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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의 문화재
은평의 역사
석기시대부터 일부 지역에서 혈연을 같이 하는 씨족끼리 집단을 이루어 취락생활을 했던 은평구 지역은 서울의 일부로써 백제 때에는 위례성, 신라시대에는 신주,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산주로 부르다가 경덕왕 7년(757년)에 한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을 설치했는데 서울이라는 이름의 하나인 한양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한양군을 양주라 고치고 문종 21년(1087년)에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더불어 3소경이 되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충렬왕 34년(1308년)에 한양부로 개칭하였습니다.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한양부로 도읍, 한성부로 고치고 서울지역은 5부 52방으로 개편했는데, 지금의 구(區)에 해당하는 5부(동, 서, 남, 북, 중)중 은평구 지역은 북부의 성외인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은평은 이 두 지명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한일합방이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성안(방)과 밖(면)을 구분, 5부 35방 8면제(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만들었으며, 1913년 12월 총독부령 제111호로 각 도의 위치 및 관할지역과 부(府), 군(郡)의 명칭이 결정되고 이듬해 4월부터 실시되었는데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은평면(36개 동, 리 관할)이 설치(경기도령 3호)되었습니다.
이때 경성부의 관할지역이 대폭 축소되어 은평면 지역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떨어져나갔고, 서울시로 편입된 것은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야 이루어졌습니다.
그간의 서울지방의 행정구역 변천을 보면 1936년 2월 14일 조선 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의 구역을 확장, 변경했는데 은평면의 일부인 5개리(홍제외리, 홍제내리, 부암리, 홍지리, 신영리)가 설치되고 이어 1940년 7월에는 서부출장소를 신설,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43년 6월 경성부령 제163호로 출장소를 폐지, 구(區)제를 실시했는데 용산출장소를 용산구, 동부출장소를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서부출장소를 서대문구로, 영등포출장소를 영등포구로 하고 4대문안에 종로구와 중구가 설치되어 7구제가 시행된 다음에 10월에는 연희면의 일부를 경성부로 편입하면서 서대문구, 용산구의 일부를 분할, 마포구가 신설되어 8개구로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해방후 1946년 9월에 경성부가 서울시로 되었고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 서울특별시로 승격(서울특별시 군정법령 제 106호)되었으며 1949년 8월 고양군 은평면 11개리, 연희면 7개리가 서대문구에 편입, 이 구역을 관할할 은평출장소를 설치(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61호)하면서 비로소 은평구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었습니다.
1973년 3월 12일 법률 제2569호로 그해 7월 1일을 기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관내 구파발리와 진관내, 외리를 서울시로 편입하여 현재의 은평구 지역으로 관할하게 되었으며 197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서대문구에서 분구되어 출장소를 폐지하고 은평구(15개동 : 녹번, 불광1, 불광2, 갈현, 구산, 대조, 응암1, 응암2, 응암3, 역촌, 신사, 증산, 수색, 진관내, 진관외)로 되었습니다. 1989년 9월1일 이후 행정동 20개동, 법정동 13개동으로 늘어났다가 2007년 8월 13일 법정동인 구파발동, 진관내·외동이 하나의 진관동으로 통합되면서 법정동 11개동, 행정동 19개동으로 되었습니다.
문화재
사현사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은 진관외동에 위치한 사현사(沙峴寺)에 있으며, 좌고(坐高) 129Cm의 석불좌상이다. 육계(肉髻),보주(寶珠),삼도(三道)의 표현, 통견(通肩)의 법의(法衣) 등 여래상이 갖추어야 할 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많은 부분이 손상을 입었다.
불상은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이다. 얼굴은 갸름하고 상체가 길며, 하체는 무릎이 짧고 평면적이어서 조선초기의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5C후반~16C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불상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인조별서유기비
이 석비는 조선왕조 제16대 임금 인조(仁祖,1623~1649)가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별서(別墅)를 기념하고자 숙종21년(1695)에 세운 것으로 인조반정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그 현장을 증명해 주는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
표제는 조선 19대 숙종(肅宗)의 어필(御筆)로 〔인조대왕용잠지시별서유기비(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라고 쓰고 뒷면 음기(陰記)는 숙종의 어제(御製)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쓰고 있어 가치를 더해준다.
석비의 조형적 측면에서도 거북받침돌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등장한 조선시대 초기양식의 전통을 잇고 있는 동시에 지붕돌은 이수 대신 간결한 한옥양식으로 변화된 후기 석비양식의 특징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어 조선시대 석비예술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성당
1880년대 초반 이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후기의 전통적 당집 양식으로서, 19세기 서울ㆍ경기지역 민간 무속신앙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민속문화재이며, 금성대군(1426~1457)의 영혼을 위무하려고 세운 굿당으로서 무신도와 각종 무구류(巫具類)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등 그 희귀성과 건축사적 중요성도 대단히 높아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화의군 이영 모역
이 묘역은 조선 제4대 왕인 세종(世宗)의 아들로 단종(端宗의)의 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세조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화의군 이영의 분묘가 자리한 곳이다.
화의군 이영은 제4대왕 세종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어머니는 영빈 강씨이며 후에 박중손(朴仲孫)의 사위가 되었다. 사육신 박팽년의 매부이기도 하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단종 복위사건에 참가하여 전라도 금산에 안치되었다. 종친으로서는 드물게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하는 등 절의로 이름 있는 화의군의 묘역으로 선조~영조 연간의 묘제(墓制)와 석물(石物) 조각 방식을 잘 보여주는 예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화의군의 묘소와 사당인 충경사(忠景祠)와 제실(祭室), 그리고 신도비(神道碑)와 홍살문(紅箭門)이 자리하고 있다.
숙용심씨묘표
숙용심씨 묘표는 이수(이首)의 이무기의 힘찬 움직임과 운문(雲文)이 빼어나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숙용심씨는 죽은 후 서울 근교에 예장(禮葬)하였으나 묘가 실전되었다. 그러다가 부산일보 동경지사장으로 있던 최성규(崔性圭)씨에 의해 일본 토쿄도(東京都) 미나토구(港區) 아카사카(赤坂)에 있는 한 작은 공원에서 묘비와 이에 부수되는 듯한 석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중 대표가 수차 일본을 방문하여 증빙자료를 제시하고, 현지 관청 공무원과 협상을 한 결과 2000년 7월 3일 현지 지방 관청의 허락을 받아 유물을 해체하여 귀국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문에는 이와 같은 반환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대리석으로 된 묘표는 전면에 “淑容沈氏之墓”라고 쓰여 있으며, 빼어난 조각미로 인해 왜병들에 의해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이며 우수한 조각 솜씨 등 예술성과 역사적인 유물로써의 가치가 있다
조선 제9대 왕인 성종(成宗)의 13남인 영산군(寧山君) 이전(李恠)과 그 아들인 장흥군(長興君) 이상(李祥), 손자 이경의(李鏡義), 증손자 이종(李琮) 등 4대에 걸친 묘역으로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묘제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전(李恠)의 묘역과 문인석, 장명등 등 묘역 내 부착된 석물들은 당대의 전형적인 형식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진관사
천년의 향기를 품고있는 진관사는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다.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이 12세의 나이로 궁에서 쫓겨나 삼각산의 암자에 거쳐하며 신병의 우험함을 느낄때 땅굴에 피신시켜 화를 면하게 지켜준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했으며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로 명하고 그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임금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며 조선시대 진관사에 수륙사를 설치하여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수륙제를 올려 더욱 유명하다.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진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진다.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고려 제5대 경종(景宗;975~981) 때로 거슬러 올라가 981년(景宗 6)에 경종이 죽고, 성종(成宗)을 거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后;964~1029)는 그의 아들 송(誦)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 獻哀王后)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다.
또한 태후는 성종년간에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해 몰래 사생아를 낳게 되었고 마침내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이런 정쟁(政爭)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獻貞王后)와 태조(太祖)의 아들인 욱(郁, 安宗)의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진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임을 꾀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津寬大師)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三角山)의 한 암자로 축출하게 된다.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는데,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대량원군 순이 제8대 현종(顯宗)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대량원군은 재생의 은덕에 대해 고개 숙여 감사하고,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로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神穴寺)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명하였으며,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해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서 승당이 각 30칸, 청풍당(淸風堂)과 명월요(明月寮)가 각 10칸, 제운루, 정재소, 일주문, 해탈문, 종각, 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었다. 또한 불상과 장엄구, 일상도구 등 사찰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현종이 지원하였다. 현종은 이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완공 그해 10월에 낙경법회(落慶法會)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까지 책봉하였다.
진관사의 수륙재
수륙재(水陸齋)는 수륙무차평등재(水陸無遮平等齋)를 줄인 말로, 수륙회(水陸會), 혹은 무차대회(無遮大會)라고도 불린다.
수륙재는 물이나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의 혼령들에게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의식 중의 하나이다.
이 의식은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502~549)가 유주무주(有主無主)의 고혼들을 구제하는 일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여겨 지공(誌公)에게 ‘수륙재의문(水陸齋儀文)'을 짓게 하고, 재를 베푼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이후 당(唐), 송(宋)을 통해서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륙재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거행된 것은 고려 때부터로 고려 태조 23년(940) 12월 수륙재가 거행된 것을 시작으로 광종21년(970)에 갈양사(葛陽寺)에 최초로 수륙도량( 水陸道場 )이 개설되었으며, 이후 수륙재가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된 것은 11세기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수륙재 의식의 절차를 기록한 의문집(儀文集)이 번역되면서 부터로 국가적인 후원 하에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수륙재는 조선시대에 와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오래도록 봉행되었는데, 진관사는 조선시대 수륙재의 중심에서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한 곳이다.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되어 매년 의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가 표면적으로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으로, 근본적으로는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한 것을 계기로 수도 근처에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하게 되었고 태조 6년(1397)에 진관사에 모두 59칸이나 되는 대규모 수륙사(水陸社)를 건립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권근에게 지시하여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기록하여 남겼다.
진관사에서는 수륙사가 건립된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2번 국가행사로서 수륙재가 성대하게 열렸으며, 이후 태조의 재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의 모든 재가 이곳에서 올려지게 된 것은 그와 조선왕실이 불교를 통해 항상 보호받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 태종(太宗)이 그의 재위18년 3월에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하여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열었으며, 연산군이 성종의 칠칠재를 수륙재로 대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세종년간 이후부터 문종1년까지 수륙사를 대대적으로 중수하여 대대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하였다.
조선시대에 견암사와 관음굴 등에서도 수륙사를 중심으로 국가적 수륙재가 봉행되었지만 진관사는 적극적인 국가적 후원을 배경으로 수륙도량 중에 가장 번성했던 사찰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지금의 진관사 회주이신 진관(眞觀)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셔서과거의 수륙재를 복원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82년 자운율사스님의 증명 하에 수륙재를 복원하여 이후 매 윤년 윤달에 진관사 수륙재를 봉행하게 되었다.
대웅전
진관사의 주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의 다포계 단층건물로 정면 13.6m, 측면 8m의 크기이다. 기단의 초석만 원래의 것이고 건물은 1965년에 중창주인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으로, 장방형의 화강암 기단 위로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이다.
다포는 용두와 어우러져 한껏 주법당의 위엄을 보이며, 팔작지붕 위에 깔린 청기와는 뒤의 삼각산을 배경으로 한껏 조화를 이룬다.
대웅전의 외부는 삼면에 외벽화를 장엄한 모습으로, 외벽은 심우도와 비천으로 단청되어 있으며, 어간에는 편액과 주련 6기가 걸려 있다.
건축창호의 살짜임새는 앞면 양칸은 빗살이며 중앙에만 솟을빗살꽃살로 짜여져 있고 용머리를 중앙문 양쪽에 조각하여 대웅전을 수호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중앙 감실형 불단 위로 1966년에 조성된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을 모시고, 그 뒤로 1967년에 금어(金魚) 일섭(日燮)스님이 조성한 삼신불후불탱화(三身佛後佛幀畵)를 봉안하였는데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고 그 왼쪽에 노사나불을, 그 오른쪽에 석가여래를 배치하였다.
노사나불과 석가여래의 아래에는 각각 한 명의 천왕이 있어 전체적으로 두 명의 천왕이 삼신불을 호위하는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또 삼존불의 우측 벽에는 1990년에 금어(金魚) 수산(樹山) 임석환(林石煥)이 조성한 오여래탱화(五如來幀畵)를 두고 좌측 벽에는 1967년에 조성된 신중탱화(神衆幀畵)와 1934년에 화경(和璟)스님이 그린 현왕탱화(現王幀畵)를 봉안하였다. 현왕탱의 구도는 단순한데, 중앙에 현왕(염라대왕)을 두고 그 아래에 판관(判官)과 녹사(錄事)가 마주한 모습이다. 전체적인 색감은 적색과 황색이 주조를 이루며, 크기는 가로 63.5㎝, 세로 96㎝이다.
이외 불구(佛具)로는 1966년에 조성된 높이 93㎝, 구경 57㎝의 범종이 있으며, 후불벽 뒤로 괘불궤(掛佛櫃)와 괘불(掛佛)이 있다.
석가여래좌상
대웅전의 석가여래는 법화경(法華經)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의 주존불(主尊佛)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단편견(右袒偏肩)에 결가부좌를 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하고 있다.
후불탱화(後佛幀畵)는 비로자나후불화로, 삼신불(三身佛)의 주존(主尊)인 비로자나불은 양 어깨를 감싼통견(通肩)을 입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미의 손 모양인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미륵보살상
대웅전의 미륵보살은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의 한 분으로 석가여래의 왼쪽에서 협시(挾侍)를 하고 있다.
미륵보살은 석가여래에게 장차 미래에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보살로 미래불(未來佛)을 보살형으로 표현한 것으로 손 모양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하고 있다. 후불탱화(後佛幀畵)는 노사나후불화로, 비로자나불처럼 통견(通肩)을 입은 노사나불은 양손을 위로 한 설법하는 모습의 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제화갈라보살상
대웅전의 제화갈라보살은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의 한 분으로 석가여래의 오른쪽에서 협시(挾侍)를 하고 있다. 석가여래가 과거 범지(梵志)로 있을때 머리카락을 깔아 정광불(定光佛)을 지나가게 한 공덕으로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는데 제화갈라는 과거불(過去佛)의 대표인 정광불이 보살로 표현된 경우로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하고 있다.
뒤에는 석가모니 후불화가 봉안되어 있다. 주존의 오른쪽에 위치한 석가여래는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쳤고,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가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진관사 명부전
명부전은 저승세계인 유명계(幽冥界)를 상징하는 당우(堂宇)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주불(主佛)로 모신 곳이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모신 곳이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도리천에 살면서 미륵불이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용화삼회를 열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고, 시왕은 128개 지옥을 나누어 다스리는 명계의 왕이다.
진관사 명부전은 대웅전 좌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에 다포계 단층목조건물인데, 정면 9.6m, 측면 8m의 크기로 1968년에 진관스님이 세운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96년에 다시 신축한 것으로, 낮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얹은 모습이다.
건물 외부는 3ㆍ4분합의 교살문을 두고 삼면에 지장보살과 연관된 반야용선도와 지장보살 영험도를 단청하였으며, 어간에는 탄허(呑虛)스님이 쓴 편액과 주련 4기를 걸었다.
건물 내부는 후벽에 맞붙여 삼면의 벽에 ㄷ자형의 불단을 가설하였는데, 그 위로 1969년에 조성한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상, 무독귀왕상, 그리고 저승계의 심판관인 시왕상(十王像)과 시왕을 시봉드는 동자상(童子像), 사자(死者)를 심판하는 판관(判官)과 기록을 담당하는 녹사(錄事) 그리고 문 입구를 지키는 장군상 1쌍을 봉안하였다.
이외 후불벽에는 1997년에 금어(金魚) 임석환이 그린 지장시왕탱화(地藏十王幀畵)과 시왕탱화(十王幀畵), 사자탱화(使者幀畵)를 두었으며, 높이 43㎝, 구경 28㎝의 범종(梵鐘)이 있다.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보살님의 위신력이여
恒河沙劫說難盡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하기 어렵나니
見聞瞻禮一念間 보고 듣고 예배하는 잠깐 사이에
利益人天無量事 인천에 이익된 일 무량하여라.
나한전
나한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모시고그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인 16나한상을 안치한 법당이다. 나한은 아라한을 줄인 말인데 존경과 공양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진리에 도달했다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진관사 나한전은 대웅전 좌측 축대 위에 있는 정면 3칸(8m), 측면 1(4m)칸의 맞배지붕의
익공계 목조 단층건물로 근래에 새로 중창하였다.
건물은 화강암으로 만든 낮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평방 위로 익공을 얹은 모습으로, 건물 전면에 2ㆍ3분합의 교살문이 빗살창무늬로 짜여져 단장되어 있으며, 삼면의 벽에는 나한도가 단청되어 있다.
예서체로 쓴 나한전 현판은 광서10년(光緖10年; 고종21년, 1884년)에 노천(老泉)이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둥마다 4기의 주련이 있다.
건물 내부에는 후불벽과 맞닿은 ㄷ자형의 불단 위로 조선후기에 조성된 소조석가삼존상을 비롯하여 소조16나한상, 사자상, 제석상, 인왕상 등 완전한 16나한상 일체가 봉안되어있으며, 후불벽에는 1884년에 진철(震徹)스님이 그린 영산전의 후불탱화로 조성되었던 영산회상도와 16나한도가 걸려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16나한상과 나한도(羅漢圖) 4축, 관음도(觀音圖) 2축 등이 함께 조성되었다고 하며 진철(震徹)스님이 그리고, 시주자는 왕실 상궁들이라고 한다.
석가삼존상은 현재 진관사 나한전의 주존(主尊)으로 소조불(塑造佛)이다. 중앙의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이 배치된 구도로,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삼존불의 머리 표현과 얼굴 형태, 법의의 주름 등 전체적인 양식적 특징으로 볼 때,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진다.
본존은 상체가 약간 긴 세장(細長)한 체구이지만 직사각형에 가까운 양감 있는 얼굴과 좁지 않은 어깨로 인하여 다소 건장한 느낌을 준다.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표현된 미소 띈 얼굴, 활형의 눈썹과 이와 연결된 우뚝한 콧등 등에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진관사 나한전 석가삼존상
머리는 나발(螺髮)로서 육계(肉)가 아주 낮게 표현되었고,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굵은 주름의 옷자락이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좌우의 협시보살(脇侍菩薩) 역시 본존과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수기 삼존인 좌 미륵ㆍ우 제화갈라보살로서 좌우 수인(手印)을 서로 대칭적으로 표현하여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 삼존상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서울 인근지역에 있는 조선 후기 불상 중에서 비교적 연대가 빠르고 삼존상(三尊像)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진관사 나한전에는 본존상(本尊像)인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 좌우로 각각 8구(軀)씩 16구의 나한상(羅漢像)과 제석상(帝釋像) 1구, 사자상(使者像) 1구, 인왕상(仁王像) 2구 등 모두 20구(軀)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재료는 모두 소조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으며, 각 상은 크지 않은 아담한 크기로 높이 47~53㎝의 소형상(小形像)이다.
이들 나한들은 여러 가지 지물(持物)을 들고 각각 특징적인 자세를 취하는 등 자유롭게 표현되었으며, 각 나한들의 얼굴표정과 자세는 매우 사실적일 뿐만 아니라 해학적으로 묘사되어서 불교 조각이 갖는 엄격하고 규격적인 모습을 탈피하고 초상 조각과 같은 개성적이고 활달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후기 서울, 경기지역의 나한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서 주목받고 있다.
진관사 나한전 영산회상도
진관사 나한전의 본존불인 석가삼존상의 후불탱화는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로서 1884년에 제작되었다.
구도는 중앙에 본존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그 옆에 네 명의 보살과 사천왕, 여섯 명의 제자를 배치하였는데 화면의 빈 공간에 채운(彩雲)을 가득 그려 넣어 전체적으로 여백 없이 빽빽한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본존인 서가모니불은 얼굴이 양감(量感) 있게 표현되었으며, 당당한 신체는 건장한 느낌을 준다. 또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두 손은 왼손을 가슴 위로 올리고 오른손을 배에 댄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마치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과 같은 손 모습을 보여주나 이러한 수인은 조선 후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석가모니의 수인(手印)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본존의 좌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두 손으로 커다란 연꽃을 들고 본존을 향해 시립(侍立)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사천왕이 각각 칼과 비파, 용과 여의주 및 탑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옆과 위로는 두 보살과 상체만 드러난 채 합장을 하고 있는 제자가 좌우에 각각 3명씩 묘사되었다.
이 불화는 횡축의 화면과 단아한 형태, 밝은 주조색 등 19세기 말의 불화(佛畵)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로서 당대 불화 중 대표작에 속한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관사 나한전 소조16나한상
진관사 나한전에 모셔진 영산회상도 좌우에 봉안된 16나한도로서, 나한도(羅漢圖) 4폭과 제석신중도(帝釋神衆圖) 1폭, 사자신중도(使者神衆圖) 1폭 등 총 6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4폭의 나한도에는 각각 4명의 나한이 산수를 배경으로 시자(侍者)와 시동(侍童)을 거느리고 다양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또한 제석신중도와 사자신중도는 나한도의 좌우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화면을 둘로 나누어 구름 속에서 있는 제석과 신중, 사자와 신중을 각각 그렸는데
진관사 나한전 나한도
근대적인 음영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조성연대는 1884년으로, 왕실 상궁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다. 당대의 유명한 화승인 진철(震徹), 축연(竺衍)들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서 특히 세밀한 필선(筆線)과 정교한 문양 표현 및 금니(金泥)의 사용 등이 돋보이며, 나한도의 배경에 묘사되어 있는 경물(景物)은 당시에 유행하던 민화풍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19세기 회화연구의 비교자료로도 주목되고 있다.
현재는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6호로 지정되어 있다.
無邊無量圓法珠之三昧 무량무변 깊고 원만한 법계의 삼매
正等正覺妙雜華之一宗 위없이 바른 깨달음의 꽃, 일승종지라네
畵雪牛於上乘十六羅漢 상승의 경지에 설우를 그리니 16나한이요
湧火蓮於法界一初如來 법계에 용솟음친 불꽃 연꽃은 가장 첫 여래라.
칠성각
칠성신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인 칠성각에 모셔지게 되었다.
진관사 칠성각은 가람의 서쪽 끝에 있는 정면 3칸(4.8m), 측면 1(4m)칸의 맞배지붕을 한
민도리집 형식으로 조선조 말에 중창한 건물이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낮은 기단 위에 마름모꼴의 초석을 두고 그 위로 사각기둥을 올린 모습으로 독성전과 같이 공포 없이 서까래를 이용하여 지붕을 올린 모습이다.
건물 외부는 전면에 2·4분합의 띠살문을 두고, 측후면 벽체는 아래가 방화장, 위가 심벽으로 구성되었다.
칠성각은 바로 옆의 독성전과 함께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전서체로 쓴 현판도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내부는 후불벽에 맞닿은 불단(佛壇) 위에 조선후기에 조성된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과 1910년에 조성된 칠성도(七星圖), 그리고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
진관사 칠성각과 독성전은 신중단(神衆壇=사찰에서 호법신중을 모셔두는 단)에 속하는 건축물로서는 서울 시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건립연대가 가장 오래됐다.
또한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서울 · 경기 지역 사찰 건물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건축방식으로 좌.우.후면 등 3면의 벽을 벽돌로 마감하는 화방벽(火防壁)이 설치되는 등 건물들이 창건될 당시의 시대적,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33호로 지정되었다
석조여래좌상
진관사 칠성각의 석조여래좌상은 옥석(玉石)으로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으로, 상호는 둥글면서도 앳된 얼굴이 특징적인 동형불상(童形佛像)으로 신체에 비하여 두부(頭部)가 유난히 크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로써 육계(肉)가 낮고 정상계주(頂上珠)와 중간계주(中間珠)가 모두 표현되었으며, 크고 넓적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작은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어 아기 같은 신체와 더불어 친근하면서도 온화한 인상을 준다.
몸에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양 어깨를 덮은 옷자락은 가슴 한가운데에 평행으로 표현되어있는 군의(裙衣) 아래로 끼워 놓았으며, 두 손은 신체에 비해 유난히 크게 묘사되어 양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어 놓은 모습이다. 이 불상은 천불상(千佛像) 중의 하나로 생각되는데, 이 상과 같은 형식의 불상은 강원도와 서울ㆍ경기 북부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지만 삼각형을 이루는 안정감있는 자세와 조형성에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1969년에 진관스님에 의해 개금되었으며, 현재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관사 칠성각 칠성도
칠성각의 후불탱화(後佛幀畵)로, 1910년에 금어 춘담(春潭), 범천(梵天)이 제작한 것이다.
구성은 장방형의 화면에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칠성(七星)과 성군(星君) 등이 묘사되어있다.
중앙의 청련화(靑蓮花) 위에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는 붉은 법의를 걸치고 오른손은 가슴 부위에, 왼손은 무릎 위에서 금륜을 얹은 채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으며, 머리는 유난히 뾰족한 육계(肉) 위에 원형(圓形)의 정상계주(頂上珠)가 표현되어 있다.
치성광여래의 좌우에는 향우측에 넷, 향좌측에 셋 등 모두 7구의 칠성여래가 치성광여래를 향하여 합장하고 서 있는데 7구 모두 붉은 법의를 입고 있으며 치성광여래와 같이 뾰족한 육계가 돋보인다.
치성광여래의 아래쪽에는 협시인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각각 금빛으로 칠해진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데 일광보살은 붉은 해, 월광보살은 흰 달이 그려진 보관(寶冠)을 쓰고 본존(本尊)을 시립(侍立)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도교식으로 표현된 칠원성군이 홀(笏)을 들고 서 있다.
이 불화는 두터운 설채법(設彩法), 붉은 적색의 주조색(主調色)에 감색과 녹색이 약간 섞인 채색, 주위의 성중(星衆) 얼굴에 칠해진 두터운 호분(胡粉) 등의 표현에서 20세기 초반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정확한 조성 연대와 화승(畵僧) 등이 밝혀져 있을 뿐 아니라 서울 인근 지역에서는 드문 칠성도(七星圖)의 작례(作例)로서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관사 칠성각 영정
이 불화는 칠성각 칠성도 향우측에 봉안된 영정(影幀)으로 높이 106.2㎝, 폭 83㎝의 소형 불화이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는 세로로“영입산수도 수주간경(影入山水圖 數珠看經)”으로 시작되는 4줄의 찬시(讚詩)가 적혀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한글로 '인사졀명호불영뎡'이라는 명문이 있어 ‘인수사’의 명호스님의 영정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의 중앙에는 경상(經床)을 앞에 두고 정면을 향한 채 바닥에 결가부좌한 스님의 모습을 화면 가득 그렸는데, 스님의 옆으로 불자(拂子)와 두루마리를 든 시자(侍者)를 배치하여 삼존형식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삼존형식의 영정은 다른 예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희귀한 작품으로 크게 주목된다.
제작연대와 화가의 기록이 없어 시기와 화사(畵史)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구도와 채색 등으로 볼 때 조선 후반기 19세기 말~20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三尊) 배치는 물론 찬시(讚詩)와 한글제목이 적혀 있어 다른 영탱(影幀)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조선조 말의 영정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주목된다.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8호로 지정되어 있다.
靈通廣大慧鑑明 신령하고 능통한 지혜 거울 같이 밝아서
住在空中映無方 허공중에 머물면서 비추지 않는 곳 없네
羅列碧天臨刹土 푸른 하늘에 계시면서 이 국토에 임하여
周天人世壽算長 천상, 인간에 두루하사 수명을 관장하시네
독성전
독성전(獨聖殿)은 홀로 천태산(天台山)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는 아라한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시고 있는 전각(殿閣)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산신(山神) 및 칠성(七星)과 함께 삼성각(三聖閣)에 봉안하거나 따로 독성각(獨聖閣)에 봉안하여 신앙하였다.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은 독성각(獨聖閣)으로 일반화되어 있으나 진관사에서는 ‘독성전(獨聖殿)’으로 격상되어 있다. 진관사 독성전은 명부전 좌측에 있는 정면 1칸(3.2m), 측면 1칸(2.4m)의 맞배지붕을 한 민도리집의 형식으로 조성된 조선조 말의 건물로 1969년에 진관스님이 중수한 건물이다. 건물은 장방형의 화강암을 기단 삼아 마름모꼴의 초석을 두고 그 위로 사각기둥을 세운 모습으로, 평방 위로 공포 없이 서까래를 올린 모습이다.
건물 전면은 4분합의 띠살창호로 단장되어 있으며, 좌우와 후면의 벽 전체를 벽돌로 마감한 ‘방화장’ 형식이다.
건물 내부는 불단(佛壇) 위로 조선후기에 조성된 소조독성상(塑造獨聖像)과 독성탱화(獨聖幀畵), 산신탱화(山神幀畵)를 봉안하였다.
진관사 독성전에는 "삼각산 진관사 독성전 창건급단확 화탱불사공덕기(三角山 津寬寺 獨聖殿 創建及丹 畵幀佛事功德記)"라는 이 건물의 건축 관련 기록을 적은 작은 목조 현판이 전해져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광무(光武)11년 즉 1907년 3월에 독성전을 짓는데, 상궁 4인과 민간인 부부 2쌍이 참여한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공사 참여자 명단도 부기되어 있는데 모두 승려장인들이다.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34호로 지정되었다.
진관사 독성전 독성상
진관사 독성상은 높이 37cm의 소조(塑造) 불상에 채색을 하여 봉안하고 있는데,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크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댄 모습 등이 칠성각의 석불좌상과 닮았다.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각이 졌는데 눈과 눈 사이가 멀고, 코가 우뚝 솟아 있으며,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등 의지가 강한 나한(羅漢)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몸에 걸친 가사(袈裟)는 좌임(左)으로, 왼쪽 어깨에는 가사를 고정한 금구장식(金具裝飾)이 표현되었다.
다 소 긴 상체에 비하여 무릎이 낮아서 신체가 길어 보이며 낮게 표현된 무릎 위에 두 손을 단정히 대고 있다. 대부분 독성은 불화에서는 나이 든 나한(羅漢)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진관사 독성상은 젊은 나한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 특이하다.
이 독성상(獨聖像)은 소조(塑造)로 만든 독성상으로서 서울 , 경기 일원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독성조각 (獨聖彫刻)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또한 당시 독성상의 특징과 조각 양식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11호로 지정되었다.
진관사 독성전 독성도
이 독성도는 가로로 긴 화면에 민화풍(民畵風)의 산수를 배경으로 독성(獨聖)과 시자(侍者), 동자(童子) 등을 그린 것으로 가로가 2m가 넘는 대작에 속한다. 이 불화는 19세기말~20세기 초 경기도 일원에서 활약하던 화승(畵僧) 경선당(慶船堂) 응석(應釋)이 그린 불화(佛畵)로서 홍순모(洪淳謨)와 상궁 이씨(李氏)의 시주에 의해 1907년에 제작된 것이다.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채색이 탁하게 되어 있으며, 화면의 중앙에는 늙은 비구가 정면을 향해 앉아 있고 그 좌우에 시자(侍者)와 동자(童子)가 시립하고 있는 구도로, 늙은 비구는 부처님의 제자로 16나한 중의 한 분인 나반존자(=빈두로존자)이다.
또한 나한의 좌우에 노소의 시자가 합장하고 서 있는 삼존(三尊)형식의 구도는 칠성각의 삼존영정(三尊影幀)과 유사한 형식으로 주목받는다.
그림의 배경은 나반존자가 거주하던 남인도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화면의 향좌측 가장자리에 그려진 청록색의 소나무와 산악 등은 민화에서 자주 묘사되던 주제이다. 1907년에 제작된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필선이 유려하며 작품성이 있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12호로 지정되었다.
진관사 독성전 산신도
독성전에 봉안된 산신탱화는 세로로 긴 화면에 일반적인 산신도와는 달리 산수배경이 생략된 채 온화한 산신이 호랑이에 기대 앉아 있는 모습을 화면 가득 묘사하고 있다.
세밀하게 수염이 묘사된 산신의 얼굴은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듯하며 산신을 휘감고 있는 호랑이는 해학적이며 익살스러워 민화(民畵)의 호랑이를 연상시킨다. 밝은 진홍색의 채색과 녹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호랑이의 황색과 흰색 등이 어우러져 밝은 색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산신도는 화기(畵記)가 없어 제작연대와 화가 등을 알 수 없지만 진홍색의 채색과 호랑이의 표현 등으로 볼 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산신도(山神圖)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산수배경이 생략되고 산신과 호랑이만을 부각시켜 그려 대담하면서도 단순한 구도가 돋보인다.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9호로 지정되어 있다.
那畔神通世所稀 나반의 신통력은 세간에서 찾아보기 힘들어
行裝現化任施爲 나타나고 사라지며 교화하시기를 자재로 하시네
松巖隱跡經千劫 송암에 은적한 지 몇 천겁이 지났던가
生界潛形入四惟 중생계에 자취를 숨기고 사유에 들으셨네.
나가원
나가원은 대웅전 우측에 있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로, 1972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이다. 건물은 콘크리트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으로, 건물전면 3칸에 툇마루를 두어 요사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사채이지만 건물 외부는 동자도와 화훼도 같은 단청이 칠해져 단정한 멋이 느껴지며, 어간에는 현판을 비롯하여 주련 8기가 걸려 있다.
건물 내부는 정면 3칸은 대중방으로, 그리고 좌우 2칸은 요사채와 종무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중방에는 1972년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石造觀音菩薩坐像)과 1973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홍탱(阿彌陀後佛紅幀)이 봉안되어 있다.
나가원의 현판과 주련 또한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細推今舊事堪忍 貴賤同歸一土邱
고금의 사바사계 일 살펴보았더니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모두 흙으로 돌아갔네
梁武玉堂塵已沒 石崇金谷水空海
양무제의 화려한 궁궐도 이미 티끌이 되었고
석숭의 금곡도 빈 바다의 물거품이 되었네
光陰乍曉仍還夕 草木春卽到秋
시간은 잠깐 새벽이었다가 곧 저녁이 되어버리고
초목은 겨우 봄인 듯 싶더니 문득 가을이네
處世若無毫末善 死歸何物答冥候
세상살이 털끝만큼도 좋은 일 없으니
죽으면 어떤 물건으로 염라대왕에게 답하랴
동정각
나가원 아래에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지붕의 목조건물로, 1975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이다.
건물은 계단석이 있는 가구식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으로, 사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기둥에는 낙양각이 장식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어간에 근대 불교계의 대강백(大講伯) 탄허(呑虛)스님이 쓴 동정각(動靜閣)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기둥 외부로 주련(柱聯)이 있다.
건물 내부는 진관사의 범음을 전달하는 범종(梵鐘)이 걸려 있는데,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160㎝, 구경 91㎝, 300관의 대형범종이다.
願此鐘聲遍法系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하여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산 깊고 어두운 무간지옥 다 밝아지며
三途離苦破刀山 지옥·아귀·축생의 고통 여의고 칼산지옥 깨뜨려
一切衆生成正覺 일체 중생이 바른 깨달음 이루어 지이다
진관사 홍제루
진관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 초입에 있는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형식의 건물로서 1층은 석주기둥으로 구성되었고 2층은 팔작지붕의 목조건물로 1977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건물이다. 절에 진입하는 출입구로 경내에 들어서려면 누각아래의 중앙 계단통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건물 1층은 석주를 세워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으며, 석주에는「대종대시주비」가 새겨져 있어 조선후기 진관사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외 석주 좌우로는 목조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출입구에는 사천왕문을 대신한 듯 인왕상이 단청되어 있다.
이외 2층은 현재 강당으로 사용되는데,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아 사찰을 참배하고 집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외부는 계자난간을 둘러 진관사를 찾는 참배객들의 휴식처로도 사용되고 있다
慈光照處蓮花出 자비광명이 비추는 곳에 연꽃이 피고
慧眼觀時地獄空 지혜의 눈이 열리니 지옥도 본래 없네
又況大悲神呪力 또한 다시 대비신주의 힘으로
衆生成佛刹那中 중생을 찰나 중에 성불시켜 주시도다
普濟人天難思量 널리 인천을 제도함이 사량키 어려움이라
招憑諸佛大悲力 제불의 대비력을 불러 의지함이요
衆生不盡業茫茫 중생의 업이 아득하고 아득하여 끝이 없음이여
世界無邊塵擾擾 가없는 중생계는 어지러이 일어나는 먼지와 같음이여
삼천사
삼천사는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 대사가 개산(開山)하였다.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승병들의 집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임란 중에 소실 되었으나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마애여래 길상터에 진영 화상이 삼천사라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현재의 주지 평산 성운 화상이 부임하여 경내에 위치한 마애여래입상이 천년 고불(古佛)임을 입증하여 보물로 지정받고 30여 년의 중흥 불사를 통해 대웅보전, 산령각, 천태각, 연수원, 요사채 등의 건물과 세존진신사리탑, 지장보살입상, 종형사리탑, 관음보살상, 5층 석탑, 중창비 등을 조성하여 현재의 문화재 전통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마애여래입상
불상은 고려 초기의 마애불(磨崖佛)로 양감을 뚜렷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원만한 얼굴 표정과 부드럽게 흘러내린 유려한 옷주름에서 불화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매력을 주는 작품이다.
불상의 어깨 좌우에 큰 사각형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목조가 구(木造架構)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만하고 둥근 얼굴에는 입가에 미소가 가득 번져 온화한 느낌을 준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었으며, 가슴 부분에 속옷을 맨 띠매듭이 있다.
왼팔에는 겨드랑이 사이로 물결모양의 옷주름을 촘촘하게 새긴 반면 오른팔은 성기게 표현하여 두 팔의 구조가 짜임새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애불은 신체의 비례가 자연스럽고 조각수법도 섬세하여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암기적비
비는 조선왕조 제22대 임금 정조가 명릉(明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인 영조의 옛일을 회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세운 것이다.
비문은 영조가 부왕인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금암(黔巖) 덕수천(德水川)에 이르러 밤이 깊고 불도 없어 참사(站舍)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 때 이곳의 참장(站將)이 소도둑을 잡았다가 흉년으로 인한 도둑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타일러 보낸 일을 목격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를 거울삼아 훌륭한 정치를 행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금암은 의주(義州)로 가는 역참(驛站)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며, 현재 참사(站舍)는 없고 비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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