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로 거듭날 부평에 남은 군사 도시의 흔적을 찾아서
올 1월 문화체육관광부는 인천시 부평구를 법정문화도시로 지정했다.
지난 6월엔 구청장 등이 모여 법정문화도시 선포식도 가졌다. 부평은 앞으로 5년간 약 200억 원의 정부예산을 지원 받아
도시의 문화환경 조성에 쓸 계획이다. 특히 지역의 도시재생사업들을 '문화적'으로 연계하고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생태계를 조성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부평에서 나고 자란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이다. '감격'까지 할 일이냐 하겠지만 그도 그럴 만하다.
오랜 시간동안 부평은 공업도시, 군사도시로 인식되어 와서다. 도시에 대한 이미지가 그다지 밝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부평이 문화도시로 공인 받았으니 실로 '대사건'이 아닐런가.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펼쳐갈지 자못 기대가 크다.
한데 무엇을 하든 부평의 역사와 배경과 정신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다소 부정적이고 자랑스럽지 못한 이미지라 할지라도 그것에 일부러 덧칠을 하고 어설프게 각색을 하는 우(愚) 따위는
없었으면 좋겠단 말이다. 공업이면 어떻고, 군대면 또 어떤가. 그 모두 나라와 국민 모두를 위한 부평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아니었던가. 좀 더 떳떳해도 된다.
작은 미국을 품은 도시
특히 부평은 군(軍)과는 떼려야 뗄 수 없다. 과거 곳곳에 많은 군대가 주둔해 있었고,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도심의 일부 부대 터가 공원 등으로 바뀌긴 했지만, 외곽엔 여전히 많은 군부대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휴일이면 시내에 군복 입은 병사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그러지 못하다.
갇혀 지내는 청춘들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다.
도시 곳곳에선 군사문화의 흔적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중 백미는 최근 개방한 미군부대 터다.
일제강점기 땐 무기를 만들던 조병창으로 쓰이던 자리다. 해방 후 미군이 들어와 그 너른 터에 그들만의 작은 도시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에스캄 시티(ASCOM City, Army Service Command)라 불렀다. 많을 땐 20여 개의 부대가
한꺼번에 주둔했었다.
그 중 캠프 마켓은 끝까지 남았던 부대다. 에스캄 전체로 보면 그건 그 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40만 평이 넘는다. 미군들은 사방에 높은 담을 쌓고 철조망을 쳤다.
거대한 출입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하고 한국인은 아예 접근금지였다.
더구나 도심 한가운데였다. 부평 발전의 걸림돌이란 비난은 틀리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전 요구가 빗발쳤다. 그래도 미군은 완강하게 버텼다. 2002년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이전 계획에 합의했다. 하지만 합의문은 금방 성사되지 않았다. 이전비용부담, 토질오염 등의 쟁점을 놓고 또 20년 가까이 협상과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2020년 전격적으로 시민에게 개방됐다. 대한민국 속의 작은 미국이 80년 만에 문을 연 것이다.
그렇게 열린 문을 지나면 위병소가 나온다. 작고 낡았지만 어딘가 위엄이 느껴진다.
그곳에 근무하던 병사들은 단순히 자신의 부대를 지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철통방어한 건 조국인 '미국'이었다.
그곳은 일종의 출입국관리소였다. 한국 사람들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었고, 그 안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무시로 그곳 병사들에게 몸수색을 당해야 했다.
위병소를 지나면 드넓은 잔디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야구장이었다. 제법 크다. 조명시설까지 잘 갖췄다.
그 주위로 병사들의 숙소, PX, 클럽 등으로 쓰이던 건물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다. 낡았지만 상당히 '미국'스러웠다.
이국적인 영화세트장을 방불케 한다. 지금은 토질정화작업이 한창이라 직접 볼 수는 없다.
군사적 목적으로 태어난 지하상가
미군부대 맞은편의 '부평공원'도 군부대 터였다. 국군 정비부대가 있었다.
그 이전에는 일본의 미쓰비시 사(社)가 차량이나 기차 등을 만들고 수리하던 곳이었다.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강제동원 됐었다. 공원 한가운데 징용노동자상과 소녀상을 놓은 까닭이다. 공원은 공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관리도 잘 되는 편이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대동한 가족들이 많이 찾는다.
공원 맞은편엔 식당들이 즐비하다. 강화도 밴댕이 집부터 중국음식점까지 골고루 섞여 있다.
여긴 저녁시간이 더 활기차다. 해가 저물면 식당들이 제 가게 앞에 야외용 식탁을 내놓는다.
순식간에 커다란 포장마차촌이 된다. 동남아 어느 도시의 밤풍경을 연상하게도 한다.
식당가 뒤편으론 서민들의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가 있다.
사실 이 동네는 유서가 깊다. 식당들은 70~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군을 상대로 하는 술집(Bar)이나 클럽 등이 있던 곳이다.
클럽엔 한국인 연주자들이 꽤 많았나 보다. 얼마 전부터 그들을 한국대중가요의 원형으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 커지고 있다.
문화도시 부평은 '음악'이 중심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제법 그럴싸하게 들리긴 한다.
부평공원을 지나 부평역 쪽으로 가다보면 땅 밑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지하세계로 향하는 출입구다. 그 유명한 부평지하상가다. 내려서자마자 화려한 조명의 별천지가
눈에 확 들어온다. 가로 세로로 정말 끝 간 데 없이 길다. 다 합치면 2km 가까이 된다. 바깥세상으로 이어지는 출입구만
서른 개가 넘는다. 토박이들도 곧잘 길을 잃는다.
세계최고라는 말이 그저 터무니없는 허풍은 아니다. 실제로 한국과 미국 기록원이 인정했다.
실은 크기가 아니라 단일면적 최다점포수 주문에서 최고로 인정받았다. 그 안에는 1400개가 넘는 가게들이
오밀조밀 붙어있다. 의류, 잡화, 화장품 그리고 휴대전화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특히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인천 젊은이들의 패션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군사문화 이야기 하다 뜬금없이 지하상가는 왜?' 하는 분들이 있을 터다. 그런데 이곳 역시 군사문화의 흔적이다.
처음 부평역 앞 대로에 땅을 팔 땐 상가를 들일 계획은 없었다. 폭격에 대비하는 방공호를 염두에 둔 거였다. 그런데 이재에
밝은 사람들이 그곳에 칸을 막아 가게들이 내기 시작했고, 공간도 조금씩 넓혀 오늘날의 거대한 지하제국이 완성된 것이다.
아무리 깊게 판들 원자폭탄 같은 것에 견딜까마는 그 당시 우리의 사고 수준이 그 정도였다.
그래도 대단히 튼튼하게 짓긴 한 듯하다. 1978년에 준공 되었으니 어느덧 40년이 넘었지만 그동안 별다른 안전사고
한 번 없었다. 처음엔 계획에 없던 냉난방과 환기시설 등도 완벽하게 갖췄다. 그래서 지하면서도 참 쾌적하다.
상권을 지키려는 상인들의 분투 덕이다.
지하상가를 빠져 나오면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테마의 거리', '문화의 거리'가 이어진다. 지금이야 코로나로 뜸하지만
특히 불금이면 어깨를 부딪치며 다녀야 했다. 그 뜨거운 거리를 지나면 인천 최대의 재래시장인 부평시장이 나오고 그
뒤로는 최근 핫 플레이스로 뜨고 있는 평리단길이 얌전히 자리하고 있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공방 등이 오순도순 모여있다.
지나는 거리 곳곳에 맛집이 즐비하다. 이 시리즈 4회 차에서 소개한 '충남순대'집이 구 시장 골목 안에 있다.
이 집의 화끈한 순댓국도 추천할 만하지만 오늘은 부평의 군사문화를 주제로 돌아 봤으니 마지막도 그 비슷한 걸로 하면
어떨까. 부평시장 뒤편 구 경찰서 맞은편에 있는 '솔밭정'의 원조부대찌게를 강추한다. 시리즈 8회 차에 소개한 바 있다.
우리 부평이 문화도시라니, 다시 생각해도 참 기분 좋다. 한데 그 문화라는 게 꼭 격이 높고, 고급하며 우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소 거칠고 험한 것일지라도 그게 사람을 위한 가치를 품었다면 진정한 문화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문화를 단순히
예술과 연계하려는 것도 촌스러운 발상이다. 문화는 다양성의 어우러짐이다. 군부대도 공장도 모두 훌륭한 문화의 토대다.
철거냐 보존이냐, 미군부대 터에 남은 건물들을 놓고 논란이 한창이라 한다. 개인적으로 보존에 한 표 던진다.
그리고 그걸 부평의 군사박물관으로 쓰면 어떨까 싶다. 아무리 가리려 해도 과거는 흔적으로 남는다. 숨기려면 더
짙어진다. 차라리 시원하게 드러내고 알리는 게 낫다. 그런 의미다. 오늘 소개한 부평의 '밀리터리 로드(Military Road)'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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