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서머셋 모옴의 <점심>을 읽고
그 줄거리를 간략하게 재구성해서 올립니다.
인간의 위선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면서도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내용이
마음에 와닿는 단편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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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윌리엄 서머셋 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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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극장에서 만나 반가워하며
손짓하는 그녀를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를 처음 봤던 때가 이십여 년 전 일이었다.
강산이 벌써 몇 번 바뀐 건가.
'그때 그 사람'을 몰라보기에 충분한 세월 아닌가.
“ 처음 만난 게 이젠 먼 옛날이 됐네요.
세월 참 빠르죠!"
"당신이 나를 점심에 초대했었잖아요.
기억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기억이 났다.
파리의 식당 '포요(Foyot)'에서의
그 난처했던 점심 식사가 말이다.
그는 당시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정도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한 작가였고,
그녀는 그의 작품을 읽고 편지를 보내온 팬이었다.
몇 번 편지가 오간 끝에 그녀는 여행 중에 파리를
들를 일이 있는데 점심을 대접받으며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제안해 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대접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받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녀가 만나자고 한 곳은
프랑스 상원의원들이 드나드는
최고급 식당이었다.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핑계를 대고 거절을 하는 게 마땅했겠지만
팬이 만나자고 하는데 (더군다나 여자인데)
거절하기에 그는 그렇게 노련한 나이는 아니었고,
아직 순진한 감성과 매너가 남아 있는 노총각이었다.
살포시 기대감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혹시 또 아는가?
상대는 아리따운 아가씨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드디어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한 마흔 정도 되어 보였다.
사실, 마흔이란 나이가 애매하긴 하다.
매력적인 나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눈에 반해 열정을 불사를 만큼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나이는 아니다.
그녀는 희고 큰 치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필요 이상으로 많아 보여 그다지 실용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게 그녀를 본 첫인상이었다.
그녀는 말이 많았고 계속 말하고 싶어 해서
그는 내내 경청하는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그가 수중에 지닌 돈은 80프랑.
이 돈으로 한 달을 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 식당은 한 번 가볼까 하고 빈 마음으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고오급 식당이라 가진 돈으로
2인분의 한 끼 점심을 감당할 수 있는 건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2주 정도 커피 마시는 걸 포기한다면
점심 정도야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식당 메뉴판을 들여다본 뒤
그는 아차 싶었다.
'각오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메뉴판을 들고 있는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그녀는 이런 말로 그를 안심시켰다.
"난 점심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그러지 말아요."
돈 많은 남자가 흔히 그러듯 짐짓 여유로움을 섞은
말투로 그가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지요.
저는 딱 한 가지만 먹는답니다."
속으로 저으기 안심하는 남자.
"작은 생선 한 마리라면 괜찮겠지요."
"여기 연어가 있을지 모르겠네."
웨이터는 지금은 연어 철이 아니라 귀하긴 하지만
오늘 마침 아주 좋은 연어가 들어왔다고 한다.
올해의 첫 연어라고 한다. 방금 들어온...
웨이터는 덧붙인다.
연어 요리가 나올 동안 뭘 드시지 않겠냐고.
"음, 저는 하나 이상 먹지 않아요."
"캐비아라면 또 모를까."
결국 캐비아도 추가 주문.
그는 제일 싼 양고기 요리를 주문했다.
캐비아와 연어를 순삭 하면서
그녀는 문학과 음악을 넘나들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음식값이 모두 얼마나 나올까 ?'
그가 주문한 양고기를 먹을 때 그녀가 말했다.
“점심을 무겁게 먹는 나쁜 습관이 있군요.
건강을 위해 나처럼 한 가지만 먹어 보는 건 어때요?"
그는 대답했다.
“안 그래도 한 가지만 먹을 거예요.”
다시 메뉴판을 들고 다시 웨이터 등장.
이 집 웨이터는 아무래도 수완이 좋은 것 같다.
그녀가 거절할 것처럼 손사래를 치며 하는 말은
“아뇨, 아뇨, 난 점심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니까요.
그저 맛만 보는 거지요."
"대화를 나누려고 명분으로 먹는 거예요.
그 이상은 아니에요."
여기까지 듣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하는 찰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다음 한 마디는
안 그래도 잔뜩 쪼그라든 그의 간뎅이에
그만 결정타를 날리고 말았다.
"혹시 자이언트 아스파라거스 조금이라면 모를까.
그걸 맛보지 않고 파리를 떠난다면 아쉽긴 할 거예요.”
자이언트 아스파라거스라니...
맙소사!
꿈에서조차 맛본 일 없고, 접해볼 엄두도 못 내던 건데.
그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값비싼 요리였다.
순진한 그는 딱한 눈으로 웨이터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오늘 이 식당에 그 재료가 없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 그녀를 제지할 어떤 요령도 없었다.
결국 그녀 앞에는 버터 냄새를 풍기며
요리된 자이언트 아스파라거스가 놓여있었다.
그 고소한 향기는 무엇이라 할까.
여호와께 올려드리는 번제물의 향내와도 같았다.
그녀가 입속으로 아스파라거스를 욱여넣는 걸 보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아스파라거스를 씹으며 그녀는 온갖 예술 얘기와
무슨 발칸반도의 실태까지 도마 위에 올려놓고
열변을 토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만일 계산대에서 돈이 부족하면
돈을 잃어버렸다고 연기를 하거나
시계를 잡히면 되겠다는 궁리에만 골몰했다.
마실 것을 묻는 웨이터에게 그녀는 샴페인을 주문했다.
"제 주치의가 샴페인만 마시라 해서요."
"제 주치의는 샴페인만 마시지 말라 하더군요."
샴페인은 한 잔만 주문이 되었다.
이걸로도 끝은 아니었다.
아직 후식이 남아있다.
" 커피 드셔야죠?"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가 말하자
"네, 아이스크림과 커피."
그녀의 입에서는 엄청난 철학이 쏟아져 나왔다.
짐작건대 아마도 언젠가 써먹을 일을 대비해
열심히 암기해 놓은 것이리라.
그 시점에서 웨이터가 바구니를 꿰차고 나타났다.
바구니 안에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복숭아가 한가득.
"고기를 드셨으니 복숭아는 드시기 곤란하시죠?
하지만 전 간식을 조금 먹었을 뿐이니
이 복숭아를 하나 먹고 싶군요."
어린 소녀의 발그레한 뺨의 빛깔 내지는
이탈리아 풍경화의 수려한 색감이 감도는
복숭아 한 개를 그녀는 낼름 집어 들었다.
'아아, 지금은 복숭아 철도 아닌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복숭아 가격은 얼마일까.
그건 하나님만 아실 테지.'
음식값은 과연 얼마가 나왔을까.
그에게 있던 돈으로 값을 치르니
팁으로 주기엔 약소한 3프랑만 남았다.
3프랑을 팁으로 건네자 쩨쩨한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는 게 분명한 그녀의 눈길이 느껴졌다.
식당을 나왔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동전 한 푼 남지 않았고 그가 그 돈으로 살아야 할
한 달이라는 시간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앞으로 점심으로 저처럼 한 가지 이상
드시지 마세요."
택시에 올라타며 그녀가 말했고
그는 대답했다.
"오늘 저녁은 아무것도 먹지 않을 겁니다."
그는 복수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를 이십 년 만에 만나고 보니
사람이 하지 못하는 복수는 신이 개입하신다는
생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오늘 보니 그녀는 족히 130킬로는
넘어 보였던 것이다.
끝.
첫댓글
마음을 졸이며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ㅎㅎ
염치 없는 여인과 소심한 작가의
안타까운 점심 식사였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