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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 낙가산보문사(12.1) 아침에 일어나서 날씨를 보니 시야가 흐리다. 어제부터 약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들어 맞은 것이다. 어제는 아주 청명한 날이어서 이런 날 낙가산 보문사의 마애관음좌상에서 서해를 내려다 보면 좋을 텐데 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숙소 근처에서 가까운 곳에서 아침으로 시골밥상인가 먹었는데 된장국이 아주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난번 정수사에 갈 때도 음식이 괜찮았는데 그러고 보니 강화도 음식이 괜찮은 편인가 보다. 우리 일행 7명이 소형승합차에 타고 외포리에 갔다. 미리온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세 번째줄 첫 번째였는데 다행히 오는 배에 탈 수 있었다. 석모도에 도착하면 보문사에 보통 왼쪽으로 가는데 우리는 오른쪽으로 갔다. 나중에 왼쪽으로 돌아왔으니 전체를 고루 볼 수가 있었다. 석모도도 과거에 간척사업을 했는지 농토가 상당히 넓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화도에서 1년 벼농사를 지어서 11년을 먹고 살 수 있다고 하고 과거 벼농사가 중요하던 시절에는 강화는 부유한 곳이었다고 한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일주문쪽으로 가는데 예나 지금이나 근처에서 농사짓는 듯한 분들이 순무, 고구마, 번데기 등등을 팔고 있었다. 일주문에는 낙가산보문사라고 쓰여 있는데 그 글씨가 여초 김응현 선생의 글씨이다. 올라가는 왼쪽 언덕에 새로 지은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새로 탑도 만들었다. 보문사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이 있고 들어가는 오른쪽에는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 옆에는 윤장대가 있는데 이상하게 강화에는 윤장대가 여러 곳에 있다. 전등사 올라가는 곳에도 있고 선원사지에도 있다. 극락보전 바로 왼쪽 옆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고 그 앞에 맷돌도 있다. 향나무 뒤에는 보문사 석실인 나한전이 있고 나한전 안에는 나한상이 있다. 이 나한상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고 해서 가던 날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모셔진 석불이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나한들이라고 하는데 사진으로 보아서는 잘 형태를 알 수가 없었다. 보문사에는 머니 머니 해도 극락보전 오른쪽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마애관음좌상이 있다. 여기도 기도빨이 받는다고 해서 전국 각지에서 기도하러 오는 분들이 많다. 눈썹바위 밑에 좌불이 조성되어 있는데 화관에 아무리 봐도 아미타불이 보이지 않는다. 잘못 보았나 생각을 하고 이리 저리 밑에서 다니면서 쳐다봐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 관음보살이면 화관에 아미타불이 있어야 하는데 조성한 스님이 바쁘셔서 생략하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곳에 전망을 기대하고 갔는데 그 날 따라 전망이 별로였다. 예전에 왔을 때도 날씨가 흐려서 조망이 안 좋았는데 이번에는 안개인지 운무인지 알 수는 없지만 조망이 별로 였다. 어쩔 수 없이 다음에 또 기약을 하면서 오는 수밖에 없다. 아래 내용은 보문사 홈페이지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번지 낙가산에 있는 사찰.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에 있다. 양양낙산사와 금산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이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 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였는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산의 이름을 낙가산이라고 하였고,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절의 이름을 보문사라고 하였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는데, 사람 모양의 돌덩이 22개가 한꺼번에 그물에 걸렸다. 고기를 잡지 못해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를 바다에 버린다. 다시 그물을 쳤는데 또 다시 바로 그 돌덩이들이 걸리게 되자, 어부는 또 다시 그 돌덩이를 바다에 버렸고, 돌이 두번이나 그물에 걸리게 되자 그만 집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낮에 그물에 걸렸던 돌덩이는 천축국에서 보내온 귀중한 불상인데, 바다에 두번이나 버렸다고 질책하고, 내일 다시 그곳에서 불상을 건져서 명산에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 날, 23개의 불상을 건져올린 어부는 꿈 속에서 노승이 당부한 대로 낙가산으로 불상을 옮겼는데, 현재의 보문사석굴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불상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 옮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석굴이 불상을 안치할 신령스러운 장소라고 생각하고, 굴 안에 단을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 깨어진 옥등잔 전설 옛날에, 보문사의 어린 사미승이 부처님께 등공양을 하기 위해 법당에 들어갔다. 나한전에는 보문사에 전해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인 옥등잔이 있었는데, 사미승은 옥등잔에 기름을 부으러 가는 것이다. 사미승은 옥등잔을 내리고, 등잔에 기름을 붓다가 실수로 등잔을 떨어뜨리게 된다. 떨어진 옥등잔은 두조각이 나게 되고, 사미승은 혼비백산하여 법당을 빠져나와 구석에 주저앉아 훌쩍이게 된다. 마침 지나던 노스님이 사미승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슨일인지 물어보자, 사미승은 옥등잔을 깨게 된 일을말하게 된다. 사미승과 노스님은 깨진 옥등잔이 있는 나한전으로 들어갔는데, 두동강난 옥등잔은 멀쩡히 불빛만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노스님은 옥등잔을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깨진 흔적조차 없이 멀쩡하였다. 이에 노스님은 "이것은 분명 나한의 신통력 때문이로다"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극락보전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규모로 보문사를 찾는 사람을 반기고있다. 극락보전의 내부 넓이는 약 60평이며, 이곳에 관음보살상을 포함해 3,000불이 모셔져있다. 극락보전 바로 아래에는 요사채가 있다. 그래서 경내에서 이 곳을 바라볼 때는 지상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계단 아래 주차장 쪽에서 보면 2층 요사 건물 위 3층 되는 곳에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곧 2층 요사 옥상 위에 세워진 셈이다. 보문사 석실(나한전) 석실 안에 봉안된 23불의 나한상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더불어 보문사의 대표적 성보문화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문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인 동시에 나한신앙의 대표적 도량이 된 것은 바로 이 석실에 있는 나한상 때문으로 보아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석실 및 안에 봉안된 나한상이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높다. 또한 이 석실은 우리 나라에 흔치않은 석굴사원이기도 하다. 석굴사원의 예는 경주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開祖庵)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몇 되지 않는 귀중한 예이다. 이 석실의 역사는 곧 보문사 창건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전설에 따르면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선덕왕 때 어부들이 고기잡이 나가다 그물에 걸려 올려진 석불상들을 이곳 동굴에 안치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곧 이때부터 석실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는 알 수 없고,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서인 1812년(순조 12)에 한차례. 그리고 1867년(고종 4)에 다시 경산(京山)화상이 석굴을 보수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1958년 춘성(春城)선사가 석굴 내부를 좀 더 확장하며 개수하였다. 최근에는 1980년 정수(靜守)스님이 내부를 다시 확장하는 한편 지금의 불단(佛壇) 뒤와 옆에 있는 석탱화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석실의 구조를 보면, 내부는 천연 동굴을 확장하여 만들었고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虹?門)을 달았다. 석굴 안은 면적이 30평으로 꽤 널찍한 편이다. 늘 이 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기도음이 끊이지않고 이어지고있다. 석실 나한상 석실을 들어서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전부 22불의 성상(聖像)을 모셔 놓은 불단이다. 석실이니만큼 다른 불전과는 달리 불단 및 닷집이 전부 돌로 커다랗게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연꽃이 조각된 불단 위에 닷집이 달린 전각 형태의 불전(佛殿)이 있고, 그 안에 아래 위 두 줄에 걸쳐 감실(龕室)이 마련되었으며 여기에 22불의 석상이 봉안되었다. 석상의 22불의 석상(石像)은 아마도 전설에 전하듯, 어부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 봉안한 석상 그대로인 것으로 보인다. 이 22나한상의 명호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좌우의 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 및 빈두로아존자·가락가빌차존자·바리도 아존자·노빈타존자·낙구라존자·발타라존자·가릿가존자·빌사라불타라존자·주단반탁기존자·라후라존자·나가세라존자·인계라존자·빌라바사존자·아시다존자·수단반탁가존자·정우존자·빈두루존자 등 18분의 나한들이라고 한다. 석상의 크기는 전부 30cm 안팎이다. 불단 뒤에는 1982년의 불단 조성을 기념한 <보문사석굴법당연기문(普門寺石窟法堂緣起文)>과 <법화경약모게(法華經略摹揭)>가 새겨져 있다. 연기문은 기현(奇玄)스님의 글이고, 게는 법화경의 내용을 베낀 것으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글씨다. 한편 근래 이 석상들의 재질(材質)을 조사한 결과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이 아닌 인도에서 나오는 석재임이 확인되었다고도 한다. 불단 좌우로는 인등(引燈)이 있고, 불단 왼쪽 벽에는 석조 신중탱이 걸려 있다. 이 석조 신중탱과 불단 뒷벽에 커다랗게 조각된 탱화는 1980년 조성된 것이다 마애관음좌상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가장 잘 상징하는 성보문화재로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한 눈에 조망되는 등 경치가 장관이다. 특히 낙조(落照) 경관은 아주 일품이어서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종종 그야말로 무아지경 불심(佛心)의 경지에 들곤 한다. 이 관음좌상은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있는 계단을 따라 한 10분 가량 올라가면 나오는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져 있다. 절에서부터의 거리는 약 1km가량 된다. 오르는 길이 제법 가파르기 때문에 계단은 지그재그 식으로 놓았다. 이 불사를 기념하는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중간에 놓여 있다. 계단이 놓여졌다고는 하나 눈썹바위로 올라가는 길 자체가 워낙 급한 까닭에 한달음에 올라갈거리는 못된다. 가다 보면 제법 다리에 힘도 들고 허리가 뻣뻣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 `관세음보살'을 마음속으로, 혹은 나지막이 외우며 올라가노라면 문득 어느새 관음보살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이다.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관음 좌상 약간 비스듬히 나 있는 바위면에 새겨졌는데, 위의 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다. 관음 좌상의 양식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淨甁)을 받쳐든 채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 며 정감이 간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白毫)도 이마 사이에 솟아 있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도록 입는 통견(通肩)을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연화대좌 왼편, 그러니까 관음을 바라보아 오른쪽에는 `조불화응선사(造佛華應禪師)'가 그리고 그 반대편 위패 모양으로 새긴 구획 안에도 `화엄회상필부사왕중(華嚴會上八部四王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南無華嚴會上欲色諸天衆)·화엄회상호법선신중(華嚴會上護法善神衆)' 등의 글씨가 세 줄로 새겨져 있다. 이 관음상은 비록 작품이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이 관음 도량의 성지인 동시에 기도(祈禱) 성지임을 나타내는 상징성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 드리면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없다 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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