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느님 나라 (3)
프랑스 유학길에 오를 때,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프랑스 말은 ‘메르시 보꾸(merci beaucoup)’였습니다. ‘매우 고맙다’는 뜻을 지닌 이 말이 ‘멸치볶음’과 발음이 비슷한 게 우습기도 하고 멸치볶음을 싫어한 저로선 ‘메르시 보꾸’를 되뇌며 괜히 ‘프랑스 싫어!’라고 우겨보기도 했습니다. 낯선 유학생활이 두려웠던 게지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무렵, 저는 프랑스 리옹 근교의 작은 본당에서 환송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신자분들은 이제 제 나라로 돌아가는 동양의 얼굴 납작한 신부를 눈물로 보내주었습니다. 사람 사는 데는 어디든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정이 생기니 정 떼기가 힘든 건 동양이든 서양이든 매한가지였습니다.
“처음 제가 프랑스 올 때 알았던 말이 ‘메르시 보꾸’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갈 무렵, 신자 분들의 눈은 저를 향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서툰 프랑스 말 발음이 성당에 울려 퍼졌습니다. “떠나는 지금, 다시 ‘메르시 보꾸’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프랑스의 자유에 대해 ‘메르시 보꾸’, 프랑스의 평등 정신에 대해 ‘메르시 보꾸’, 프랑스의 형제애에 대해 ‘메르시 보꾸’입니다.” 잠시 박수가 이어졌고, 저는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자유, 평등, 형제애를 꼭 살겠습니다. 그게 제가 공부한 성경말씀의 정신이기도 하니까요.”
자유, 평등, 형제애는 프랑스 혁명 정신입니다. 왕이 다스리던 봉건시대를 민중의 힘으로 끝을 낸 것이 지금의 프랑스입니다. 저는 프랑스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소시민의 자세를 다시 되짚어 보곤 합니다.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적어도 내가 혼자 살지 않는다는 생각, 내가 더 움켜쥐면 누군가는 덜 움켜쥘 수밖에 없고, 또 누군가는 아예 가진 것마저 뺏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게 프랑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떠올리면 선물로 받을 상당한 기쁨과 영광, 혹은 넉넉함 정도를 많이 떠올리곤 하지요. 문제는 ‘내가’ 받는 것에 ‘당신’이 받을 게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돈도 좀 벌고, 성공도 좀 하고, 떵떵거리지는 못하더라도 남부럽지 않게 살고픈 생각은 얼마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 6.10절을 읽어보면 이런 생각은 조금 손질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하늘 나라를 차지하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이 하늘 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 ‘나’ 위주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낯설거나 불편한 생각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선도 쌓고, 덕도 쌓고, 그리 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 같은데, 가난을 사는 건 왠지 거북한 것이지요.
대개의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자고 하면 좋은 일이라며 함께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가난을 살자고 하면, 그건 이미 가난한 이들의 몫이라 여기고 가난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에게 제 이익과 재산, 그리고 명예를 일정부분 지켜나가고 싶은 욕망은 당연한 것이니까요. 가끔씩 사회 운동을 하시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분들이 하시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때론 그 일에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나 비판적 생각을 보태면 배타적 자세를 견고히 하시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굳이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이란 원래 돈이 되었건 명예가 되었건 권력이 되었건 그 가치에 대해 갈망하며 사는 존재니까요.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갈망을 버려야 한다고 스스로 채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갈망 자체를 죄악시하는 경우도 있지요. 갈망 자체를 놓고보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주어진 우리 본성의 민낯입니다. 다만, 갈망이 어디를 향하는가는 두고두고 살펴보고 수정하고 다시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시편 24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을 건진 인생에 굳이 ‘내 것’이라고 고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데서 우리의 갈망을 설계하는 게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온유하다는 그리스말 ‘프라우스(πρα)’는 물질적 가난을 사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겸손으로 번역된 그리스말 ‘타페이노스(ταπειν)’ 역시 윤리적 덕목으로 정신적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삶의 태도만이 아니라 밑바닥을 사는,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힘도 권력도 명예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이들의 자리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것이고, 스스로 낮추임의 자리를 갈망하신 것입니다. ‘나’를 살기 위해 사신 게 아니라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뛰어넘는 강력한 갈망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난을 사는 이들을 위해 수많은 선물을 안기기는 해도 스스로 가난해지는 데 익숙하지 못한 우리가 가난해지려고 작정하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건 뭔가 모순된 일이기도 하고, 도무지 힘든 일이라 과연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늘 주저하며 성당에 가고 레지오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러 가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을 사신 것은 가난 자체를 목적으로 둔 것이 아닙니다. 가난을 만들어 낸 이들,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사회를 비판하고, 그런 사회에서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든 이들과 친구가 되셨기 때문에 가난해지셨습니다. 이른바 ‘입바른 소리’를 하면 세상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테고, 그 괴롭힘은 대개 현실적 가난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돈에 대한 미련도, 권력에 대한 욕구도, 명예에 대한 욕망도 모두 내려놓고 방에만 틀어박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이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가지지 못한 이들처럼 헐벗고 목마르고 배고프다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없이 사는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게 신앙적인 것도 아니고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또 가르치실 때에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시는 경우도 다반사였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고, 인간 취급 받지 못하던 어린이가 오는 걸 막지 않으셨고, 죄인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모두가 ‘너’를 향한 갈망이었고, 그 갈망 덕택에(?) 예수님은 가난해지셨고, 급기야 수난과 죽임까지 받게 되셨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프랑스를 떠날 때 ‘메르시 보꾸’는 처음 프랑스에 발을 디뎠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메르시 보꾸’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유학 내내 힘들었지만 뭔가 이루어냈다는 기억, 아팠지만 가슴 한 켠에서 올라오는 따뜻함의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이를 맞아들이는 프랑스 신자들의 자유, 평등, 형제애에 대한 기억이 ‘메르시 보꾸’라는 짧은 말마디 안에 흠뻑 녹아있었던 것입니다. 자유는 나를 떠나 너를 향하는, 너를 통해 새로움을 얻어 누리는 새로운 창조의 행위를 가리키고, 평등은 나만 잘나고픈 갈망을 너와의 연대를 통해 같이 폼 나게 살아보자는 것이며, 형제애는 어떠한 처지에든 함께할 것이라는 자비의 마음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시작에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신 건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를 실천할 자리가 바로 당신 안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갈망하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월간 빛, 2017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