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족의 이동과 로마카톨릭교회 이길상가. 게르만족(Germanic peoples)(1) 게르만족의 원주지와 원시사회,
그러나 여기에서 게르만족이라는것은 기원, 4세기 후 이른바 게르만족의 대이동 전 후의 원시 게르만족과 로마제국영내에 세운 여러 부족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후손이 지금은 세계에서중심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막상 그들의 먼 조상인 원시게르만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문자를 사용할줄 몰랐고 국가다운 정치집단도 없었기 때문에 역사가 없는 것은 물론 그 흔한 고고학적인유물이나 유적도 남긴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원주지는 오늘날의 발트해주변이 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수십개의 부족으로 나누어져 목축을 주업으로삼아 짐승의 고기, 젖, 치즈 등을 많이 먹고 짐승의 가죽을 의복이나 도구의 재료로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기위해 점차 농경을 시작하였는데 빙하침식으로 척박한 땅에서 밭갈이에는 무거운 바퀴가달린 쟁기를 소 두 마리나 네 마리가 끌게 하였으며, 비료의 사용이나 윤작의 방법을몰랐던 그들은 토지의 지력(地力)이 다해 맥류와 콩의 수확량이 떨어지면 새로운경작지와 목초지를 찾아 남쪽으로 서서히 이동하여 기원 전후에 이르러 라인강과도나우강을 경계로 로마와 접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의 갈리아총독 카이사르가(58 ~ 50 BC)쓴 "갈리아전기"와 타키투스(독:탁치투스Tacitus, Publius Cornelius:55 ?~117 ?)가 아시아주의 총독 시절(112∼113)이들을 보고 당시 퇴폐한 로마와는 달리 건전한 사회를 이루었던 북방 만족(蠻族)을묘사한 "게르마니아"를 통해서 기록으로 그들의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타키투스를 우리들은 단순한 역사가로알고 있지만 그는 로마의 호민관·재무관·법무관을 거쳐, 97년에 콘술(執政官)에까지 오른 명문 출신의 정치가였습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의하면이들은 혈연, 지연단체의 단계를 넘은 정치적 결합체로서 50여개의 키비타스(Civitas)로분열되어 있었는데, 세습적인 왕에게 지배되는 것과, 선거로 뽑힌 군장에 의해 지배되는두 종류의 체제가 있었으나 중대한 문제는 두 체제 모두 전 자유민으로 구성되는민회(Thing)의 결의를 그들(국가) 최고의 의사로 간주하는 점에서는 구별이 없었다고합니다. 우리가 민회라고 이름을 붙였지만그들의 회의모습을 타키투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게르만족은 거칠고야만스러운 민족이었다. 북유럽, 그들의 땅은 늘 비가 오고 춥고 습한 곳이라 사람이살기가 마땅치 않아 차츰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어 -중략- 왕은 무제한적인 전제 권력을갖고 있지 않으며, 장수들의 지위는 권세보다도 사람의 모범됨에 의해서 정해진다.그들은 싸움에서 사람들을 감탄시켜 그 지위를 얻는다. 사소한 일은 수령들이, 중대사는인민 전체가 협의한다. 그러나 결정권이 인민에게 있는문제도 미리 수령들에 의해서 논의된다. 예기치 않은 긴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한, 일정한 시기, 즉 초승달 혹은 보름달이 뜨면 집회를 갖는다. 그들은 이 때를그들의 일을 시작하는 데 가장 좋은 시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충분한 수가 되었을때, 그들은 무장한 채로 자리에 앉는다. 왕이나 수장들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고함을 질러 거부하고, 마음에 들면 창을 마주친다"라고 기록하였는데 반대는고함을 질러서 그리고 찬성은 무기로서 그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자연의 능력 자체를신으로 생각하는 다신교(多神敎)로서 특히 숲을 매우 신성시하여 그들의 신(神)들에게바쳤고, 신을 울타리로 에워싼다든지 사람과 가까운 모습으로 표현하는 행위는 신들을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금기(禁忌)했다고 합니다. 신들의 자손이라는 왕이나 수령을중심해서 혈연(血緣)에 의한 씨족이 발생하고 다시 몇 개의 씨족이 만나 부족집단을이루고, 이러한 부족집단이 수십개가되어, 새로운 농경지와 목초지를 두고 그들 상호간에반목과 투쟁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타키투스의 표현을 빌리면 "하늘색의날카로운 눈, 황적색의 머리털, 장대한 데다가 공세에만 적합한 튼튼한 체구를 가진그들이,.... 아아 나는 기도드린다 이들 부족 사이에서는 부디 우리들에 대한 애정이싹트고, 반대로 그들 사이에서는 반목이 계속되고 그 상태가 악화되라고.... "그러나 타키투스의 이러한두려움과 소원의 간절한 기도는 절반은 성취되고 나머지는 그 반대가 되었으니, 그들간에대립항쟁은 군사력과 전투력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종사제도(從士制度 : Gefolgschaft)라는게르만적 주종관계가 더욱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종사제도란 상호 성실 의무에바탕을 둔 자유인 대 자유인이, 약탈적 원정(遠征)에 나설 때마다 맺어지는 주종관계로,원정이 끝나면 사라지는 일시적 관계였으나, 그러나 게르만 시대에 이르자 키비타스의수장(首長) 및 그 밖의 유력자 주위에 전시(戰時)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지속적으로유지되는 장기적인 주종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종사의 자격은 자유민인 미성년자에한정되고, 그 지위는 명예로운 것으로 여겼으며, 거의 주인 집에 기거하면서 무예를연마하고 주인으로부터는 무기·말·식사 등을 제공받으면서 전문적 전사(戰士)로서봉사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종사가 수장처럼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명예로 여겼고,수장이 전사했는데도 종사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을 치욕으로 알았으며, 따라서 종사는수장을 돕고 보호해야 하며, 자신의 용감한 행동을 수장의 영광으로 돌리는 것을성스러운 종사의 의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족장은 승리를 위해싸우고, 종사는 족장을 위해 싸운다"라고 타키투스는 그의 게르마니아에서 서술하고있습니다. 그러다가 성년이 되어 가정을 가지면서 주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주종관계가해소되는 형태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라인강과 도나우강 유역까지 남하한게르만인들에게, 이제 까지 와는 전혀 다른 세계, 즉 로마제국의 방벽(防壁)이 이들의남하를 가로막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들과 로마제국간에 투쟁이 시작되었고, 게르만족의일부가 전쟁포로, 병사, 혹은 둔전병(屯田兵)으로 로마영토내에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니,제정초기에 벌써 게르만인과 로마인 사이에는 우리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활발한교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5현제 시대(96 ~ 180)에는 이들을변경지대에 살게 해주고 둔전병으로 로마의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였으며, 그 후 로마의정규군단에 편입시키고 다시 시민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이동이 시작될무렵에는 이미 다수의 게르만인이 로마제국내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많은사람이 정규군단에 편입되어 있었고, 돈 많은 상인도 있었으며, 로마의 장군이나고위관직에 오른 자도 있었습니다. (2) 게르만족의 대 이동(V쉕kerwanderung)
대이동에 대한 직접원인이 동방의훈족의 압박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게르만 족 자체의 내부사정,특히 인구증가에 의한 토지의 부족 등과 더불어 로마제국의 내부사정에도 관계가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당시에 이미 군사적으로약화되어 있었고 내부적 혼란과 모순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기에 게르만족의대이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어느 시대 어느 국가이던간에 외부의 침입자 보다는 착취, 부패, 지도층의 무능으로 대표되는 내부의 적이더 무섭다고 합니다. 게르만족이 처음으로 로마인과큰 규모의 무력으로 충돌한 것은 BC 2세기 말 남(南)갈리아와 북 이탈리아에 침입하면서시작되었고, 그 뒤에도 로마의 갈리아 원정군과 가끔 충돌하였으나 그 때 마다 로마군에 의해서 격퇴되었습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로마의 내정은충실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375년 동 게르만의 고트족(독: 고텐족 Goten)이 아시아에서침입해온 훈족의 압박을 받아 이동을 개시함으로써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전개되었을때의 로마사정은 이미 내부가 병들어 이를 막지 못하였고, 게르만족들은 그들의 왕국을로마영토 각처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세운 부족국가는 북아프리카의반달왕국, 에스파냐의 서고트왕국,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 남프랑스의 부르군트왕국,북프랑스의 프랑크왕국, 영국의 앵글로색슨왕국 북이탈리아에 랑고바르크왕국 등이며,그들의 원주지인 발트해(海) 연안에 남아 있던 북게르만도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3왕국을 세웠습니다. 처음 이동의 불을 붙인 고트족(Goths)은2세기 중엽 도나우강 북안에 서고트족이 자리잡고 있었고, 동고트족은 동쪽 흑해북안에 정주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의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이었던훈족은 2세기경부터 서진(西進)을 시작하여 유럽에 들어와 볼가강·돈강 등 두 강유역에 거주하고 있던 이란계의 알란족을 정복하고 다시 서진하여 375년에 동고트족을핍박하면서 그들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훈족의 진출에 놀란 서고트족의일부는 서쪽으로 도망하였고, 다른 일부는 로마제국의 보호를 구하였는데, 로마 황제발렌스의 허가를 얻어, 376년 도나우강을 건너, 아드리아 지방에 이주하였습니다.이 때 아리우스파의 크리스트교를 신봉하고 있던 서고트족의 숫자는 4만여명 그 중전사는 약 8천명이 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나.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게르만족의 부족국가들(1)대이동을 유발한 훈족훈족(Hun:Huni)이 중앙아시아의초원지대에서 머물다가 남부러시아의 볼가강을 건너 사르마트족을 정벌하고 다시돈강(Don R)을 건너 동서 고트족을 압박하여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유발 시켰는데,대 이동을 촉진 시킨 훈족은 누구일까요? 그들의 정체가 매우 궁금해 집니다. 일부 학자들은 중국의 진(秦)·한(漢)시대에 북방에서 활약한 흉노(匈奴)가 4세기 초 서진(西晉)의 쇠약한 틈을 타서 장안과뤄양을 점령하고 대 약탈을 자행한 것은 남흉노에 속하고 또 다른 서쪽에서 살던흉노(서흉노)가 중국의 역사에서 사라진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유럽에 나타난 것으로보아 이들이 훈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흉노가 훈족이라는 설에는이론(異論)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다만 투르크계(系)의 유목기마민족이라는 것은확실하다고 합니다. 당시 그들의 이상한 모습이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고하는데, 동로마 역사가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몸 집이 뚱뚱하고, 다리가안으로 굽고, 피부가 거무스레하며, 귀가 빳빳하고, 코가 넓죽하며, 눈이 위로 찢어지고,머리털이 곤두서 있어 비 자루를 거꾸로 세운 것 같다"고하였으며, 짐승의 털가죽으로옷을 해 입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급한 성질은 용서가 없는 것이 이상한 맹수 같다고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부족단위로 생활하는유목민들에게 왕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자를 만나면 그를 중심으로유목국가를 건설하고 주변 민족을 약탈하거나 통상로를 확보하여, 통행세나 공납을받아 국가의 재정을 운영하는데, 훈족 역시 4세기 말경 추장 루아를 왕으로 받들고,오늘날의 헝가리·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했고, 다음의 아틸라왕 때에는 전성기를이루어, 주변의 게르만 제 부족을 복속시켜 흑해 북 안에서 라인 강에 이르는 대제국을수립했습니다. 그러나 대제국으로서의 행정조직이나통치기술을 몰랐던 그들은 주변을 약탈하거나 공납을 요구하는 것이 통상적인 그들의수법이고, 징세나 치안 등의 내부적 기틀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다만 루아왕의 조카 아틸라(434-453)가왕이 되고 나서는 약탈이 더욱 심해져서, 로마제국에 큰 위협을 주었는데 동로마제국의사절과 함께 아틸라의 궁정에 갔던 프리수쿠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역시 앞서 얘기한훈족의 신체적 특징을 다 갖추고 있었고, 다만 주위의 모든 것이 호사롭기는 해도아틸라 자신만은 의복이나 사용하는 식기가 검소하였고, 주위가 아무리 소란해도그 자신은 숲처럼 조용했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였는지 울던 아이도 아틸라가 온다고 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합니다. 질박한 그들의만용(蠻勇)은 힘으로 지배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복잡하고 골치 아픈 행정능력은 없었기때문에 로마제국을 상대로 군사적으로 로마제국을 지원하고, 대신 공납을 받는 조건으로동맹을 맺었습니다. 아틸라왕국과 동서 로마제국과의동맹은, 말이 동맹이지 동서 로마제국은 아틸라의 주요 재원이 였다고 합니다. 그는매년 로마제국에 대하여 엄청난 공물을 요구하였고, 데오도시우스2세의 동로마제국은그의 공물을 채우기 위해 파산에 이를 지경이 였다고 합니다. 이에 견디지 못한 동서 로마제국은태도를 바꾸어 강경하게 나오자 아틸라는 갈리아에 원정했으나 실패하고(451) 다시이탈리아에 침입하여 여러 도시를 약탈하였습니다. 교황 레오1세의 간곡한 만류로로마시에 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헝가리의 본거지로 돌아가서 동로마제국을 침범할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일디코(Ildico)라는 처녀와 결혼한 다음날 갑자기 피를 토하면서죽었다고 합니다. 대개의 유목국가가 그러하듯이 강력한 지도자가 사라짐과 동시에아틸라 제국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2) 니벨룽겐의노래(Nibelungenlied, Das)독일문학의 제1차 황금시대인중세의 영웅 서사시로서, 독일 기사문학(騎士文學)의 최대걸작일 뿐만 아니라, 독일문학고전(古典)의 최고봉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인 니벨룽겐의노래(Nibelungenlied, Das)의무대가 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등장하는 크림힐트가 일디코이고 훈족의 왕에첼(Etzel)이 아틸라라고 합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제1부가 <지크프리트(Siegfried)의죽음>, 제2부는 <크림힐트의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잠깐 따라가보겠습니다. 제1부 - 부르군트족의 왕 군터의누이동생인 크림힐트가 훗날 자기 남편이 될 사랑하는 기사를 여의는 꿈을 꾸게 됩니다.크림힐트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네덜란드 왕자 지크프리트가 보름의 성을 방문하게되는데, 지크프리트는 전에 니벨룽겐이란 소인족(小人族)을 정복하였을 때 보물을얻었는데, 당시 그 보물을 지키고 있던 용(龍)을 퇴치할 때, 그 용의 피를 뒤집어쓰고불사신(不死身)의 영웅이 되었으나, 다만 등의 일부분에 보리수 나뭇잎이 붙어 있어서피가 묻지 않아, 거기가 유일한 약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크프리트는 약 1년 가까이그 곳에 머물다가 겨우 크림힐트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한편 보름의 성주(城主)인군터는 이젠란트(아이슬란드)의 여왕인 브룬힐트에게 구혼하고 싶었지만, 그녀는무예로써 겨루어 자기를 이기는 남자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므로 자신이없었습니다. 그는 손님인 지크프리트에게 도움을청하고, 만일 일이 잘 되면 자기 누이동생을 왕비로 주겠다고 약속하게 되고, 지크프리트는니벨룽겐의 보물을 이용하여 몸을 숨기고(투명인간이 되어) 군터를 몰래 도와 브룬힐트를이기게 하여 줌으로써 두 쌍의 부부가 출현하게 됩니다. 그 후 10년 만에 지크프리트 부부는보름을 다시 방문하게 되고, 이 때 크림힐트와 브룬힐트는 제각기 자기 남편을 자랑하다가말다툼을 하게 되며, 이 말다툼의 결과로 결혼하기까지의 비밀이 폭로되고, 지크프리트는브룬힐트의 원한을 사게 됩니다. 브룬힐트는 복수를 하기 위해자기 남편의 부하인 하겐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게 되고, 하겐 역시 평소에 지크프리트가자기보다 강자(强者)라는 것에 질투심을 품고 있던 터라, 자기 주인에 대한 의무라는구실로 그녀의 편이되기를 약속합니다. 하겐은 책략으로 지크프리트의 몸 중 꼭 한군데에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크림힐트로부터 알아내고, 2번째 간계로 뒤쪽에서지크프리트를 암살합니다. 제2부 - 크림힐트는 복수를 위해훈족의 왕인 에첼과 재혼하고, 잠시도 복수를 잊지 않고 있던 그녀는 13년 후에,자기 2번째 남편에게 부탁하여 친정 오빠와 그의 신하를 초청하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다 살해하여 복수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늙은 영웅 힐데브란트에 의해의분의 칼을 맞고 죽게 된다는 것이 그 대략의 내용입니다. 니벨룽겐의 노래가 437년에훈족이 중부 라인지방에서 부르군트 왕국을 멸망시킨 일이 있으며, 453년에 훈족의왕 아틸라가 갑자기 잠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게르만 계통의 왕비 곁에서 급사한 일을두고 전설을 가미하여 수준 높은 기사문학을 이루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3)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게르만의 부족 국가들앞에서 이야기한 4만명의 서고트족이로마제국의 허가를 얻어 이주한 곳은 토지가 척박해서 살기 힘들고, 더구나 로마관헌의 압박도 심하였으며, 또한 그보다 더 서쪽에 있던 동고트족의 일부가 로마제국영토 내로 이주하겠다고 허가를 요청하자 동로마황제 발렌스는 문제의 게르만인을얕잡아보고 서로마황제의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서고트족의1만8천명과 싸움을 시작했습니다(378) 아시아의 유목민 알란족으로부터등자(橙子)와 박차(拍車)의 기마전술을 익힌 고트군은 아드리아노플전투에서 로마의기병대를 격파하고 이어서 중장보병을 괴멸시켰으며 동로마황제 발렌스를 패사(敗死)시켰습니다. 이 패전으로 동로마제국의 방벽은무너지고 게르만인들은 밀물처럼 밀려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위(帝位)를계승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친(親)게르만 정책을 취하여 서고트족의 침입을 저지하고그들을 도나우강쪽에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서고트족은 도나우(다뉴브)강하류 남안(南岸)에 이동하여 비잔틴제국의 영토인 트라키아에 정주하였다가, 395년테오도시우스가 죽자 젊은 지도자 알라리크1세(Alaric : 370 ?~410)를 왕으로 선출하고(395∼410),마케도니아로부터 그리스를 공략하였으나 397년 로마의 장군 스틸리코의 대군을 맞아에페이로스에서 패했고, 이듬해 비잔틴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화약을 맺어 일리리쿰(아드리아해東岸)의 지배권을 인정받았습니다. 401년 북이탈리아에 침입하여여러 도시를 빼앗고, 403년에 베로나에 침입하였으나 그때마다 로마의 장군 스틸리코에게격퇴되었는데, 스틸리코는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간 알라리크1세의 만행으로부터로마를 구출했으나, 서로마황제 호노리우스는 그가 게르만출신이라 하여 의심한 나머지살해(408)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습니다. 스틸리코의 죽음을 확인한 알라리크1세는세 번째로 로마에 입성하여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돈을 받고 물러났다가, 409년다시 로마를 위협하고 로마시의 지사 아탈루스를 대립황제(對立皇帝)로 세웠습니다.이듬해 다시 이를 폐하고, 호노리우스와 유리한 조건으로 화약을 강요하였으나, 호노리우스가이를 거절하자 마침내 로마시내로 쳐들어가 "무성한 풀은 성긴 풀 보다 베기가쉽다"고하면서 3일 동안에 걸쳐 대 약탈을 감행하였는데(410), 이 기회에 노예들은게르만의 편이되어 그때까지 주인으로 행세했던 로마인들에게 피로서 보복하니 로마는약탈과 피로 물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게르만 추장으로서는 최초의 로마시 침입이었습니다. 그는 대단한 미인으로 알려진호노리우스황제의 누이 클라키디아를 납치하여 카르타고에 가기 위해서 아프리카원정 길에 올랐다가 폭풍우를 만나 포기하고 북이탈리아로 가던 중 급사하였다고합니다. 클라키디아는 후일 다시 서고트의 두 번째 왕 아타울프와 결혼합니다. 이에 다급해진 서로마제국이 이탈리아본국의 방위를 위해 라인강 국경의 수비군단을 소환하게 되자, 지키는 군대가 없는국경을 마음 놓고 넘어오게 되어 게르만계의 여러 부족은 제국 안으로의 이동이 더욱활발하였습니다. 이래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후반까지, 약 1세기간에 걸쳐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은 이탈리아에 동고트왕국, 이베리아반도에서고트왕국, 북아프리카에 반달왕국, 북갈리아에 프랑크왕국, 서갈리아에 부르군트왕국,브리타니아에 앵글로 색슨왕국 등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서로마제국의 용병대장오도아케르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제 네포스를 추방하여 서로마제국은 멸망되었습니다(476)그러나 오도아케르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다만 로마영내에서게르만의 부족국가를 이루는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이 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의군대가 대부분 게르만족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였습니다.결과 적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여 고대세계가 막을 내리고 게르만족이 이끄는 중세가서서히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 이질집단간의 융합과 갈등(1) 게르만 부족국가들의 고민로마제국의 장성 밖에서 로마문명을동경(憧憬)했던 게르만족의 소원은 이룩되었으나 수 적으로 월등히 열세인데다가문화적으로도 로마시민이나 갈로로마인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믿을만한 통계에 의하면 서고트족이아타울프의 인솔하에 이베리아반도에 들어 갔을 때 그들의 숫자는 10만여명이 였으나그곳의 주민은 720만 정도였고,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 지역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숫자는 8만이 였는데 그곳의 로마시민이나 로마계 주민은 약 6백만,테오도리쿠스가 이탈리아에 동고트왕국을 세웠을 때 게르만의 숫자는 약 10만 로마시민은600만이 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정은 북갈리아의 프랑크왕국이나서갈리아에 세운 부르군트왕국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절대 숫자에서는 로마계 주민들의상대가 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문화적인차이는 로마계 주민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그것은 유목과 이동으로 살아온 게르만 인들에게 로마적인 교양이나 지적인 취미생활은고사하고, 입에서 풍기는 고약한 음식 냄새와 아무렇게나 먹어대는 식사모습, 알아들을 수도 없는 노래를 목청을 돋구어 부르는 소란 등은 로마시민들이 이들을 혐오하게되거나 얕잡아 보게 되겠지요. 이런 게르만 인들에게 로마시민들을 마음속 깊이 존경을받으면서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르만 인들이 로마에 침입한것은 제국을 지배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제국 안에서 살기 위해서 였다고 보아야 합니다.음산한 기후와 척박한 토양에서 생활해야 했던 이들에게 밝은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는지중해 연안은 이른바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향(理想鄕)이 될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북아프리카는 "약속의 땅"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는 당시 로마제국으로서는조금도 포기할 수 없는 곡창지대로서 식량창고와 같은 구실을 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이아프리카를 잃는다면 이탈리아도 갈리아도 굶주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게르만 인들의 이동경로를추적해 보면 이들이 한사코 갈려고 했던 곳이 지중해 연안, 특히 북아프리카였고로마제국은 이를 필사 적으로 저지 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했습니다. 지금도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한여름에도 유럽 인들은 그늘을 찾지 않고 땡 볕에서 먹고마시며 담소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고, 독일 쪽으로 갈수록 짠 음식과 말라 빠진빵 조각을 챙기고, 전 가족이 자동차를 타고 남쪽(지중해)으로 휴가를 떠나는 모습을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햇볕을 피해서 그늘을 찾아 쉬고 있은 사람들 중에는우리나라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로마시민과 로마계주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지중해 일대에 무리하게 이동하여 각 부족 단위의 왕국을건설한 게르만 인들은, 그들 자체의 모순, 이를테면 이곳에서 살기는 살아야 되겠고문화적 수준이나 수 적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선 주민들이 버티고 있는데이것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서 처신을가장 어렵게 만든 것이 이들의 왕이 였습니다. 게르만의 왕들이 왕으로서 행세한것은 그들의 부족 내에서이고 로마시민이나 로마계 주민에 대해서는, 로마제국의한 귀족, 장군, 집정관(콘술) 등으로 행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족국가의성립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왕이 로마황제로부터 그런 작위(爵位)를 받지않으면 안되었고, 다음에는 로마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주위의 로마계주민들과 공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1세가 로마시를3일간 약탈한 것도 장군의 지위를 승인받지 못한 분풀이가 주된 원인이 였다고 합니다.그러므로 게르만의 왕들은 동서 로마제국의 황제들과 동맹을 맺는데 이것은 대등한입장에서의 동맹관계가 아니고 로마황제가 이들을 고관으로 임명하는 주종(主從)관계에불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게르만의 왕들은 로마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다는 것이지요. (2) 로마속의 게르만인들국왕이 스스로 택한 황제와의주종관계를 대내적으로도 이를 원용하여 가급적이면 큰 변동없이 통치하고자 했던것이 그들의 기본방침이었습니다. 어느 부족국가에서나 로마계 주민이중용되어 국사를 맡았고, 국왕의 측근으로 최고 정책의 결정에도 이들의 영향이 컸다고합니다. 따라서 일반 로마계 주민들의 생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것이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기 시작한 것이 라틴어로 관습법(慣習法)을성문화(成文化)하는 작업이 추진되어 소위 부족법전(部族法典)이 생겨 나는데 속인주의(屬人主義)를채택하여 같은 영내에 살아도 게르만인과 로마계 주민들이 다른 법의 적용을 받았습니다.결국 로마계 주민들은 종전의 그들 법 속에서 계속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원주지에서 살던 게르만인들이부족단위로 남쪽을 향해서 이동을 시작한 목적은 보다 좋은 땅을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보다 좋은 땅을 얻기 위해서 서서히 남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이 겪은 고초 또한 남다른점이 많습니다. 소나 말이 끄는 수레에 그들의보잘 것 없는 가재도구를 싣고, 지친가족을 재촉하여 가다가 적을 만나면 수레를원진(圓陣)으로 배치하여 죽음을 넘나드는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들의 길고도먼 이동의 끝 로마제국에 와서도 이 관행은 버리지를 못하고 제국 내의 여러 곳을찾아다니다가 어느 곳을 차지하면 그곳의 땅을 몰수하여 그들 부족에게 분배하여경작토록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서고트왕국과부르군트왕국으로서 서고트왕국과 부르군트왕국은 로마계 주민들로부터 소유지의3분지2를 몰수하였고, 동고트왕국은 3분지1을 몰수하여 그들 부족 민 에게 분배하여경작토록 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관행은 2천년이 지난후그들의 후손인 앵글로아메리칸들에 의해서 다시 연출되었습니다. 포장마차에 의지해서서부로 서부로 향하다가 인디언을 만나면 마차를 원진으로 배치하여 싸우고, 좋은땅에 이르면 그곳에 머물다가 강자가 나타나면 죽기로 싸우거나 쫓겨서 다시 옮기고...서쪽바다(태평양)에 다다르자 이제는 바이킹의 후예들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누비다가일본과 큰 전쟁을 일으키고.......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인 로마제국으로볼 때 이들이 차지한 지역이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로마계 주민들에게는큰 변동이 없었습니다. 다만 지배층이 로마의 귀족에서 게르만의 전사계급으로 바뀌었다는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한편에서는 비록게르만인에 대한 경멸감은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소박한 통치를 환영하기도 하였습니다.특히 로마계 주민들 가운데 빈민(貧民), 미망인(未亡人), 고아(孤兒) 등은 다시는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고 게르만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로마제국보다는훨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것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빈민, 미망인, 고아 이외의로마계 주민들도 내놓고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생활 역시 로마제국의 통치때 보다 못하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제정(帝政)말기 수많은용병(傭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財政:돈)이 필요했고 이것들이 전부주민들의 세금으로 충당되었기 때문에 항상 중세(重稅)에 시달려야 했다가, 게르만인들이들어오면서 그들이 군역(軍役)을 담당하게 되었고, 따라서 군역을 충당하기 위해서돈을 거둘 필요가 없게 되자, 로마계 주민들은 무거운 세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게르만의 전통이 군역에종사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였으며 로마제국내에 들어와서도 이런 전통이 지켜져,토지를 분배해 주면 이 토지에서 생활을 해결하고 기꺼이 군역에 종사했는데 이것이로마계 주민들로부터 큰 호감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인과 게르만인이융합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는 아직도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간의 신앙의 차이였습니다. 라. 로마 카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1) 카톨릭교회의 성립기원 전후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유대에서 예수가 태어나 메시아를 갈구하던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면서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나, 그의 가르침이 유대교의 율법학자들로부터 미움을 사게되어 신을 모독(瀆神)하고 왕을 사칭했다 하여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예수(Jesus)는 "하느님(야훼)은구원해 주신다"는 뜻을 담고 있는 헤브라이 언어이며 크리스트(Christ)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메시아)의 뜻을 가진 그리스 언어라고 합니다. 당시 예수를 재판했다는 로마총독필라투스(Pilatos, Pontior)는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의 고소로 그에게 잡혀 오자,그리스도의 무죄를 인정하여, 과월절 특사로 그를 방면코자 하였으나 민중의 강요에굴복하여, 그리스도 대신에 강도 바라바를 석방하고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고합니다. 그의 생애는 짧은 기간(34년 ?)이었고,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이렇다 할 교육을 받은 흔적도 없다고 합니다. 그의 사후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보통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모아지고, 다시 극적인 장면들로 윤색 가필되어 복음(福音)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제국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후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 등의헌신적인 복음전파에 따라 신자가 늘어나고, 교단조직과 종교적인 제식(祭式)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로마제국으로부터 받은 수 많은 박해와 고난에 대해서는 본 칼럼 로마제국에서그 편린을 적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게르만족 이동 기의 크리스트교에 대해서간단히 적고자 합니다. 예수의 사후 그의 복음서와 사도들의행적을 적은 것을 신약이라 하고 그 전의 유대교의 경전을 구약이라 해서 신·구약성경을경전으로 채택하여 교세를 넓힘에 따라 신자가 늘어나고 교회수도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이 교구제도가 발생하여이른바 5대 교구가 성립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로마교구(로마교회)가 베드로가 세웠다해서 모든 교회의 수장(首長)이 되었고, 로마제국에서도 이미 제국 내에 널리 퍼진이 신흥종교를 더 이상 탄압할 수 없다고 느낀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밀라노칙령으로크리스트교를 공인하게 되었습니다(313)
여기에서 니케아 신경(信經)이채택되고 이른바 3위 1체설(trinitas) 즉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啓示)한 하느님은성부(聖父)·성자(聖子) 및 성령(聖靈)의 세 위격(位格)을 가지며, 이 세 위격은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고, 유일한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정식 교리로 공인하였고,예수와 하느님(야훼)를 별개로(양자) 보았던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몰려서 파문(破門)당하고 유형에 처해 졌습니다. 그 후 콘스탄티노폴 공의회(381)에서3위 1체설이 다시 채택되어 정통 신조가 되었습니다. 이 때 정식으로 카톨릭교회(가톨릭:Catholic)라고부르게 되었는데 카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그리스언어라고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어느 개인 어느민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에게 미쳐야 된다는 것이지요. 게르만의 침략이본격화되자 테오도시우스황제는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선언하였는데(392) 이를 두고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병든 로마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또 다른 신을불러 들였을 때 정작 로마를 지키던 신들은 이미 로마를 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이새로운 신(그리스도)도 로마를 구하지는 못하였고, 결국 로마제국은 망했다는 것입니다. (2) 게르만족의 개종이동 이전에 서고트족의 불(울)필라(Wulfila: 311~382)는 콘스탄티노폴에서 아리우스파로 개종하고 사교(司敎)가 되어 고트어로성서를 번역하고 재빨리 게르만 사회로 들어가 주로 동게르만계의 부족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그 결과 이동 기의 게르만족의 많은 부족들은 크리스트교를 믿고 있었으나, 그것이하필이면 이단으로 파문당한 아리우스파 였기 때문에 로마계 주민들과의 1차적인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불필라가 전도하고근 1세기가 지나면서 게르만적인 토속신앙과 밀착되어 크리스트교의 본질은 찾기힘들고 제식(祭式)도 고트어를 사용하면서 로마계 주민들의 눈에는 이상한(?) 야만적인미신의 형태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라틴어만을 사용하면서 엄격한 제식(祭式)을 지키고있던 로마계 주민들에게 이것이 받아 질리는 없겠지요. 종교란 출생지에서는 그 나름대로의이유가 있어서 거기에 합당한 형식이 갖추어 저지만 이것이 다른 지역으로 들어가면그곳의 풍속과 습관, 정치적인 이유 및 토속신앙과 밀착되어 그 형질의 일부가 변형되는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변형된 내용이 의식으로 굳어져 맹신(盲信)에 이르게되면 어떤 힘도 이것을 고칠 수 없는 또 다른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윤회해탈과 출가주의를 기본으로하는 불교가 유목사회로 들어가서는 라마불교(티베트불교)가 되었고 우리나라에 와서는호국불교(왕실불교)로 자리 잡게 되는 것도 우연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로마카톨릭이선교사를 통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바뀌게된 것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서는 비록자생(自生)하였으나 조상숭배의 상징적인 제사(祭祀)가 우상숭배라 하여 교리로서금지하자 박해와 순교자(殉敎者)가 나타나는 것은 차치하고, 신자가 늘어나지 않게되자 드디어 조상제사를 허용하는 교리의 신축성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역사적으로수없이 나타나는데 게르만족의 이동 시기에도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의 모든 부족이 결국에 가서는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하였으나,그들의 심성 깊이 자리잡고 있던 신앙의 본질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 한가지 예가 고트족이 교회를건축하면서 그들의 심성에는 지상의 인간이 천상의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교회를 높이 세워 하느님과 거리를 좁혀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건축상의 기술문제와 비용등을 감안하여 건물 자체는 높일 수 없고 대신에 뾰족하게 탑을 만들어(尖塔)세움으로서 천상(天上)의 세계에 상징적으로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처음 이를 본 로마계 주민들은그들의 무식을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것을 모방하게되어, 고딕양식이라는 이름으로 건축사에 빛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딕이란고트 적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런 저런 교리상의 문제로게르만부족의 왕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차이는 이들간에결혼도 거래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융화란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게르만의 왕들이 카톨릭을탄압하지 못한 이유는 동로마제국을 종주국으로 섬겨 황제로부터 봉작(封爵)을 받아야로마계 주민을 그 남아 포섭할 수 있었고, 그 많은 로마계 주민들을 아리우스파로개종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게르만인들을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하기도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해서는 일체의 간섭을 안 하는 것이그들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의 길이 였습니다. (3) 수도원과 로마 카톨릭교회의 발전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로마 사회가불안해 지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게 되었고 앞에서 언급한 데로 게르만의 왕들은아무런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순수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고행(苦行)과 금욕(禁慾)으로초자연의 진리를 파악하려는 수도회(修道會:ordo/congregatio)가 생겨났는데 그 기원은초기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의 은수사(隱修士)들이 혼자 숨어서 수도생활을 하는데서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3세기 말 이집트의 수사안토니우스가 은수사들을 가까운 곳에 모아 은수사원(隱修士院)을 세워 수도복을 입게 하였는데, 이것이 수도원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4세기 중엽 알렉산드리아의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수도원 규칙을 제정하였고, 파코미우스는 이것을 발전시켜서수도원 주위에 담을 쌓아 세속과 단절시켜 금역제(禁域制)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동방 수도회는서유럽으로 전파되었고, 그 영향을 받아 4세기 중엽부터 정식 수도회가 발족되었습니다.이러한 운동이 활발해진 것은 베네딕투스가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있는 몬테카시노의산기슭에 수도원을 세우고(529?), 청빈(淸貧), 동정(童貞), 복종(服從)을 주 내용으로하는 전문(前文)과 73장(章)의 베네딕투스 계율(戒律)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훗날모든 수도회(원)의 수칙(守則)이 되어 새로운 교회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편 로마교회가 베드로의 정통성을인정받아 모든 교회의 지상(至上)권을 선언한 것은 아틸라의 로마시 침입을 간곡하게만류했던 교황 레오1세 였습니다. 그 후 로마의 교황은 모든 교회의 수위권을 수행할수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세속군주와의 성직 서임권을 두고마찰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서로마제국이 멸망된 후 게르만부족의 왕들은동로마황제와의 사이에 신속(臣屬)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교황주의를 채택한 동로마제국의황제가 모든 교회에 대해서 간섭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가 동로마제국의 황제유스티니아누스였고, 두 번째가 랑고바르트족의 왕알보인 였습니다. 유스티니아황제는 로마제국을부흥하기 위해서 그의 제위 기간 중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고, 지중해 세계를 거의통일하자 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이른바 유스티니아법전이라고 말하는 로마대법전을편찬하였으며, 수도 콘스탄티노폴에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외견상 로마제국의 부흥을 이룬듯 하였으나 그의 정복전쟁과 대규모사업은 국고를 탕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무거운 세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호응을 얻지 못하고 그의 사후 제국은 다시 옛 상태로환원되었지만 이 기간동안 로마교회에 대해서도 간섭이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또 한편으로 로마교회를 어렵게만든 것은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이탈리아 침입이었습니다. 이들은 수비에족에 속하며, 엘베강(江)하류지역에서 목축생활을 하면서 정착 지를 찾아다니다가 로마의 쇠락에 즈음하여게피다에족을 정복하고 남쪽으로 대이동하였습니다. 이 때 그들의 왕 알보인은 유스티니아누스와신속(臣屬)관계를 맺고 그들의 남하를 저지했던 게피다족에을 멸망시키고,게피다에족의왕 구니문트의 딸 로자문트를 왕비로 삼았는데 그의 장인이 되는 구니문트의 두 개골로잔을 만들어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지 삼년 후, 568년 5만명의부족민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삼 년 간의 공방전 끝에 북부이탈리아의 파비아를점령하고 그곳에 랑고바르드왕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오늘날 이지역을 롬바르디아라고부르는 것은 이 랑고바르드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알보인왕은 구니문트의 두 개골로만든 잔으로 술을 따라 그의 왕비이며 구니문트의 딸인 로자문트에게 먹이는 횡포를부렸고, 부친의 두개골(頭蓋骨) 잔으로 치욕의 술을 마신 로자문트는 그 복수로 알보인을죽였습니다. 그 후 랑고바르드왕국은 후계자들에게이어져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토스카나에서 스포레트·베네벤트 지방까지 지배하게되었으나, 각지에 배치된 호족을 중심으로 독립성이 강한 여러 공국(公國)이 형성되어,유일한 후계자 클레프왕의 사후에는 35명의 대공(大公)들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펼친이 왕국은 다른 게르만부족들과는 달리 로마 교황청을 크게 위협하였습니다. 그 왕알보인의 야만적인 행동에서 보이듯이 이들이 기독교적인 교양과는 너무나 거리가멀었고, 교황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며, 지역적으로도 교황청과 가까이있으면서 교황청을 수 없이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원로원 의원으로명문 출신이 였고, 그 역시 로마 시장(572~573)등의 요직을 거쳤으나, 어느날 갑자기마음을 바꾸어, 그의 전재산을 정리한 돈으로 로마와 시칠리아 등지에 7개소에 수도원을설립하고 스스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교황 펠라기우스 2의사절로 동로마제국으로 갔는데, 목적은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원조를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을때, 동로마제국의 사정도 핍박하여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7년간 그곳에 체재하면서많은 보고 배웠다고 합니다. 다시 로마로 돌아와 수도원장 등을 지내다가 590년 교황이되었습니다. 이래서 최초의 수도사 출신 교황이탄생하였습니다. 그는 탁월한 정치력으로 이탈리아에서 로마 교회의 독립성을 확고하게하였으며, 동로마제국과 랑고바르드족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등 외교 역량도 돋보였습니다. 성직의 매매를 금하고 복음화사업·사회사업을장려하였으며, 특히 빈민·난민·포로·노예를 보호하면서, 로마·시칠리아 등의교황령(敎皇領)을 확보하고 교황권을 확장하였습니다. 게르만 민족의 중요성을 인정하여,그들의 침략을 앉아서 막을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를 개종(改宗)시켜 교황권의 지지자로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신앙에 물들지 않았던 앵글로색슨족을베네딕투스파 수도원 출신의 선교사들을 보내어 1년 만에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성공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이민족에 대한개종이나 선교사업은 베네딕투스파가 첨병이 되어 많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이것이로마교황권을 높이는 결정적인 전기(轉機)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생전에 전도 사업이 성공한것은 앵글로색슨족에 한정되나, 그의 사후에도 베네딕투스파의 선교사업은 계속되어서유럽을 카톨릭의 단일 정신세계로 통일하고, 로마카톨릭교회가 프랑크왕국과 손을잡고 나란히 유럽의 중세를 이끌어 가는 한 축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구약성경의 지혜와문학이 담긴 욥기에 주해(註解)를 썼으며 복음서를 비롯하여 많은 성서해설과 서간문·사목규칙(司牧規則)등의 저술을 통하여 종교·문학 방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주기도문을만들고 성가집을 편찬하게 하여 교회음악 발전에도 이바지하였습니다. 마. 유럽세계를 형성한 프랑크 왕국(독:프랑켄왕국:Frankenreich)(481∼751).(1)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프랑크라는 명칭은 자유와 용기를뜻하는 것으로, 사료(史料)에 처음 등장한 것은 3세기 중엽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4세기 초엽 이래 라인강을 중심으로 서게르만계의 살리족, 리부아리족, 상(上)프랑크족의3대 부족이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중 살리족은 민족 이동기에라인강(江)을 넘고, 서진(西進)하여 브뤼셀 부근에 소왕국을 세우고(430) 메로비스와 그의 아들 힐데리히 1세 때 이미 살리족을 통일하고, 갈리아의 로마군과 결탁하여서(西)고트 및 작센인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481년 뒤를 이은 그의 아들 클로비스는살리족뿐만 아니라 리브아리족·상(上)프랑크족까지 병합하여 프랑크왕국을 건립하였으며,루아르강 유역에 남아 있던 로마의 마지막 세력인 시아그리우스의 군대를 격파하여이 나라를 멸망시키고 로마인의 갈리아 지배권을 타도하였습니다(486). 이어 서(西)고트왕국과부르군트왕국을 토벌하고 아라망족을 정복하여, 갈리아 지방과 남서 독일지방까지그 세력을 확대시키고, 가톨릭교로 개종하여(496) 로마 교회와의 제휴를 도모하였습니다.
테우데리히 1세는 동부 및 샹파뉴를소유하고, 클로도미르는 아키타니아, 힐데베르트 1세와 클로타르 1세는 남·북 갈리아지방의 주요한 왕령지를 분할하여 각각 영유케 함으로서 4국으로 분열되었고, 이러한 분할상속은 힘있는 자식에게합쳐지고 그가 죽으면 다시 흩어지기를 계속 반복하다가 대토지 소유에 바탕을 둔귀족세력이 점차 강대해져, 정치상의 실권은 이들 귀족들 중 가장 세력이 강한 각분국 궁재(宮宰 : Hausmeier)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그림은 클로비스(독;클로드빅:Chlodwig)의네 아들이 다정스럽게 앉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잔인성이 그 아들이라 해서 다를리가없겠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입장에서 자식들만은 우애있는 형제가 되기를 바랐을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의 뜻대로 그렇게만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죽이고 또 죽이는 그들간의 싸움(?)을 여기에서 클로비스네 아들, 오른쪽의 막내 클로타르 이야기만 잠시 따라가 보겠습니다. 큰형이 죽자 막네동생은 큰형의아들(그의 조카)들을 전부 죽이고 땅을 뺐고, 그러다가 둘째형과 셋째형에게 맞아죽을 번 하였으나 그 모친의 덕택으로 죽음을 면하고, 그 형들이 죽자 조카들을 죽이거나추방하고 왕국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형이 죽자 세명의 형수를 차례대로 모두 자기의 처로 만들었다고 합니다.그러나 그것도 그 아들들에가면 다시 그의 아버지가 했던 그대로 연출되어 이 왕국이 망하고서야 골육상쟁도부도덕한 왕실의 행위도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새로운세계정복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는데 예언자 마호메드는 이슬람교를 창시하고(622)그 후계자들을 칼리프라하여 제정일치의 강력한 종교국가가 탄생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코란을 들고 종교전파를 목적으로 정복전쟁을 수행하여 삽시간에 북아프리카 일대를이슬람화 시키고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 그 때 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서고트왕국을점령하고(711), 아라비아인과 무어인, 그리고 고트인 까지 가세한 혼성부대를 편성하여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을 쳐들어 왔습니다. 이 때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카롤링거가(家)의 샤를 마르텔(독,Karl Martell)은 투르와 프와티에 사이에서 유럽역사상처음으로 중무장한 기병대를 이끌고 7일간이 전투 끝에 이슬람군을 격파하여(732)프랑크왕국을 지켰고 이로 인해서 프랑크 전국의 궁재를 겸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권력이 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소(小)피핀의 쿠데타로751년 최후의 메로빙거가 국왕 힐데리히 3세가 폐위되고, 카롤링거왕조가 그 뒤를이어 프랑크왕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메로빙거왕조는 단절되어 역사의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이것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에대한 이야기는 끝을 내고 프랑크왕국과 카톨릭교회에 대해서는 중세유럽에서 다시쓰기로 하겠습니다. 언제나 서양사를 비롯한 세계사에대한 기록을 할 때마다 느끼는 공통적인 생각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본인 자신도 헷갈릴때가 여러 번 있는데 이 글을 읽는 입장에서는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할까 생각해 봅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첫째로 역사라는 것이 과거사실, 그것도 어제가 아닌 수천 년에서 수백 년 전에 있었던이야기를 오늘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공간적으로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에서 이해하는데는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아침인사로 하는 GoodMorning은 독일어의 Guten Morgen이 그 원조가 되는데 독일의 기후는 음산하고 춥고비바람이 거세기 때문에 태양이 밝게 빛나면 그들에게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이런 좋은 아침을 염원하면서 인사말을 만들게 되었겠지요. 지금은 달라졌지만 배고프고 굶주림을참고 살았던 우리들은 아침 진지(식사) 자셨습니까(잡수셨습니까)?라고 물어보는것이 아침 인사였었습니다.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그 보다 더 예절바른인사말은 없었겠지요. 지금도 반가운 친척이나 친구집에 가면 먼저 물어보는 말이 "밥 먹었느냐?" 그리고 "밥 많이 먹어라"하는소리를 한 두 번 은 들어 보았을 줄 압니다.서양인들의 낯선 사람에게 보내는 미소라는것도 총을 난사하는 무리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낯선 사람을만나면 적의가 없다는(총을 쏠 생각이 없다는) 의사 표시가 미소였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이야 사정이 달라졌지만그 원류를 찾아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낯선 사람(특히 남녀간에)을 만나미소를 보낸다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되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모르는 척 하는 것이 우리들의 풍속이고 습관입니다. 둘째로는 그 남아 이해되는 부분도용어에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특히 인명이나 지명에 있어서는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가 다르고 중국어와 일본어가 달라서 아무 것도 아닌 사실자체를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 보태어서 원어를 중시한다하여 영어에서는 헨리가 프랑스로 가면 앙리로 다시 독일에 건너가면 하인리히로둔갑하니 어디에 기준을 두고 이해해야 할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엄격하게이야기하면 헨리건 앙리건 하인리히건 모두 틀린 표기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명은 중국의 영향으로앞에서부터 차례대로 한자인 성(姓)과 두 자인 이름 (명:名)이 정석으로 되어 있고(물론예외적으로 두 자의 성과 한자의 이름도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앞에 두 자의 씨족명과뒤의 두자 정도의 이름이 기재되어 그런데로 원칙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는 이것과는전혀 달라서, 앞에는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이 몇 음절 이어지다가 끝에 가서 씨족명이 붙게 됩니다 헨리라는 것도 빵집 아들 헨리인지 대장간 집 아들 헨리인지 도무지알 수가 없습니다. 구태여 우리식으로 하면 끝에 한자에 불과 합니다 홍길동에서동에 해당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지않고서는 세계사를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성과 이름은 Caesar,Gaius, Julius이고, 폼페이우스의 성과 이름은 Pompeius Magnus, Gnaeus라고 합니다우리식으로 하면 어디 까지가 이름에고 어디서부터가 성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이것이 러시아나 동구 권으로 가면 더욱 복잡해 집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의 어문 정책입니다.로마자를 비롯해서 외래어 표기에 대한 기준이 심심하면 바뀝니다. 지브랄타가 지브랄탈로다시 지브로울트로, 북경(北京)이 베이킹에서 뻬이핑으로 다시 베이징으로 동경(東京)이토오쿄오에서 토쿄오로 다시 토쿄, 도꾜로 등등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야어쩔 수 없겠지요. 이러한 어려움은 외국인들이라고해서 다를 수는 없습니다. 한국(韓國)을 중국에서는 한고, 일본에서는 강고꾸, 영어권에서는 코리아, 라틴어 권에서는 꼬레, 러시아에서는 까레이.... 김영삼대통령도President Kim, 김대중대통령도 President Kim, 이름을 날리는 야구선수도 Park,골프선수도 Park,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김은 짐(Gim)으로, 박은 백(Bag)으로,...최는 초이(Choi) 현대를 현다이(Hyundai) 삼성을 섬숭(Samsung), 김포(Kimpo)가 다시짐포(Gimpo)로....이른 것이 귀찮아서 아예 LG, SK라고 하는 국적 불분명의 상호를채택한 기업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일까요? 입만 열면 애국을, 국어사랑 나라사랑을부르짖는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인명이나 지명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공부라고(시험)하면 획 하나 자구하나 틀리지 않게 써야만 백 점을 맞았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시험 출제자의 입장에서 다시돌이켜 보면 그 자체가 얼마나 스스로의 무식(?)을 폭로한 것이 였는가를 느낄 수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현명한 출제자라면 법적인 소송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그런 점은 스스로 피하겠지요. 뒤에 붙어 있는 내용은 게르만족이 세운 부족국가들의종말을 간단히 적은 것입니다. 간단히 적었다고는 하지만 인명과 지명의 복잡성은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대로 적으면서 필요한 분들이 한번쯤 훑어 보도록 도움의자료를 제공할 뿐입니다. 이들의 왕조가 단명으로 끝났는데 프랑크왕국만은이동이라기 보다는 영토의 확장으로서 멀리 나가지 않음으로서 게르만의 전통을 보유했고,다른 종파에 물들지 않은체 바로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로마제국을 이을수 있었다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크 이외의 왕조가 단명이라고하는데 短命의 기준이 어떤지는 몰라도 중국의 5호 16국의 여러나라가 평균 13년을지탱한 것에 비교하면 그것 보다는 훨씬 오랫동안 통치했다는 사실도 주의 깊게 살펴볼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 -사산왕조 페르시아-
훈족의 왕 아틸라의 갈리아 침입 때에 국왕 테오도리크는아틸라를 격파하였고 또한 유리크왕은 로마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서고트법전(Lexvisigothorum)을 편찬하였습니다. 알라리크 2세는 프랑크왕 클로비스(재위 481∼511)에게패배하여 아키타니아·남갈리아를 잃었으나(507)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과 동맹을맺고 프랑크왕국에 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동고트의 국왕 테오도리크의 사후 서고트왕국은 다시고립되어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남부 에스파냐를 빼앗겼고 국내에서도귀족층의 봉건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레오비길드왕(재위 568∼586)은 국내 귀족층을억압하고 남부 에스파냐를 탈환하여 왕국의 번영을 회복하였고, 다음 왕 레카레드는 아리우스파(派)의 신앙을 버리고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고트인이 로마 주민과 융합할 것을 진행시켰으나 711년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서고트왕국은 멸망하였습니다. 2. 동고트족(Ostrogoths)은 370년경 동방에서 이동하여온 훈족에게 정복되어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가,453년 아틸라의 사망으로 훈제국이멸망하자 독립하여 파노니아(지금의 헝가리) 지방에 이동 정착하였으며, 이 무렵부터아마라가(家)의 왕권이 확립되었습니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제노(Zeno 474-492)는 동고트의아마라 가(家) 출신의 테오도리쿠스에게 오도아케를 정복하고 이탈리아에 정착할것을 권고하였습니다(488). 이에 대왕은 부족민을 거느리고 다키아·모이시아·판노니아를거쳐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오도아케르를 격파하고 493년까지 전(全)이탈리아를 지배하에넣었으며, 라벤나를 수도로 삼아 동고트왕국을 세웠습니다. 테오도리쿠스는 로마 문화를 섭취하기 위해 F.카시오도루스,A.보에티우스 등을 등용하여 로마계(系) 주민의 융화를 꾀하는, 이른바 '로마적이고도게르만적인 국가'의 전형적인 번영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는 서고트 왕국을 원조하기도하면서 한때 게르만계 제부족국가(諸部族國家)의 패권을 잡았으나 만년에는 이 부족의아리우스파 신앙과 로마계 주민의 가톨릭 신앙의 대립이 심각하여 교황과의 관계도악화되었고, 그의 사후 테오다하드 이후의 왕위 상속을 둘러싼내분이 일어나자 비잔틴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것을 계기로 간섭전쟁을 일으켰고(535).동고트 왕국은 토틸라를 중심으로 격렬하게 항전하였으나 555년 동로마제국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3. 반달족(Vandals)은 루기족(族)을 중심으로 한 혼성부족으로,l세기 무렵 오데르강(江) 상류에 거주하였으며, 3세기 후반 도나우강(江) 중하류로이동하였다가, 4세기경 이후에는 로마의 주권하에 판노니아에 정주하였습니다. 409년 민족대이동기 때 왕 고데기젤이 부족을 거느리고피레네산맥을 넘어 에스파냐를 침략, 이동하였으나, 뒤늦게 에스파냐를 침략한 서고트족의압력으로, 429년 왕 가이세릭이 전부족을 모아 아프리카를 침입하여 로마 총독 보니파키우스를살해하고 아프리카 정복을 완성한 뒤, 439년 카르타고를 수도로 반달왕국을 세웠습니다. 가이세릭은 다시 지중해에 진출하여 제해권을 장악,로마시를 약탈하는 등 맹위를 떨쳤고, 뒤를 이은 군다문트·트라사문트는 평화정책을취하였고, 5대왕 힐데릭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극단적인 친(親)로마 정책으로 전환하였기때문에, 민족주의자의 반감이 폭발하여 왕위를 사촌 겔리메르에게 빼앗겼습니다.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달 왕국 내의 세력 대립을 이용, 534년 장군 벨리사리우스가지휘하는 원정군을 보내 반달 왕국을 멸망시켰습니다. 4. 부르군트족은(Burgund) 동(東)게르만의 일파로서1세기경에 오데르강(江)과 비슬라강 중류에 거주하던 부르군트족은 군디카르 영도하에3세기부터 점차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413년에는 서(西)로마의 맹방부족(盟邦部族)으로서마인강(江) 남쪽에서 라인강 중류 지역에 있는 보름스를 수도로 왕국을 세웠는데,436년에 서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던 훈족(族)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습니다(413∼436) 이 사건은 나중에 전설화되어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가되었습니다. 그 후 군디카르의 손자인 군데리크가 패잔부족(敗殘部族)을 이끌고 서로마의허락을 받아 론·손강(江) 유역으로 이동하여 443년 제네바를 수도로 왕국을 재건하였고,이후 군도바드왕 때 서고트로부터 프로방스를 빼앗고 부르군트 법전을 편찬하는 등최성기를 이루다가 500년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에게 패하여 복속되었고, 지기스문트때 아리우스종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나, 군디마르 때 프랑크의 잇단 침입으로534년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오늘날 프랑스에 있는 부르고뉴지방의 어원(語源)은부르군트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5. 알라마니족(Alamannen)은 수에비족의 한 분파로서,셈노네스족을 중핵으로 하여 형성된 서게르만계의 혼성부족으로 알레마니족이라고도합니다. 원주지 엘베강(江) 유역에서 3세기 초에 마인강 유역으로 이동하였으며, 3세기 중엽에는 로마 영내로 진출했다가, 357년 황제율리아누스에게 슈트라스부르크에서 격파되었습니다. 5세기 초에는 스위스 동부에서레히강(江), 알프스에서 라인 중 유역에까지 세력을 넓혔으나, 496년 프랑크왕 클로비스에게정복되었고, 6세기 말부터는 그리스도교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메로빙거시대말기에 한때 독립성을 강화하여, 부족대공(大公) 란트프리트 밑에서 부족법전이 성문화되기도하였고, 카롤링거시대에는 자립성을 빼앗겨 프랑크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왕국이해체된 뒤 부족대공 밑에서 정치적 통일을 회복하여 슈바벤대공령으로서 독일왕국에속하였습니다. 6. 앵글로색슨(Anglo-Saxon) 5세기에 독일 북서부에서브리타니아로 건너온 게르만인의 한 파. 원래는 잉글랜드의 색슨인을 대륙의 색슨인과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노르만이 영국을 정복하기 전의 영국인이라는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현재의 영국 국민의 중심을 이루는 민족이며, 앵글인·색슨인·유트인으로이루어져 있습니다. 인종적으로는 북방계(北方系)에 속하여 장신(長身)·백색·금발·벽안(碧眼)에다좁고 높은 코 등의 육체적 특징이 있으나 민족적으로는 인도유럽어족(語族)에 속하는게르만(튜턴)족의 한 파이며, 이 민족의 이주기(移住期)인 5∼6세기에 관해서는 아직도불분명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문자를 갖지 못하였고 또 신뢰할만한 문헌적 자료가 없기 때문이며 겨우 약간의 고고학적 자료가 있는 데 불과하다고합니다. 베다(674?∼735)의 영국 교회사(8세기)에 의하면 스코트인·픽트인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는 영국 남동부 켄트 지방의 브리튼인의 수장(首長)은 앵글인(유트人)의도움으로 그 침입에 대응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영토를 빼앗겼다고 합니다. 이무렵부터 1세기 반 동안이나 이주가 행해졌는데, 그것은 인구증가로 인하여 비옥한브리튼의 저지(低地) 지역에 이동한 것으로 짐작되며, 그 이주는 민족 전체의 이주로서종래와 같은 해적적(海賊的) 침략이 아니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군사적 지도하에 민족적 집단이 침입하여 성공하면 고향에서 처자를 불러들였던 것같습니다. 그 결과 로마의 지배하에서 로마화되어 가던 브리튼은그 이주와 동시에 로마 문화의 영향이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고 합니다. 앵글로색슨의제족(諸族)은 섬의 동부 저지지역에 들어가자 잇달아 작은 국가를 건설하였느데,이들 소국(小國)은 종족국가(種族國家)로서 이주·정복을 통하여 그 전력이 증대한종족의 군사지도자가 왕으로 된 국가이며, 소국들은 상호간에, 또 서부로 몰아낸 켈트인(웨일스人:외국인의뜻)과 항쟁을 계속하여 7왕국시대를 전개하였습니다. 6세기 말에는 로마 가톨릭교가전래하여 성장 중에 있던 왕권과 손을 잡았고, 이윽고 웨식스 왕국이 강력해지면서9세기 전반에 액버트에 의한 전(全)잉글랜드의 정복, 후반에는 앨프레드 대왕이 잉글랜드통일에 거의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9세기부터 시작된 노르만인(데인人)의 침략결과로 1016∼42년 데인인의 왕 카누트(크누트)와 그 후계자에 의한 지배로 말미암아앵글로색슨왕조는 무너졌습니다. |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