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아시아는 중국 지역과 北方으로 연결되는 大陸의 一部와 韓半島, 日本列島로 구성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歷史像을 파악하고자 할 때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陸地爲主의 秩序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海洋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 일 양 지역을 둘러싼 지역은 오히려 해양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東海를 가운데 두고 한국와 일본, 러시아, 그리고 중국의 변방이 만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은 동아시아의 역사발전에서 海洋的 役割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복잡한 종족구성과 역학관계의 장 속에 있었다. 三國統一戰爭이 끝난 이후 국제질서가 전면적으로 再編되는 과정에서 발해는 주변국들과 力學關係를 조정하면서 나름대로 自己位置를 설정하고 보다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던 당시의 현실과 소강상태인 국면에서 외교와 경제의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이때 해양은 외교적 위치를 강화시키고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효용성 있는 수단이었다. 발해는 동해와 황해를 활동무대로 하면서 해양활동을 활발히 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이 있었고, 실제로 활발했었다.
그러므로 발해의 역사, 특히 日本을 비롯한 對外交涉에는 해양활동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이다. 對日外交의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힘은 바로 海洋能力에서 비롯되는 면이 많다. 그럼에도 발해의 해양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를 논할때 일본 측의 사료에 근거해서 마치 발해가 일본에 從屬的인 듯한 인식과 견해를 갖고 있다. 특히 발해의 대일본 교섭은 일본적 질서에 編入하기 위하여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루어졌다는 식의 견해도 있다.
본고는 이러한 인식과 견해를 수정하기 위하여 발해 해양활동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한다. 해양활동이 多目的의 포석을 배경으로 추진됬으며, 교섭하는 각 지역의 성격과 특성을 파악해서 발해사가 일본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기본자료를 제공할 예정이다. 또한 고대 역사에서 해양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가를 살펴보고, 그 행위의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발해의 해양활동 전반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1차적으로 해양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들, 예를 들면 航海術, 造船術, 航路 등 구체적인 능력을 검토 할 예정이다. 그러나 복원에 필요한 기록이나 유물 유적이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자료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단은 海流 바람(風) 自然地形 등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차용하여 개연성 및 가능성을 제시하고. 다음에는 그것을 殘存記錄과 역사적 상황에 적용하여 地域, 時期, 航路 등 실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동일한 海域內에서의 技術模倣, 經驗의 共有, 活潑한 交涉 등 해양문화의 일반적 특성을 적용하므로써 동일한 시대, 긴밀한 교섭을 가진 주변국의 해양관계기록과 유물들을 토대로 항해능력과 조선술 등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2. 自然條件 및 航海時期의 檢討
그러면 발해인들은 언제 출발했으며, 언제 도착했을까? 즉 그들의 航海時期는 어떠했을까?
항해 시기가 가진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고대의 항해는 자연조건의 영향을 받아 그 형태가 유사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발해사들의 항해시기를 분석하므로써 渤 日交涉의 패턴을 알 수 있다. 발해사들의 방일은 정치 외교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일본국내의 각종 정책을 결정하고, 권력의 역학관계를 조정하는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적극적이고 뛰어난 외교능력은 상대적으로 消極的이었던 일본에게는 대외정책을 수립하고 대외관계의 형태를 調整하는 소중한 資産이 되었을 것이다. 경제나 문화면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특히 교역으로서 일본사회에 끼치는 파장은 적지 않았다. 때문에 양국간의 교섭패턴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일은 당 시대인들의 최대 관심사였을 것이다. 우리는 발해를 알고, 양 국간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항해시기를 분석하여 교섭패턴을 추출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선결과제로서 항해와 밀접한 당시의 자연조건을 알고자 한다.
1) 自然條件(季節風과 海流)
727년 부터 929년까지 약 200여년 동안에 발해사가 일본에 온 것은 총 35회(마지막 1회는 東丹國 사자이다. 그 밖에 1 회는 민간교섭일 가능성이 많다.)이다. 그것을 시기와 횟수 장소의 특성 등을 토대로 유형화 시켜 분류하면 전기와 후기의 두 형태로 나눌수 있다. 전기는 727년 부터 818년(18차 항해) 까지이고,후기는 819년부터 919년(34차) 까지이다.
이하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선 발해사들관 관련된 도표를 제시한다.
발해사 도표
위 도표를 보면 몇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시대 별로 항해시기에 차이가 있다. 또한 도착장소도 시대와 항해시기에 따라 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들은 산발적이고,불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집중현상을 보이며, 규칙적이어서 유형화되어 있다.
전기에는 발해사가 訪日하고, 일본사가 귀국하여 도착한 가운데 절대 다수는 10월 이전이다. 이때 도착한 지점은 대개 越後인 出羽, 중부인 北陸지방과 越 등지이다. 후기에는 12월과 1월이 압도적이다. 도착하는 지점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能登 加賀 등 북륙지방은 전기와 마찬가지로 골고루 있지만, 북쪽의 出羽지방 대신 남쪽의 山陰지방인 隱岐 出雲 但馬 伯耆와 若狹 長門 등으로 도착한다. 그런데 항해과정을 살펴보면 전기에는 해난사고가 비교적 많고, 후기는 비교적 안전하다.
왜 이러한 시대적 특징이 나타나는 것일까?
고대에 해양교섭은 육로에 비하여 자연조건, 즉 항해조건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다. 물론 정치 외교 등 역사적인 환경이 중요하고 절대적인 경우도 있으나 항해환경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큰 因子는 바람과 해류이다.
<季節風>
해류와 함께 양 지역간의 교섭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조류와 바람이다. 특히 동아시아 해역의 바람은 계절에 따라 일정한 方向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해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潮流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지만 동해는 황해나 남해에 비하여 미미하다. 동아시아는 계절풍으로 인하여 해류의 방향이 영향을 받는다.
자료 1 季節風圖 에서 보듯이 여름에는 風力이 약하고 남풍계열의 바람이 분다. 동남풍은 4월 중순에 시작하여, 8월에 들어서면 제일 강성하며, 9월 이후에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서북풍이 主風인 북풍계열의 바람은 9월 하순부터 시작하여 11월에 최강이 되고, 다음해 3월까지 계속된다.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집약한 여러가지 자료는 삼국시대의 對外使行이 계절풍과 해류의 영향받으며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백제와 중국과의 관계 新羅와 倭의 관계는 물론이고 이러한 현상은 신라와 일본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신라에서 일본으로 갈 때, 10월에서 3월까지의 6개월 동안에는 40번,그 나머지는 21번이다. 특히 650년 부터 700년 경은 입국시기가 거의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집중되고 있다. 북풍계열의 겨울 계절풍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일본에서 신라로 향하는 경우에는 역시 봄에서 초여름, 가을에 걸쳐 있다. 남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일본과 당의 관계는 더욱 살펴 볼 필요가 있다. 遣唐史들은 대개 여름에 일본을 출발하여 당으로 항해하고 있다. 7월 하순에서 8월 하순은 동중국해의 기상이 비교적 안정되고, 때때로 태풍이 불어오면서 바람의 방향에 교란이 생기지만 보통은 남동 내지 남풍계열의 바람이 분다. 귀국할 때는 가을부터 초겨울에 걸쳐서 9월에 북동풍을 이용하였다. 당의 상인들도 6월,7월에 江蘇省 安徽省 浙江省 등을 출발하여 일본열도에 왔다.
동시대에 圓仁이 신라배를 이용하여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황해중부를 횡단하는 모습이 나온다. 唐 開成 4년 839년조 4월 2일에는 신라 관내로 들어갈 수 없다. 서풍, 서북풍이 불면 큰일이다라고 하면서 적지로 들어가는데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다. 4월 17일에는 登州 근처에서 동쪽으로 가면 신라가 있다. 바람만 좋으면 2~ 3일만에 도착할 수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高句麗人인들은 주로 겨울철에 동해연안을 내려오는 南流에 편승하여 沿岸水의 영향, 地域潮流의 도움을 받아서 北東系列의 바람을 활용하면서 항해를 한다. 돌아올 때는 반대가 된다. 渤海航路는 특히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후술하겠지만 近海航海 및 遠洋航海를 주로 한데다가 해류의 기본 방향은 항해하는데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다. 출발지도 한계가 있었고, 航海區域도 고구려보다 더 제한적이어서 바람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남향하는 한류를 타야하지만 무엇보다도 북풍 내지 북서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자료 (2)<발해사 항해시기 도표>를 보면 발해인들은 일본에 갈 때는 늦가을부터 초봄에 걸쳐 부는 북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하였다. 동해의 계절풍은 북서-북-북동으로서 발해사가 방일하는 데는 거의 순풍이다. 歸還할 때에는 늦봄부터 여름에 걸쳐 부는 남서풍계열을 이용하였다.
초기교섭은 8월이었으나, 700년대에서 800년대에는 10월에 10번, 11월에 8번,11월 하순이 1번, 음력 12월이 4번 등이다. 7월에 1회와 8월에 2회의 예가 있을 뿐 4,5,6,9월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점차로 12월과 1월이 많아진다. 이로 볼 때 발해인들은 일본열도로 항해할 때 음력 10월에서 1월 사이, 즉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서 계절풍을 의식적으로 이용을 했다.
더우기 36번 가운데 과반수 정도가 10,11월에 집중된 것은 겨울 계절풍이 강해지지 않는 中秋에서 晩秋를 선택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10월 중순에 5번이나 있는 것은 겨울 계절풍이 불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계절풍의 시기와 발해사가 동해를 건너는 시기는 분명히 일치하고 있다. 반대로 여름의 계절풍은 남서로서 발해사가 歸航하기에는 順風이다. 때문에 발해사가 귀국할 때 出京과 出國은 전부 3월에서 8월에 집중되어 있고 9월에서 1월에는 1번도 없다. 즉 봄 부터 여름의 남 또는 남서의 계절풍을 이용했다.
실제로 발해인들은 스스로도 바람을 활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842년에 발해대사인 賀福延 편에 발해의 中臺省에서 보낸 牒文에는 바람을 점치고 때를 기다려 출항한다는 내용이 있다.
<海 流>
계절풍 다음으로 항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해류이다.
동아시아의 해양은 쿠로시오(黑潮)의 범위대에 속한다. 쿠로시오는 중국연안에서 일본전역에 걸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 外海에서 북태평양을 東方으로 흘러가는 暖流系의 해류이다. 대한난류는 對馬島를 가운데에 두고 東水道와 西水道로 나뉘어진다. 서수도를 통과한 해류는 북북동으로 1노트 미만의 속력으로 흘러 올라간다.
자료 (3) <동아시아 海流圖 > 참조
동수도를 통과한 해류는 북동방향으로 흐르면서 일본서안을 끼고 올라간다. 이 해류의 流速은 계절과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평균 1kn 내외이며 물의 방향은 항상 북동으로 향하고 있다. 한편 回流는 리만해류가 연해주의 연안을 통과해서 한반도 동안에 접근해서 남하하고, 서남쪽에서 북상해온 대한난류와 동해의 중남부 해상에서 만나 원산의 外海와 鬱陵島 부근에 이르러 그 일부는 방향을 동으로 움직여 횡단하다가 올라간다. 能登半島의 외해에서 대마해류의 주류와 합류한다. 한반도의 동남부를 출발하면 산음지방의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 한편 중국연안을 남하하는 해류는 발해 및 북해북부에서 기원하며 중국대륙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중국해 방면으로 사라지는데 동계에는 수온이 낮다. 황해, 동중국해의 해류는 바람의 영향, 중국대륙으로부터 하천수의 유입량의 변화 등에 의하여 변화가 많다.
이렇게 항해 시기를 살펴보고, 계절풍 및 해류 등 동해의 자연조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결국 수치나 시실로 볼 때 이 양자 간에는 밀접한 함수관계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면 왜 어떻게 관련이 있을까?
2)航海時期의 檢討
발해사신들의 교섭과정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후기인 9세기에 들어오면 사신선들은 왜 전 시기보다 늦은 1,2월에 출발하는 것일까? 또,왜 남쪽으로 도착하는 것일까?
1월, 2월에 출발했기 때문에 남쪽에 도착한 것일까? 아니면 남쪽에 도착할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1월, 2월에 출발한 것일까? 즉 자연조건이 먼저인가, 아니면 목적의 실현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가? 어느 것이 먼저인가는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 다만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필자의 견해를 언급하고자 한다.
11월 부터 2월까지는 발해의 북부지방 어디에서 출발한다해도 일본열도 내의 어느지역에건 도착할 수 있다. 설사 예정 지역과 멀리 떨어진 곳에 漂着한다 해도 일단 近海圈에 진입하면 근해항해 혹은 연안항해를 실행해서 목적지까지 항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구분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왜일까?
일단 몇가지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전기에 동북지방에만 도착하는 이유는 新羅와의 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8세기 경에 신라와 발해는 전쟁을 모색하는 정도로까지 매우 긴장된 관계에 있었다. 일본도 신라와 전쟁을 준비하면서 발해와 정치 군사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발해로서는 고구려 처럼 보다 남쪽으로 내려와 출발하여 동해중부를 사단해서 비교적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越이나 山陰지방에 도착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동해북부를 출발하여 동북지방인 出羽 등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상황을 상정해본다.
越中 이북의 지방은 고구려인들이 도착하던 지역이다. 道君과 江沼의 갈등에서 보여지듯 고구려와는 정치 교역의 측면에서 緣故權이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이 지역으로 유민들이 組織的이거나 自然發生的으로 건너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더구나 당시 동북지방은 야마도 조정의 지배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지역이다. 발해의 대신라 정책과 실천의지를 고려할 때 발해와 이 지역 세력간의 특별한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더구나 초기 遣渤海使들 가운데 高麗朝臣老麻呂( 758년의 3차 사절) 高麗朝臣大山(761년의 5차사절) 등 高麗氏들이 파견된 것은 발해와 고구려 유민세력들간의 관계가 필요한 상황이 조성됬을 가능성을 보인다.
두번째로, 후대에 이르러 산음 등 남쪽지역에 도착하는 이유는 9세기 경의 東亞政勢, 특히 일본의 對新羅, 對唐關係에서 비롯됬을 가능성이다. 9세기에 이르면 신라와의 관계가 매우 험악해진다. 견신라사도 836년을 끝으로 더 이상 보내지 않았으며, 신라사 역시 8 세기에 들어오면 받아들이지 않고 放還시켰다. 그나마 9세기 들어오면 없다고 봐야 할 정도다. 842년에 大宰大武藤原衛는 신라인의 입국을 일체금지하는 것을 상주하여, 정부는 상인. 표류자의 특례를 제외하고 이것을 받아들였다. 견당사의 파견도 838(承和 5)으로서 사실상 정지되어 버렸다. 이 후 이렇게해서 일본은 당, 신라와의 국교를 끊고 발해와만 국교를 계속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일본정부는 이로 인한 외교상의 공백을 발해를 통해서 보완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고대의 교섭은 교역 등 경제 문화의 수입을 동반하였으므로 신라 당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실은 대재부를 중심으로 한 남쪽 지역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반면에 발해로서는 이러한 공백상태를 최대한 활용했을 것이다. 특히 교역의 측면에서 활동범위를 남쪽으로 넓히고,신라 당의 상인들을 직접 만나서 보다 국제적인 교역행위를 추진했다.
신라의 私貿易船이 들어오고 814년에는 長門國에 신라상인 31명이 표착하였다. 그런데 발해사들은 9월 하순에 장문국 바로 위인 出雲에 도착하였다. 무엇인가 가능성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張寶高 (保皐)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에도 역시 발해선과 대규모의 사절단들이 장문국에 도착한다. 819년에는 당의 越人인 周光翰이 발해선을 타고 귀국하기도 한다.
세번째, 후대에 들어서면서 출발하는 시기가 늦어지는 사실과의 관련성이다.
체류기간과 관련이 깊은 것 같다. 계절풍과 해류의 흐름, 해상상태를 감안할 때 山陰지역에 도착할 경우에는 동해를 縱斷하면서 강한 북풍을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항로는 다음 장에서 상술 예정) 그래서 12월이나 1월에 발해의 어느항구를 출발해서 동해를 건너온 것이다. 그런데 8 세기 중엽에 이르면 출발일은 대략 1~ 2달씩 늦춰지는 데 반하여 귀국일은 거의 음력 5월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발해 내부의 사정과 함께 일본 내부에서의 반발을 감안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필자는 이러한 몇가지 이유에서 9세기에는 발해사들이 남쪽으로 도착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조건과 상황이 교섭의 형태를 결정진슨 중요한 요인만은 아니다. 특히 동해를 매개로 한 교섭이므로 자연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결국 양국 간에 발생하는 역사적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조건, 특히 계절풍의 활용이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인들은 자연조건을 숙지한 다음에 최대한 활용하여 국익을 추구할 수 있는 형태를 결정하였다.
3.航海術과 造船術
1) 航海術
항해의 종류에는 沿岸航海, 近海航海, 遠洋航海가 있다. 인류의 역사 이래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항해는 바닷가를 따라 비교적 안전성을 확보하면서 이루어지는 연안항해이다.
근해항해는 연안항해와는 달리 육지와 일정하게 떨어져 항해하므로 해안의 환경보다는 해양자체의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이를테면 潮流나 陸地風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는다. 특히 육지를 관찰할 수 있어서 선박의 위치와 목표는 물론, 보다 효율적인 航路의 선택 까지 가능하다. 그러므로 고대항해, 특히 안전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외교 군사적인 항해에 많이 활용되었다.
황해는 거리가 짧은 內海, 地中海로서의 성격이 있으므로 대부분 地文航法을 활용한 근해항해는 큰 난관이 없었을 것이다. 필자가 황해 내부에서의 자연조건들을 토대로 계산해낸 결과에 의하면 양 지역간의 대부분 해역에서는 근해항해가 가능하였다.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등은 중국 일본지역과 교섭을 할 때 주로 근해항해를 활용하였다. 반면에 일본열도의 경우는 중국지역과 교섭하고자 할 때 근해항해로 만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야마도시대에는 백제 등의 도움을 받아 근해항해를 활용하면서 황해를 건너갔다. 이것이 양국의 政治力學關係에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원양항해는 중간에 陸地나 物標 등이 없이 대양의 한 가운데를 항해하는 것이다. 이때는 불가피하게 地文航法이 아닌 천체나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기구를 사용하거나 오랜 관찰, 경험 등을 토대로 목표지 및 선박의 위치와 항로를 측정하는 天文航法을 사용해야만 한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황해와 동해를 사이에 두고 각지역 간의 교섭 흔적이 수천년 전부터 나타나는 것은 최소한 원양항해가 이루어졌음을 입증한다. 해양민들은 경험과 직관력 외에도 물빛, 바람의 방향과 냄새, 하늘의 태양이나 별자리 등의 세밀한 관찰을 통해서 항로를 잡아가는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방법 외에도 과학지식과 기구를 이용한 항해, 즉 天文航法을 이용한 大洋航海가 이루어졌다. 중국지역은 兩晋과 南北朝 시대에 이르면 天文觀測이 활발하여 天文航海 技術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천문도, 고분벽화, 유물들은 天文學 발달이 대단한 수준임을 알려준다 최근 평양에서 발견된 2000년 전 경으로 추정되는 나무곽 무덤에서 나온 方位觀測器는 천체의 별자리를 통해서 방위를 관측하도록 만든 것이다. 최근에 아스까의 키도라 고분에서 발견된 星宿圖는 당시 천문학 매우 발전했음을 알려준다. 天文學의 발전을 실생활이나 軍事·外交·航海 등 海洋活動에도 활용했을 것이다.
한편 天文航法은 항로를 결정하는데 필요한 방향표시기와 海圖가 있어야 한다. 指南의 사용은 이미 漢武帝 때에 사신들의 航艇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三國에서 南北朝時代에 이르면 史籍·文獻 중에 기록이 다수 나타난다. 그런데 {三國史記}에는 文武王 9년에 당나라의 승려인 法安이 신라에서 자석을 구했고, 그해 5월에는 級 祇珍山 등을 唐에 보내어 磁石 2상자를 받쳤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러한 기사는 자석의 용도로 보아 나침반으로 사용됐고, 신라 역시 항해에 나침판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倭도 나침판을 사용한듯한 기록이 나온다. 이런 사실로 보아 고구려는 일찍부터 指南車를 사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고분에서 발견되고 일본신화에 등장하는 三鍾神器 가운데서 銅鏡은 방향을 판정하며 항해에 이용했다는 견해와 방법론도 제기되고 있다. 海圖는 중국의 경우에 兩晉時代부터 사용했다.
원양항해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8~ 9세기 경에 견당사를 파견하였는데 신라와 비우호적 또는 적대적인 관계이었기 때문에 백제를 흡수한 신라의 해역을 통과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원양항해를 할 수 밖에 없는 소위 南路 혹은 南道를 자주 활용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매우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전체 15번을 통하여 소위 남로를 활용하여 往復航海에 성공한 것은 제13차 사절단 한 차례 밖에 없었다. 그만큼 원양항해는 매우 위험하고 성공의 확률이 적었다. 동해에서도 연안항해및 근해항해가 활용되었으나 일본열도와의 교섭은 자연조건 상 원양항해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발해는 고구려와 말갈인들의 동해 횡단능력과 경험을 토대로 건국 후부터 원양항해를 하면서 일본정부와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발해인들의 항해능력은 어느정도 수준이었을까?
초기에 발해선들이 동북지방에 도착한 사실은 항해지식 때문이며 중국 동북지방의 산중에서 성립했으므로 일본해를 횡단하는 항해술을 갖지못했다. 항해술을 획득한 것은 읍루 이래의 전통적인 항해술을 가진 러시아 연해주의 拂捏이나 越喜 등의 말갈족을 영향하에 두었던 8세기 전반이었다. 때문에 월후 이북에 도착한 발해선이 8세기 대에 한정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결국 항해기술자는 말갈이었고 발해는 말갈의 도움으로 왔다고 하였다.
필자는 고구려가 일본열도에 진출한 시기를 5세기 초의 광개토대왕 시대일 가능성을 수차 언급한 바 있다. 물론 그것은 산음지방 내지 큐슈 북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해양문화의 한 특성인 非組織性, 無政府性 등으로 인하여 민간인들에 의한 移住와 교역이 전 해역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많다. 최소한도 欽明 31년의 고구려사 도착은 동해 한가운데를 횡단한 원양항해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후 고구려인들은 수십차례에 걸쳐 越 및 기타 지방으로 도착하였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므로 최소한도 국가의 인적 구성원, 문화, 영토 등을 수용했으며 당연히 해양정보를 비롯한 해양활동능력 또한 답습하였을 것이다. 거기다가 말갈의 여러부족을 통치하므로써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였던 기존 해양민들의 능력마져 흡수하였으므로 고구려에 비해서 발달했을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초기의 발해선들이 고구려가 도착하던 월 지방이 아닌 그 이북인 것을 두고 말갈의 영향을 강조하는 것 같다. 필자는 그것은 정치적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생각한다. 고구려는 전성시대에 동해남부 지역까지 영토화 혹은 영역화하였다. 때문에 대일교섭의 출발지가 동해남부였을 것이고, 따라서 航路와 到着地 또한 신라인들의 그것과 유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6세기 들어서면 정치 상황의 변동으로 인하여 동해중부지역에서 원양으로 나갔기 때문에 도착지가 越 등이었다.
반면에 발해는 최남단 영토가 함경남도 德原(물론 여러 설이 있다.)이었고, 신라와 정치 군사적으로 팽팽한 긴장상태에 있었다. 때문에 근해항해를 통해서 동해중부 까지 내려갔다가 원양으로 나가는 출발형태는 외교사절로서는 위험도가 높은 항로였다. 당연히 자연조건은 부담되더라도 정치적 위험이 덜한 동해북부를 출발해서 막바로 원양으로 나가는 항해를 택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 도착 지역은 바로 出羽 등 동북지방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발해선들이 출우에 도착하는 것은 발해인들의 항해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발해와 일본의 항해능력을 몇가지 면에서 비교할 수 있다. 물론 이 방법은 실제 경험이나 기록 유물 등 구체적인 것을 근거로 비교한 것은 아니지만 상황을 통해서 상대적인 비교는 가능하다.
황해와 동해의 항해환경은 많은 차이가 있다. 일본의 견당선들이 활동했던 황해는 內海 혹은 地中海的 성격을 갖고 있다. 양 육지간의 거리가 짧아 대부분이 근해항해지역에 해당한다. 파도가 약하고 리아스식 해안이 많아 유사시 대피할 항구가 많다. 항해에 이용되는 계절풍의 편중성이 덜하다. 특히 유리한 것은 일본열도에서 중국지역으로 갈 때 남동풍을 이용하므로서 봄에서 여름철에 항해를 한다. 정치적으로도 중국은 안정되어 견당사들이 邊方에 도착하거나 풍랑을 만나 표류를 하여도 불의의 사고를 당할 위험성이 적다. 반면에 발해사들이 활동한 동해의 항해환경은 차이가 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양 지역간에는 반드시 원양항해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불리한 동해의 항해환경을 알기 위하여 하나의 방법, 즉 시인거리를 추정하여 원양항해의 범위를 찾아내는 방법을 도입하고자 한다. .
동해에서의 근해항해 가능성을 自然條件과 구체적인 航海技術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추적해본다. 먼저 自然條件, 특히 양 지역간의 거리를 계산하여 항해자들이 地文航法을 사용해서 항해할 수 있는 범위를 일단 설정한다. 이를 위하여 우선 1차적으로 한반도와 일본, 중국, 러시아, 즉 동해 및 타타르 해협 일대에서 양 지역간에 항해의 깃점이 될 수 있는 몇개의 지점을 선정하였다. 물론 이 지점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港口나 航路의 깃점으로 이용됐던 곳이며, 기록에 남아있고,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그런 다음 각 지점을 서로 연결하여 떨어진 거리를 계산한다. 그 다음에는 선택한 지점을 바다에서 認知할 수 있는 最長距離를 계산한다. 그러면 陸地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서 항해할 수 있는 지점이 나온다. 이런 방법으로 모든 각개의 지점을 연결하면 동해내부를 둘러싼 하나의 타원형선이 나타난다. 이 선의 안쪽은 이른바 육지를 보지못하면서 항해할 수 밖에 없는 구역이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航海術이 발달하지 못해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항해할 수 있는 구역과 그렇지 못한 구역의 분명한 구분이 생긴다.
視認距離
K(해리) = 2.078(√H +√h )
** H = 목표물의 최고 높이
h = 관측자의 眼高(10m) **계산 방식
東海 沿岸 각 지점의 視認距離( 위 계산 방식으로 산출)
위 도표는 해당지역 근처에서 가장 높고 가능한한 해안에서 가까운 산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근해항해 및 원양항해를 하는 범위의 윤곽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계산과 도표 그리고 예를 든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면 다음과 같다.
자료 (4) <近海航路 가능범위도>를 참조하여야 한다.
동해 어느지역에서든 陸地를 보면서 자기위치를 확인하고 항해를 할 수 있는 지역은 A 부분이 된다. 그리고 자기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한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지역은 B 부분이 된다. 이 부분이 차지하는 범위는 황해에 비하여 매우 광범위하다 이처럼 동해는 황해와 달리 地文航法을 활용한 近海航海와 함께 원양항해를 병행해야 한다. 발해사들은 원양항해를 하면서 일본열도로 갔다.
원양행해를 하기 위해서는 천문항법을 숙지하여야 한다. 발해선에는 天文生이 타고 있었던 사실로 보아 천문항법을 활용했음을 알수 있다.,
거기다가 발해사들이 일본열도로 항해하는 계절은 반드시 늦가을에서 겨울, 즉 북서풍이 부는 계절이어야 한다. 얼음이 얼 정도의 낮은 수온과 거센 겨울의 북서풍, 그것이 일으키는 높은 파도를 맞으며 항해하여야 한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황해와 동중국해를 사용하여 실제로 항해한 遣唐使船들은 총 15차였었는데 北路를 제외한 南路 南道를 사용한 경우에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남로는 往復 모두 무사한 때가 13차 견당사때 단 1회 뿐이었다. 때때로 일본인들이 발해 사신선의 귀국배에 탑승하여 당과 교섭한 사실은 1차적으로는 신라와의 불편한 관계라는 정치적인 동기가 있었지만 그 외에 遠洋航海의 어려움을 발해사들의 도움으로 부족함을 메꾸려는 목적도 있었다.
더욱이 초기의 발해선이 일본열도에 도착할 시대에는 동북지방이 정치적으로 안정이 안된 상태이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예를 들면 796년에 大使 李元泰가 탄 배는 표류하여 蝦夷 땅에 도착하였다가 65인 가운데서 蝦夷들에게 12명이 죽고 41명만 살아남았다.발해인들은 그 험난한 겨울바다애 기술적으로 어려운 원양항해를 하면서 그것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일본의 변방에 상륙한 것이다. 일본의 견당사들이 이렇게 실패한 과정을 볼 때 상대적으로 보다 악조건속에서도 성공적인 항해를 한 발해인들의 항해능력이 뛰어났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2)造船術.
그러면 당시 발해인들의 조선술은 어느정도 수준이었을까?
해양문화의 不保存性으로 인하여 유물 유적이 남아있지 않고, 자체의 기록마져 불실한 상태에서 고대의 조선술을 복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해양문화의 특성인 모방성을 근거로 동일한 시대, 동아시아 지역의 해상수준을 통해서 그 범위와 윤곽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아시아권에서 범선을 사용한 예는 갑골문자에서 나타나고 있고,鼎에는 帆이 그려져 있다. 法顯의 {佛國記}에는 바람을 항해에 활용한 기록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6개월 정도의 장기항해용 선박을 제조할 수가 있었다. 越絶書에 의하면 大翼이란 군선은 길이가 120尺 (1척은 약 23cm) 폭이 1丈6尺 총승무원은 91인으로서 그 가운데 전사 26인 櫂卒(노꾼)이 50인, 에 3인이 있었다. 魏가 나라를 세운 후에 王浚에게 명하여 큰 배를 운반하게 하였는데 길이가 120步, 수송인원은 2000여명에 달했다. 배위에 나무로 성을 만들고 樓閣을 일으켰다고 한다.
삼국시대와 유사한 시대의 일본열도에는 당시 선박의 형태와 규모, 그리고 조선술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있다. 사이도바루(西都原古墳)고분에서 나온 船型埴輪이 비교적 유사한 시기의 것이고, 그 외 珍敷塚,日の岡塚 등 6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裝飾古墳에서는 배그림들이 나타나고 있다.
후에 고구려,발해인들이 도착한 지역인 후꾸이현에서는 선박과 관련된 유물이 있다. 大石유적에서 출토된 銅鐸에는 배그림(線刻畵)이 있는데 중간에는 마스트가 있고, 櫂가 兩舷 합해서 18~20정으로 보여진다. 거의 全長이 15미터에 달하는 대형선으로 여겨진다. 역시 후꾸이현의 坂井郡 春江町의 井向유적에서도 동탁의 배그림 線刻畵가 있는데, 한쪽 현에 9개의 櫂가 묘사되어 있어 최소한 18인이 조정하는 배임을 알수 있다. 전장은 14미터로 추정된다. 이시가와(石川)현의 黑氏유적에서도 舟形의 木器가 나왔다.
그런데 한민족의 일본열도 진출은 조선술의 발달을 빼놓고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東征繪傳繪卷}에 그려진 造船 풍경을 보면 고대의 百濟 新羅인들이 조선을 지도하는 것이 보인다. 특히 6세기 중반 이후에 오면 일본은 造船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일본은 이후에도 백제선을 만드는 등 우리의 조선술의 영향을 받았다. 선박에서 사용된 항해도구로서는 {古事記}에 나오는 天日茅의 신화를 항해와 관련시킨 茂在寅南의 해석이 고대인의 항해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高句麗人들의 造船術은 역시 발달했을 것이다. 杜佑의 {通典}에는 馬 水를 설명하면서 고구려에 大船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長壽王은 강남에 있었던 송나라에게 말 800필을 보냈다. 이 때 우수한 능력을 갖춘 대규모의 船團이 이동했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의 조선능력은 일본서기에 나타난 선박 및 사신들의 규모를 통해서 짐작할수 있다. 656년 제명 2년에 도착한 고구려 사신은 총 81인이었다. 660년인 齊明 6년에는 사신인 乙相賀取文 등 100여인이 築紫에 도착하였다. 그러니까 한 배에 약 50여명 씩 타고 있었을것으로 추정한다. 발해는 고구려의 이러한 능력을 전수 받았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조선술이 매우 뛰어났다. 752년에는 東大寺에서 大佛을 개안할 때 신라에서 축하사신과 상인들이 대거 일본에 갔는데, 그때 700명이 7척의 배를 타고 갔다. 평균 1척당 100명이 승선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배의 우수성은 조정에서도 분명하게 인식하였고, 국가적으로 건조했었다. 839년에는 대재부에 명하여 新羅船를 만들어 능히 풍파를 감당할수 게 하라.라는기록이 나온다. 역시 같은 무렵인 840년에 대마도의 관리가 신라배의 우수성을 말하고 대재부가 가진 신라배 6척 중에서 1척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정이 신라배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국내 뿐 만 아니라 대외교섭에도 신라배를 활용하였다.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在唐新羅人들의 조선술은 이미 중국에서 알려져 있다. 839년 일본의 견당사선이 귀국할 때에는 楚州의 신라배 9척을 얻어타고 왔었다. 승려 등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圓仁이 타고 귀국한 신라배가 현재 히에이산의 明德院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쌍돛대에 활대가 9개,사각돛과 누각이 있었는데, 돛을 물레를 이용하여 조정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 하듯 당시 원인은 자신이 타고온 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예를들면 6월 6일은 돌을 매단 닻을 올리고, 돛폭을 가지런히 하였으며, 또 6월 23일에는 닻돌(碇) 돛대( ) 등 등 선박에 대한 표현이 있다.
발해와 동시대의 일본 견당사선들은 대체로 4척 정도가 1개 선단을 이루었는데 1척당 100명에서 150명 남짓 타고 있었다. 그 크기는 추정할 수 밖에 없는데 전장은 20 여미터,폭은 7미터 전후이고, 크기는 총 톤수로서 백 수십톤 정도로 추정한다
발해는 고구려의 조선능력을 계승하였으며, 물론 말갈인들의 조선능력도 흡수하였을 것이다. 등주공격에서 보듯이 거대한 군선을 보유하였다. 해양문화는 모방성이 강하다. 특히 서로에게 선박을 건조해 주는 여러사례로 보아 동아시아 각국 간의 조선술에는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통일신라와 비슷한 정도의 조선술과 해양능력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발해의 조선술에 대하여 회의적이고, 오히려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발해사신들은 귀국할 즈음에 일본에 선박증여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 777년에는 배를 만들어 사신을 본국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2년 후인 779년에는 일본 사신인 高麗朝臣殿嗣 등을 위해 배 2척을 만들고 張仙壽 등을 보냈다. 또한 그 해 12월에는 校渤海人使가 발해의 사신 高洋粥을 위해 배 9척을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발해선들이 타고 온 선박은 초기에는 20명 전후가 승선한 소선이었는데, 후기인 9세기에 들어가면서 비로서 100명이 넘는 사절을 승선시킨 큰 선박을 정기적으로 파견한다.
이러한 몇가지 상황을 놓고 이는 일본이 준 배를 가지고 기술혁신을 거쳐서 가능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열도의 조선술은 한반도에서 건너왔으며, 이 당시도 일본인들은 新羅船을 건조하고, 신라선을 이용하여 당나라와 교섭을 하였다. 茂在寅男을 비롯하여 일인들은 遣唐使船의 우수함을 열거하고 있으나 그 한계는 필자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문제가 많다. 또한 이러한 견해는 海洋環境과 造船術의 상관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이 발해에게 조선기술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살펴보자.
동해의 겨울 荒天航海를 수행한 발해의 선박이 출발할 당시와 똑같이 온전할 리는 없다. 더구나 도착한 발해선들은 장기간동안 沿岸航海 내지 近海航海를 통해서 수도권 내지 九州까지 접근해야 한다. 또한 귀국하기 까지의 수개월 이상을 물에 띄어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필수적으로 수리가 필요하고 때로는 解體와 復原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파손이 심하거나 보존상태에 문제가 있는 심각한 경우에는 다시 건조해야 한다. 이것은 원양항해의 경우에 당연히 거쳐야 할 단계이다. 그래서 하나의 바다를 둘러싼 海洋民들 간에는 技術의 模倣과 移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발해인들은 일본열도에서 선박을 수리 또는 건조해야 한다.
그런데 지적할 것은 일본인들은 당시 동해의 겨울바다는 물론 여름바다를 건너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가 동해를 직항하여 越 등 지역에 들어올 때에도 왜는 고구려에 갈 수가 없었다. 7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서 연안항해를 통해서 오늘의 동북지방에 있는 蝦夷를 공격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동해를 건너기에 적합한 배를 건조하는 데에는 기술적으로 한계가 있다. 일본의 기록에 나타난 선박의 建造 내지 贈與한다는 기사는 오히려 발해인들의 技術指導와 技術移轉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최종의 출발 항구인 能登半島의 福良에 造船所가 있었던 사실은 기존의 선박을 수리하는 작업과 함께 새로운 배의 건조가 때로는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필자는 1998년 7월 초 복량을 답사하였다. 현재 조선소는 2개가 있는데 하나는 현대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발해사들은 왜 적은 배를 사용했을까?
실제로 발해선들은 승선인원이 적다. 특히 1차항해를 비롯한 초기에는 使臣團이라는 일반적인 기준에 못미치는 소수의 사람만이 타고 왔었다. 당시 견당사선의 크기와 탑승인원에 비해서도 발해선은 적다. 그래서 조선술의 미숙함 때문이라고 지적당한다.
발해선의 규모가 적은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정치적인 상황을 지적하고 싶다.
8세기 전반에는 발해가 아직 안정기에 들어서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신라와의 관계가 매우 적대적이어서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기존항로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일본항해가 끝난 후 이미 60여 년이 지났으므로 항로는 물론 동해의 해상상태와 항해환경, 항해술, 조선술 등에 익숙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일본열도에 도착한 후의 상황도 매우 불투명하고, 위험부담도 컸을 것이다. 특히 첫사신인 高齊德 일행이 蝦夷人들에 의하여 다수가 희생당한 사실은 대규모의 교섭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으므로 사신단은 위험부담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소규모의 선박으로 선단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러나 점차 정치적인 환경이 개선되고, 항로가 개척되면서 선박도 대형화되고, 사신단의 규모도 커지게 된 것이다. 전 기간을 통해서 볼 때 발해사신선들은 대체로 5척으로 船團을 이루고 있었다.
두번째로 자연환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견당사선이 크고, 설사 효율적이라고 하여도 ( 물론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동해는 황해와는 여러 면에서 항해조건이 다르다. 겨울철의 동해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 황천항해일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機動性이 약하고 무거운 대형선박인 것 보다는 작고 빠른 배가 효용성이 클 수 있다. 또한 선박이 작은 것은 조선재료의 한계도 있다. 796년에 발해왕이 보낸 국서에는 선박조선용의 큰 나무는 토질때문에 자라기 어려워 부득이 작은 배를 띄운다고 되어있다. 亞寒帶지방이므로 침엽수들이었고, 때문에 나무가 단단한 반면 浮力이나 크기에는 제한이 있었을 것이다.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발해선의 구조와 성격을 자연조건에 비추어 몇가지 특성을 추론해보고자 한다.
첫째, 능파성이 좋아서 험하고 높은 파도를 가르면서 航進할 수 있어야 하며, 겨울의 편계절풍을 활용해야 하므로 내구력이 좋고 튼튼한 돛이 있어야 한다. 지중해의 배들은 삼각돛을 사용했으나 북해의 배들은 사각돛을 사용했다. 이는 바람의 상태와 돛의 이용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동해에서 운행한 발해배도 주로 사각에 가깝고 황해나 동중국해의 범선보다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태의 돛을 사용했을 것이다.
동해는 水深이 깊고, 출발항이나 도착항의 해안선이 비교적 단순하여 조류의 영향도 적고, 암초도 적다. 따라서 배는 항해의 平底船보다는 홀수가 깊은 尖底船에 가까웠을 것이다. 강한 바람을 견디며 운행하기 위하여 용골과 키도 발달했을 것이다. 또한 늘 거센파도와 바람을 맞아야 하므로 선체는 耐久力이 강하고 튼튼해야 한다. 따라서 단단한 목재를 사용해서 건조했을것이다. 이처럼 동해와 황해의 배는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할 때 발해는 조선술이 발달했다고 판단된다. 발해의 배들이 절강성 해안까지 가서 교역을 한 것은 그러한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4. 渤 日 航路
이러한 항해술과 조선술을 가진 발해선의 海上活動의 길, 즉 航路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어디서 출발하였으며, 어디를 경유하여, 어느 지역에 도착하였을까? 아래 글에서는 당시의 국제역학관계와 자연적 조건, 항해수준 등을 고려하여 발해의 對外交涉航路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항로는 매우 중요하다. 항구의 選擇과 立地條件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경우가 세계사에서는 매우 많다. 항로가 중요하다는 것은 삼국시대 각국의 일본열도 진출과정과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과정에서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는 나라의 위치가 다른 만치 각각 다른 항구에서 출발하였다. 출발항구가 다르므로 항로도 다를 수 밖에 없었고, 항로가 다르니 도착항구가 다를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도착항구가 다르니 당연히 居住한 集團의 정치적 문화적 성격도 다르다. 예를 들면 가야계는 남해 동부해안을 출발하여 가장 손쉬운 항로를 선택하여 대마도를 경유한 다음에 큐슈북부 지역에 도착하였다. 백제계는 전라도 해안에서 출발하여 큐슈 북서부 혹은 서북부 지역에 도착하여 거점을 확보하였다. 신라계는 동해남부해안을 출발하였으므로 혼슈 남부인 산음지방에 도착하였다. 고구려는 비교적 일본열도 진출에는 불리한 조건이었으나 동해 중부해안을 출발하여 일본의 중부인 越 지방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항로에 따라서 지역의 성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발해 또한 정치적 상황이나 자연조건에 따라서 여러개의 항로가 사용됬을 것이다.
그러면 발해사들이 사용한 항로는 과연 어떠했을까? 항로를 살펴보기에 앞서 몇가지 전제해야 할 사실이 있다.
먼저 출발 항구, 특히 항구조건에 관하여 살펴보자.
항구는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灣 안에 암초가 없다든가 조류의 흐름이 비교적 규칙적이고 안전해야 한다. 바람의 영향을 크게 받지않아야 하고, 계절에 맞는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동해안은 겨울철에 북서풍이 많이 불어오기 때문에 가능한한 북서쪽으로 山 등이 있어서 맞바람을 막아주어야 한다. 또한 주로 출발하는 계절에 맞춰서 바람을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을 항구로 택해야 한다. 고대에는 출발 항구 가까운 곳에서 배를 건조하거나 수리를 해야 하므로 항구 주변에 나무가 풍부한 山林이 있어야 한다. 반면에 고대항구는 배의 크기가 비교적 작으므로 커다란 灣보다는 적합한 항구가 좋다. 강과 연결되어 水路交通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므로 江과 직접 연결된 항구, 즉 津을 겸하는 곳이 많다.
이러한 자연조건 외에도 몇가지 人文條件 또한 갖추어야 한다. 특히 항해의 목적이 단순한 어업활동이나 민간인들의 교역이 아니라 정치,경제, 군사, 문화 등 특별한 경우에는 배후지의 존재와 성격등 그에 걸맞는 항구를 선택해야 한다. 이상에 언급한 몇가지 조건에 걸맞는 항구로서 발해사들이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는 항구는 그리 많지 않다.
출발항구가 가진 이러한 문제는 도착항구를 설정하고 이해하는데도 거의 유사하게 적용된다. 다만 발해사와 관련하여 몇가지 더 문제점을 덧붙인다면,
첫째, 이 항해는 일종의 '漂流性'이 첨가된 항해라는 사실이다. 기본목표는 설정하지만 정확히 그 지역이나 항구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노선으로 항해가 반복되면 항로에 대한 정보가 축적되고 경험이 풍부해져서 후대에 보이는 것 처럼 똑같은 지역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편 일본해역에 접근한 다음에는 근해항해나 연안항해를 통해서 목적지를 다시 찾아가므로 사료에 기록된 지역 및 항구가 반드시 航路의 終着点은 아니다. 예를 들면 중부에 도착한 선박도 외교상의 이유때문에 큐슈까지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859년에 노도반도의 珠洲郡에 도착한 배는 다시 能登國을 거쳐 加賀國으로 이동한다.
둘째, 항로를 설정할 때 출발항구로 불리워지는 것은 반드시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대체로 수도나 큰 도시에서 출발할 경우에는 그 도시를 직접 출항한다. 그러나 항로는 대부분 강을 통해서 일단 바다로 나간 다음에 출발하기 때문에 출발지인 河岸都市와 실제로 바다로 항해하는 항구는 다르다. 더구나 바람을 절대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고대항해는 일단 바다, 혹은 원양으로 나가기 직전에 항해에 적합한 바람과 좋은 날씨를 기다리면서 避港할 수 있는 外港에 대기하였다. 이 외항은 主港 가까히 있거나 그 연결선상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먼 곳에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셋째, 출발항으로 언급한 곳을 중심으로 항로를 이해하는 것에도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출발항구에서 도착항구까지 항로가 直線으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항해는 연안항해, 근해항해, 원양항해를 상황에 맞춰서 골고루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외항을 출발하였다 해도 원양으로 나가는 해역은 그 곳과 전혀 다른 곳일 경우가 많다. 특히 발해선들은 원양항해를 해야하는 해역이 상당히 광범위하다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실제 항로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이러한 몇가지 점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전제로 하면서 발해사들의 항로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항해의 전반을 이해하는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유형화 해보고자 한다.
발해는 황해에서 활약을 하여 황해항로가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일본과의 관계때문에 해양활동은 동해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사료에 항로로 표현된 것은 '紫築線' '北線' '南海府線' 세개 부분이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추상적이고 일정한 기준이 없다. 역사적인 성격이 담겨 있으므로 交涉路라는 표현은 될 수 있을지라도 航路나 海路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다. 항로를 정확히 파악해야 교섭의 성격 또한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서 자연조건과 표류지역의 관계를 살펴볼수 있는 자료(5)를 제시한다.
1) 東海 北部 橫斷航路
이 항로는 청진 나진 등 두만강 하구와 그 위인 연해주 남부의 포시에트만 사이의 항구에서 출발하여 동해북부를 횡단한 다음에 일본의 동북지방인 越後 이북의 出羽國인 秋田, 能代 등의 항구에 도착하는 항구이다.
< 출발항구>
동해항로의 출발지는 동해와 연변하고 항구 조건이 좋은 곳은 다 해당이 된다.
먼저 출발항구를 살펴보자.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인들의 대외 교통로가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龍原東南瀕海, 日本道也,南海, 新羅道也. 鴨綠 朝貢道也,長嶺 營州道也,扶餘 契丹道也."
이 기록을 보면 일본도의 출발지는 동경 용원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동경용원부의 위치는 어디일까? 그리고 그것은 對日航海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또한 발해사들은 정말 그 곳에서 출발했을까?
용원부의 위치와 출발항구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항해조건과 관련하여 일부만 언급하고자 한다. 上京의 동남에 있는 동경 용원부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琿春縣 八連城(半拉城)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리대희는 驛站리수의 계산과 海路의 설정문제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있다고 하며 훈춘설과는 다른 견해를 펴고 있다. 훈춘설에 회의를 가진 많은 논자들은 훈춘은 첫째로, 바다에 면해 있지 않다는 지리상의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 훈춘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가는 홍기하를 통해 두만강을 거쳐 동해로 가는 지역과 현재는 러시아령이 된 포시에트만(波謝特灣)에 위치한 모구위이다. 포시에트만은 추까노프까강이 있는데 과거에는 얀치혜(鹽州河)였다. 즉 발해시대의 鹽州인 것이다. 이곳에 크라스키노성(克拉斯基諾城)이 있다. 현재로서는 이 성이 용원부의 외항일 가능성이 제일 많다고 한다. 그런데 팔련성과는 거리가 거의 100km에 달하여 지나치게 먼 약점이 있다. 行政都市와 外港 간의 일반적인 관계를 염두에 둔다고 해도 훈춘과 크라시키노의 거리는 다소 멀다.
둘째로, 북한학자와 일부 중국인들은 포시에트만은 不凍港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의 해양기상자료에 의하면 함경북도 선봉군과 그 이북연해는 겨울철에 바다물이 얼기 때문에 배가 다닐수 없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용원부에서 최소한 겨울철에는 포시에트만에서 절대로 떠났을 수가 없다. 그런데 현재의 해상상태로 보아서 불라디보스토크는 1월에서 부터 3월까지는 배가 다닐 수 없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항행기간은 보통 1~2 주일정도 였다.(물론 이 기간은 순수한 횡단 기간에만 해당한다. 후술 참조) 일본열도에 도착한 날짜와 계절을 기본으로 역산할 경우 12월, 1월에 추운 겨울철에 용원부를 떠난 횟수는 매우 많다. 이 논리라면 결국 용원부내에서는 라진항과 그 이남지역에서만 배가 떠날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 타당하다. 설사 이 海域들이 겨울에는 언다 하여도 나머지 계절에는 出航이 가능하므로 홋카이도(北海道)까지는 항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위도상으로 양 지역간은 直航 또는 北航이기 때문에 바람을 이용하거나 바람없이도 노를 활용하여 도해할 수 가 있다. 크라스키노의 경우는 제한적이나마 항구의 기능은 충분히 하였을 것이다. 필자는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몇가지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먼저 용원부의 위치 문제이다.
일본과의 관계를 위하고 두만강 유역을 적극적으로 경영하기 위하여 동경 용원부로 천도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할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당과의 교섭이 불리해진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東南瀕海'라는 표현은 도시 혹은 항구를 기준으로한 것이 아니라 용원부의 지역 전체를 기준으로 방위를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동경 용원부와 출발항구가 다소 먼 느낌이 있지만 반드시 밀접하거나 근거리에 있어야 된다고는 생각할 이유가 없다. 발해에서도 이와 유사한 예가 있다. 당시 소위 朝貢道는 서경 압록부였으나 실제 출발항구는 압록강 하구인 현재 단동의 泊灼口이다. 그것도 박작구는 河港이지 海港이 아니다. 압록강구에서 臨江까지는 약 830리(唐尺)리에 달한다. 남경 남해부 역시 일본도라고 하였지만 {續日本紀}에 기록대로 제 9차 항해인 776년에 출발한 실제항구는 吐 浦였다. 그러니 신당서에 기록된 지명들은 항구라기 보다는 관할 行政都市인 것이다. 즉 용원부의 동경은 팔련성이지만 출발항은 상황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다.
< 도착 항구>
그러면 이 항로를 이용해서 도착하는 지역과 항구는 어디일까?
주로 출우국을 중심으로한 동북지방에 있다. 고구려인들이 이 지역에 도착한 사실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발해인들은 전기에 해당하는 8세기 대에는 거의 이 지역으로 도착한다.
아끼다(秋田)현 남부에서 니이가타(新潟)현에 이르는 동해(일본해) 연안은 대한난류(대마해류)의 영향으로 기온이 높고, 겨울에는 평년기온의 평년치가 섭씨 0도 이상이다. 겨울에 연안부의 풍향은 북서 또는 서풍의 계절풍이 탁월하고, 여름에는 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남쪽은 남동의 바람이 탁월하다. 秋田, 酒田의 겨울 풍속은 월평균 8~9m/sec에 달한다. 겨울 계절풍에 의한 비도 많고, 바다에서는 강풍과 파랑이 높아 해난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특히 해안에서 40~ 50km의 연안에서 많이 일어나는데 암초가 많은 男鹿半島는 정도가 심하다. 그래서 1차, 2차, 12차 항해에서 처참한 결과가 발생했다.
첫 사신인 고제덕 일행이 727년에 이 지역에 도착했으나 하이들에 의하여 처참하게 희생당하였다. 그 다음 2차 때도 이 곳이었으며 13차 항해까지 도합 6회 이상에 걸쳐 이 출우지역에 도착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746년에 발해와 철리인 1100 여인이 도착한 것이다. 이들은 물론 정식교섭단이 아니고 민간인들에 의한 일종의 망명 내지 집단진출이며 정식 항구를 출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항해는 앞으로 발해와 일본의 교섭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계속되는 고고학적 발굴결과와 함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779년에도 발해인과 鐵利 등 359인이 이 지역에 도착하였다. 각 지역과 부족을 대표하는 이들은 각각의 地域港口를 출발하여 큰 항구로 집결하였다가 大船團을 이루어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秋田城跡에서 출토된 鐵製羽釜는 발해인과의 기술교류를 시사해주는 자료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몇가지 사실들은 많은 발해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일정한 기간동안 거주하거나 머물렀음을 알려준다.
< 항 로>
그러면 발해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 항로는 어떻게 연결될까?
포시에트만(북위 42도 30분)이나 함경북도 해안에서 이 지역(秋田 북위 40도)을 연결하면 약간 斜線으로 이어진다. 10월 11월은 비교적 북서풍이 약하게 부는 계절이다. 또한 동해(일본해)의 북서부에서 한반도의 동안에 연해서 리만한류, 북한한류가 남하하고, 동해(일본해)를 反시계방향으로 순환하고, 중앙부인 39도~40도부근에는 極前線이라고 불리우는 현저한 潮境이 동서방향에서 형성되고 있다. 자료 (6)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자연조건과 돛을 활용하여 바람을 斜線으로 받고 동으로 항진한다면 출우국에 자연스럽게 도착할수 있다. 그러나 쉬운 항해는 아니어서 많은 사신선들이 침몰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을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배들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난당하기 보다는 연안 혹은 근해에서 침몰하는 일이 의외로 많다. 사서에서 '漂着'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2)東海 北部 斜斷 航路
이 항로는 원산 이북인 南海府에서 두만강 하구를 지나 포시에트만 지역까지의 여러 항구를 출발하여 동해북부를 사단한 다음에 일본의 越지역인 현재의 쓰루가(敦賀), 북륙인 이시가와(石川)현의 加賀, 노도(能登)반도, 니이가타(新潟)현 등에 도착하는 항구이다. 전 기간을 통하여 무려 12번이나 도착하고 있다.
<출발항구>
먼저 출발항구를 살펴보자.
이 항로는 고구려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고구려의 동쪽해안에서 항구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은 두만강 하구의 羅津港, 淸津港, 그리고 원산이 있는 金野灣, 興南이 있는 咸興灣이 있다. 특히 원산은 潮流는 불규칙적이지만 潮汐의 차이가 별로 없어 안정된 환경인데다 동해안의 난류와 한류가 만난 지점으로서 漁港의 조건이 좋을 뿐 아니라 항해에도 물길을 탈 수가 있어 항구로서 매우 유용하다. 고구려는 이러한 항구들에서 일단 연안항해 내지 근해항해를 해서 내려온 다음에, 三陟 혹은 그 아래에서 먼바다로 나가 斜斷으로 일본열도 혼슈우(本州)중부의 이북지방으로 航進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보다는 조건이 약간 좋지 않았다. 영토의 남방 한계 때문이다. {續日本紀} 寶龜 8년(776년)에는 '發弊邑南海府 吐 浦 西指對馬嶋 竹室之津'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발해 5경 중의 하나인 남경 남해부는 중요한 출발지였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新唐書} [北狄 渤海傳]에 기록된 대로 신라도이므로 (南海 新羅道也.)신라와의 접경 지역이었다.
남경 남해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흥설과 경성설,북청설이 있으나 북청설을 따르고자 한다. 특히 해양교통을 염두에 두고자할 때 가장 유리한 지역이 북청 지역으로 생각된다. 발해의 남방한계선에 대해서는 대체로 德源으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이때 니하는 발해와 신라의 경계선이었다. 한편 泥河를 강원도의 명주군 련곡천으로 보는 견해와 발해의 최남단 경계를 한때 강원도 양양지방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발해인들은 남해부를 출발하거나 혹은 북쪽의 어느 항구에서 출발한 다음에 그 근해를 남하하다가 新羅水軍의 견제를 안받는 최남단 海域에서 원양으로 뜨는 항로를 사용했을 것이다. 아니면 염주 등 북부항구에서 출발하여 사선으로 항해했을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인들보다는 훨씬 북쪽에서 원양으로 나갔다. 남해부는 몇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해양전략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 도착항구>
그러면 이 항로를 이용하여 발해사들이 도착한 지역과 항구는 어느 곳일까?
발해선이 北陸지방에 도착한 것을 보면 越前 3회, 加賀 5회, 能登 3회, 若狹 1회로 총 12회이고, 시대적으로도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많은 지역에 도착하므로 중요한 몇개 지역만을 선정하여 항해와 관련된 몇가지 사실 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石川縣 (加賀, 金澤市 등 )
현재의 이시가와현은 발해와 일본간의 교류에서 매우 중요했다. 가나자와(金澤)시 및 주변의 고마쓰(小松), 가하, 그리고 노도반도 등을 포함하고 있다.
{日本書紀}에는 고구려인들이 繼體天皇 10년조, 欽明天皇 원년 31년조. 敏達天皇 2년 3년 조에 越國 혹은 越의 해안에 도착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고구려 외에 백제 신라 등 한반도계 사람들이 진출하였다. 고마쓰(小松)지역은 지금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額見遺址는 엄청난 범위이다. 이 지역에서는 중국계의 도자기 등이 출퇴되었는데 10~11세기에 교류되던 것들이다. 그 후에 발해인들이 북륙의 가하 등에 도착하였으며, 자연조건상으로 보아 가장 적합한 도착지가 되었다. 776년에 남해부를 출발한 史都蒙은 가하에 도착하였다. 유일하게 출발지와 도착지가 분명한 교섭이다. 하지만 이 항해는 187인 중에서 46인만 생존하는 大慘事로 끝을 맺었다. 이것이 소위 북로이다.
가하에는 발해인들을 위한 건물을 지었다.'가하국에 금월 14일 105인이 닿으니-- 가하국에 명하여 便所에 발해객을 안치하고'라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객원 같은 곳은 '安置於便所'혹은 '安置於便所 依例供給'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신이 도착하면 大使 등은 수도로 가고 일부는 남아서 便所를 거점으로 歸國準備 겸 交易을 하였다.
금택시의 서부를 흘러가는 犀川 주변에는 8세기 전반의 대형건물군과 木間이 출토된 金石本町 유적이 있다. 戶水 c 유적 등은 헤이안(평안) 시대 유적이다. 郡津府 國府津 등의 항구를 관할하는 관부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 유적은 지금은 해안에서 떨어져 있다. 그 근처에서 현재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곳은 교역의 장소로 해석하고 있다. 발해인들은 정치적인 교섭은 물론 이러한 장소를 이용하여 활발하고 대규모적인 교역과 각종의 문화를 전파하였다. 8세기 후반의 鐵생산 기술도 발해가 전해준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지역은 노도반도이다.
釜山灣은 能登반도의 동쪽으로 형성된 일본 최대의 外洋性 內灣이다. 고온의 대마해류가 유입되어 따뜻하다. 기상은 晩秋에서 初冬에 이르기까지 극히 변하고 있다. 북서계절풍이 강하지만 일단 만에 들어오면 서풍으로 변한다. 뒤로는 약 3000m의 일본알프스가 있다. 하지만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비교적 조용한 날이 많고, 북서 계절풍이 강해져도 만 안에 들어오면 바람이 약해지고 파도도 약해진다. 이처럼 노도반도는 도착지역으로서 적합한 지역이다.
또한 한반도 동해안의 어느 지역에서 출발해도 도착할 수 있는 지리 해양조건을 갖추었다. 고구려 발해 등과 관련된 동해중부 이북의 해상에서 출발할 경우에는 노도를 가운데 둔 북륙지방에 도착할 확률이 제일 많다. 참고로 언급하면 동해 삼척 등과 노도반도는 북위 37도로서 비슷한 위도에 있다.
노도반도에는 3회 도착하였는데 이들을 위하여 객원을 지었다. 859년 1월에 珠洲郡에 도착한 사절은 2월에는 能登國에 도착한다. 이어 加賀國으로 옮겨 편한 곳에 안치하게 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항해모습과 함께 노도가 中間經由地 역할도 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니 당연히 객원이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은 고구려 고분의 말각조정양식을 가진 蝦夷穴 古墳도 있어 고구려와도 깊은 관계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고분은 대륙으로 이어지는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에 있어 피장자가 해양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려준다. 노도반도에는 항해의 안전을 비는 氣多神社및 寺家遺跡地가 있었다. 淺香年에 의하면 氣多神社에서는 7,8,9세기에 커다란 제사가 행해졌다고 하는데 寺家遺跡과 관련이 있으며 발해와의 교류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한편 일본의 견당사가 북로를 택할 때에 발해는 중간기지 역할을 하였는데 能登은 이러한 북방외교 루트의 거점이었다. 763년에는 처음으로 발해에 파견되었던 배는 '能登號"로 명명되기도 하였다.
귀국할 때도 쓰루가의 松原 등을 출발한 발해선들은 연안항해를 통해서 북상하다가 福良에서 이른바 神風인 봄의 남동풍을 기다리는 것이다. 사신들은 福良津(石川縣 富來町 福浦)에 안치되었다. 특히 7회째의 사신 壹萬福 일행은 이곳에서 수개월 동안을 체류했다. 883년에는 발해사절이 귀환하는 배를 만들기 위하여 백성들이 福良泊의 큰 나무들을 벌채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복포는 고대의 항구조건으로서는 매우 훌륭하지만 만이 산과 바로 붙어 있으므로 공간이 너무나 협소하고, 대규모의 인원이 그 곳에서 직접 머무를 만한 장소로서는 부족하다. 또 제사유적지라는 사가유적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지역은 쓰루가(角鹿)이다.
와카사만(若狹灣)은 동해쪽에 면한 몇개 안되는 큰 만의 하나이다. 丹後半島에서 敦賀灣으로 해서 아래로 이어진다. 해안선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서 복잡하고 작은 만들이 많이 있다. 만 내의 해조류는 약하고, 파고는 12월에서 2월에 걸쳐서 파고도 1,5미터를 넘는다. 11월에서 3월까지 5개월간은 북서 내지 북북서의 바람이 많고, 10m/sec이상의 강풍이 겨울에는 많다. 반면에 4월에서 10월까지 7개월간은 남동풍이 탁월하다.
이 지역은 가야, 신라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특히 신라계와 관려이 깊었으므로 지금도 신라계지명 및 신사가 곳곳에 남아있다.
고구려인들의 도착지점은 기상상태의 변화가 없는 경우에는 현재의 쓰루가를 중심으로한 지방이었다. 후대의 발해 사신들도 역시 이 지역을 도착지점으로 하였다. 심지어는 발해의 私貿易船들과 신라의 私貿易船들도 이 곳에 도착하였다. 신라, 가야와도 관계가 깊다. 해양교통의 조건도 좋았지만 육로교통의 조건도 매우 좋았다. 이곳에서 경도나 奈良까지는 琵琶湖를 거쳐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10세기 초엽에는 송원객관이 있었다. 758년에 온 발해대사 揚承慶은 월전국에 약 3개월간 머물렀는데, 아마 돈하의 송원객관으로 여겨진다.이곳의 중요성은 北海道에 도착한 발해사신들도 秋田 山形을 경유하여 新潟 富山 石川縣을 통과하여 이곳 福井의 敦賀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이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교역들이 이루어졌는데 {福井縣史}의 실린 자료에 의하면 이곳에는 발해인과 宋人들도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객관을 중심으로 비공식적인 무역을 했다.
그런데 참고할 만한 사실이 있다. 후꾸이현의 '三國の浜'을 출발한 일본의 배가 있었다. 58인이 탄 배는 북해도를 향하여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우연히 포시에트만에 도착하였다. 그 후 심양과 북경을 거쳐 서울 부산을 통해 오오사카에 도착하였다.(1646년, 6, 17일). 후구이현의 三國の性海寺에 기록이 있다. 이 사실은 양 지역간의 교섭이 이미 오래전 부터 있어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다음에 또한 중요한 도착지는 니히가타(新潟)현과 사도섬(佐渡嶋)이다.
사도섬은 니이가타시 바로 앞에 있는 매우 큰 섬이다. 이 지역에는 발해인들 오기 이전에 이미 말갈인들이 왔었다. {일본서기} 660년(齊明 6년)년조에 阿部水軍이 佐渡島에서 숙신과 소위 '沈默交易'에 실패해서 전쟁을 했던 기사가 있다. 이 싸움에서 能登臣馬身龍이 전사하고, 肅愼도 幣賂辨島에 틀어박혀 결국은 전원이 죽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들 보다 먼저 왔을 가능성이 강한 사람들이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풍속 등을 근거로 동옥저 북옥저인이 먼바다로 항해를 하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동방의 큰 섬이란 사도섬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이미 오래전 부터 동해안에서 북륙이나 그 이북지역으로 진출했을 가능성도 있다.
발해인들은 3차 항해인 752년에 처음으로 越後인 사도섬에 도착한다. 니히가타현 卷町 赤坂遺跡에서는 5세기 초의 흙구덩이에서 토기들이 검출되었는데 러시아 남부의 연해주지방과 관련이 있다. 이 유물은 日本書紀 544(欽明 5)년조에 기록된 숙신인이 사도에 머물면서 봄 여름에 고기를 잡는다고 하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 참고로 청진에서 이 곳 까지는 487해리이다. 지금도 북한으로 가는 만경봉호가 이곳을 출발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자연적인 배경이 작용한 때문이다.
<항 로>
발해사들에게 가장 중요했고,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이 항로는 어떻게 연결될까?
두만강하구(북위 42도 30분 전후)나 그 이하에서 이곳(쓰루가만은 북위 35도30분, 사도섬은 북위 38도)으로 선을 그으면 거의 斜線에 가깝다. 발해인들은 결국 동해북부를 斜斷으로 길게 횡단하거나 남으로 내려온다. 북풍 내지 북서풍을 이용할 경우에는 북청 이북선이 최종라인이다.그 이하로 내려가면 노도에는 도착 하기가 힘들다. 물론 중간에는 지형지물이 없으므로 鬱凌島와 獨島를 右로 보면서 방향을 측정했을 것이다. 그 다음에 다시 일본쪽으로 붙어 강한 북서풍을 이용하여 직항하거나 아니면 아래로 내려갔다가 북상하는 흐름을 택해 혼슈우 중부의 여러지역에 도착했던 것이다. 아래 자료( 자료 7)는 그러한 자연조건을 보여주고 있다.
3), 東海縱斷 航路.
이 항로는 역시 동해에 면한 발해의 여러 항구를 출발해서 남으로 종단해서 내려오다가 山陰지방과 長門 등 여러 지역에 도착하는 항로이다.
< 출발항구>
먼저 출발항구에 대해서 살펴보자.
출발항구는 동해사단항로에서 언급한 것과 거의 유사하여 동해북부해안의 항구가 다 해당이 된다. {續日本紀}에는 '--發弊邑南海府 吐 浦 西指對馬嶋 竹室之津---.' 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므로 발해 5경 중의 하나인 토호포가 산음으로 도착하는 일본도 항로의 깃점이 된 것은 확실하다. 동시에 신당서 북적 발해전에 기록된 대로 신라도이므로 (南海 新羅道也.) 신라와의 접경 지역이기도 하였다.
776년에 9차 발해사인 史都蒙은 이곳을 출발한 이유 중의 하나로서 北路를 피하라는 일본측의 요구에 따라 대재부를 향하여 남해부의 토호포에서 출항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항해가 무리임을 간하고 있다.(당시 항로에 대해서는 후술 예정)사실 남해부에서 출발하였다고 大宰府로 가는데 유리한 것은 아니다.
토호포를 출발하여 산음지방 내지 그 이하를 목표로 항해를 한 다음에 근해권에 접근한 다음에는 연안에 바짝 붙어서 남으로 항진해 한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매우 어려운 항해이다. 산음에 도착하려 한다면 적어도 동해안을 연안항해 내지 근해항해로 타고 가능한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먼바다로 떠서 동진해야 한다.
반면에 포시에트나 두만강구 등을 출발하는 경우에는 강한 북풍을 타고 남진하면 된다. 이 곳에서 산음까지는 경도상으로 동일하여(동경 132도에서 134도 사이) 거의 일직선에 가깝다. 9세기에 이르러 대체로 1,2월에 산음에 도착하는 것은 강한 북풍을 이용한 동해종단 항로를 선택한 때문이다.
일인들은 포시에트만이 동계에 얼기때문에 발해선이 출발하는 항구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李承英이 대사로 간 19차 항해 이후(興仁 10년 이후)에는 발해사들이 전적으로 남경 남해부의 토호포를 출발하여 남로를 경유하면서 동해를 횡단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바다의 조건과 항해의 성격상 남해부가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 도착항구>
동해종단항로에서 주로 도착을 하는 지역은 산음인 돗도리현의 但馬, 伯耆, 시마네현의 出雲, 隱岐, 그리고 그 이하인 山口縣의 長門 등이다.
산음지방의 항구는 다소간의 차이는 있어도 대개 북향으로 되었으므로 북서풍, 북풍인 때에는 높은 파고에 의한 피해가 매우 크다. 풍속은 서, 북서의 경우 13미터/sec가 많은데 때때로 돌풍이 일어나 해난사고를 유발한다.759년 대마도에 표착한 배가 있는데 이는 바람의 영향으로 항로를 잃고 표류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발해선들은 왜 이 지역으로 많이 도착하였을까?
9c에 들어오면 발해와 신라의 긴장관계가 풀려서 전 시대에 비하여 근해항해를 많이 하는 등 비교적 안전한 항로를 취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당 상인이나 신라선이 서일본에 자주 들어오고, 교역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발해는 강남교역권과 접촉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이다. 발해선들은 908년까지 산음(伯耆)에 도착하였는데 민간무역을 금지하는 움직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선들은 꾸준히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도착하였다. 사실 이 지역은 해양조건 상 신라계와 관계가 깊었으며, 가야는 물론 고구려도 진출하였다. 이즈모(出雲) 등에 고구려 문화의 흔적이 있고, 해류의 흐름 등을 감안하면 동해 남부를 출발한 고구려인들은 이 곳으로 진출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伯耆에도 고려와 관련된 地名과 神社 등이 있다. 발해인들은 산음지방 앞에 있는 오끼제도에 1번 도착하였고, 이즈모에 4번 등 자주 도착하였다.
< 항 로>
이 지역에 도착한 발해사들의 동해종단항로는 신라의 예를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그 중의 한 갈래이다. 이즈모지역은 경상남도 울산이나 포항지방과 위도상(북위 35,5도)으로 보아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다. 양 지역 사이에는 항로가 2개 있었다. 하나는 동해남부 또는 남해로 부터 리만한류를 타서 북위 30도 부근에서 대한난류 西派를 횡단하여 본류에 올라타서 출운 서안에 도달하는 직접항로이다. 제 2의 항로는 한반도 동안에서 출발하여 隱岐에 도착하고, 다시 島根灣頭 혹은 因幡해안에 도착하는 것이다. 즉 黑潮에서 분파된 해류는 동해 남부나 중부에서 출발한 선박을 일본해안으로 자연스럽게 밀어 붙이므로 물길과 계절풍을 활용한다면 항해는 성공할 수 있다.
자료 (8) <해류병의 漂着상황도>은 그러한 자연조건을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항로는 포시에트 만이나 두만강하구에서 직항하여 산음지방에 도착하는 항로이다. 포시에트와 산음은 경도 상으로 거의 직선에 가깝다. 해류의 영향을 감안하지 않고 강한 북풍을 활용한 항해이다. 그 실제적인 예는 1998년에 시도한 뗏목 발해호의 역사탐사에서 찾아볼수 있다.
발해호는 1997년 12월 31일에 포시에트만의 바로 위인 불라디보스토크항을 출발하였다. 발해호는 돛을 이용한 뗏목이었으므로 범선에 비해서는 효용성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해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것을 감안해도 발해호는 아래 항해도에 나타나듯 거의 종단해서 남으로 내려왔다. 발해호는 울릉도부근에서 의도적으로 한반도 남안을 향해 항로를 바꿨으나 결국은 후포 항 40 km 동쪽 해상에서 東進을 하였다. 그리고 1월 24일 새벽, 오끼제도의 도고섬에 상륙하기 직전에 전복되면서 좌초하였다. 24일간 총 항해거리는 1290km이고, 하루 평균 항해거리는 53 km이었다. ( 자료 9 <발해호 항로도> 참조) 이 항해를 통해서 동해종단항로의 2가지를 코스를 확인할 수 있다. 즉 한반도 동해 중부 해상까지는 종단을 하고, 그 후에는 신라인들의 일본열도 진출 항로와 똑같이 동진하여 산음의 관문인 오끼에 도착하는 항로이다. 참고로 825년의 高乘祖일행 101인은 오끼에 도착하였고, 861년에 李居正 일행 105인은 오끼를 경유하여 이즈모에 도착하였다. 뗏목 발해 1300호는 이러한 발해인들의 동해종단항로를 실증적으로 밝혀낸 것이다. 발해호는 1997년 12월 31일 불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1월 24일 일본 오끼제도 도고섬에서 좌초하였다.
4). 沿海州 航路
이 항로는 북으로는 하바로브스크와 비교적 가까운 항구인 그로세비치로 부터 남으로는 불라디보스토크 등에 이르는 연해주 지역에서 출발하여 사할린(高項島)와 홋카이도(北海道)의 남단에 이르는 장소로 도착하는 항구이다.
< 출발 지역>
이 항로의 기본성격을 알기 위하여는 먼저 해양문화의 특성과 항해와 민간교섭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해와 일본간의 교섭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문화교류, 교역 등 政治外的인 목적도 있었다. 특히 후기에 가면 공식적인 사절단들에 의한 교섭마져도 교역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민간인들에 의한 교역도 활발해졌다. 동중국해와 황해에서 장보고로 상징되는 민간인들의 교섭과 해적활동이 이루어졌다면 동해 역시 유사한 형태였을 것이다. 그 예를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여러 면에서 확인할수 있다.
해양문화는 일종의 無政府性 내지는 地方性을 가지고있다.
보다 원활하고 안정성있는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특히 해류 조류 안개 암초 바람 등의 자연조건으로 결정지어지는 물길(海路)의 숙지와 장악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능력은 그 지역사정을 숙지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다. 이들은 해양의 영향력이 큰 문화권에서는 일종의 海洋豪族이 된다. 그들은 중앙정부의 간섭을 비교적 덜 받고, 국가와 국가간의 교섭에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가 하면 독자적으로 교섭을 시도하기도 하는데, 특히 교역은 그들의 경제력은 물론 정치 군사력을 신장시키는데 큰 몫을 한다.
발해인들과 말갈인들은 중앙정부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교역이나 교섭을 했을 것이다. 이들 지방세력들이 교역, 즉 對日交涉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발해사 가운데 지방수령들이 동행하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續日本紀}에는 발해인들과 철리인이 8세기 중엽에 출우국에 도착한 사실이 나타나있다. 특히 746년에 출우에 도착한 1100여인은 물론 민간인들이었을 것이다. 朱錫과 鐵 교역을 중심으로 이러한 民間交涉에 대하여 주목을 기울이는 견해도 있다.
그러면 바다를 사이에 둔 채 相互交涉을 원했던 양 지역의 비공식적인 세력들이나 민간인들에 의하여 항해와 발 일 교섭이 이루어졌다면 그 출발지역은 어디였을까?
이들은 공식적인 교섭이 아니므로 국가의 교섭항구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또한 小規模로 非組織的으로, 비밀리에 행해지는 것이므로 항해조건만 적합하면 어느 곳을 항구로 사용해도 상관 없다. 심지어는 바다 한 가운데나 섬에서 비밀리에 만나 교섭을 하는 경우도 있다.(사도섬에서 이루어진 현지인과 숙식인의 교역 등) 그러므로 기본적으로는 발해의 전 영역의 해안가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중앙에서의 統制가 어렵고, 海上制御가 매우 어려운 지역일 확률이 크다. 우리는 여기서 연해주지역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발해의 영역확대 과정과 연해주 지역의 통치상황을 살펴보자.
발해는 文王 시대인 天寶 년 간에 興凱湖 일대에 자리잡은 拂捏部를 쳐서 병탄하고 東平府를 설치하였다. 다시 鐵利部와 越喜部를 병탄한 다음에 그 지역에 鐵利府 懷遠府 安邊府를 설치하였다. 虞婁部를 병탄하고 定理府, 率賓河지역을 점령하고 率賓府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성시의 발해영토는 현재의 동해 및 타타르 해협 등과 맞닿은 전 지역까지 뻗쳐 있었다.
당시의 행정구역과 현재의 지명을 대비해보면 다음과 같다. 安邊部는 하바로프스크 지역을, 定理部는 연해주 남부일대, 率賓部도 연해주 남부일대를 포함,安遠部는 연해주 중부 동해안일대였으며, 鐵利部는 하바로브스크주 남부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하바로브스크는 철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이 각부들은 각각 말갈 여러 부족의 근거지였다. 이들은 내륙에 영토를 넓게 가지고 있음에도 바닷가를 좁은 면적씩 공유하고 있었다. 바다를 삶의 영역으로 활용하고 해양출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말갈의 제 부족들은 이미 발해가 성립되기 이전 혹은 발해에 복속되기 전부터 바다에서 어렵활동을 해왔으며, 일본열도로도 진출하거나 교역을 하였다. 고구려의 압박을 받은 黑水靺鞨은 隋에 조공사를 보내면서 사할린에 살고 있는 流鬼 등 오호츠크해 연안의 여러민족과 연대를 강화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항해서 570년 왜에 파견된것이 제 1차 고구려 사절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특히 9 세기가 되어서 흑수말갈 전체가 발해의 영향권 아래에 든 이후에는 흑수말갈이 독자적으로 오호츠크해역과의 접촉권은 점차로 규제되었다. 물론 이 항로를 발해가 장악했을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때문에 정리부 안변부 안원부 등 이러한 연해주의 여러 해안과 항구를 거점으로 북해도 혹은 사할린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 도착지역>
그러면 이들이 도착한 지역 혹은 항구는 어디일까?
이미 선사시대부터 양 지역 사이에는 교섭이 있어왔다. 일본의 繩紋陶器와 대륙의 승문도기는 문화의 연원이 유사하며, 대륙과 高項島(사할린)는 교섭이 있었다고 한다.
7세기, 8세기에 한해서 말한다면 대륙에서 도래한 유물이 오늘의 일본열도에서 가장 가장 많은 곳은 북해도이다. 북쪽에서는 常呂遺跡 등 이른바 오호츠크해 문화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 외에 文島의 香深유적 A 지구는 그 관련성이 검토된다. 7세기 대의 오타루(小樽)나 大川(余市)의 주변에서는 錫제품 등 연해주로 부터 반입되었다고 생각되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대천유적에서 발견된 銅鈴은 고구려에서는 馬具의 장식으로 이용되었고, 집안시 万寶汀 M 242 墓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 결국은 고구려가 직접왔거나 말갈이 중간교역을 하여 이 지역에 왔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그 당시에 말갈은 고구려의 소속 내지 영향권 하에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 외에도 蘭島 D유적(小樽市) 유물 등도 관련성이 검토되고 있다.
그런데 8세기에 들어서면 말갈계의 유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연해주 남부의 말갈족이 발해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므로. 독자적으로 교류할수 없었기 때문이다.대신 발해인들이 그들과 함께 혹은 독자적으로 북해도 등지에 도착하였다. 발해 전성기의 영토에 비추어 볼 때 위에서 언급한 섬들 외에도 북해도의 삿포로의 외항이 될 수 있는 이시카리만(石狩灣), 루모이(留萌), 와카나이(椎內) 사할린의 코롬스크, 오로보 등은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다.
발해가 멸망 한 이후에도 大川 유적에서는 渤海末 내지 女眞初期라고 생각되는 黑色壺形土器가 출토된다. 이 사실은 연해주와 북해도의 교류는 늘 개연성이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 항로>
동해북부와 타타르 해협을 가운데 두고 연해주와 북해도 일대간의 교섭이 있음은 입증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사용한 항로는 어떤 것이었을까?
포시에트 혹은 불라디보스토크, 그 위 지방에서 타타르 해협을 건너 사할린 또는 혹카이도의 오타루까지는 항해가 가능하다.
우선 불라디보스토크와 오타루는 동일한 위도상에 있어 지리적으로 매우 조건이 좋다. 또한 이 항로는 겨울이 아니라 봄 여름에 사용하는 항로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봄 여름에는 남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하면 쉽게 북상할 수 있다. 6월,7월,8월에는 편남풍이 분다. 이시기는 天氣도 매우 좋아 항해에 유리하다.
더구나 날씨도 따뜻하고 바람도 세지 않아 해상상태도 상대적으로 안정되있다. 그 지역의 해류는 북에서 남류하고 있는데 북해도 남부나 동북지방의 경우에는 이것을 활용하면 거의 직선거리로 접근할 수가 있다. 이렇게 연해주 항로는 바다를 바로 건너서 홋카이도에 상륙하거나, 가까히 다가온 후에 연안항해를 통해서 출우 등 혼슈 북부지역에 도착할 수 있다. 더구나 연해주 동부에는 시호테알린산맥이 있고 반대편인 사할린에도 산맥들이 있어 상호 바라보면서 항해하기에 매우 유리하다. 결국은 발해선의 동해항로보다 항해하기에 더 쉬울 수도 있다.
연해주 남부항로 뿐만 아니라 북부항로도 있었을 것이다. 사할린은 발해의 북부 영토인 안변부나 안원부에서 북동방향으로 항진할 수 있다. 만약 하바로프스크까지 발해의 영향력이 끼쳤다면 발해의 해상활동범위도 더욱 북상할 것이다. 연해주 북부 해안인
소베츠카야가반에서 건너편의 오롤보까지는 불과 150km에 불과하고, 연해주 북부는 거의 사할린과 붙어있다. 아주 가까운 지역에서는 원시적인 주민들도 간단한 노를 저어서도 항해가 가능하다. 연해주 항로는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으나 사할린이나 북해도에서 더 많은 자료들이 발글된다면 발해와의 관련성이 더욱 분명해지리라 믿는다. 해양문화의 특성을 볼 때 발해인들의 이 항로를 이용한 北海道 진출은 당연한 일이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 도표와 같다.
渤海使臣向日本航路圖
5 結 論
발해의 해양활동은 매우 활발했다. 특히 일본과의 교섭을 위해서 34차례에 달하는 사신을 파견하고 기타 民間人들에 의해서도 많은 교섭이 있었다. 우리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험난한 자연조건 속에서 가장 활발한 해양활동을 한 것이 발해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많은 교섭기록과 고고학적인 유적 유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은 주로 對外交涉의 입장에서 파악하였지 海洋活動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對日交涉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발해의 정치외교적 위치를 격상시키고, 경제 문화적으로 발정하게 한 데에는 해양활동이 큰 역할을 하였다.
논문을 작성하면서 깨달은 발해 해양활동의 의미와 역할은 매우 많지만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몇가지 정리하면서 결론을 내고자 한다.
첫째, 발해의 對日交涉은 자연조건, 특히 해양조건의 영향이 매우 강하였다.
둘째, 발해인들은 이러한 必要性을 自覺하고 海洋活動 能力을 강화하여 현실적으로 활용하였다. 동해의 季節風과 海流는 발해인들로 하여금 일본열도에 적극적으로 교섭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발해의 출발항구와 일본 도착항구, 항로는 정치적인 요인보다는 역시 자연조건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셋째, 발해의 航海術과 造船術은 매우 뛰어났다. 조선술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지만 당시 荒天航海를 수행하면서 겨울의 동해를 넘나들었던 것은 조선술의 발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黃海나 南海에서 사용하던 선박과는 다른 構造와 다른 能力이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넷째, 발해의 해양활동 범위는 의외로 넓어서 동해는 물론이고, 沿海州와 北海道 혹은 사할린까지도 이어지는 광범위한 해역이었다. 앞으로 발해사의 연구영역과 인식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지표가 되리라고 믿는다. 발해인들은 정말 적극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생각된다.
필자는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결론의 몇가지를 도출하기 위하여 서문에 언급한대로 독특한 방법론을 사용하여 해양활동의 실상을 복원하였다. 문제가 많고, 또 보완되어야 할 자료와 생각들이 있지만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 일단 끝을 내려한다.
21세기 東아시아에서 우리의 中核調整役割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 싯점에서 해양활동을 배경으로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발해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