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브리서5장 11절에서 6장 20절 까지는 삽입된 부분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을 설명하면서 왜 우리가 신앙의 초보에 머물면서 완전한데
나가지 못하는가를 말씀합니다. 사실 현대기독교가 신앙의 초보에만 머물러있기
때문에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에 나가지 못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였는데(롬3:23)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거듭나서 회개와 세례를 받는 믿음으로 의를
얻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됩니다(롬5:1-2)
그래서 참 회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모세 이후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내다보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으로 그 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다음 다시 사시고 하늘에 오르신 다음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 성령이 주의 영광을 나타내심이 실상인데 왜 이 사실을 못 믿을까요?
그건 바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면을 지적한
다음에 우리도 완전함에 나아갈 수 있는데 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맹세하시고
소원을 두고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라고 긍정적인 결론을 맺습니다.
6장 2절에 보면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하십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간다’ 이 말씀은 발로 걷는 걸음걸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완전한 것을 받으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초보에서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도이시며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의 모델입니다. 예수님도 육체로부터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히5장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도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그 육체를 벗고 다시 영광으로 들어가시려면
자신도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굉장히 넓은 의미입니다.
죄에서 구원, 사망에서 구원, 가난에서 구원, 질병에서 구원, 음부에서 구원,
어두움에서 구원 등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몸을
벗고 다시 영광의 형체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 구원을 위해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드리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의 모델이 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구원 나의 구원’이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 이렇게 노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십니다. 그분이 성공하셨기 때문에 그 분과 하나가
되어 그분을 쫓아가면 우리도 성공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완전한데 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장 11절부터 시작해서 6장 20절까지
완전한 데에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과 그 방법과 약속에 대해 말씀합니다.
5장 8절부터 10절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죄인과 같이 되셨지만 죄인은 아닙니다.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가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드려서 영광의
보좌에 다시 올라가심으로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일생은 우리의 일생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내 아들이라’ 인정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물과
성령의 세례를 받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겁니다.
예수가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못 박으므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을 보는 겁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몸을 죽여서 영광 속에 들어가신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이 껍데기를
죽여서 영광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왜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대제사장의 반차가 달라졌습니다.
레위지파 제사직분에서 멜기세덱의 계통의 제사직분으로 바뀌는 것은 점프와 같습니다.
육적 족보에서 영적 족보로 점프하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욥은 땅 차원의
완전한 신앙입니다. 물론 42장 이후부터는 하늘 차원의 신앙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시편은 처음부터 하늘 차원의 신앙입니다. 땅 차원의 신앙과 하늘 차원의
신앙은 차이가 큽니다. 육적 신앙의 수준은 맨 날 마귀에게 당하면 하나님이
왜 안 풀어주실까? 하나님이 왜 이다지도 고생을 시키실까?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가난하게 하실까? 하나님이 왜 이토록 내 기도를 안 들어 줄까? 하며
자기가 당하는 모든 불행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바로
육적 신앙입니다. 신앙의 초보에 걸려 있는 겁니다. 미스트 욥, 미세스 욥들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욥에게 손끝이라도 건드린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습니다.
욥이 사탄과 싸워서 늘 당하면서 원망은 하나님께 합니다. 이게 땅에 속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하늘 차원의 신앙은 원수가 바로 자기 자신이며 또 사탄이 원수이며
사람들이 자신을 대적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그 싸움을 하면서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이렇게 나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게 바로 하늘 차원의
신앙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육적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 바뀌는 단계가 있습니다.
저도 육적 신앙일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할 만큼 했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답답하게 하느냐? 하고 기도원에 가서 고함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심방을 가서 집사님 지금은 힘이 들지만 시작은 미약해도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되리라는 말씀처럼 될 줄 믿습니다(욥8:7) 하고 위로를 합니다.
이 말씀은 약방에 감초입니다. 그래서 ‘아! 하나님이 기다렸다가 수십 배로
불려서 왕창 주시려나보다’ 이렇게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성령의
조명을 받고 나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복을 다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할렐루야! 그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세상의 염려와 여러 가지 두려움이 있고, 답답한 일도 있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환경은 환경이고 내 믿음은 믿음입니다. 망하는 것과 믿음은 별개입니다.
바로 다윗 같은 사람입니다. 다윗만큼 못 나고, 문제 많고 고난이 많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록 쫓겨 다니면서도 ‘주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대적이 너무 많습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나는 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하소연 해놓고는 ‘내가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완전히 미친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바로 하늘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늘적인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죠.
율법 이전에는 불문법이 있었습니다. 양심의 법 자체가 불문법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있고 난 다음, 율법이 가입한 이후부터는 죄가 성립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생겼기 때문에 제사의 법과 직분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만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죄를 어떻게 처리 하느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막을 주시고 성막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주셨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말은 살렘의 왕이었습니다. 이 말은 살렘의 나라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살렘이라는 말은 예루살렘의 이름입니다. 평강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4장에 실제로 나타났지만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받고 축복한 다음에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설적이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고 율법도 없고 성막은 구경하지도 못한
우리들에게 내가 너희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데려가는 대 제사장이라 하시며
나타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르면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파악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첫댓글 오래전하나님께서저를이카페로인도하셔서지금껏영혼이살찌우게하심감사합니다
앞으로도더욱더많은이에게복음이전파될수있도록부디목사님강건하여주시길기도합니다
그래서저같잇냇물을찾아갈급하는이에게 생명수를내어주세요. 아멘
할렐루야 16년 만에 터져 나오는 아멘이 주님의 보좌로 올라가는 영광의 찬송이 되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저같이 시냇물을찾아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