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170
(소설 삼국지 )
제2권 군웅쟁패
제16장 조조의 세력 확장
5) 연주, 예주 쟁탈전
한편 원술은 원소를 견제하고 공손찬을 지원하고자 서주자사 도겸(陶謙)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여 발건(發乾, 연주 동군의 현)에 주둔하면서 원소를 압박하게 했다. 공손찬은 이에 호응해 유비를 보내 고당(高唐)에 둔영하게 하고 단경(單經)은 평원(平原)에 주둔시켰다. 청주에서 원소와 공손찬이 화해하고 각각 철군하자 조조는 자신의 본거지인 동군에 진출한 도겸을 공격해 격파했다.
초평 4년(193년) 봄 조조의 군은 견성(鄄城, 연주 제음군의 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서주의 도겸을 공략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원술이 황제를 별도로 세우려 한 원소의 역모를 토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군사를 이끌고 연주에 침입했다. 원술은 거의 전군을 이끌고 들어와 봉구(封丘, 진류군)에 주둔했다. 원술은 흑산적의 잔당과 어부라 등에게 사자를 보내 서로 동맹을 맺었다.
그 동안 주로 손견의 활약에 의존해 오던 원술이 처음으로 제 스스로 대규모 군대를 지휘했다. 원술의 이번 작전은 여러 가지 의도가 복합되어 있었다. 먼저 조조의 공격 위험에 처한 서주의 도겸을 구원하는 한편 원소의 세력을 견제해 원소와의 싸움에서 밀리고 있던 공손찬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조가 연주에 항구적 기반을 마련할 수 없도록 견제하고자 했다.
원소의 동맹세력인 조조가 연주를 기반으로 황하 이남에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원술과 공손찬 연합에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연주에서의 조조의 기반이 아직 취약한 틈을 타 그를 몰아내고 연주를 탈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원술은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먼저 서주자사 도겸에게 동군을 치게 해 조조를 동쪽으로 이끌어낸 다음 자신은 진류군으로 진격해 조조의 배후를 습격했다.
원술은 진류공격은 자신의 기반을 재정돈하고 근거지를 남양에서 연주나 예주 등 황하 이남의 핵심지역으로 이전하고자 했다. 원술은 무분별한 착취행위로 남양에서 인심을 잃었다. 게다가 손견이 패하여 죽은 후 남쪽으로부터의 유표군의 압박은 나날이 거세지고 있었다. 원래 원술의 영향권은 간접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지역을 포함하면 형주 이외에도 예주, 양주 지역을 망라했다. 이 지역에서 군대를 일으킨 호걸들이 다 원씨가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걸었고, 황하 이남 지역은 원술을 맹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참에 원술은 연주를 빼앗아 예주 및 양주를 포함한 황하이남 지역 전역을 아우르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조의 전력은 원술에 비해 크게 열세였다. 연주를 장악한 지 얼마 안 돼 전력보강을 위한 충분한 시간조차 없었다. 조조는 긴급히 원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원소는 병사들과 군수물자를 조조에게 지원해 주었다. 특히 중원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숙련된 북방의 기마병을 보내주었다. 원소의 지원은 조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켜 주었다.
원술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의 장수 유상(劉詳)이 이끌고 광정(匡亭, 진류군 평구(平丘)현 내에 위치한 정 이름)에 주둔하게 했다. 원술과 유상은 서로 의각지세를 취했다. 조조가 먼저 광정의 유상을 공격하는 척했다. 역시 원술이 구원하러 왔다. 맞아 싸워서 대파했다. 이 싸움에서 가장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은 여봉교위(厲鋒校尉) 조인이었다. 조인은 늘 선봉에 서서 원술 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제법 많은 수의 적장과 병사들을 참획했다.
원술은 군대를 후퇴시켜 봉구(封丘)라도 지켜보려 했다. 조조가 급히 쫓아와 포위를 시도했다. 아직 포위망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원술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 양읍(襄邑, 역시 진류군 내의 한 현)으로 도망쳐 갔다. 조조가 추격하자 원술은 또 다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원술이 태수(太壽)에 이르자 조조가 강둑을 끊어 성을 물에 잠기게 했다. 원술이 이번에는 영릉(寧陵, 예주 양국(梁國)의 한 현)으로 도망했다. 조조가 또 추격했다. 원술이 구강(九江)으로 달아났다. 그해 여름 조조가 회군해 제음군 정도(定陶)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원술이 세만 믿고 나섰다가 혼쭐이 났다. 조조는 옛날의 조조가 아니었다. 조조군은 청주군을 받아들여 군대가 매우 강성했다. 게다가 용병술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원술은 몇 번 결정적으로 패한 후에는 맞아 싸워보지도 못하고 연주 경내에서 예주를 거쳐 양주까지 달아났다. 추격전이 주로 전개된 지역은 예주의 진국, 양국이었다. 이로써 조조의 영향권이 연주에서 예주까지 확대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