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유의(皇甫兪義)는 사서(史書)에서 그 세계(世系)를 잃어버렸다.
목종(穆宗) 때에 관직을 두루 거쳐 선휘판관(宣徽判官)에 이르렀다.
왕이 병 들자 김치양(金致陽)이 반란을 도모하니, 왕이 그것을 알고 명령하기를 문신과 무신 각각 한 사람씩 뽑아 군교(軍校)를 거느리고 가서 현종(顯宗)을 맞아오도록 하였다. 이에 채충순(蔡忠順)과 최항(崔沆) 등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황보유의는 뜻이 종묘사직을 보존하려는 데에 있고 그 부친과 조부가 나라에 공로가 있어서 마땅히 가업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전심전력할 것이니, 어찌 이 사람을 보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아울러 무반으로는 낭장(郞將) 문연(文演)을 추천하여 아뢰었다.
그리하여 채충순에게 명령하여 현종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초하게 하고, 〈그것을〉 황보유의·문연 및 별장(別將) 이성언(李成彦)·고적(高積) 등 10명에게 주어 삼각산(三角山)의 신혈사(神穴寺)로 가서 〈현종을〉 맞아오게 하였다. 또한 개성부참군(開城府叅軍) 김연경(金延慶)에게 명령하여 군사 100명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현종을〉 마중하게 하였다. 황보유의 등이 〈신혈사로〉 갔는데, 승려가 간신 일당이 보낸 것이라 여겨 〈현종을〉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 황보유의 등이 〈그를〉 맞아 왕으로 세우려는 뜻을 자세히 설명하고, 마침내 받들어 〈개경으로〉 돌아왔다.
현종이 즉위하자 〈황보유의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임명되었고,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승진하였으며,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고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에 중추원(中樞院)의 일직원(日直員)이 되었다.
경술년(1010)에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군비가 증액되니, 이로 말미암아 관리들의 녹봉이 부족하게 되었다. 황보유의가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함께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취해서 녹봉으로 충당하게 하니 무관들이 자못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상장군(上將軍) 최질(崔質)은 변방을 지킨 전공으로 여러 차례 무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문관이 될 수는 없었기에 평소 원망하다가 마침내 상장군 김훈(金訓)·박성(朴成)·이협(李協)·이상(李翔)·이섬(李暹)·석방현(石邦賢)·최가정(崔可貞)·공문(恭文)·임맹(林猛) 등과 함께 영업전을 빼앗겼다고 무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하여 여러 위(衛)의 군사들을 꾀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궁궐에 난입하였다. 〈그들은〉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결박하고 채찍으로 때려 거의 죽게 하였으며, 궐 안에 이르러 왕을 대면하고 하소연하여 말하기를, “황보유의 등이 우리들의 영업전을 점탈하였으니, 사실상 자신들의 이익을 꾀한 일이지 특별히 조정[公家]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발가락을 잘라서 신발에 맞춘다면, 몸체는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분노와 원한을 이기지 못하니, 요청하옵건대 나라를 좀먹는 자를 제거하셔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왕은 많은 사람들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여, 황보유의·장연우를 제명하고 귀양 보냈다.
후에 〈황보유의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전임되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으며, 참지정사(叅知政事) 왕가도(王可道)와 함께 개경(開京)의 나성(羅城)을 쌓았다. 중추사(中樞使)가 되었고 참지정사 이부상서(叅知政事 吏部尙書)를 역임하였으며,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호부사(內史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判戶部事)로 승진하였다가, 정종(靖宗) 2년(1036)에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전임되었으며, 〈정종〉 8년(1042)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