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말나리
왕원추리
산수국
산수국
2주째 이어지는 장마로 들과 숲의 초목들이 더욱 무성하고 푸르러진 느낌입니다. 다시 비구름이 몰려들며 산섶과 도랑둑이 어둑해집니다. 앞으로도 꽤 여러 날 비가 오락가락하며 무더운 날씨가 이어질 텐데요. 계절이 다소 늦게 시작되는 산촌농원에도 장마만큼은 같은 시기에 찾아듭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마가 이어지는 7월의 초입, 산섶 한 귀퉁이에 환한 등불 하나가 켜져 있습니다. 황적색의 두드러진 꽃송이 하나가 한낮의 어둑한 녹음 속에 밝은 빛을 뿌립니다. 꽃은 하늘을 향해 활짝 문을 열고 있는 하늘말나리 꽃입니다. 여러 나리 중에서 이 하늘말나리가 이곳 산촌농원에서는 이맘때쯤 가장 먼저 꽃을 피웁니다. 서양에서는 하늘말나리를 Twilight Lily, ‘황혼의 나리’라고 부르는데요. 황혼 무렵의 어스름과도 같이 장마로 어둑해진 산섶과 풀숲에 저녁노을과도 같은 빛을 뿌려주기 때문일까요? 등불과도 같이 환한 빛을 밝혀주는 이 꽃이 7월 한여름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이때쯤 하늘말나리와 함께 피기 시작하는 나리꽃 아닌 나리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Daylily, ‘하루 동안 꽃 피는 나리’라는 이름의 꽃으로 우리가 왕원추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꽃 모양이 나리꽃을 닮아서 나리라는 영어 이름이 붙기는 했지만, 요즈음 하늘말나리와 함께 한창인 이 꽃은 나리과가 아닌 원추리과의 풀꽃입니다. 어쨌든 왕원추리도 이맘때 길섶 여기저기에서 한여름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7월에는 하늘말나리를 시작으로 나리꽃들의 릴레이가 이어집니다. 옆으로 고개를 살짝 떨군 섬말나리 꽃이 피어나면서 바로 옆을 쳐다보는 중나리가 피고, 이어서 꽃이 땅 아래쪽을 바라보는 땅나리가 핍니다. 이어서 밝은 분홍빛의 솔나리 꽃도 필 것입니다.
7월 하순에 접어들어 장마가 그치고 여름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이면 나리 중의 나리 참나리 꽃이 핍니다. 내 키보다도 더 높게 시원스레 줄기를 뽑아 올린 참나리가 푸르른 창공에 큼직한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뒤쪽으로 아리땁게 뻗어 젖힌 짙은 황적색의 큼직한 꽃잎에는 흑자색(黑紫色)의 반점이 나 있습니다. 반점이 박혀 있는 꽃잎의 모습이 마치 호랑이 또는 표범의 무늬와도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서양에서는 참나리를 ‘호랑이 나리’ Tiger Lily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참나리 꽃이 피면 그 무늬 모습이 참나리와 비슷한 산호랑나비가 어디에선가 용케도 나타나서 이 꽃의 꿀을 땁니다.
참나리가 필 때쯤에는 뻐꾹나리 꽃도 핍니다. 꽃이 생긴 모습은 보통의 나리와 전혀 다른데 이도 나리과 식물의 한 종류입니다. 뻐꾹나리는 꽃받침과 꽃잎이 하나로 되어 있고 꽃 중간 위쪽으로 솟아오른 암술과 수술의 모습이 여러 개의 갈고리로 된 오징어 작살 모양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꽃부리가 사방으로 물을 뿜어내는 정원의 분수와도 같은 모습입니다. 뻐꾹나리라는 이름은 꽃덮이에 있는 분홍색의 얼룩이 뻐꾹새의 목 부위에 있는 무늬와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무척이나 독특한 모양의 꽃입니다.
한편 2~3주 동안 장맛비가 이어져 땅이 푹 젖어 들면, 잎을 사그라뜨렸던 것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꽃대를 뽑아 올립니다. 상사화(相思花)입니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자신의 잎을 보지 못해 서로가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는 애달픈 꽃입니다. 잎이 완전히 사그라져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홀연 싱싱한 꽃대가 솟아올라 연분홍의 화사한 꽃을 피웁니다. 서양에서는 상사화가 나리과의 식물은 아니지만, 나리와 같은 모습의 꽃 모양에서 이 꽃을 ‘깜짝 나리’ Surprise Lily 또는 ‘부활의 나리’ Resurrection Lily라고 부릅니다. 또 ‘벌거벗은 나리’ Naked Lily라는 조금은 야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긴 장마를 친구하여 피어나는 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무릇이라고 부르는 별 보잘것없는 작은 풀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물굿 또는 물구지라고도 하고 예전에는 구황식물의 하나로 그 뿌리와 잎을 먹기도 했습니다. 이른 봄부터 담뿍하게 솟아올랐던 뾰족한 선형(線形)의 잎 일부가 사그라들며 가늘고 긴, 여린 꽃대가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이 꽃대 위쪽 끝 화살촉 모양의 꽃 송아리에 좁쌀만한 크기의 꽃송이들이 가득 달립니다. 이 꽃 송아리는 연한 홍자색의 자잘한 꽃송이들을 마치 연보랏빛 빛을 흘리는 별을 달아내듯이 아래로부터 위쪽으로 차례차례 피워 올립니다.
순수한 우리의 말인 나리를 우리는 백합(百合)이라고 많이 부릅니다. 하얗다는 의미의 ‘백합(白合)’이 아닙니다. 이 꽃의 뿌리가 수많은 비늘로 이루어져 있어서 ‘百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백합을 이르는 여러 나라의 말이 모두 ‘리’자로 끝이 납니다. 백합이 우리말로는 나리, 영어로는 릴리 Lily, 그리고 일본어로는 유리 ゆり입니다. 중국어로는 백합을 ‘마리’라고도 한다는데(http://blog.dau.net/hamdongjin/15068095), 이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백합에는 700여 종이나 되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우리가 ‘백합’ 하면 하얀 순백의 꽃잎을 가진 ‘흰 정원 백합’ White Garden Lily를 연상합니다.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이 ‘마돈나 릴리’ Madonna Lily를 떠올리게 되지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그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태복음 6장 26-30).”는 성경 속의 꽃이 바로 이 나리꽃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나리꽃 ‘Fleur-de-lis’는 오랫동안 프랑스 왕가의 상징이 되어오기도 했습니다.
초록의 빛깔과 녹음이 압도하는 한여름 정원의 단조로움을 달래보고자 몇 해 전에 원예용 백합 구근을 구입해서 산촌농원의 화단에 심은 적이 있었습니다. 분홍꽃 모나리자와 소르본느, 노랑 콘카도르, 하양 화이트 헤븐 등... 그런데 낭패를 보고 말았습니다. 하늘말나리, 참나리, 뻐꾹나리와 같은 우리 토종의 백합들은 멀쩡한데 이들 원예종 백합들은 남아나지를 못했습니다. 멧돼지가 출동해서 그 크기가 큼직한 이들의 구근을 모두 파헤쳐 내서 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7월의 계절을 이야기하면서 산수국(山水菊)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수국은 6월 하순 장마가 시작되면서 피기 시작해서 7월 하순에 장마 끝난 뒤까지도 아주 오랫동안 꽃을 피웁니다. 수국은 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 씨앗의 모양이 히드리아(Hydria)라는 이름의 그리스ㆍ로마 물병 모습을 닮은 데서 하이드레인져(Hydrangea)라는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촌농원에 피는 야생의 산수국은 화려한 모습의 원예종 수국과는 달리 자잘하지만 큼직한 꽃송이 주위에 무성(無性)의 가짜 꽃을 만들어서 수분을 위한 곤충을 유인합니다. 산수국은 햇빛을 받는 정도와 그 토양의 특성에 따라 실로 다양한 색깔의 꽃을 피웁니다. 도랑 쪽 농원 안길을 따라 심겨있는 산수국의 꽃들이 갖가지 색깔로 형형하게 빛납니다.
지리한 장마와 찌는듯한 무더위로 맥이 풀리는 한여름, 이들 7월의 꽃들이 나에게 적잖은 위로를 줍니다. (2021.7.8.)
첫댓글 곧 상사화가 만발하게되면 구경차 선운사와 불갑산등을 찾아가고 싶군요~나리가 이토록 종류가 많은지 미처 몰랐네요!
내가 관찰한 바로는 꽃들은 화려하면 향기가 없고,향기가 짙으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각자의 존재가치를 드러내지만,욕심을 내지않는 자연의 순리이기도 하지요. 꽃을키우는 것은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순우의 순백한 마음이 글속에서 읽혀지네요. 앞으로 대표적 사진도 한 컷 첨부하면 더 항기나는 글이 될 것 같네요.
백합은 700여종ᆞ백합은 하얀색이
아니라 뿌리에 백여가지 비늘이 있
다는것ᆞ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이
꽃하나보다 못하다는 멋진말에 감사
드립니다.
순우, 나리에 대해 백과사전을 본 것 같네요. 동요 '나리 나리 개나리' 만 있는 줄 알았는데, 화랑대 연병장 국기봉 아래 나리가 피어야 졸업식을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떠 오르네요.
백합이 나리라는 것을 어딘선가 들은 기억이 나지만 나리의 종류가 수 백가지 되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네요. 색깔도 하얀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러가지 있다는 것도 오늘 순우의 글을 보고 알게 되어 너무 좋군요. 꽃은 色으로 말해 준다고 하잖아요. 화사하게 핀 모습에 감동을 받게 되지만 때로는 부정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지요.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양면성이 있다는 의미이겠지요. 오늘 자연 공부 잘 했어요....
장미의 화려함은 없으나,소개한 꽃들이 잔잔한
아름다움을 주네요.작은 것의 미학이라는 할까요 .
또한 혼을 다해 쓰는 글에대한 열정이 대단해 시
한편 툭 던지는 제가 송구스럽네요.
고마워요 .순우친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