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신학 “순복음성령신학” “오순절성령신학”
성령 이해, 체험과 기도의 중요성 등 특징 가져
현대 오순절 운동이 일어난 지 한 세기가 지나고 한국에서 순복음 성령운동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기독교 신학 가운데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또는 교회사의 많은 신학적 사조들 가운데 순복음의 신앙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성찰해 볼 시기에 이르렀다. 한 세기 또는 반 세기가 지났기 때문에 이제 시간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세계 오순절 교단이 개신교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았고, 한국의 순복음 성령운동이 10년내 500교회 개척이라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목표 아래 장차 범 기독교적으로 확산되어 나갈 것이 분명히 예견되는 이 시점에서 순복음 성령운동을 적절하게 신학화하는 작업은 이제 21세기를 이끌고 나갈 순복음 성도와 신학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간 순복음 성령운동에 대한 외부의 비판과 내부의 자성적 비판이 적지 않게 있어 온 만큼, 이제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의 ‘우리됨’을 지켜 나가야 할 때이다.
순복음 신앙의 신학화 작업을 위해서, 순복음성령신학의 이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신학은 신앙체계를 설명해주고 그것을 가지고 세계를 보게 하는 패러다임이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나 새로운 신앙 체험은 종종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볼 때 맨 처음으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은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셨다. 그동안 유대인들이 견지해 온 신관은 유일신론이었다. 야웨 하나님 외에는 섬길 다른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시되지 않았다(출 20:3, 신 6: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시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하셨다(요 14:9, 10:29). 예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유일신관이 아니라 이위일체의 신관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유대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갖게 된 것도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기존 유대인들이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한 것도 신앙의 패러다임의 갈등과 마찰 때문이었다(행 9:20, 20:21). 그런데 오순절날 성령께서 오셨을 때 또 한번 신관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패러다임이었다.
베드로는 성령을 하나님으로 인식하였으며(행 5:4), 바울은 성령을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 동일한 차원에서 다루었다(고전 12:3∼6, 고후 13:13).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라틴 교부인 터툴리안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고 삼위일체의 교리는 니케아 종교회의와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확립되었지만, 유일신론의 신관에서 삼위일체적인 신관으로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미 초대교회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기독교에서의 또 한번의 큰 패러다임의 변화는 루터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이 때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구원론에서의 변화였다. 인간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얻는 수단이 되고 참회와 고행이 하나님 앞에 모종의 의를 얻는 공로가 된다는 것은 당시에 팽배해 있던 사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루터는 구원 전에도 믿음이요 구원 후에도 믿음만이 하나님 앞에 의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이 보시는 의는 오직 신앙적 의라는 것이 루터의 외침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루터의 이러한 신앙 또는 신학 운동을 종교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제 나는 여기서 또 하나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오순절 운동 또는 순복음 신앙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을 설명하고 신앙 실천을 위한 별다른 신학적인 체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여기서 순복음성령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20세기 초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확산되어 나갔을 때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자들이 오순절주의를 “제3의 세력”, “제3의 교회” 또는 “제4의 교회”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의 필요성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순복음성령신학은 간략하게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가지고 하는 기독교 신학”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에는 성령의 역할과 활동 및 성도의 성령 체험과 이해가 무엇보다도 강조된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신학은 “체험적 성령신학”, “오순절성령신학” 또는 “순복음성령신학”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성령신학의 특징에는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 신학에서의 체험의 중요성, 신인식론의 방법으로서의 기도의 중요성 등이 포함된다. 이 외에 성령과 말씀,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등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에 포함될 것이다.
임형근목사
- 서울대학교 및 대학원 졸업
- 풀러 신학대학교 박사과정 Ph.D. (조직신학 전공)
- 현, 여의도순복음교회 새신자국장
- 한세대학교, 순복음신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