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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해설
시간을 견디는 힘, 타임캡슐의 의미
김 광 기 (시인)
인간은 자신만이 영유하는 삶의 공간을 확보하며 움직인다. 그리고 타인과 함께 공유하는 세상의 영역으로 점차 나아간다. 이렇게 삶을 운행하는 일상에서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공간이동을 하거나 시간이동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움직일 때 항상 어떠한 목표를 정해 놓고 진행하거나 꼭 목적의식이 있어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의식이 없이 삶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시인이 시(詩)를 창작하는 것도 이와 같다. 시의 길을 정하고 방향에 따라서 시심을 움직이며 시적 형상을 구축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시인이 시를 쓸 때는 이미 시의 길과 창작기법은 시인의 몸속에 녹아 있어 시심을 담은 그 의미성만 시인의 성향에 따라 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어떻게 시를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할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시인의 특성을 지닌 작품이 그대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김해심 시인의 시(詩)가 이러한 예에 적합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독자적인 세계라 할 수 있는 특정범주의 시심을 담은 소우주적인 세계의 바탕에서 모든 것은 비롯되지만 능동적으로 시인이 삶을 운영하는 방향에서 시 작품들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발현적인 의미들은 시인이 자신의 세계를 서사적으로 펼쳐놓듯이 생의 근원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하늘의 명(命)을 받드는 시인의 자세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시인은 다음의 시에서처럼 천명(天命)을 의식하고 그러한 명(命)을 여성성에 담으며 그 세계를 펼쳐 나간다.
스스로 전족을 신고서
아파합니다
벗어야지 마음 뿐
더 작은 전족을 부러워도 합니다
그러다간 썩기도 하고 상처뿐인 작은 발
맑은 물에 담가 깨끗이 닦은
어머니의 흰 고무신
한 켤레
즐거운 외출을 생각하며
밤이 새도록 신어 보다가
가지런히 챙겨놓고
잠이 듭니다
-「스스로 전족纏足을 신고서」전문
중용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말로 성(性)은 하늘이 내는 것이니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성(性)은 인간의 근원적 의미로서 성품, 성질, 생명, 목숨과 같다. 이러한 연유로 조선시대에 형이상학적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던 성리학(性理學)은 성의 다스림에서 출발하여 우주의 생성과 구조, 인간 심성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그 중심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김해심 시인의 명(命)은 이러한 대의명분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 담겨 있는 여성적 삶의 명분(命分)을 진솔하고 소박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는 결연하리만치 확고하다. 그것은 마치 운명적으로 따라야 할 명분과 같은 것으로 여성적인 삶의 순명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간 썩기도 하고 상처뿐인 작은 발 / 맑은 물에 담가 깨끗이 닦은 / 어머니의 흰 고무신 / 한 켤레’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머니의 삶이 시인의 삶까지 전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상처를 물려받은 듯하고 또한 그것은 새로운 세례의식을 통하여 정화된 모습으로 비친다. 더 나아가 ‘즐거운 외출을 생각하며 / 밤이 새도록 신어 보다가 / 가지런히 챙겨놓고 / 잠이 듭니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향하는 봉사와 헌신을 예고하는 순수정령의 모습으로 성숙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꿈의 모습이 현현되듯 타임캡슐 속에서 시간이동을 하고 있다.
단테!
타임캡슐을 타고
당신의 어린 베아트리체가 되어
당신의 시야에 빨려들어
하늘을 울리는 춤을 춥니다
단테!
당신이 나를 향한 글 속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고 신곡을 썼던
철없음도 괜찮소이다
단테!
700년을 초월한 타임캡슐에 누워
당신과의 동침 공유한 시간
피렌체를 떠나 각처를 떠돌던
당신의 말씀은, 가슴 아픈 당신의 언어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당신 조국 최초의 언어로 탄생한 신곡
나를 감싸던 물컹한 나의 보호막을 터뜨리고
수줍은 언어로
당신의 애달픔을 노래하리요
단테!
당신이 베아트리체를 통하여
하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나도 이제 하늘의 언어를 들을 테요
나도 이제 나의 베아트리체를 위한 신곡을
나의 조국을 위한 신곡을 노래하며 춤추리요
-「타임캡슐」전문
위의 시 「타임캡슐」에서는 천상으로 인도하는 여신, 단테의 연인 베아트리체를 통하여 시인은 자신의 열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것은 몇 분밖에 안 될 정도로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생각하며 『신곡』을 완성시킨 시간은 30년 정도의 세월이었다니, 베아트리체를 향한 그 열정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열정의 고사와 같은 사례를 들며 자신의 존재가치와 열망을 이입시킨다. ‘700년을 초월한 타임캡슐에 누워 / 당신과의 동침 공유한 시간 / 피렌체를 떠나 각처를 떠돌던 / 당신의 말씀은, 가슴 아픈 당신의 언어는 / 생명이 되었습니다’에서처럼 시인은 타임캡슐 속에서 시간이동을 하며 그 열정을 녹여내고 있다. 마치 오랜 시간동안 잠잠히 시간이동을 하고 있는 타임캡슐에서 육화된 몸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견딘 시인은 잠잠하지만 열정적이다. 때때로 시인은 단테의 화신이 되기도 하고 베아트리체의 화신이 되기도 한다. 시인은 이러한 시간의식을 갖고 자신이 꿈꾸는 대상으로의 전화를 통하여 자신이 열망하는 대상을 발견하려 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열정적인 기운으로 대상에 도달해서 그와 함께 혼연일체가 되고자 한다. 그것은 시인이 마주하는 세상일 수도 있고 시인 자신의 내부 깊숙이에 있는 존재의식일 수도 있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하나가 되고자하는 것이니 어느 쪽이든 시인의 기운이 가닿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또 이러한 기운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행보가 다음의 시에서처럼 산을 오르듯 시업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산에 오릅니다 / 즐겁습니다 / 땀도 나고 / 개구쟁이 시란 녀석은 / 저만치 가서는 / 헉헉대는 나를 조롱합니다 // 닿을 듯 닿을 듯 / 잡아야지 / 한참을 기다려 주다가는 /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갑니다 // 모두들 / 여유롭게 오릅니다 / 쉬어갈까 /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볼까 / 삼천포로 빠지려는데 / 시란 녀석은 다시와 / 속삭입니다 // 모두들 힘들어도 재미있다는데 /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은 위험해 / 반질반질 사람들에게 / 짓밟혀 / 지친 길 / 그 길로 가야한다고 합니다 / 모두들 열심히 갑니다 / 정상을 향하여 / 나는 개구쟁이 녀석과 함께 / 가끔씩 외딴 곳에서 / 명상도 하고 한눈도 팔고 / 빠른 걸음이 보지 못한 것들을 / 보겠습니다 //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 시란 녀석과 산속에서 / 술래잡기를 합니다’ -「술래잡기」전문
시적 전화(轉化)를 통해서 도달하고자하는 세상(세계)은 어렵고 힘든 정상의 고지가 아니라 시업을 진행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나는 개구쟁이 녀석과 함께 / 가끔씩 외딴 곳에서 / 명상도 하고 한눈도 팔고 / 빠른 걸음이 보지 못한 것들을 / 보겠습니다 //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 시란 녀석과 산속에서 / 술래잡기를 합니다’에서 읽히는 것처럼 때로는 동화 속을 거닐 듯 길을 가고 때로는 느림의 미학으로 속사포 같이 빠른 세상에서 놓치는 진정한 의미들을 발견하고 새기면서 시의 길을 가고 있다. 시업의 목표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시적 과정으로 삶을 풀어내는 것은 고행이 아니라 술래잡기처럼 행복한 놀이가 될 수 있기도 하다. 이러한 삶의 바탕에는 서두에 밝힌 것과 같은 어머니라는 존재의미가 있고 그에 따른 여성성을 구현하다는 의식이 있다.
어머니 뱃속 양수 같은 / 생명의 물을 품고 / 어린모들의 착상을 위해 / 넉넉한 정숙함으로 앉아있네 // 아- / 저 어머니의 진지한 / 고요 / 한 치의 미동도 없이 / 하늘 향해 / 황금 들녘을 꿈꾸며 / 단전에서 / 물을 뿜어내는 / 내 어머니 같은 논 -「논」전문
어머니 그리울 때면 / 찾아가는 곳 / 어린 시절 새벽녘 / 잠자리에서 / 밥 짓다 들어오신 어머니 / 치마폭 냄새 맡으러 간다 / 아- 향내 나는 곳 / 새벽 단잠에 / 달콤한 어머니 향기는 / 무수한 꿈을 꾸게 했고 / 지금은 어머니 냄새 같은 / 불곡산 새벽 향기 품어다 / 자식에게 / 맡게 해 주고 싶다 -「불곡산 1」전문
호미를 들고 마음속의 / 쓴 뿌리를 캐냅니다 / 뽑다가 잎이 뜯기기도 하고 / 뿌리는 다시 잎을 낳아 / 무성하기도 했습니다 / 촉촉이 비올 날을 기다리며 / 온전히 잔뿌리마저 뽑으려 했으나 / 가뭄은 계속되고 / 헛된 수고만 반복됐습니다 // 온전히 뽑힐 / 단비와 함께 / 한바탕 용솟음칠 / 아- / 자유인 것을! -「나의 밭」전문
전술한 바와 같이 시인의 서사는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성성에서 출발한다. 또한 그 여성성의 바탕에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또 하나의 어머니로 시인 자신의 존재가 되어 있다. 때문에 시인의 존재적 성찰은 어머니라는 대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인간관계로 나아가는 전조의 형국이며 자신의 존재 안에서 변증법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의 정반합적인 변증법과 같이 갈등의 대상이 외부에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의 내부 자체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그 안에서 스스로 갈등이 조정되고 있다. 시인은 시인 자신과 어머니라는 화자를 통해 인간 세계의 갈등과 그러한 조짐을 예견하고 예습하며 밖으로 드러날 세상에서의 인간관계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식은 천명에서부터 발현되는 여성성을 충분히 삭히고 감내한 결과 때문인지 화자는 대상을 포용하고 용서하고 나아가서는 상처까지도 치유하고 보듬어줄 사랑과 헌신의 정령으로 비친다. 또한 어머니라는 대상적인 의미의 여성성은 천지 관계에서 하늘의 상대적 위치에 있는 땅(대지)의 의미와 동일화된다. 위의 시 「논」에서와 같이 어머니의 양수와 같은 생명탄생 영역의 의미로는 논으로 대상화되고 있으며 여성성의 고행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업보와 같은 운명적 삶을 나타내주는 것은 「불곡산 1」과 같은 산으로 대상화되고 있다. 그리고 다음의 시 「나의 밭」에서와 같이 삶의 질곡 그 끊임없는 영위 속에서 끝까지 놓칠 수 없는 ‘자유’의 뿌리를 ‘밭’이라는 대지에서 키우고 있다. 시인 자신으로 보이는 화자와 어머니 그리고 대지는 작품 안에서 동일화된 채로 그 생의 질곡을 통해 또 다른 삶을 구현하고자 한다.
당신은 사랑 하나
한 눈금 던져 놓고
삼천육백 바퀴 돌게 하시나요
뛰고 뛰고 뛰어도
도달하기 어려운 일각 속에서
당신 마냥 배짱 좋게 졸고 있네요
죽은 줄 알았더니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삼천육백 바퀴 중
당신과 합일점
목말라 하며
허망하게 지나친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스쳐 지날 때마다
울어야 하나요
-「시계」전문
위의 시에서처럼 그 생의 질곡은 마치 운명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은 사랑 하나 / 한 눈금 던져 놓고 / 삼천육백 바퀴 돌게 하시나요’에서 보이듯 운명의 신은 화자에게 삶이라는 명분 하나를 부여하고 다음의 것은 알아서 하라고 뒷짐 지고 졸며 모른 체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정황이 시계와 화자의 대립으로 비쳐지며 결코 쉽지만은 않은 삶의 과정들이 ‘삼천육백 바퀴 중 / 당신과 합일점 / 목말라 하며’ 화자가 삭혀야 할 몫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운명에 종속되듯 체념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화자가 갖고 있는 희망의 뿌리, 영원히 꿈꾸고 있는 자유의 뿌리인 ‘허망하게 지나친 것에 대한 / 그리움’ 때문에라도 화자는 체념만 하고 있을 것으로 감지되지는 않는다. 또한 그것은 ‘그리움으로 / 스쳐 지날 때마다 / 울어야 하나요’에서 보이고 있는 것처럼 울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반어적으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단테의 신곡에서처럼 시간을 견디는 힘, 타임캡슐 속에 내장된 시간을 이동하는 잠잠한 기운으로 운명을 극복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함유되어 있는 듯하다. 시인이 시간이동을 하는 것은 타임머신과 같이 순간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임캡슐과 같이 시간을 견디는 힘으로 자신이 꿈꾸는 세계에 도달하겠다는 의지가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것은 사랑과 헌신으로만 가능할 것이라는 성찰의지를 다음의 작품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름답다고 / 설레이는 가슴으로 / 경탄하더니 / 작은 바람에 / 힘없이 / 떨어져 / 정처없이 떠돌다 / 마른 잎 되어 / 밟히다 / 귀찮은 듯 / 쓸려 / 타 / 는 / 구 / 나 -「낙엽을 태우며」전문
낙엽을 밟고 태어났다 / 낙엽을 밟고 / 아장아장 걸었으며 / 낙엽의 품에 안기어 / 토실토실 살쪘다 // 거센 태풍 비바람에도 / 꿈쩍 않고 / 오직 날 위해 / 송두리째 / 밟히고 썩고 태우고도 / 모자라 / 젖줄이 되어 줬던 낙엽처럼 / 이제 낙엽이 될 / 준비를 한다 // 설레이는 마음으로 -「낙엽을 밟고 태어났다」전문
그대 메마른 가슴에 / 아름다운 향기 되어 / 적시고 싶습니다 // 향기따라 긴 호흡으로 / 머물다가 / 날아가리다 // 지친 향기 가시 되어 / 서로를 아프게 해도 // 맑은 향기 / 당신 한 모금 / 나 한 모금 / 마 / 시 / 고 / 평행선 따라 나란히 / 걸으오리다 -「아카시아」전문
위의 시 「낙엽을 태우며」는 재생을 위한 서곡으로 제의를 치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낙엽의 대상적인 물질은 생명을 갖고 이 세상에 존재했지만 ‘아름답다고 / 설레이는 가슴으로 / 경탄’하던 삶의 과정을 보내고 운명의 바람에 힘없이 몰락하는 삶의 부산물처럼 보인다. 그래서 세파에 찌들 듯 밟히고 부서져 누군가에게 제 몸이 불 살러지고 있지만 ‘귀찮은 듯 / 쓸려 / 타 / 는 / 구 / 나’에서 감지되듯 이미 낙엽은 삶을 초월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낙엽을 태우고 있는 화자의 심정이 낙엽이라는 대상을 통해 드러난 것이기에 화자의 상태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화자는 경탄했던 짧은 생의 순간을 태우며 미래를 위한 제의를 치르고 있다. 역설적으로 다음의 시 「낙엽을 밟고 태어났다」에서는 재생의 의미를 기원하는 데 주력했을 것이다. 그리고는‘거센 태풍 비바람에도 / 꿈쩍 않고 / 오직 날 위해 / 송두리째 / 밟히고 썩고 태우고도 / 모자라 / 젖줄이 되어 줬던 낙엽처럼 / 이제 낙엽이 될 / 준비를 한다 // 설레이는 마음으로’에서 다시 낙엽이 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질곡의 생을 다시 준비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잉태하는 것은 죽음, 소멸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누군가를 위한 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이유 없이, 아무런 의미 없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헌신적으로 또 다른 삶을 위해 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헌신적으로 삶이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소멸과 별개의 탄생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끊임없이 재생되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해를 버티지 못하는 낙엽과 같은 짧은 생애가 헌신을 통해 무한한 생명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를 새기며 시인은 「아카시아」에서처럼 진하고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영속된 사람의 분신인‘그대’가슴에 남기려 한다. 하지만‘맑은 향기 / 당신 한 모금 / 나 한 모금 / 마 / 시 / 고 / 평행선 따라 나란히 / 걸으오리다’에서 감지되는 것처럼 그대와 내가 둘이 아니다. 세월을 지나는 길도 분리된 것처럼 보이나 언제나 평행선으로 끝까지 함께 가는 길 이외의 의미는 없는 듯하다.
시인은 그렇게 삶의 여정을 통한 무의식적인 발현으로 천명에 순응하는 길을 가며 그것을 시학의 도(道)로 가꾸려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뿐이 아닌 주변의 삶까지 아름답게 가꿔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리고 함께하는 공동체적인 헌신이 타임캡슐처럼 시간을 견디는 힘을 갖고 나아갈수록 향기 더욱 그득한 삶으로 끊임없이 재생된다는 것을 시인은 시적 작업을 통해 의미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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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누구나 하나씩 두고 떠날 타임캡슐을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