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향과 먹향을 벗삼아 法古創新하는 작가
-서산 권시환 선생의 작품세계-
논어 학이편 제1장에는 “배움이란 말은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善하나 이것을 앎에는 먼저하고 뒤에 함이 있으니, 뒤에 깨닫는 자는 반드시 선각자의 하는 바를 본받아야 선善을 밝게 알아서 그 처음을 회복[復初]할 수 있다”는 글귀가 있다. 이 속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있지만, 서산 권시환權時煥선생은 평생 동안 서예의 본령을 탐구하면서 자신을 경계하기 위하여 늘 복초復初’하려는 마음가짐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리하여 당호를 복초헌復初軒이라고 짓고 서예가들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금싸라기 같은 고전들을 중시하는 자세를 견지해 나가고 있다.
복초헌에 들어서면 은은한 먹향과 담백한 차향이 있고, 서가에는 명법첩들이 가득하다. 젊은시절 자료가 흔치 않았을 때 소장하고 싶은 책 몇 권을 구하기 위해 한 달 사용할 생계비를 몽땅 책구입비로 투자해서 모은 애정깃든 자료들이다. 이는 선생께서 마땅한 스승이 없어서 일찍부터 책속에서 법을 깨닫고 고전을 통해 서예의 정수를 발견해 왔기 때문이다. 일찍이 추사가 윤정현으로부터 <침계梣溪>라는 호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처음에 침梣자를 예서로 쓰려고 하였으나 고전에 그 글자가 없어서 30년이 지나도록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변방을 합하여 글자를 꾸민 사례가 수나라와 당나라에 들어오면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해서와 예서의 변과 방을 짜맞추어 겨우 완성시켰다는 고사처럼 선생 또한 함부로 지어쓰지 않고 고전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선생의 40년 가까운 서학역정을 처음 고전에 접하는 임고臨古의 시기, 고전을 자신의 렌즈로 바라보는 양오養吾의 시기, 고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개성을 추구해 나가는 창신創新의 시기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선생의 삶속에 녹아있는 한층 진한 먹향과 담백한 다향을 더 진솔하게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고전에 다가가는 임고臨古의 시기
선생의 서예입문은 어릴적 한문을 읽고 가르치던 가문의 전통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아직까지 명심보감의 구절을 줄줄 외우고 있으니 가학의 전통을 짐작할만 하다. 1963년 중학교 2학년 때 집안 이모부였던 효정 권혁택선생 앞에서 신문지에 글씨를 쓰기 시작하면서 서예가로서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동방연서회 책자를 구해 본격적으로 서예의 묘미에 빠져들어 갔다. 군대에서 제대한 1973년부터 서예에 관심이 깊었던 문종명씨 등의 서우들과 모여 서법에 대한 이론적 탐구를 하였다. 이 때만 해도 서예인들은 이론에 관심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서너 개의 서실만 있었고 여기에서는 대부분 선생의 글씨를 배우고 있었으며 체계적인 서예이론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여기에서 한걸음 나아가 더 깊은 연구를 하려는 젊은 서학도들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열악한 환경이었다. 선생은 청년서가들과 더불어 서론을 구해 윤독하고 이를 실제 실기에 대입하면서 실천해 나갔다. 이들이 경북청년서단과 대구서학회의 모체가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해결이 안 된 궁금한 것에 대해 전국의 대가들을 찾아 문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간단한 문제에 관해서도 속시원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여초 김응현선생을 만나 여러 가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집필과 운필에 대한 대답을 듣고 자신이 하고 있는 방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초선생을 사숙하면서 더 폭넓은 서론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서론대계를 구입하는 등 이론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1976년 동산동에 있는 원만사 주지스님이 젊은서예가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서실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아산서도회라 부른 서실에서는 밤과 낮이 따로 없었는데 당시의 열정적인 공부에 대해 제자인 송정택씨는 증언하고 있다. 이 때는 법첩이 귀하였는데 초기에는 안진경을 위주로 공부하였다. 경북도전 3회 때 <고신첩>을 임서하여 동상을 받을 정도로 안진경의 글씨에 재미를 느껴가던 중 지인으로부터 <고정비>와 <정희하비>를 구하여 본격적으로 <구성궁예천명>과 북위시대 해서들도 임서해 나갔다. 차츰 박섭博涉에서 전공傳工으로 철저한 임서를 해야겠다는 자각이 들어 74년경부터 임서하기 시작한 <구성궁예천명>을 하루 한번씩 완임해 나갔다. 방필方筆 속에 원필圓筆의 묘미가 있는 <구성궁예천명>의 점획의 특징과 결구의 완벽함에 반해 조석으로 임서하고 또 임서해 나갔다. 70년대 말까지 법첩이 3권이나 닳도록 수백번을 임서하였으니 얼마나 열심히 하였는지 짐작이 된다. 특히 장봉의 붓으로 엄정한 결구를 지닌 구양순의 해서를 서사하는 용필방법에 대해 실험을 거듭하였다. 안진경과는 다른 구양순의 전절을 익히기 위해 장봉으로 획속에 둥근 원필의 묘미를 구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쉽사리 해답이 보이지 않자 다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북위의 해서와 한대의 예서, 진대의 전서, 왕희지의 행초서를 익히는 박섭博涉으로 돌아갔다.
그러는 한편 서론강독을 통해 시야를 넓혀나갔다. 이런 결과 28회 국전에 구성궁예천명을 임서하여 입선하였다. 우리는 이 시기 구양순에 대한 공부의 흔적을 (도판 1)에서 느껴볼 수 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왕희지의 성교서와 난정서를 철저하게 임서하면서 장봉으로 해서와 행서를 임서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구성궁예천명과 성교서의 결구 및 전절이 상통함을 알았고, 한비와 북위시대 해서 속에서 구양순, 안진경의 글씨연원을 찾게 되었다. 이 때쯤 차츰 일본에서 법첩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하나씩 구득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구성궁예천명에서 왕희지의 행서로 임서의 축을 옮겨갔다. 행서를 공부하면서 비로소 오체五體가 융합된 행초서가 서예가들로부터 글씨의 꽃으로 불리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요컨대 20년이 넘는 이 시기는 일관되게 고전을 임서해 왔는데, 선생의 예술에 있어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는 시기였다.
고전을 바탕으로 개성을 키워가는 양오養吾의 시기
1988년 대백갤러리에서 가진 첫 개인전에서는 지금까지 밤낮으로 임서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자 한 자씩 법첩에 있는 문자를 집자하여 서고를 만들고, 이를 다시 소화하여 작품화한 전시였는데 그 속에는 선생특유의 개성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1994년 봉성갤러리에서 열린 2회 개인전에서는 활달한 운필과 자국이 큰 넉넉한 결구에서 보듯이 힘차고 독특한 선생의 개성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전의 전시가 고전에 더 무게를 두었다면, 이 전시를 통해 선생자신의 글씨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온 것으로 보여진다. (도판 2)에서 볼 수 있는 행서는 왕희지와 구양순과 안진경의 여러 요소들을 취사선택한 선생특유의 작품이다. 장봉의 붓맛이 그대로 종이위에 나타나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유를 갖게 한다. (도판 3)의 <갑골문>도 한껏 여유로워 보인다. 박섭의 결과를 여러 서체로 확인케 해 주고 있는 것이다. 1996년 봉성갤러리에서 열린 3회 개인전에서는 이러한 개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도판 4)의 문인화 <취죽>은 근원 김양동교수가 도록서문에서 눈을 부비게 하는 수작이라고 평하였듯이 거리낌없이 휘호하여 마치 댓잎소리가 들리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70년대 후반부터 틈틈이 연마해온 문인화 작품도 박섭의 결과물인 셈이다. (도판 5)의 <선시구>를 행초로 휘호한 작품에서는 보다 뚜렷한 개성이 엿보인다. 99년 기외묵림전에 출품한 (도판 6)의 금문에서는 장봉의 붓으로 휘호하여 색다른 멋을 풍겨준다.
이와 같이 이 시기 동안 선생의 작품세계는 필세가 표일하면서도 활동적인 굳건한 획질로 자유스러움을 보여주나 그 속에는 정교한 결구가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평소 두주를 사양하지 않고 즐겨하는 여유와 각고의 노력으로 고전을 임서한 결과물일 것이다. 삶과 예술이 일이관지의 정신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선생의 철학과도 부합된다. 이는 세속에 살면서 세속적인 것, 인위적인 것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 예술에 있어 노니는 것[遊]이라고 설파한 장자의 생각과 일치되는 것이다. 결국 이 시기는 작가가 고전을 바라보고 그 모습을 작품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여는 창신創新의 시기
최근에 선생의 작품은 또 한번의 커다란 변화가 온다. 지금까지 고전을 중시하면서 법고法古에 치중하였다면 2000년을 넘어서면서 창신을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일찍이 조자앙은 만년까지 오로지 이왕의 글씨만 임서하여 자기의 글씨가 이왕과 같게되었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씨를 논하는 사람들은 노서奴書라고 폄하하였다. 즉 그의 글씨속에는 자앙의 모습이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이란 자신의 개성을 표출시키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일 뿐 그 자체가 개성을 생산해 내지는 못한다. 서가에 있어서 창신이란 법을 자신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뚜렷이 드러내어야 하고, 독자적인 표준을 세워 독창성을 분명히 나타내어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선생의 작품속에서 창신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이러한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2001년 미협초대작가전에 출품한 <경봉선사시>(도판 7)에서 이전과는 다른 행초의 새로운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국내에서 행초로 이름을 크게 얻고 있는 선생의 독창적인 경지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2002년작 <백봉선사시>(도판 8)는 앞의 행초보다 훨씬 격정적이다. 2002년 기외묵림전에 발표한 <화국민강>(도판 9)은 예서에 행초의 운율을 섞어 움직이는 율동성을 보여준다. 2003년 미협초대작가전에 출품한 행초에서는 오체의 점획이 녹아있고 율동미가 어울려 넘실거리는 파도를 연상케 한다.
선생은 지금껏 지난한 서예마라톤을 떠나 반환점을 돌았고, 앞으로 자신만의 주법으로 결승선을 향해 나아가서 특유의 주법으로 완주해 나갈 것이다. 다시 어떻게 자신의 서체가 변할지 모른다는 선생은 청나라 부산傅山의 말을 빌려 현재의 심정을 대신한다. “차라리 졸拙할지언정 교巧하지말고 차라리 미울[醜]망정 예쁘게[媚] 하지말고, 차라리 무질서[支離] 할지언정 가볍고[輕] 매끄럽게[滑] 하지말고, 차라리 진솔眞率할지언정 꾸미지 말라”.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앞으로 선생이 지향해 나갈 작품의 방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선생은 법고를 통해 창신을 이루어야 하나의 획을 그을 수 있는 작가가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창작은 고전속에서 자신의 색깔로 우러내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과 성품을 작품에 투영시켜 나가려면 평소 생활이 늘 작품과 유리되지 않도록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철저한 임서와 정성을 다할 때 남도 감동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온다고 확신한다.
이제 이런 선생의 사상과 인품에 감명받은 40 여 명의 사람들이 ‘서사모-서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결성하여 선생을 후원하고 있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은법. 선생의 서예술이 잔잔하게 만방에 울릴 그날을 고대해 본다.
정태수 (이 글은 월간 서예문화 2003년 9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