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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모임 <산에 대하여> 11차 정모 산행지는 충북 괴산 화양동구곡에 있는 도명-낙영산이다. 일찌기 화양구곡을 잘 알고 있었고 가 보고도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화양구곡에는 이번이 처음이다. 산 자체를 즐기던 나에게 도명산은 그리 큰 산이 아니었을까? 또 이 근처에 있는 괴산 최고의 명산 군자산에도 아직 가보지 못했다. 산을 치우치지 않고 두루두루 섭렵하는 것으로 유명한 나의 산행도 어떤 면에서는 편식증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시기가 그런건지 이번엔 긴겨울이 못 오고 여럿이 빠졌는데 재미있게도 산에는 그리 친화적이지 못한 이정이가 시끄새와 함께 왔다. 경주팀(우원과 단미)은 저녁 6시에 경주를 출발해 청주로 가서 미리 예약한 테마모텔 <잉카의 작은 마을>에 들었고, 서울팀(이정과 시끄새)은 밤 9:10분 차로 서울을 출발해 밤 10:40분에 청주에 도착했다.
이정이가 서울에서 청주로 오기 위해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섰다. 그는 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친구들 보고 싶어서 온다고 했다.
청주에 먼저 도착한 경주팀이 터미널로 마중 나가 서울팀을 픽업하고는 바로 숙소 근처로 와 어느 주점에 들었다. 횟집이었는데 재미있게도 굴과 밥, 라면, 순대 등은 무제한 먹을 수 있다는 주점이었다. 우리는 우럭매운탕을 하나 시키고 라면, 밥, 순대, 굴 등을 마구 먹어댔다. 열 띄게 얘기를 하는 이정이는 늘 진지하다.
굴을 구워 먹다보니 메인 메뉴인 우럭매운탕이 나왔다.
2차로 <피쉬 엔드 그릴>에 가서 새로 시작한다. 이정이는 왕십리 얘기만 나오면 흥분해서 막 줏기는데(?) 그런 사이에 시간은 새벽 4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 그건 별 문제 없다. 이러기를 한두번이냐?
다음 날 아침 시끄새의 성화에 9시에 모두 일어나서 산행에 나선다. 청주 상당 용암동에서 설렁탕으로 가볍게 배를 채우고 우리는 청원을 지나 괴산으로 달려간다. 우리는 바로 화양구곡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반대쪽에 있는 공림사로 가서 거기서 낙영산과 도명산을 넘어 화양구곡으로 들어갈 것이다.
공림사로 들어가는 길에 낙영산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공림사에 선 이정과 단미.
공림사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 낙영산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경문왕 때 자정선사(慈淨禪師)가 창건하였는데 조선시대인 1399년(정종1)에 함허(涵虛)가 폐사된 이 절에 법당과 요사채 등의 모든 건물을 새로 중창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여러 건물이 불탔으나, 대웅전만은 보존되었다. 인조 때 다시 중창, 그뒤 6·25전쟁으로 8동의 건물 중 영하문(暎霞門)과 사적비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으며, 1966년 법당과 요사채를 재건하였다.
극락전 안에 안치된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 초기의 걸작품인데, 공비 토벌 때 손상된 것을 1979년에 개금(改金)하여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그밖에도 1776년에 주조된 범종과 부도 3기, 맷돌, 석조(石槽), 사적비 등이 있다. 부도 3기 중 2기는 높이 170cm로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극락전 좌측의 청룡날에 있고, 1기는 남쪽의 부도골에 있다.
공림사에서 왼편으로 난 길을 올라 도명산 방면으로 나아간다. 중간에 잠시 쉬는 일행들. 아직도 낮은 여전히 덥다.
공림사와 도명산 사이의 딱 중간지점. 여기서 우측으로 오르면 낙영산이다. 하지만 오늘 등반에서 낙영산을 넘어가기는 하지만 낙영산 정상까지 갈 가치는 크게 없어 보인다. 오늘은 그저 낙영-도명 종주인 것이다. 우리는 안부를 넘어 도명산으로 나아간다.
또 하나의 안부. 이제 도명산이 600m 남았다. 거의 다 왔다. 산속에 조폭들이 왔나? 모습들에 강인한 포스가 느껴진다. 아니! 브루스 브라더스인가?
도명산을 오르는 일행들. 늘 패잔병이었던 이정이가 단단히 준비를 한 모양이다. 어제 술을 그만큼 먹고도 오늘은 계속 선두에서 치고 오른다. 다시 보게되는 이정이다. 그는 어제 밤 술에 취해서 자신의 성장기의 비밀을 몽땅 털어놓고 말았다. 화려한 과거를.............
전망대에서 잠시 쉬고...............시끄새가 달라졌다. 살이 많이 빠져 몸에 균형이 조금씩 느껴진다. 술을 가급적 자제하고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했다. 장익진가가 요새 성호한테서 연락이 없다고 한다. 성호는 그 동안에 혼자서 운동을 열심히, 또 마눌님한테도 열심히 봉사(?)한 것 같다.
큰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하는 이정. 비? 맑은 날 무슨 비? 그럼 왜 저 밑에서 저렇게 앉아 있냐? 범죄형의 인간들은 늘 저렇게 숨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지.
도명산 오름길에서 샛길로 정상에 오르는 우원. 근데 누가 내 사진을 찍었냐?
드디어 도명산(643m) 정상이다.
도명산은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으며,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있는 천혜의 계곡 화양동을 안고 있는 명산이다. 낙영산에서 북쪽으로 갈라진 산줄기가 화양천에 그 맥을 가라앉히기 전 바위로 불끈 일으켜 세운 산으로 이름처럼 삼체불 부근에서 도를 닦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성을 드리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화양구곡에서 도명산 정상까지는 통나무 계단과 철사다리 등 안전시설이 잘 되어 있다. 정상은 크고 작은 바위 다섯 개가 하나를 이뤄 정상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중 높고 큰 바위에 올라 앉아보면 신선이 따로 없다. 동으로는 백악산에서 뻗은 줄기, 서로는 그 너머 금단산, 남으로는 낙영산 너머 톱날같이 늘어선 속리산 연봉들, 북으로는 화양천 너머 쌍곡계곡의 군자산의 위엄이 다가선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속리산의 문장대도 또렷이 보인다. 정상주변에는 분재처럼 잘자란 소나무 몇 그루가 무상한 세월을 느끼게 한다.
점심은 서로 준비한다고 미루다가 결국 아무도 준비하지 못하고 말았다. 화양구곡으로 들어오는 줄 알고 모두들 만심하다 점심을 놓쳐버린 것이다. 구멍가게에서 먹거리를 좀 사 가져왔고 이 가방 저 가방에서 간식들이 흘러 나왔다. 선식가루, 떡, 빵, 육포, 초코렛바, 사과 등으로 그럭저럭 배는 찼지만 뭔지 모자란다. 우리네는 꼭 밥을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은 것이다.
도명산은 예로부터, 천하 절승지로 이름난 화양동계곡 남쪽을 가로 막고 서있는 명산으로 화강암의 바위봉과 기암석벽이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정상 바로 아래인 9부 능선 정도에 옛날에 낙영사가 있었다던 낙영사터에 마애석불이 있다. 마애석불은 도명산 제1 경승지로 손꼽힌다.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최고 30m나 되는 수직암벽에 각각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부처님의 발끝에서는 물이 샘솟고 있다.
정상에서 내려서면 처음으로 나오는 철사다리이다. 하산은 서쪽의 바위 사이를 빠져 철사다리를 타고 15분 정도 내려섰다 올라서면 소나무 숲속에 10여m 바위가 길게 누운 끝봉을 마지막으로 급한 경사길을 내려가게 된다. 중간중간 줄을 매어 놓아 잠시 정도면 어렵지 않게 내려서 8부 능선으로의 편안한 길이 계속되며, 30분 정도 내려오면 철조망이 처진 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이 쪽에 있는 화양 5곡인 첨성대로 하산하는 길과, 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화양계곡의 운치는 자연의 넉넉함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에 젖게 한다.
뒤이어 일행들이 따르고 있다.
내려오면서 학소대 방면 능선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이런 개구멍바위도 지나야 하고...............와! 배가 없어진 시끄새. 완전히 인간승리이다.
요런 철계단도 여러 개나 나타난다.
한참 내려서다 앞을 쳐다보니 갑자기 화양동계곡이 나타나면서 암서재가 계곡 건너편에 보인다.
화양구곡중 제일 중심에 있는 금사담 위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암서재는 오른편으로 서재 오르는 바위 절벽에 명태조의 어필이라는 "충효절의" 글귀가 있고 그 옆으로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창오운단무이산공" 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금사담과 어우러진 암서재는 바위절벽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이지만 서재 툇마루에서 계곡을 바라보는 풍광이 더욱 아름답다. 암서재는 오늘에 이르기 까지 5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명승지 이름을 보면 '팔경' 또는 '구곡' 이라는 명칭을 보는데 그 말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팔경은 중국의 소상팔경에서 유래되었고, 구곡은 중국의 무이구곡에서 유래된 것이다. 팔경과 구곡의 차이점이라면 뒤에 붙은 경과 곡의 차이라 할 수 있는데 '경'은 한눈에 들어 올 수 있는 최대의 경치를, '곡'은 좁은 계곡을 뜻한다고 할 수가 있다. 팔경은 지금도 지방자치단체나 기관에서 경치 좋은 곳을 선정하여 8경으로 정하고 있다.
화양구곡 암반에 내려선 2인의 무뢰한.
화양동계곡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절경이 아홉 곳이나 된다고 해서 '화양구곡'(華陽九曲) 또는 '화양동 소금강'으로 불린다. 이곳은 경치가 너무 아름답고 물이 맑아 조선시대의 조선조 대유학자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나와 은거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암 송시열은 이곳이 중국의 무이구곡을 닮았다 하여 스스로 제1곡부터 9곡까지 이름을 붙이고 경천벽, 금사담, 첨성대 등의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 화양구곡은 제1곡인 경천벽에서 제9곡인 파천까지 화양천변 10여리길에 암석과 암반이 펼쳐져 있다. 대충 설명해 보자면...........
제1곡은 경천벽. 층암절벽이 깎아지른 듯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라 이름지어졌고
화양2교 옆에 나타나는 제2곡은 운영담이라 불린다. 이름 그대로 구름이 물에 비치는 아름다운 곳이다. 강변 모래사장이 넓어 단체놀이에 좋다.
제3곡은 우암 선생이 효종의 승하를 슬퍼하며 새벽마다 이 바위에 올라 통곡했다는 읍궁암으로 이 일대에 민박집과 식당이 많이 몰려 있어 화양계곡 중 가장 번화한 곳이다.
화양구곡 가운데 가장 빼어난 금사담( 제4 곡)은 이름처럼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깔려있는 곳으로 넓은 암반 위에 우암 선생이 서재로 사용했던 정자(암서제)가 노송 사이에 있다.
화양3교 직전 오른쪽 낙영산 꼭대기에 있는 기괴한 암벽인 제5곡 첨성대는 별을 관측했다는 곳이다.
이곳에서 1백m쯤 더 올라가면 계곡이 더욱 깊어지면서 2층으로 된 큰바위인 제6곡 능운대가 나온다.
이후로 제7곡 와룡암,
제8곡 학소대,
제9곡이 파천이다.
피서객이 주로 쉬는 곳은 4곡이나 5곡. 그래서 9곡근처는 한적하다. 도명산 정상에서 우측으로 8곡 학소대 쪽으로 내려와서 8곡부터 7곡, 6곡, 5곡...................1곡까지 보면 화양구곡을 다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첨성대 방면으로 내려왔으므로 5곡, 4곡, 3곡, 2곡, 1곡...이렇게 화양구곡을 감상한다.
무이산은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는 명산으로 옛날 신인(神人)무이군이 살았다는 전설에 의해 무이산으로 불리워 왔다. 본래 구곡은 중국의 송나라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비롯되었다. 주자는 무이산에서 풍경이 아름다운 계곡 9곳을 선정하여 구곡을 설정하고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무이도가를 읊었던 것이, 우리나라 선비들의 입에도 회자되어 왔다. 특히 조선조에 성리학이 송의 주자학을 능가할 정도로 발달하고 성행하자 유학자들 사이에 주자의 무이생활을 선망하여 경승지 도처에 구곡을 설정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구곡을 설정하고 정사를 운영한 것은 율곡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율곡 이이는 황해도 해주 고산면 석담에 은거하면서 고산구곡을 돌며 구곡의 이름을 짓고 5곡에 은병정사(隱屛精舍)을 짓고 은거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 율곡과 같은 기호학파였던 우암 송시열도 병자호란 이후 충북 괴산군 청전면 화양리에 은거하면서 화양구곡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읍궁암 앞 식당가 앞에서 담화하는 일행들. 이정과 시끄새는 둘만 있으면 늘 "씹새끼!", "씨팔놈!". "우라질 새끼!", "씹새야!"....하다가도 단미가 중간에 끼면 대화가 어느새 품위있고 지적인 분위기로 바꾼다. 하여튼 놈들이란!
내가 사진을 다 찍었는데 시끄새가 몇장의 사진을 생략하고 올리지 않아 할 수 없이 이정표 가지고, 또는 사진이 없이 막 설명에 들어간다.
금사담은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보이는 계곡 속의 못이라는 의미로 화양구곡 중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다.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이 정계를 은퇴한 후 이곳 반석 위에 집을 지어 이름을 암서재라 하고 이곳에서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하였다고 한다.
화양구곡의 어느 풍경
우암 송시열의 유적지인 화양서원으로 사적 417호이다. 이 유적은 조선 성리학을 계승하고 완성한 우암 송시열의 애국사상과 중국 청나라의 무력에 굴하지 않는 민족자존 정신이 깃든 곳이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은거했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써 조선시대 학자들의 모임 장소였으며, 만동묘는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옛터가 잘 남아있다. 건립 이후 조선말까지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였던 이 유적은 경술국치 후 일제에 의하여 철저히 왜곡되고 파괴당하는 수난을 겪은 곳이다.
읍궁암에서 조금 내려가다 보면 계곡에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있다.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 운영담이라 이름했다. 소 위에 자리잡고 있는 바위절벽 밑에 운영담이란 글자가 있다.
자! 이제 주차장으로 나간다. 우리는 산을 타러 왔기에 화양구곡에 대한 풍광이나 유적에 대한 탐색은 간단하게 하기로 한다.
어쿠! 아직 1곡이 남았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화양 제1곡인 경천벽이다.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그 형세가 자연의 신비라고나 할까,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듯 하고 있어 경천벽이라 한다. 경천벽 아래 '경천벽'이란 각자가 있고 그 옆으로 '화양동문'이란 글이 바위절벽에 새겨져 있다.
여기가 화양구곡 입구. 우리는 거꾸로 나왔던 것이다.
서울 가는 차를 타기가 애매한 지역의 괴산에서 문경, 충주, 청주를 저울질하다 청주로 다시 달려 올라간다. 그리고 청주고속터미널 근방에서 쇠주를 몇 병 때리고 우리는 저녁 7:30분에 이별을 한다. 잘 가거라! 친구들이여! 자주 보는 친구들이지만 헤어질 때는 항상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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