과 넬슨이 지휘한 빈센트곶
해전에 나일 해전과 트라팔가 해전은 갤리선은 사라지고 풍력을 이용하는 범선으로, 아직은
" 근거리 전투" 가 기본이니 넬슨등 영국 해군은 “고정 관념을 깨고 새 전술” 을 선보였는데....
“적 함대 전열을 차단” 하고 “집중 포격” 과 “야간기습전” 으로 과감한 전투를 벌인게 특징입니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네 번째 “근대 해전” 은 산업혁명으로 기술이 발전해 90년전인 1805년
트라팔가 해전의 주역이었던 “범선” 은 사라지고..... 쇠로 만든 배인 “철갑선” 이 등장하니
석탄을 때서 "증기력" 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스크류 추진 방식으로 근거리가 아닌 “원거리에서
함포와 전술” 로 해전을 하니 1895년 “청일전쟁 해전” 과 1904년 “러일전쟁 쓰시마해전” 입니다.
1. 청일전쟁 : 유럽이 만든 군함으로 일본이 청나라 해군을 격파하다!
청나라 이홍장은 양무운동으로.....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하고 독일에서 7천톤급
초대형 장갑 군함인 “정원(定遠), 진원(鎭遠)” 과 쾌속함 제원(濟遠) 을 구입함으로써 4천톤
급인 “일본 해군을 압도” 했으며 1887년에는 치원(致遠), 정원(靖遠), 경원(經遠), 내원(內遠)을
더 구입했고 1891년에는 축하를 핑계로 정원과 진원을 “도쿄 앞바다로 보내 위력” 을 과시합니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영국이 청과 손” 을 잡는데다가 조선은 친러로 돌아설 조짐
이고 러시아의 남하는 일본에도 위협이라..... ‘청을 주적으로 하는 군비태세가 옳은가?’
라는 의문을 품었으니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은 “청과 동맹을 맺고 함께 러시아를 공격해서
청나라는 서부 시베리아를, 일본은 만주, 조선과 캄차카” 를 차지한다 라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1894년에 조선에서 동학 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이씨 왕조의 발상지 “전주” 를 점령
하자.... 진압할 힘은 없고 그렇다고 동학당에 기득권을 양보하기는 죽기 보다 더 싫었던 조선
조정은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임진왜란과 임오군란 때 처럼 원세개를 통해 청나라에 진압군
을 요청하니 이홍장은 직례제독 엽지초와 정여창의 군대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 합니다.
일본 정부는 6월 2일 공사 스기무라로 부터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다는 보고를 받는데
때마침 중의원에서 내각탄핵 상주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기사회생할 천재일우의 기회" 라 보고는 즉시 각의를 열어
의회를 해산하고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 라는 구실로 군대를 조선에 파병합니다.
1894년 6월 4천으로 인천에 상륙한 조슈번 출신 아베 신조 총리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
5사단장은 7월 23일 서울을 제압한후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 임금을 포로로 잡고는.....
조선군의 항복을 받은후 4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충청도 아산으로 내려가 청나라 엽지초군
3,500명을 공격하니..... 청군은 50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포로를 내고 평양으로 달아납니다.
이와 더불어 일본 제1 유격대로 4천톤에 300mm 주포 8문을 장착한 요시노, 아키츠시마,
나니와호는 7월 25일 아산만 풍도(豊島) 에 정박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해 3천톤으로
200mm 주포 4문등을 장착한 광을호를 격침시켰으며 피격당한 제원호는 함장 방백겸이
항복하려고 하자 선원들이 항거하며 북쪽으로 도주하니 방백겸은 황해해전후 처형됩니다.
청나라 호위함 조강호와 영국 국적으로 청군 1,200명과 보급품을 실은 수송선 고승호를 가로 막은
것은 “나니와호 함장” 인 사쓰마 출신 “도고 헤이하찌로” 인데..... 외교문제로 비화할수도 있는
민감한 상황에서도 강경하게 저지하니... 청군이 항복을 거부하자 영국인 함장 골즈워시와 64명
선원들이 바다로 투신하니 나니와호는 구조를 하는 한편 고승호를 격침시키고 조강호는 나포합니다.
고승호는 영국배이고 선장등 영국인이 많으며 청나라 군사고문 독일 하네켄 소령이 타고 있었으니
"외교문제가 되어 엄청난 배상" 을 해야하는 문제인데도 수습하는 모습이 기막힌데...... 청나라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킨지라 위협당한 선장과 선원이 바다로 투신했고, 청군이 물에 빠진 사람들을
사격하자 부득이 고승호를 격침했다고 이해하는데 물론 "도고가 유럽인들을 구조"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도고가 저 유럽인들을 구조하지 못했다면 일본은 영국에 큰 배상금을 물어야 하고 도고도 불명예
제대할뻔 했으며, 근세해전인 빈센트곶 해전에서도 넬슨은 사령관의 작전지시를 어기고 적함대를 파고
들어가 흔들어 결국 승리하니 처벌 대신에 격려를 받았는데.... 고대 그리스 팔랑크스진에서는 내 방패
는 옆 동료를 보호하고 그 동료 방패는 또 옆 동료를 보호하는데, 동료가 죽으니 흥분한 병사는 진을
벗어나 돌격하니 적이 움찔해 승리를 거두지만 처형당하는데 세월이 흐르니 위반의 처벌도 달라집니다?
일본군은 9월 15일 평양에서 오시마의 5사단 12,000명이 15,000 명의 청군을 공격해서는 현무문을
부수고 평양성을 함락하니 청군은 2,000명의 전사자와 600명의 포로를 내고 달아나고 일본군
은 만주로 진격하는데 사쓰마번 이토 스케유키의 일본 해군도 북상해 9월 17일압록강 하구에서
황해 해전” 이 일어나니..... 12척의 일본 군함은 14척의 청나라 북양함대를 “속사포로 공격” 합니다.
"황해해전" 의 결과 청나라 북양함대는 “5척이 침몰하고 6척이 파손” 된채 여순으로 달아난
반면에 일본측은 “침몰은 단 한척도 없고 단지 4척만 파손” 되었을 뿐이니...... 두 나라
간에 “전투력의 차이” 를 실감하는데, 청나라 함정이 더 크고 화력이 우세한데도 패배
한 것은 “군함의 기동력 열세” 에다가 지휘관과 선원들의 “전투 경험 부족” 으로 보입니다.
일본 해군은 산둥반도 위해위를 점령하고 “유공도의 청나라 북양함대를 전멸” 시켜 1895년 2월 16일
정여창의 항복을 받고 대만의 팽호열도 까지 차지해 “동중국해 제해권” 을 얻는데 청나라와 일본
모두 “유럽에서 만든 군함” 으로 싸웠으니 “군함의 크기나 성능은 청나라” 가 월등히 뛰어난데도
패배한건... “지휘관과 병사의 훈련수준 ”이 승패를 갈랐으니 “훈련의 중요성” 이 돋보이는 해전입니다.
2. 발트해에서 지구를 반바퀴 돌아온 러시아함대를 전멸시킨 쓰시마 해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만주와 산동반도를 점령하고 천진과 북경을 위협해서 “요동반도” 를
얻었으나 “프랑스와 독일에 러시아 3국” 이 연합해 공동으로 간섭하니..... 요동반도를
내놓을 수 밖에 없는지라 일본은 피눈물을 삼키며 절치부심 이빨을 앙다물고 더욱 “군비를
확충하고 영일동맹” 을 맺은후 “미국의 지원” 까지 얻은후 1904년에 러시아를 공격합니다.
청일전쟁이 독일과 영국등 유럽에서 만든 군함으로 해전을 치뤘다면 10년 후인 러일전쟁 때도
“주력함은 유럽산” 이지만 “보조함은 일본이 직접 건조” 했고 폭발력이 뛰어난 “신형 사세보
포탄” 을 자체 개발했으니 “전술” 도 세계 해전사를 연구해서 다듬으며 “조선의 진해항을 군항”
으로 사용하고 “대마도 중간에 운하” 를 만들어 군함 통행을 신속하게 할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당시 일본 해군은 전함 7척, 무장순양함 8척, 경순양함 17척, 구축함
19척, 어뢰정 28척, 포함 11척을 보유하였으며 이에 비해 대부분의 함정이 “여순”
에 기항하고 있던 러시아 극동해군은 전함 7척, 무장순양함 4척, 어뢰정 37척, 포함
7척이었으니 1904년 2월 8일에 일본 함대는 “여순을 기습 공격하여 군항을 봉쇄” 합니다.
여순항 봉쇄 과정에서 “기뢰” 가 다수 터졌으니 러시아는 유능하다고 알려진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전사” 했고 일본 역시 기뢰로 인해 구축함 하츠세, 야시마에 순양함 요시노,
수뢰정 아카츠키, 포함 오시마등 5척을 잃었지만...... 일본은 “여순항을 봉쇄하는데 성공” 합니다.
최초의 기뢰는 1585년 네덜란드와 스페인간에 벌어진 “안트베르펜 해전에 뗏목식인 계류
촉발식 부유기뢰” 가 등장했으며 미국 독립전쟁 때 데이비드 부쉬넬이 만든 “케이블
기뢰가 영국함정” 을 파괴했고 이후 북군은 1862년 12월 12일 카이로함을 남군의 기뢰
에 잃은 이후 양측은 전쟁기간 중에 “30여척의 함정들이 기뢰로 인해 침몰” 했다고 합니다.
다음날인 1904년 2월 9일 “인천” 에서 일본 제독 우류 소토키치는 경순양함 지요다등 6척에
어뢰정 4척을 전진시키니 영국의 탤봇, 프랑스의 파스칼, 이탈리아의 엘바, 미국의
빅스버그 등 “중립국가 함선은 일본 해군에 항의” 했으나 오히려 위협을 받고는 피신했고
“러시아군 바랴크와 코리에츠” 승조원들은 나포당할 것을 우려해 “두 전함을 자침” 시킵니다.
1904년 5월에는 “여순항이 봉쇄된 요동반도 상륙” 을 시작하였고 조선에서 북진한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진입해 9월에는 랴오양을 점령하였으며.... 노기대장의 일본군은
“기관총 십자포화” 를 뚫고 고지를 돌격해 천신만고 끝에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
시켰으며 3월에 조슈번 고다마 겐타로가 지휘하는 일본군 25만은 러시아군 37만에 승리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보급선이 길어지니 “탄약이 떨어져 백병전으로 7만명이 전사” 햇으며 전비조달
도 어렵고 탄약과 무기 및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데 전전에 이를 예상한 이토 히로부미는
“가네코 겐타로” 를 그 전에 미국에 보내 하버드 동문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에게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를 선물했으니 이후 “루즈벨트는 중재” 에 나서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1905년 5월 27일 사쓰마번 “도고 헤이하찌로” 사령관은 대서양과 인도양을 돌아 중국해를 거쳐온 “러시아
함대를 격파” 하는데 이 해전 직후 일본 정부는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였고 친일파가 된 루즈벨트 대통령
은 미국 동부 “포츠머스에서 러시아를 윽박질러 협정을 강요” 했던 것이며 그후 가쓰라 다로 총리와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 간에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 이 갈라먹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 합니다.
러시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은 표트르대제가 만든 “발트 함대” 를 이끌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출발
해 발트해를 거쳐 대서양을 지나 “지중해” 로 들어가려 했으나 일본과 동맹인 “영국 해군의 방해로
아프리카를 종단” 하는 긴 항해를 했으며..... 인도양을 돌아 중국 해안을 지날 때 석탄과 식수며
식량 보급 과 휴식을 위해 육지에 상륙하는 것을 “영국 해군으로 부터 방해”를 받아 기진맥진 했습니다.
반면에 일본 함대는 함정을 수리하고 “포술훈련을 하며 휴식” 을 충분히 취했고 본국과 “조선의
진해에서 정비” 를 받은 함정에 승선해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도고 제독은 이 러시아
함대만 격퇴할 수 있다면 꽤 심각한 피해도 감수할 생각이었으니 적선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접하자 말자 5월 27일 새벽 5시에 한반도 남부“진해항에 대기중이던 일본 연합함대”가 출항합니다.
일본함대 기함은 영국에서 건조된 미카사로 10년전 청일전쟁때 4천톤에 비해 1만 5천톤으로 길이
132m 니 12인치(305mm) 주포 4문에 6인치 단장포 14문, 76밀리포 20문에 47밀리포 16문으로
무장하고 갑판은 3인치 현측은 9인치 크루프장갑으로 방호되었는데 전쟁 후에 화재로 침몰했고
인양해 수리후 시베리아출병 때 까지 활약하다가 현재는 요코스카항에 박물관으로 공개중 입니다.
러시아 기함 크냐지 수보로프는 길이 121m에 14,400톤으로 305mm 주포 2문에 152mm 포 6문과 기타 46
문에 어뢰발사관으로 전함 8척, 순양함 8척, 구축함 9척, 기타 3척등 37척인 반면에 일본은 미카사등 전함
4척, 순양함 27척, 구축함 21척, 소형 어뢰정 37척등 89척인데 “러시아는 21척이 침몰하고 13척이 나포”
됐으며 전사 5,380명에 포로 6,106명인데 비해 일본은 “소형 어뢰정 3척”이 침몰하고 117명이 전사합니다.
러시아 함대는 자국에서 건조한 크냐지 수보로프등 불과 4척의 신형 보로디노급 전함을 빼면 그외는
구식 모델 함정을 보유한채 “반년에 걸친 오랜 항해와 정비 부족”으로 배 밑바닥에 해초가
심하게 들러붙어 속도도 상당히 줄어들 수 밖에 없었는데 비해, 일본 함정들이 “속도에서 거의
2배”나 빨랐으니 도고 제독은 함대의 “월등한 기동력” 을 활용해“T자 전법”을 두차례 구사합니다.
러시아 함대는 전함 8대, 순양함 8대, 구축함 9대 모두 25척 인데 비해 일본은 전함 4대,
순양함 8대, 구축함 21대등 33척에 소형인 어뢰정 60대로 이루어졌으며 러시아 함선
보다는 “신식” 이었으니, 11시 발트 함대에서 발포로 포격이 벌어진 가운데 일본 연합
함대의 일부가 발트 함대 앞을 “빠른 속도” 를 이용해 “가로지르기를 하며 도발” 합니다.
러시아 함대는 대열이 “3열 종대”로 바뀌게 되는데 13시 39분 까지 일본군은 연합함대의
모든 함대가 집결하자 1,2 전대가 발트함대를 좌현 남쪽에서 확인해 전투개시를 명하니
13시 55분 도고는 연합함대 “기함 미카사에서 Z기” 를 기양했으니 Z기는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노력하라." 는 의미를 가진 신호기 라고 합니다!
14시 2분 침로를 남서로 정한 연합함대와 북동으로 정한 발트 함대는 14시 10분 양측 함대
의 거리가 “8,000m” 가 되자 도고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는
모습을 보였고 선두에 있던 “기함 미카사는 크게 좌현”으로 돌기 시작했으니 러시아군
앞에서 “대반전” 하는 일명 “정자전법” 혹은 “도고 턴” 이 시작되면서 포격전이 시작됩니다.
러시아 “기함 스보로프호를 비롯해 전함 네척이 침몰”했고 일본의 소형 어뢰정은 남은 배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전투 결과 러시아 해군은 1만명의 사상자에 전함 6척을 포함한
“16척이 격침되고 5척이 자침”했으며 “6척이 나포”되고 6척이 중립국으로 도피 하였는데
무사히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건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으로 총 3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러시아 해군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포함한 6,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는데...
반면에 일본 측의 피해는 고작 “소형인 어뢰정 3대와 군인 1천명” 에 불과했습니다.
대규모 해전에서 보기힘든 “일방적인 대승리” 인데..... "이날 일본은 함대 내 모든 장교
와 사병이 용기와 기력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1905년 5월 27일 도고 헤이하치로 라.....
일본 함대가 대승한 이유를 보자면..... 첫째 함대 확충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지원과 국민의 성원”
두 번째 정비를 통한 “함대의 우세한 기동력” 세 번째 철저한 사전 “훈련으로 함포사격의 높은
명중력” 네번째 연구 개발로 “함포와 포탄의 우수한 성능” 다섯번째 도고제독등 “지휘관의 리더쉽
과 판단력 ”여섯 번째 “탁월한 야간전투 능력” 일곱번째로는 승조원들의 “높은 사기” 라고 봅니다.
쓰시마(대마도)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의 패배” 는 “일본이 세계 열강” 으로 부상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주선한 미국의 “포츠머스 조약에서 상당한 이득”
을 얻을수 있었고..... 또한 러시아의 “군사적 무능력” 을 드러내고 러시아의 “위신을 실추” 시켜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 이 되었으니 로마노프왕조는 해전패배로 “멸망의길” 로 들어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