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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50년, 그리운 세월
한영이
1. 내 땅만 밟았던 어머니의 고향
오랫동안 부모님의 회고록을 쓰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부모님의 삶을 쓸 수 있는 자료 준비를 제대로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먼 후일 후손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를 깨닫게 되어 이미 늦었지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고향은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와 동향인 함경남도 영흥군 인흥면 왕상리 56번지에서 1등 호세를 바치며 살던 커다란 입구자집 이었습니다. 영흥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요덕 수용소와 북한에서 관광특구로 소문난 원산이 가까이 있고 산과바다, 강과 들녘이 모두 함께 잘 어우러진 풍광이 아주 수려한 곳이기도 합니다. 강에서는 금방 낚은 연어로 국을 끓여 천렵을 하고 산과 바다에서는 온갖 먹거리가 풍요로워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들이 넓은 이곳에서 자기 땅만 밟고 사는 입구자집에 어머니는 맏며느리로 시집을 오셨습니다. 아버지 나이 열셋, 어머니 나이 열여섯에, 어머니로서는 이 크나큰 집안 살림이 얼마나 무겁고 벅찬던지 한번은 큰 시누이가 친정에 와서 밭을 팔아 가는 걸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너무나 고맙고 기뻤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밭은 하루 종일 일해야 두이랑 밖에 못 매는 아주 큰 밭으로 너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아랫동서인 나의 작은어머니는 어느 날 어머니를 찾아와 ‘형님은 맏며느리가 되어 시누이가 땅을 팔아 가져가도 어찌 말 한마디도 안 하시냐’ 며 어머니를 원망 하셨답니다.
어머니가 태어난 곳은 영흥과 멀지않은 고원면 중사박리란 곳에서 1913년 맏이로 태어나셨습니다. 중사박 어머니의 친정은 주변에 각종 과일나무로 둘려 싸여있어 과수원 같았던 모양입니다. 매우 엄하시기로 소문난 어머니의 진사 할아버지는 해마다 봄이 되면 동네 아이들을 불러놓고 첫 번째 과일인 슁튕이(자두일종)를 따서 싫컷 먹이셨습니다. 이 일이 있고나면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놓고 가을이 다가도록 과일들을 따먹을 수 있는 이집만의 독특한 가풍? 내력?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어느 봄날 진사 할아버지의 슁튕이 시식행사가 늦어지자 동네 아이들은 이 시식행사를 기다리며 참지 못하고 할아버지의 출타를 틈타 몰래 따 먹다가 귀가 하시는 할아버지께 들키고 만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날 슁튕이뿐 아니라 다른 모든 과일나무들 까지 몽땅 다 베어 버린 것입니다. ‘버릇없는 나무를 집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사할아버지의 철학은 너무나 확고하셔서 이 상황에 어느 누구도 불만이나 불평은 감히 말 할 수도 없는 할아버지만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날 다 베어진 과일나무를 본 어린시절 엄마는 얼마나 아깝고 안타까웠는지 그때의 심정을 나이 60, 70이 넘어서도 두고두고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영흥으로 시집을 와선 땅부자, 일부자 때문에 넌더리를 내셨습니다. 동네 이웃들의 애경사를 우리 집에서 다시 작은 잔치로 베풀어 줘야하는 이 집만의 관행이 어머니의 고된 삶 가운데 한 예 입니다. 어떤 때는 가마솥이 하도 커서 아예 솥 안에 들어가 닦기도 하셨다니… 이렇게 사셨던 어머니는 자기의 삶이 전부인양 자기 삶의 방식대로 사윗감 고르는 그 기준이 부잣집과 맏며느리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셨습니다.
2. 남편 찾아 천리길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사회가 급변 혼란해지자 북쪽은 공산화로 변했습니다. 이때 지주들과 지식인 기득권자들은 숙청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듬해 대다수의 지주들은 집과 토지를 국가에 모두 빼앗기고 남으로 남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7년 아버지는 혼자 맨몸으로 남쪽 상황을 살피러 내려 오셨다가 1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자, 이듬해 어머니는 나만을 업고 세 아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아버지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이 당시 북은 한창 전쟁준비로 경비가 삼엄하여 혼자 몸으로도 넘어오기 힘든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세명의 아들 (영후 13세, 영수, 영기)을 기차역에 남겨두고 남으로 넘어온 것을 평생 동안 잊지 못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사셨습니다. 남으로 떠나기 전날 밤, 자식을 북에 두고 온다는 것이 끔찍한 현실이 된 어머니는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고 “영후야 동생들 잘 데리고 있어, 남쪽 가서 아버지를 찾으면 곧바로 데리러 올께” 라고 다짐하고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참으며 또 다짐하였습니다. 다음 날 젖먹이 나를 등에 업고 역에서 남쪽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숨 막히는 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주위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잡혀 갈 것 같이 삼엄했습니다.
이때 학교에서 한창 공부할 시간에 끝날 시간도 아닌데 세 아들이 불쑥 역에 나타난 것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고 너무 놀란 어머니는 서로 눈빛만 오고 갈 뿐 오빠들과 어머니는 한마디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세 아들과 함께 남으로 가지 못하는 현실을 서로 알며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세 아들을 쳐다보고 있는 어머니 ! 이렇게 기막힌 비극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이 비극의 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재빨리 엿을 사서 세 아들을 달랬지만 진정 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남북이 70년이나 가로 막히는 이 기막힌 비극을 그 당시 감히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요? 피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와 세 아들의 이별은 기차의 출발로 끝났지만 자식을 놓고 떠나오는 어머니는 주체할 수 없는 울음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이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의 한마디 ‘어딜 가는데 그렇게 우십니까? ’ 라는 이 한마디에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눈물이 싹 말라 붙었다고 하였습니다. 안내자를 앞세우며 낮엔 풀숲에서 숨어 지내고 밤에만 이동하는 것입니다. 팀 모두가 살기 위해선 어린아이들은 걸림돌 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팀원들의 목숨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강을 건널 때에도 배에서 일행 중 한 아이가 울기라도 하면 소리없이 물속에 넣어 버려야 하는 급박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나는 한 번도 울지 않고 엄마 등에 업혀 죽지 않고 살았다고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행운아 중 행운아 입니다.
그때의 탈북 과정도 요즈음 탈북과정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집은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하는 이산가족 실향민의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늘 수심에 찬 얼굴로 한이 많아 온갖 병을 평생 달고 사셨고, 어머니는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 종일 종종 걸음으로 바쁘게 괴로움을 잊으려는 듯 뛰어 다니다시피 했습니다. 생활은 엄청난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시나브로 정착하기에는 달랑 입고 있는 옷이 전 재산으로 생활력이 전혀 없는 가난한 형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명절이면 평소 한잔도 못하시는 술과 담배를 앞에 놓고 가슴에 맺힌 회한을 소리 없이 눈물 흘리시며 괴로워 하셨습니다. (신앙심이 깊으신 두 분은 감리교회 권사이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 “이 모든 것들 다 버리고 갈 것” 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시며 살림도 출세도 미련 없으시고 친척들이 찾아오면 베풀기나 하시며 사셨습니다. 나는 우리도 남들처럼 멋진 가구도 꾸미며 살고 싶었고 사치도 부려보고 싶었습니다. 나로서는 부모님 하시는 일이 마음에 안 들고 싫었습니다. 부모님의 인생 최대의 실수는, 우리들의 슬픈 유산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일은 어렵던 그 시대에 우리들에게 피아노와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신 것은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3. 청주 한씨의 본향을 찾아서
서울서 4년을 버티며 살던 아버지는 고향사람들을 피해 아무도 모르는 청주를 선택한 것입니다. 청주에 도착해 어둑어둑해지자 잠잘 곳을 찾았습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사직동 395번지, 동네 하나뿐인 권씨 할아버지의 기와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침 이집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단 두 식구 뿐 다른 가족은 없었습니다. 사대부 양반으로 보이는 두 분은 모두 연세가 많아 보였고 두 분 모두 머리카락이 호호 백발이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곳서 하룻밤만의 신세가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세월이가면서 할아버지는 아예 마당 한구석에 손수 조그마한 집을 지어주시고는 함께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할아버지와 우리는 한 가족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마루 끝에 서 계시다가 안방 벽장 속에 감추어 둔 밤, 대추, 곶감을 매일 조금씩 내 주머니에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평생 잊어서는 인될 친 할아버지, 친 할머니, 친 부모님 같은 분들이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모두 세상을 뜨시고 나서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할아버지의 집을 나왔습니다. 우리는 살고 있던 근처의 논과 밭을 사서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지키며 새로이 제2의 고향을 만든 것입니다.
한번은 이곳서 영원히 잊지 못할 드라마틱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이 있던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저녁식사를 일찍 마치신 동네 아저씨 몇 분이 우리집 평상에서 라디오로 개표방송을 듣고 계시는데 뒷동네 고샅에 사는 최 씨가 석교동 시장에서 신발수선일을 마치고 귀가 하던 중 우리집을 들르셨습니다. 그런데 최씨는 무언가 작심한 듯 안절부절 못하시며 자기 집을 오락가락 하시더니 드디어 아버지께 한마디 던지셨습니다.
“한 주사 , 날 모르오?”
한마디 던지시고는 잠시 집으로 갔다가 다시 와서
“한 주사, 날 그렇게 모르시오?”
또 똑같이 묻고는 집으로 갔다가 대답이 없자
“어찌 그렇게 모른단 말이오.” 하며 원망 섞인 말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한마디 대답을 못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최씨께 자신이 대접을 소홀히 해드려서 시비를 거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공손히 응대해 주시며 자초지정을 묻자 최씨는 자기의 지나온 삶을 줄줄이 풀어 꺼내 놓으셨습니다. 참 별일이 다 벌어졌습니다. 최씨 아저씨는 홀홀 단신으로 청주에서 영흥까지 보따리 보부상을 다니셨다며 우리 모두를 깜짝 놀랬키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는 사람을 피해서 청주에 숨어 사셨건만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시고 계셨던 분이 이웃서 함께 살며 10년이 넘도록 어찌 말 한마디 안하고 침묵으로 사셨단 말인가 ? 최씨는 영흥의 입구자집 내력 뿐 아니라 실물을 보듯 우리 조상들의 묘까지도 자기 손금 보듯 잘 아시는 것이었습니다. 최선생이 시치미를 뗀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한주사가 이곳에 와서 이렇게 살줄을 누가 알았겠느냐.’ 였습니다. 이제는 이만큼 살게 되었으니 아는 체해도 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우리에겐 타임머신을 타고 20여년전으로 돌아간 너무나 커다란 한편의 영화 같은 충격 이었으나 이제는 아득한 먼 추억의 옛날이야기로만 아물아물 거립니다.
4. 어머니의 삶
6.25를 치른 1960년대 우리들의 삶이란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때는 거리에 거지와 불량배들도 즐비하게 많았습니다. 우리집에 단골로 오는 아줌마는 허리춤에 양쪽으로 깡통 2개를 끈으로 질끈 매달고는 어른인데도 항상 코와 침을 질질 흘리고 외모가 볼상 사납게 불결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줌마가 우리집을 참 자주 드나들며 아침이면 부엌에서 가끔 불도 때주며 밥을 지어 얻어갔습니다. 찬밥이 많이 있어도 엄마는 꼭 새 밥만을 항상 고집하며 새로 지은 밥만을 주시는 것이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갓 지은 밥도 집에 가면 찬밥이 되는 건 상식이거늘 엄마는 꼭 새 밥만을 고집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엄마 자신은 늘 아침에 혼자만 찬밥을 드셔서 우리 가족들은 불편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줌마보다 우리엄마가 더 밉고 보기에도 바보 같고 창피했습니다. 한번은 부엌에서 밥솥에 불을 때고 있는 아줌마를 발견했습니다. 이날 아침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화를 있는 대로 다 내고는 아침밥이고 도시락이고 다 필요 없다며 기차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고는 그냥 학교를 가 버렸습니다. 심산이 보통 꼬였던 게 아니고 한마디로 철이 없었던 것입니다. 먼 후일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북에 두고 온 고향 가족들과 아들들 때문에 절대로 찬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늦게서야 깨닫고 많이 후회 했습니다. 이밖에도 어머니는 친척은 물론 일가도 아닌 갈곳 없는 분들을 한마디 불평 없이 보통 1-2년씩 우리와 함께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때에 어린 나는 식구가 많고 손님들이 많은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역에서 울기만하다 엄마를 바라만보고 말 한마디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빠들의 발길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13살 어린나이인 오빠는 병들고 지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철모르는 동생들과 어찌 살았을까... 지난 세월 나는 왜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로 한번을 제대로 못해 드렸을까... 어처구니 없고 한스럽기만 할 뿐 가슴 아픈 일입니다. 돌아가신지 세월이 10년, 20년이 지났건만 이 황량한 심정을 어찌 말로, 글로 다 풀어낼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살이 찢기어오는 느낌입니다.
오늘 밤이라도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나 맛있는 음식과 예쁜 옷 곱게 입혀 드리고 정답게 손잡고 걸어보았으면....
아∼ 아∼ 얼마나 내가 불효막심했으면 꿈속에서도 한번 안 나타나주실까....
칭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5. 초등학교 시절
사직동 끝에서 끝으로
우리 어린 시절에는 공부보다는 노는 게 우선이고 무엇보다도 그냥 놀기만 하는 것이 일과중 전부였다. 늘 밖에서 놀다가 늦게 들어와도 엄마는 걱정을 하거나 찾지도 않으셨다. 항상 공부가 끝나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우리들은 모여서 운동장 한구석에 책가방을 수북히 쌓아 놓고는 편을 갈라 게임을 시작했다. 고무줄, 말타기, 떨어진 기차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무승부가 날 때까지 실컷 놀아야 끝이 나고 어두워져야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집은 사직동인데 모충동과 경계에 있어 집과 학교는 사직동 끝에서 끝이었다. 충혼탑을 가로 질러 학교를 오가야만 했다. 학교가는 지름길은 작은 야산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에는 묘도 드문드문 있고 행여를 보관하는 헛간도 있었다. 이곳을 지날때는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곤두서고 떨며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쏜살같이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산길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왜냐하면 사시사철 길가에 수줍게 피어있는 들꽃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면, 눈부시게 하얗게 핀 싸리꽃과 언덕배기 연분홍 참깨꽃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키가 큰 아카시아 꽃들은 하이얀 흰솜이 되어 오솔길에 폭신한 카페트를 깔아 놓아 신나게 뛰어 놀았다. 언제나 이 작은 동산은 축제 분위기나 다름 없었다.
오고 가는중에 배가 고프기라도 하면 진달래, 목화꽃송이, 아카시아꽃으로 뱃속을 달래고 또 어떤때는 아카시아 나뭇잎으로 가위, 바위, 보 잎사귀 따기 놀이를 하며 이 산의 주인노릇을 했다.
어느날 옻나무를 잘못 만져 얼굴이 벌겋게 달아 부어 결석을 한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삭막한 큰길 신작로 보다는 작은 야산 오솔길이 우리의 요람이었다. 이 시절을 타임머신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지금도 돌아가고 싶다.
이렇게 놀기만 좋아하던 우리는 4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 서숙자 담임선생님은 비록 어린 우리가 보기에도 말씀이 적고 근엄한 표정이 마음 놓고 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의 선생님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공부만이 희망이고 공부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초라하고 가난한가를 가르치며 보여주셨다. 분홍색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멋쟁이 선생님을 우리 엄마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나는 한때 한적 있었다. 우리 반은 공부는 물론 무엇이든 제일 잘 해야만 했다. 선생님은 좀 더 나은 우리의 인생을 위해 욕심도 많고 공부도 잘 가르치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훌륭한 분이셨다.
잊혀지지 않는 나머지 공부
하루는 커다란 칠판에 하늘의 별자리를 가득 써놓으시고는
“다 외우는 사람은 집에 가도 된다” 하시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친구들은 열심히 외워서 하나씩 둘씩 집엘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 줄도 못 외우고 끙끙대고 있었다. 별자리 이름은 우리말이 아니어서인지 더 어려웠다. 그런데다 이 어려운 이름을 다 외워야 하다니 이일은 나에게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일이나 다름없었다. 외우기를 해본 적 없는 나는 오늘 저녁 집에 가기는 다 틀린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외우기가 문제 아니고 집에 가는 일이 나에게는 지상 최대 과제가 된 것이다. 혼자 고민 고민 별별 궁리를 다 해 봤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 혼자 이 넓은 교실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무서움과 외로움에 눈물까지 범벅이 되었다. 한참을 숨소리 조차 못내고 있던 중 선생님이 어디선가 나타나셨다. 깜짝 놀란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시고는 공책에 한 번만 써 놓고 얼른 가라고 하셨다. 그날 집에 무사히 오긴 했지만 엄마한테는 왠지 창피해서 오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튿날 교실에 들어서며 선생님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어저께 집을 보내준 선생님의 얼굴이 의외로 반갑고 고맙게 여겨졌다.
어제의 힘들고 괴롭던 나머지공부 사건은 나를 더욱 공부에 매진하게 하여 내 삶을 토실토실 살찌우기 시작 한 것 같다. 예전 같으면 공부가 끝나면 곧장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놀기에 바빴는데 이 사건 이후로는 운동장이 아닌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학교서 집에 오면 방에도 들어가지 않고 즉시 문지방에 걸터앉아 숙제부터 챙겼다. 엄마는 이 사실도 영문도 모른 채 칭찬을 해 주셨다.
드디어 우등상을 타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는 별로 친하지가 않았다. 뒷집 쌍둥이 친구는 싸울 일이 생기면 둘이 한꺼번에 덤벼들어 같이 놀기가 두렵고 또 다른 몇몇 친구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어 함께 어울리기가 싫었다. 전보다 노는 시간이 줄어들어 심심해지긴 했지만 이때부터 5살과 10살 아래인 동생들을 돌보며 함께 놀았다. 이때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동화책이나 위인전 같은 책을 사줄 생각을 왜 못하셨을까? 그때야 말로 나에게는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하긴 현재 나 자신도 돌이켜보면 우리 부모님과 별반 다르지 않게 우리 애들을 동화책 한권 없이 기르고 가르쳤으니 부끄럽고 한심하기로는 내가 더한 것이다.
하지만 이 나머지공부 사건은 나에게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공부를 못하면 집에 갈 수 없다’ 는 서숙자 선생님의 매서운 가르침은 지금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6학년 때는 어려운 우등상도 탔다. 가정 통신문에는 늘 ‘책임감이 강한 어린이’라고 선생님은 써 주셨다. 생각해보면 공부를 어찌해야 잘 하는 지, 또한 재미있게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인생을 방치하며 막연히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그 때의 일은 다행히 나를 교육대학까지 갈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소중한 추억거리로 남겨주었다. 처절한 좌절이나 절망을 모르고 평범한 인생을 살아 온 나에게는 ‘나머지 공부’ 사건이 나를 여물게 영글어 이 자리까지 이끌어 온 고마운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6. 초임발령
두메산골 연풍이라니
초조하게 기다리던 발령이 생각보다 일찍 났다. 부임일이 일주일 정도 남아 있었다. 우리는 졸업과 동시에 남자 168명, 여자 72명 총 240명 전원이 발령을 받았다. 공부만 했던 학창시절을 뒤로하고 사회인으로 힘차게 새 출발을 내딛는 1968년 2월 이었다.
그런데 발령을 받고 부끄러운 일이 일어났다. 발령 받은 학교가 예상치 못한 학교였기에 당황스러웠다. 거리가 가까운 증평을 마음에 두고 괴산군을 지원했는데 전혀 뜻밖의 괴산도 아닌 두메산골 연풍이라는 곳이었다. 속이 상하고 난감하여 한숨만 나왔다. 평소 소극적인 나는 어디서 용기가 나왔는지 지도를 보며 혼자서 괴산군 교육청을 찾아갔다. 인사 담당 장학사를 만나 한바탕 볼멘 목소리로 따졌다. 장학사는 어이없다는 태도였다. 장학사는 어쩔 수 없었는지 이 햇병아리를 어르며 달래고 위로해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땐 교육청이 우리의 감독기관인 줄 나는 몰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교육청을 찾아가 항의하고 따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다. 어쨌거나 부임학교에 첫 출근을 하였다. 그런데 출근 첫날 수군수군 분위기가 이상했다 나의 교육청 사건이 벌써 이 학교에 쫙 퍼진 것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내게 딱 어울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옛동헌 교무실
부임첫날 교무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곳 교무실은 일반학교 교무실과 달리 교사 본채 건물과 교무실 건물이 따로 떨어져 있었고, 교무실은 옛날 현의 원님이 사용하던 동헌 옛 모습 그대로 였다. 현대식 건축물과 옛날동헌이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이었다. 교무실은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는 역사 깊은 곳이었다.
조선시대(영조21) 우리나라 최고의 대표적인 풍속 화가인 단원 김홍도는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그렸다고 한다. 그 정표로 정조(19)는 단원을 특별히 배려해서 연풍 현감이라는 벼슬자리를 제수한 것이다. 단원은 산수와 풍광이 수려한 이곳 연풍에서 수많은 걸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단 한번 3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던 이 동헌에서 나도 단 한번 3년 동안 교사생활을 한 영광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단원의 체취와 함께 보람을 느낀다. 계절이 옮겨가듯 우리도 어딘가 옮겨가게 마련이다. 단원선생이 이 동헌에서 정사를 마치고 평생 전국을 돌며 훌륭한 업적을 이루신데 비해 나는 이 동헌을 끝으로 현모양처의 꿈을 안고 평생 살림만 한 것이다.
사무분장은 통계와 접대 그리고 신문철이었다. 통계업무는 전년도를 바탕으로 머리를 써서 요령껏 맞추면 가치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접대와 신문철은 하찮은 허드렛일로 여겨졌다. 수업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학교에 손님이 오시면 재빨리 달려가 음료수와 차, 다과를 곱게 차려 내야만 했다. 또 한편 신문철은 출근 하자마자 매일 아침 배달된 10여 가지의 신문을 분류해 철해서 한 달간 보관하는 일로 교사가 할 일 같지 않은 업무인 것이다. 한번은 어느 선생이 지나간 내용도 별것 아닌 기사를 찾는데 신문이 없다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었다. 열심히 찾았지만 헛일이었다, 이 일 이후로 나는 시간만 나면 신문을 철저히 관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담임을 맡고
부임 발령은 받았지만 아직도 나는 학생티를 벗지 못했다. 그때 처음으로 맡은 3-2반 아이들의 초롱초롱 하면서도 순박한 눈빛은 나를 희망으로 벅차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걱정거리가 기다렸다는 듯, 두메산골에도 치맛바람의 시련은 거셌다. 그동안 줄곧 우리반 반장이었던 양조장집 아들은 초짜 새내기선생이 온다는 소식에 이미 옆 3-1반으로 빼 돌려버린 상태였다. 이 사실이 나의 귀에 들려오는 순간, 아! 나는 오기가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옆반에 지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음지가 양지 되도록 일제고사 1 등을 절대 놓치지 않고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공부는 물론 청소까지… 이 일로 인해 3년의 교사생활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느덧 1학기도 지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동료인 이 선생과 함께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의 사택을 배정받았다. 우리는 복권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좋아했다. 집세와 전기세가 공짜였기 때문에 더욱 좋았다. 그 당시 월급이 6,700원 쌀 한가마가 3,000원 하던 시대였다. 사택은 달랑 방 한 칸에 원시적인 형태의 개방된 부엌이 전부였다. 물은 뒷집에서 길어다 사용하고 풍로에 나뭇가지를 꺾어 불을 피워 밥을 해 먹던 시절이었다. 지금 같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후진국 수준의 생활형편 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즐겁기만 했다. 삐딱한 쪽대문을 열고 나가면 곧바로 논이 펼쳐져 있고 깨끗한 개울물이 항상 졸졸졸 흐르고 있어 언제나 행복했다. 이 개울물은 두메산골 조령 계곡서 내려오는 청정수라서 푸성귀도 씻을 수 있고 머리를 감거나 빨래를 하면 미끄러워 한참을 휑궈야만 했다. 그 뿐인가 개구리· 여치· 귀뚜라미 등 각종 풀벌레의 끊임없는 노랫소리와 눈 비속에서 뽀시락 뽀시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계절의 냄새를 맡았다.
우렁각시 할머니
또한 이 사택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깃든 곳이다. 부엌문이 없어 문짝대신 거적을 매달아 늘어 뜨려 부엌을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1-3반을 담임한 나는 이 사택에서 특별한 할머니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반 한 남자 아동은 얌전하고 수줍고 말없는 착한 어린이인데 공부나 학교사회 생활을 적응 못하는 답답한 아이였다. 바로 이 아이의 할머니가 한결같이 내가 없는 시간에 새내기선생의 반찬 (깻잎, 더덕, 고사리, 도라지, 콩자반등)을 1년 내내 부엌에 가져다 놓으셨다. 그것도 매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우렁각시처럼 아무도 모르게 정성으로 부엌에 차려 주셨던 것이다. 자신의 딸에게도 할 수 없는 힘든 일을 손자의 나이어린 담임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말썽을 부리지는 않지만 한글이나 기타 다른 공부가 지진아 수준이였다. 할머니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 애를 썼지만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이와 함께 등교 할 때마다 내 두손을 꼭 잡고는 손자를 잘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시는데 나로서는 몸둘바를 몰랐다. 이 아이의 실력은 5-6개월이 지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는 한 번도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농사일이 바빠 농촌은 그러려니 생각했다. 나중 연풍학교를 떠날 때 쯤, 그 아동은 할머니의 친 손자가 아니고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의 머슴의 아들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와 머슴부부 3식구만 살다가 늦게서야 이 외동아들을 얻게 된 것이다. 할머니의 가정은 보통 사람들의 가족관계가 아니고 전혀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특별한 가족관계인 것을 늦게야 알게 되었다. 연풍을 떠나고 한참 후 할머니의 손자가 충북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할머니의 지극정성과 성실을 본받아 성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이 생각을 떠 올릴 때마다 가슴이 따뜻함을 느낀다.
마음의 고향
내가 살던 이 사택은 물론, 그 이웃 근처는 지금 모두 천주교 성지로 바뀌어 대지 13,000평에 이르는 대단지가 이루어져 있었다. 순교당시의 장면들이 세세히 곳곳에 놓여있고 유물과 성당이 놓여 있는 가운데 예수상이 두 팔을 벌리고 장엄하게 서 있다. 비록 카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한번쯤은 꼭 와 봐야할 역사의 현장이다.
3년 동안 가르치고 깊은정을 나누며 가정방문을 다니면서 내가 살고 싶어 했던 분지리 산속 마을에는 멋진 전원주택들이 띄엄띄엄 들어섰고 지금은 수안보, 연풍, 문경을 이어주는 단원기차역이 연풍에 건설중이고 단원 박물관도 지으며 새로운 관광단지로 부각되어 이화령도 활기가 넘쳐 보였다. 처음 발령 받았을 때 교장선생님과 동네 유지 분들이 “울며 왔다 울며 가는 곳”이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3년 되던 마지막 해에 첫눈이 오던 날 청주 교육회관에서 걸혼식을 올린 후 정든 연풍을 뒤로 하며 가정주부로 변신했다. 그 시절 10살이었던 단발머리 3-2반 소년 소녀들이 40살 어른이 되어 서울 서교동에서 반창회를 한다며 나를 초대했다. 연락을 받고 너무 반가워 식당을 한 걸음에 달려갔다. 자녀는 몇 명을 두었을까, 모습은 알아 볼 수 있을까, 무슨 일들을 하며 살까, 온갖 생각을 하며 떨리는 가슴으로 만나니 뜻밖의 많은 이야기들이 봇물 쏟아지듯 쏟아졌다.
아! 그때는 1,000여명 이었던 학생들이 지금은 50명 정도라니, 올해는 입학생이 달랑 2명이란다. 참으로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래도 자연환경이 멋진 아름다운 연풍은 아직도 사람냄새가 풍기고 오염이 안 된 곳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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