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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체 게바라인가: 무상 의료·교육의 모범국가 쿠바를 찾아서
송필경, 살림터, 2022-12-12,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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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 어느 영구 혁명의 이론보다, 체 게바라가 세계 혁명을 실천하려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 쿠바를 떠나며 남긴 말이 진솔한 혁명을 선언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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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스스로가 자신 글에서 쿠바 방문 “답사기”라고 하듯이, 쿠바에서 혁명의 중요한 지역에 대한 여행 일지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물론 쿠바를 말하면서 카스트로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와 더불어 체 게바라를 이야기해야 쿠바의 혁명과정의 서사가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저자가 혁명가들의 자취 이외에도 쿠바의 여러 곳을 순례하듯이 답사하였고, 혁명 전쟁 이후에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를 보여주면서, 특히 의사다운 시각으로 의료 체계와 특히 “가정의 제도” 등을 잘 설명하고 있고, 게다가 미국 제국에 벗어나 쿠바의 고유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단한 삶인지를 직접 겪기나 하듯이 보여준다. 설명과 사진 등을 통해, 쿠바의 인민의 삶들을 볼 수 있게 여러 삽화 같은 이야기를 곁들여 놓았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 “체 게바라”에 대한 일대기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에서 혁명의 과정과 승리, 그리고 혁명의 완수를 위한 혁명후의 집권 등을 서술하면서도, 쿠바의 자유 쟁취의 역사를 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여행기의 서술 방식을 따랐지만, 쿠바 역사의 과정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 쿠바의 스페인으로부터 수탈, 미국의 지배 등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기에, 사실상 쿠바의 역사와 더불어 혁명의 열망, 그리고 현대에서 혁명의 승리 등을 마치 긴 교향악처럼 다룬다.
어느 교향곡에서는 라르고(느리게), 안단테(걸음걸이로), 알레그로(빠르게), 클라이막스가 있고, 귀결로서 전체를 아우르며 되돌아보는 마무리가 있듯이, 이 책에서도 서서히 쿠바를 이해하게 하고, 스페인에 저항했던 호세 마르티, 미국의 앞잡이 정권인 바티스타를 쳐부수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활동 소개에서 진행이 빨라진다. 피델의 아바나의 진격과 카스트로의 산타 클라라 전투는 두 계열의 중첩으로 상승하는 시너지 효과도 있다.
가끔은 서정적 목관악기처럼 프랑스혁명의 예를 곁들이고, 다른 한편 금관악기가 개입하듯이 맑스와 레닌을, 그리고 저자가 종합적으로 관여시키고자 할 때 화음을 이루면서, 그가 좋아하는 호치민을, 가끔은 현악기들의 긴장을 주듯이 중국에서 마오쩌뚱의 대장정을, 우리의 가슴에 충격을 주듯이 타악기를 두드리듯이 이루지 못했던 우리 혁명가의 회한을 끌어들인다. - 여기에서 조세희의 언어로 우리는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난장이로 살고 있었다고 가슴치고 싶어 한다. - 그럼에도 모든 악기를 아우르러 변곡점을 향하는 편성에서 체 게바라를 솟구치게 한다. 혁명은 한 나라에서 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이루어져 한다고 생각하는 체는 볼리비아로 향하여 혁명을 지속하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그 변곡점의 고비에서 체의 행방은 미CIA의 추적의 대상이었으리라, 추적이라는 면에서는 빈라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저자는 여러 곳에서 내비치었듯이 독자의 가슴을 두드리고 싶어 한다.
저자는 이런 역사적 과정을 따라가면서도 또한 여행자로서 현실에서 쿠바 인민의 삶을 알리기 위한 지리상의 유적들을 겹쳐서 설명하는 것은 단지 여행자로서 만이 아니다. 그는 사건들의 과정에서 세계사에 비추어 대비시키기도 하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길어 올려야 함에서도 잊혀져가는 상처부분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물론 우리 역사를 현대사의 남쪽 측면에서 쓸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하더라도 은연중에 저변에 흐르고 있는 저항, 항거, 항쟁을 되새기게 한다. 시대사의 한계, 풍토와 지리의 한계, 우리에게는 제주에서 항쟁, 보도연맹으로 산화된 선각자들의 사라짐 등등 ... 아픈 역사를 다 들추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56L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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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은 사색하거나 철학하기에 앞서서 사는 것이 먼저다(그는 라틴어로,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사는 것이 먼저, 철학은 다음이다)라고 말하면서, 진솔한 형이상학은, 우리가 형이심학이라 부르는 실재성의 철학은, 생성의 철학이라 한다. 그는 삶의 터전을 먼저 생각했고, 그에 투사하여 비추어진 하늘을 실증적으로 탐구해야 하며, 그리고 인간을, 인간과 인간관계를 생각한다. 그런데 자연 다음의 제도가 아니라, 제도 다음 자연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이들은 기술이 인간사회를 바꾸어 놓고, 게다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인간이 인간과의 연관에서 제도와 체제가 생겨나는데, 속좁은 이성을 지닌 인간들은 제도와 체제 속에서 주체가 먼저이며 주체는 그 속에서 행복과 자유를 추구한다고 사고하고 있다. 제도와 체제는 인간이 있고 난 다음이며, 화폐와 신도 인간이 사는 문제 다음이라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산다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몸짓과 입말도 생겨났으리라, 20세기 철학자 들루즈/가타리는 산다는 점에서, 체제와 달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안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L'anti-Œ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72)에서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하기, 달리 사유하기는 인류가 지나온 역사에서 죽 있어왔다.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서양 철학사에서는 상층형이상학을 진리, 선, 신앙으로 여겨왔기에, 또한 진화론의 역사가 신앙의 역사에 밀려났기에, 기존의 사고는 새로운 학문과 사유를 받아들일 수 없었음을 알린 것이다. 인간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생산력의 증가로 인류가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산업사회의 발달이 과거의 참주 또는 황제와 같은 제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계급으로 자본가를 형성하며 국가라는 체제를 만든 것이 과거의 형상형이상학의 사고의 변형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오랜 과정에서 토지의 시대에 야생인으로, 제도의 시대에 야만인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 생산력의 증가로 자유 평등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공동체의 모습을 만들려는 시기에, 자본은 패거리(카르텔)를 만들고 잉여를 가로채는(전유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그런 사회에 대항하여 저항하고 항쟁하는 노력과 실천을 혁명이라 하였다. 혁명이 고대시대와 근대시대에는 없었다고 하는 것은 인민이 스스로 생각하고 노동하며, 스스로 사회에 관여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증기기관과 모터에 의해 인민의 손과 발이 기계에 벗어날 수 있었고, 또한 생산물의 가치가 인간의 노동에 의해 성립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인민이 제도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이다. 이런 관점은 인간이 주체라는 근대적 사유 다음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인은 혁명을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20세기에 그 귀결들이 보여 질 것 같았다. 그러나 전쟁을 통한 정복과 착취가 부의 획득에 보다 더 쉬운 방법이라는 것은 자본은 더 잘 알고 있었다. 자본 패거리는 무기와 독점자본으로 새로운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만들었다. 이에 저항하는 달리 사유하기, 달리 말하기는 인민 속에서 인민을 통하여 나올 것이다. 인민의 입말과 연대의 소통에 있다. 그런 터전과 풍토를 만드는 것은 소수자들이다. 20세기 초부터 인구라는 대양위에 소수자들은 실천과 조직화를 통해 세계사를 바꾸었다. 첫째 전쟁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등장하고, 둘째 전쟁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한다. 이 두 등장은 패거리들을 놀라게 하여, 이들은 이 두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전술을 제시했다. 또다시 큰 전쟁을 하면, 패거리들이 몰락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삼차대전은 없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냉전체제를 조성하였으나, 제3세계라는 세력에 부딪혔다. 패거리는 방법을 바꾸어 곳곳에 국부전을 행하면서 자유와 확대라고 선전하였으나 베트남에서, 쿠바에서 그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패거리는 세계경제의 장악을 통해 제국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중동의 석유장악에 주력을 쏟았다.
21세기는 석유가 아닌 다른 기술을, 그리고 정보기술 표본을, 장악하려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다. 21세기 혁명은 달리 저항과 다른 항쟁을 창안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굴 파기”라고 했다. (56LLJ,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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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머리글
- 파랑새를 찾아서 _ 4
- 이 글을 쓴 이유 _ 9
호세 마르티, 총을 든 성인 _ 19
시민 혁명광장의 전사들 _ 44
쿠바에서 <대부>를 만나다 _ 61
말레콘 해변에서 _ 74
세계를 울리는 쿠바의 음악과 춤 _83
쿠바의 도시 유기농업 _ 95
핀카 비히아 _ 109
코히마르, 『노인과 바다』의 마을 _ 122
드넓은 문화유산의 거리 비에하를 걷다 _ 134
산티아고 데 쿠바로 가는 길 _ 150
혁명을 향한 첫걸음,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 _ 162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서 _ 170
유레카! _ 183
총을 든 돈키호테, 체 게바라 _ 198
우정의 극치,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전태일과 조영래 _ 216
전통 건축이 온전한 도시, 카마구에이와 트리니다드 _ 230
잉헤니오스 계곡에서 맞닥뜨린 노예 착취의 흔적 _ 241
20세기 혁명의 돈키호테가 탄생한 산타클라라 _ 255
체 게바라 복합조형단지 _ 267
배려의 인간 체 게바라와 전태일, 그리고 혁명의 미래 _ 282
후기: 쿠바에서 나는 파랑새를 보았을까? _ 309
고마운 분들께 _ 312
참고문헌 _ 314
**** 내용 중에서****
# 왜 체 게바라인가: 무상 의료·교육의 모범국가 쿠바를 찾아서(송필경, 살림터, 2022)
* 머리글
- 파랑새를 찾아서. 4
- 이 글을 쓴 이유. 9
카스트로는 “자본주의는 도덕적, 윤리적 가치가 없다. 모든 것은 팔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때로는 도적이 된다.” (13)
[01] 호세 마르티, 총을 든 성인 19-43
5,482미터인 포포카테페틀 화산...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멕시코시티에 머물 때 게릴라 활동을 대비해 체력단련을 하기 위해 이산에 자주 올랐다고 한다. 체는 선천성 천식 때문에 정상은 한 번도 밟지 못했지만 훈련에는 빠지지 않았다. 피델은 이런 체의 노력에 감탄했다. (21)
“관타나메라(Guatanamera)”는 스페인어로 쿠바의 ‘관타나모 지방 출신 여인’, ‘과히라(guajira)’는 ‘여자농부’이니 ‘과히라 관타나메라’는 관타나모의 여자 농사꾼이란 뜻이다. (33)
카스트로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이냐시오 라모네와 인터뷰에서 “...그리스도는 특정 순간에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들테면 장사치들에게 채찍을 내리쳐서 그들을 사원에서 쫓아냈습니다. ... 기독교는 야만의 시절에 나온 최초의 교리였고, 거기에 아주 인간적인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 윤리적 가치와 사고가 이바지한 사회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태여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처음에 마르티를 따랐고, 나중에는 마르티와 맑스와 레닌을 따랐습니다. ..” (38)
호세 마르티 ..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 (42)
[02] 시민 혁명광장의 전사들 44-60
*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1932-1959)], 그리고 피델. (46)
* 평등이 가난을 사라지게 하리라 51
“언제 어디서나 반항의 배후에는 평등하려는 욕구가 있다.” 이는 2,300년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51)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1754) .. “문명의 진보가 부와 권력 그리고 사회적 특권의 인위적 불평등을 초래함으로써 하늘에서 부여 받은 인간 행복과 자유를 파괴하고 억압했다.” (51-52)
붓다.. “인간을 비천하거나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태어날 때의 신분이 아니라 그 자신의 행위에 따른다.” (52)
*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54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 이는 1776년 7월 4일 영국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발표한 미국 독립선언문의 첫 구절이다. ...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54)
1961년 호세 마르티 탑이 우뚝한 이 혁명광장에서 열린 혁명 2주년 기념식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 “혁명은 장미꽃으로 장식한 침대가 아니다. 혁명은 미래와 과거 간의 목숨을 건 싸움이다.” (60)
죽음을 예감한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밀림에서 전 세계 인민을 향해 절박한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미국을 향해 전면전을 펼쳐라. 제2, 제3 아니 더 많은 베트남이 나올 때까지 적의 심장부에 증오와 피와 죽음의 화살을 꽂아라.” (60)
[03] 쿠바에서 <대부>를 만나다. 61-73
쿠바 관련 영화가 1978년 개봉한 <대부2(The Godfather 2)>이다. (61)
미국은 과거 제국주의와 달리 군사력으로만 식민지를 정복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탈을 쓴 정권을 먼저 세운 다음 합법을 가장하여 식민지 땅과 기간산업을 싼 값으로 사들여서 한 나라의 경제를 통째로 삼킨다. 거대한 자본으로 경제력을 장악한 다음 식민지 노동력을 저임금으로 쥐어짜고 지하자원을 강탈하여 투자한 자본에 대한 이익을 기하급수적으로 부풀린다. 무지막지하게 긁어모은 이익금 일부를 말 잘 듣는 괴뢰정권에게 조금 떼어 준다. (66)
1990년대 초 쿠바에 가서 만든 MBC 특집 다큐멘터리 3시간 방영 (70) ... “지금 우리는 무척 고통스럽다. 그러나 미국 체제에 편입은 절대하지 않겠다. 우리는 미국체제에서 살아봤다. 카스트로 정권은 미국 체제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성과를 이룩했다. 지금 우리 쿠바에서는 교육과 의료는 완전 무상이다.‘ (71)
빅토르 위고 ..“무지한 인간에게 되도록 무료로 교육하지 않는 사회는 죄악이다. 사회는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암흑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의 영혼에 그늘이 가득차 있게 되면, 거기서 죄가 이루어진다. 죄인은 죄를 저지른 자가 아니라 영혼 속에 그늘을 만들어 준 자이다.” (72)
[04] 말레콘 해변에서 74-82
법구경 .. “건강은 가장 큰 재산이요, 만족은 가장 값비싼 보석이다” (77) - [제15장 안락품 - 마음을 맑고 깨끗함으로 가득 차게 하라.]
[05] 세계를 울리는 쿠바의 음악과 춤 83-94
쿠바 인민은 혹독한 시련을 어떤 심리적 도구를 가지고 견뎌 냈을까? 여러 글을 찾아보면 쿠바인들은 노래와 춤을 일상으로 즐긴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한다. 푸른 카리브 해의 뜨거운 태양이 담긴 쿠바의 ‘음악과 춤’이 네게는 ‘혁명’ 다음으로 쿠바를 연상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88)
중국인이 우리 민족을 글로써 나타낸 최초의 문헌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중국인이 우리 민족인 동이족을 봤을 때 첫눈에 들어온 아주 독특한 특징이 ‘음주가무’라고 했다. (88) [이(夷)는 큰 활이다. - 동양 삼국의 무기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활, 중국의 창, 일본의 칼이라고 하는데, 맹자도 “인자여사(仁者如射)”라 하였다. 활의 이야기는 훨씬 역사가 깊다. (56LKF)]
아프리카 노예들은 16세기 초 자신들의 고달픈 운명을 함께 나눌 모임인 ‘카빌도 공동체’(Cabildos en nación)를 만들었다. 인류가 만든 제도 가운데 가장 잔인한 노예제도의 사슬에 묶여 뼈에 사무치는 극도의 불안, 고난, 좌절, 분노를 달래줄 심리적 연대감과 상호 믿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원시를 간직한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문자를 통한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고 음악과 춤이 문학을 대신한 가장 역동적인 예술 표현이었을 것이다. 카빌도에는 아프리카 선조들이 조상과 신을 숭배한 종교의식의 유산인 음악과 춤을 기억하고 있었다. (91-92) [연대감과 상호믿음, 공감과 공명,]
스페인의 오랜 식민 지배로 말미암아 다인종, 다문화를 형성하게 된 쿠바는 스페인계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탄생한 혼혈족 물라토(mulato)가 ‘아프로 쿠바[음악](Afro Cuban [Music])’이라는 자체적인 문화를 구축했다. ... / 라틴 아메리카에는 아르헨티나의 탱고(Tango), 브라질의 삼바(Samba).. 쿠바에서는 쿠바손(Son Cubano)가 있다. 손은 아프리카 리듬 위에 스페인 풍의 선율이 전개되는 쿠바 고유의 음악으로, ‘쿠바 민요’라고도 할 수 있는 대표적 음악 장르이다 (93)
이후 쿠바 음악은 맘보, 볼레로, 차차차, 살사 등의 리듬으로 발전했다. (94)
[06] 쿠바의 도시 유기농업 95-108
우리는 1997년에 설립한 알라마르(Alamar) 농장을 방문했다. .. 조합의 땅은 국가소유이지만 생산과 판매 수익의 주인은 조합원 노동자다. 쿠바 농업부 장관의 월급이 700페소 정도인데 비해 조합원 노동자의 1인당 배당금은 약 1,500페소라 한다. (96)
* 21세기에는 식주교의(食住敎醫)가 필수! 99
[사는 것이 먼저다. 의식주라는 표현은 ‘식주교의’로 바꾸어 실천해야 할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1992년부터 1994년까지였습니다. 당시는 비누도 없고 빨래도 맘대로 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에게는 유머가 필요합니다. 쿠바인들은 어떤 심각한 일이 생겨도 대개 농담으로 밝게 웃어넘깁니다. 그 덕분에 지금이 있는 것이죠.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오히려 경제위기에 감사해야 할 겁니다.” (103) - [윤석열 정권은 탐만치뿐만이 아닐 탐진치의 ‘진’(분노)을 폭발하고 있다. 왜 일까, 명령체계에 포획되지 않는 자들이 포획된 자들 보다 많다는 게 현실이다.]
토지는 공공의 것이기에 경작하는 사람이 이용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농사를 지을 조합을 만들면 혁명정부는 국유지를 무료로 제공한다. .. 이렇게 맨손으로 시작한 도시농업이 10년이 지나자 220만명 도시 아바나가 유기농 채소를 자급했고, 이런 성과는 이제 탈석유문명을 꿈꾸는 생태주의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다. (104)
[인간주의 또는 인문주의 - > 인도주의(humanitaire)로]
[07] 핀카 비히아 109-121
“인간의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지.” / 쿠바를 배경으로 한 헤밍웨이(Hemingway, 1899-1961) 소설 노인과 바다(1952)에서 나오는 으뜸가는 명대사다. .. (109) [노마드: 배치에서 망가져서 못쓰는 것이 아니라 삐걱거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제국의 기계는 망가져서 버리고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려 한다. (56LKF)]
탄 타오(Thanh Thao, 1946-), 베트남 시인은 .. “전쟁은 침략전쟁과 저항 전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침략전쟁을 해서는 안 되지만, 저항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112-113)
[08] 코히마르, 노인과 바다의 마을 122
1957년 매슈스(Herbert Matthews, 1900–1977)는 1957년 2월 17일 카스트로와 인터뷰에서 세 편의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올렸다. .. 매슈스 기자는 매카시즘 광풍이 거센 조국 미국에서는 빨갱이로 취급 받았다. (123)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 그는 어쩔 수 없이 1960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123)
헤밍웨이는 자신의 짧고도 강렬한 문체를 빙산에 비유 했는데 이를 빙산이론(Iceberg Theory)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소설[비소설]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 1932)(논픽션)에서 .. “산문 작가가 자기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생략할 수 있으며, 작가가 충실히 글을 쓴다면 독자들은 마치 작가가 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강렬하게 느낄 것이다. 이동하는 빙산의 위엄은 오직 팔분의 일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데 있다.” (130)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燕巖)의 글쓰기 정신은 이러하다. “붓끝을 도끼 삼아 거짓을 싹 쓸어버릴 글을 써라!” (133)
[09] 드넓은 문화유산의 거리 비에하를 걷다 134
세르반테스(Cervantes, 1547-1616), 돈 키호테(don Quijote, 1605) .. 돈키호테 “그래서 너는 지금껏 먹여준 주인에게 감히 저항하려는가.” / 산초 “나는 왕을 추대하지도 폐위하지도 않는다. 단지 스스로 서려 할 뿐이다. 왜냐하면 나의 주인은 나이기 때문이다.” (144)
아르마스 광장 중앙에는 1868년 쿠바 독립을 이끈 세스페데스(Carlos Céspedes, 1819-1874) 대리석상이 있다. (148)
[10] 산티아고 데 쿠바로 가는 길 150-161
* 세스페데스, 마세오, 호세 마르티 – 19세기의 영웅을 만나다. (154)
[11] 혁명을 향한 첫걸음,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 162
카스트로는 “우리는 해방군이다. 너희들은 독재자의 하수인이고 살인자들이다.” ... 정부군 지휘자는 “쏘지마, 쏘지마, 사상(Idea)을 사살할 수 없어. 그 누구도 사상을 죽일 수 없어.” / 카스트로는 이 대위가 중얼거리는 낮은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164-165)
카스트로에 대한 자료를 읽으면서 페드로 사리아(Pedro Sarria 1900-1972)의 “그 누구도 사상을 죽일 수 없어”라는 말보다 더한 감동은 없었다. (165)
볼테르가 루소에 한 “나는 당신이 말하는 사상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사상을 말하는 당신의 권리를 죽을 때까지 옹호할 것이다” - 윌 듀란트(Will Durant, 1885-1981) (166)
[12]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서 170-182
아니, 이럴 수가? / 1859년부터 49년간 의심할 바 없는 절대 권력을 행사했고, 2008년에 권력을 넘기고 나서도 2016년 사망할 때까지 “헤페 막시모(Jefe Maximo, 최고지도자)라 불렸던 권력자가 남긴 흔적이 이렇게 단순한가? / 두 세평 크기의 둥글고 납작한 바위만 달랑 세워 놓은 것이 무덤이었다. (170) [노무현 대통령의 무덤의 모델이었을까?]
피델 .. “동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정의는 군대보다 강하다” (176)
“나에게 유죄를 선고하시오. 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에게무죄 판결을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178)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쿠바인, 아르헨티나인, 볼리비아인, 페루인, 에콰도르인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지?”(182)
[13] 유레카! _ 183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것이 혁명가의 가장 훌륭한 자질이다.” - 체 게바라 (185)
주도인 바야모는 쿠바섬에서 가장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다. 쿠바 국가를 작곡한 페루초 피게레도(Perucho Figueredo, 1818-1870)의 고향이기도 하다. 쿠바 국가는 “바야모인이여, 전투장으로 진격하자”라는 애국적인 가사로 시작한다. (186-187) [프랑스 국가도 진격하자(marchons)고 한다.]
* 체 게바라와 이현상. 196.
[14] 총을 든 돈키호테, 체 게바라 198-215
카스트로가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거처를 찾을 때 이곳의 농부 ‘오스왈드 메디나’가 안전한 곳으로 자리 잡게 해 줬다고 하다. (201) [혁명사령부: 지형이, 천문지리가 첫째인 이유가 있다.]
1958년 여름, 피델은 셀리아 산체스(Celia Sanchez, 1920-1980)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의 투쟁이 끝나면 나는 더 큰 투쟁을 맞이할 거요. 그 투쟁은 미국과의 싸움이 될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요” (214-215) [긴 과정을 숙지한 지도자.]
[15] 우정의 극치,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전태일과 조영래 216-229
카스트로, “나는 인간이 결점도 있고 한계도 있지만, 자신이 지키고 나아질 수 있는 지성이 충분히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219)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제도를 만들었지, 제도가 사람들을 만든 것은 아니다. 나은 삶을 향하여 제도를 고칠 수 있다. (56LLF)
Hasta la victoria Siempre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220)
1965년 체는 ‘쿠바의 사회주의와 인간’이라는 연설을 통해, “... 우리는 하나의 현실로서 물질적 동기 부여를 완전히 반대하거나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그 역할은 부차적이고 점차 미미해질 것이다.” (223)
스피노자, “나도 곧 명예나 부가 여러 가지 이익을 얻게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내가 다른 새로운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면 명예나 부를 가능케 하는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 필연적으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과 포숙아, 카스트로와 게바라, 전태일과 조영래(229)
[16] 전통 건축이 온전한 도시, 카마구에이와 트리니다드 230-240
여행안내서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 (239)
[17] 잉헤니오스 계곡에서 맞닥뜨린 노예 착취의 흔적 241-266
1750년에 세워진 공장단지를 1795년 악랄한 사업가인 이스나가가 샀다.그는 불법노예 거래라는 부도덕한 사업으로 쿠바 최고 부자가 되었다. (245)
볼테르(Voltaire, 1694-1778)의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 1759)에서 캉디드는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손과 다리가 하나 뿐인 몸뚱이에 넝마를 걸친 흑인을 만났다. 흑인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때 기계에 손가락이 걸려 손이 잘렸습니다. 우리가 달아나려 하자 다리를 잘랐습니다.‥… 이 때문에 당신들이 유럽에서 설탕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246)
[18] 20세기 혁명의 돈키호테가 탄생한 산타클라라255-266
1956년 12월 2일, 20인승 요트에 돈키호테 무리 82명이 무기와 의약품을 싣고 멕시코를 떠나 쿠바에 도착했다. (255)
1958년 12월 27일 밤, 체 게바라는 340명의 전사를 이끌고 병력이 10배 이상이며 탱크와 전투기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 12월 28일 새벽, 체의 부대는 산타클라라에 잠입했다. (259) <산타클라라는 아바나에서 24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아바나에는 피델이 진격했다.>
12월 30일 산타클라라 주위 정부군 주요 수비대들이 혁명군에 항복했다. (263)
[19] 체 게바라 복합조형단지 267-281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서른여섯](267)
게바라, “위대한 혁명은 오로지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
피델은 체의 첫인상.. “체는 많은 경험을 했고 혁명적 소신을 지녔으며, 투쟁정신을 가졌고, 제국주의를 깊이 경멸했습니다. .. 체는 민족해방 혁명과 반제국주의 혁명을 보았지만, 사회주의 혁명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체는 기뻐하면서 즉시 우리의 운동에 가입하고 입대했습니다.” (274)
*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 (274)
“아르벤스의 과테말라에서 내가 배웠던 한 가지는 혁명적인 의사가 되거나 혁명적인 사람이라면 먼저 혁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체의 유명한안 동상 아래에 새겨 있다. (275) [전사와 투사의 활동은 인민의 삶 속에 있다. - (dans la vie de peuple)]
1966년 7월 (콩고에서 실패한 후) 체는 피델을 제외하고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하고 쿠바로 돌아왔다. 체는 또다시 수십 명의 게릴라와 함께 볼리비아의 혁명을 실현하지 위해 1966년 10월 쿠바를 떠났다. (277-278)
1967[서른아홉]년 10월 8일 체게바라는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어, 다음날 9일 정오 CIA명령에 따라 처형됐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체의 양 손목을 자른 뒤, 그 손목을 쿠바로 보내 체의 죽음을 확인하게 했다. .. / 체의 죽음이 확인되자 쿠바에서는 30일간 조기를 내걸었고, 혁명광장에서는 수천 명이 촛불을 켜고 밤샘집회를 열었다. (278) [여기에 촛불집회가 있었다.]
체가 죽기 전에 쓴 메모, .. “민중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에 대한 사랑, 정의감과 관대함이 없는 혁명가는 진정한 혁명가일 수 없다.”(280-281)
[20] 배려의 인간 체 게바라와 전태일, 그리고 혁명의 미래 282-308
고 신영복(1941-2016)선생께서 「혁명의 진정성과 상상력의 생환을 위하여」에서 .. “따라서 혁명에 대한 올바른 독법은 거대 담론의 극적 도식을 해체하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의 진정성에 접속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실과 건너편을 사고하는 일이며 공고한 현실의 벽과 어둠을 넘어 바라보는 성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밤이 깊을수록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282-283)
미국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사회주의 예방의학자이자 공중보건정책 교수인 빈센트 나바로(Vicente Navarro, 1937-)는 “민중의 건강 증진은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여 실현한다.”라고 했다.
린다 화이트포드, 로렌스 브랜치,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 의료(Primary Health Care in Cuba: The Other Revolution. 2008)(최영철 등 역, 메이데이 2010년 06월) (286)
친절도 좋지만 본질적인 의료 행위는 ‘배려’이다. .. /.. 의료에서 ‘배려’의 핵심은 무상이다. 무상의료 제도 아래서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한다. (288)
나는 쿠바 방문후 답사기를 정리하면서 쿠바 의료의 좀 더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지를 알아봤다. 그 힘의 근원은 바로 가정주치의(Familly Doctor)제도이다. (289)
농촌에서 의료활동을 한 의사, ..“모든 의사는 반드시 농촌에서 일해 봐야 합니다. 의대에서는 의학을 배우지만, 농촌은 커뮤니티(Community, 공동체 의식)를 배우게 해주니까요. 커뮤니티는 제 인생의 중심입니다.” (292) [윤구병: 모든 교육은 농촌(토지)로부터..]
혁명정부 출범 당시 피델은 33세, 체는 31세였는데, 이들은 혁명 세력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으니 말이다.(294) -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는 서른하나였고 생-쥐스트(1767-1794)는 스물 둘이었다.]
피델은 현명하게도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한 체 게바라의 정신을 미래 혁명의 횃불로 삼았다. 아직도 진행 중인 쿠바 혁명은 과거, 현재, 미래가 어울린 삼위일체[지속]였다. 과거는 호세 마르티가, 현재는 피델 카스트로가, 미래는 체 게바라가 맡았다. 혁명의 실제 권력을 현재인인 피델이 독식하지 않았다. 세계의 권력 투쟁사나 혁명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297)
님 웨일즈(Nym Wales, 본명 Helen Foster, 1907-1997)의 아리랑(Song of Ariran: A Korean Communist in the Chinese Revolution 1941) (299)
1964년 12월 체게바라는 유엔에서 연설하기 위해 미국 뉴욕에 갔다. // (305)
나는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지리산의 이현상을 떠올랐고, 산타클라 체 게바라 혁명 기념관에서는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혁명가 김산이 떠올랐다. / 무엇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을 배려하는 혁명을 꿈꾼 체게바라에게서 어린 여성 노동자에게 한없는 연민을 보낸 전태일의 모습이 아른거리며 겹쳤다. / 피델과 체의 사후 우정에서 전태일과 조영래의 영혼의 우정이 떠올랐다. (308)
오라, 이상이여, 오라, 오라.(Torna, caro ideale, torna, torna.) (308) [호세 카레라스(Josep Maria Carreras i Coll, 1946-)의 노래에서], |
* 후기: 쿠바에서 나는 파랑새를 보았을까? 309-311
“낙원의 정복”(영화 <1492년 컬럼버스> OST: Original SoundTrack)
* 이 책을 쓰기까지 고마운 분들께 312-313
* 참고문헌 314-315.
(10:14, 56LMA) (11:18, 56L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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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호메로스(Homère, Ὅμηρος. 盲人, 전8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유랑시인. 일리아스(Iliade), 오디세이아(Odyssée) <Oe1395, 1406>
전563 석가(Sâkyamuni, Gotama Siddhârtha, 563?-483?)는 해뜰 무렵 북인도 카필라 왕국(지금의 네팔 지방)의 왕 슈도다나(Suddhodâna)와 마야(Mâyâ)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다마 싯달다. 사키야 무니(석가모니 釋迦牟尼, 사키야족의 현자) - 싯달다가 528(서른다섯), 고행 6년 후에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7일 만에 해탈의 즐거움을 누렸다고 하는데, 싯달다는 사위성 남쪽 기원정사에서 25년간 설법하였다.
551 공구(孔丘, 約前551年-約前479年)성은 공씨 이름은 구, 자는 중니. 후대에 공자 또는 공부자로 칭한다. 生於魯國陬邑,祖先为宋国人,東周春秋末期魯國的教育家與哲学家,曾在魯國擔任官府要職。為易学、儒学和儒家的创始人.
469(470)-399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469-399; 일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에 아티카(Attique) 지방의 알로페케(Alopèce, Ἀλωπεκή, Alōpekē) 데모스에서 태어나서, 399년에 아테네에서 죽었다. -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que Σωφρονίσκος)는 조각가, 어머니 파이나레테(Phénarète, Φαιναρέτη)는 조산원이다. 부인 크산티페(Xanthippe, Ξανθίππη)와 세 자식이 있다.
34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전427-347)(여든) 고대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서양철학상의 가장 중요한 인물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Aristoteles, 384-322 av. J.-C.)(예순둘) 플라톤의 제자, 마케도니아 출신 철학자. 사물의 탐구를 위한 네 가지 방식을 형상인, 목적인, 효과인, 질료인으로 구분한다.
356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1](Αλέξανδρος Γ' ο Μέγας 알렉산드로스 감마 호 메가스, 전 356-전323)[서른셋] 마케도니아 왕국의 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군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287 아르키메데스(Ἀρχιμήδης, 전287경-전212경) 고대 그리스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일부였던 시라쿠사 출신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겸 공학자.
145 사마 천(司马迁, 전145경 -전86경)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 - 아버지인 사마담은 전한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太史令)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하였다.
04 예수(Ἰησοῦς, 전4년경-기원후 33년경) 나사렛 예수 또는 예수 그리스도. 나자렛 출신 유대인 설교자이며 종교 지도자로서 기독교 창시자이며 신앙의 대상이다. 로마 제국에 항거하고 산헨드리아 종교지도부에 저항하다가 십자가형을 당하였다. 그를 메시아[크리스토스]라고 칭하는 이도 있다.
O
233 진수(陳壽; 233-297) 중국 후한 시대 역사가. 삼국 시대의 저작들을 모아 《삼국지》를 편찬했다. 명나라 때 진수의 글을 토대로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를 썼다.
1162 칭기즈 칸(Činggis Qan, 成吉思汗 성길사한, en. Genghis Khan, 1162-1227) 몽골 제국의 건국자, 중국식 별칭은 칭기스 황제,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
1547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 스페인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 돈 키호테(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 1605).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포르투갈 유대계 네델란드 철학자.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1665-1670쓰여지고 유고발표 1677)
1694 볼테르(Voltaire, 1694-1778) 프랑스 계몽주의 작가.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 1759)
1712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프랑스어로 글을 쓴 스위스 철학자, 작가. 인간불평등 기원론(1754) - 페스탈로찌(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 헤르바르트(Johann Friedrich Herbart, 1776-1841), 프뢰벨(Friedrich Froebel, 1782-1852) 등과 같은 19세기의 많은 교육가들은 교육의 방법을 논의하면서, 루소로부터 직접적으로 끌어냈다.
1737 페인(Thomas Paine, 1737-1809) 18세기 미국의 작가, 혁명이론가로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 때 활약하였다. 상식론(Common Sense, 1776)
1758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서른여섯] 프랑스 정치인, 철학자, 법률가, 혁명가, 작가.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자꼬방 산악당의 중요인물.
1873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1783-1830) 베네수엘라 출신의 독립운동가, 군인. 산 마르틴(San Martín, 1778-1850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Libertadores 리베르타도레스)이자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1795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신학과 문헌학 공부, 독일의 역사가. 베를린 대학 교수, 혁명전쟁의 기원과 발단(Ursprung und Beginn der Revolutionskriege 1791 und 1792 (1875)
1809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1861-1864까지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이끌었다.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유태인 출신으로 독일인이다. 인간의 자의식이 자유의 절대성을 확립하기보다, 사회라는 공시태가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역사적으로 자유를 점점 더 실현한다고 보았다.
1818 페루초 피게레도(Perucho Figueredo, 1818-1870) 쿠바 국가를 작곡한 음악가.
1819 카를로스 세스페데스(Carlos Céspedes, 1819-1874) 스페인 통치 하에 쿠바의 오리엔테 주(현: 그란마 주) 바야모 출신의 변호사, 농장 소유자. 1868년 10월 10일 쿠바의 독립을 선언하고 제1차 쿠바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쿠바의 국부라는 의미인 파드레 데 라 파트리아(Padre de la Patria)로 칭해진다.
1836 고메스(Máximo Gómez y Báez, 1836–1905) 쿠바독립전쟁(1895–1898)에 참여한 도미니크 장군,
1845 안토니오 마세오(José Antonio de la Caridad Maceo y Grajales, 1845–1896) 쿠바 독립전쟁의 장군. 쿠바 프리메이슨.
1853 호세 마르티(José Julián Martí Pérez, 1853-1895) 쿠바의 영웅이자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중요 인물. 그는 시인, 수필가, 저널리스트, 혁명 철학자, 번역가, 교수, 출판자, 정치 이론가였다. 쿠바의 아바나 국제 공항이 ‘호세 마르티’국제 공항으로 개칭했다.
16살에 쿠바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쿠바 혁명 앞의 스페인 왕국”을 썼다.
1880년 미국 뉴욕에서 “조국(La Patria)” 신문을 창간하였다.
1891 소박한 노래(Versos Sencillos)
1892년 ‘쿠바 혁명당’ 조직.
1895년 5월 19일 도스리오스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1862 마테를링크(Count Maurice Polydore Marie Bernard Maeterlinck, 1862-1949) 벨기에 시인이자, 극작가, 수필가. 191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 파랑새(L'Oiseau bleu, 1908)
1866 쑨원(孫文, 손문, 1866-1925) 중국 외과 의사, 정치가. 신해혁명을 이끈 주역이다.
1870 레닌(Vladimir Il'ich Ulyanov, dit Lenin, 1870-1924) 러시아의 혁명가, 정치가. 아내 크룹스카야
1878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e, 1878-1953)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 주석이었다. .
1879 트로츠키(Lev Davidovitch Bronstein, dit Leon Trotski, 1879-1940)는 레닌이 죽고, 스탈린(Staline)이 집권한 후에 1929년에 소비에트연방에서 추방되어, 나중에 멕시코로 쫒겨 갔으며, 제4인터네셔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 모나르(J. Mornard)에 의해 암살당했다.
1881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 오스만 제국의 육군 장교, 혁명가, 작가이며 튀르키예(터키) 공화국의 건국자. 일부일처제 법 확림, 1930년 여성에게 선거권 부여.
1883 칼릴(Khalil Gibran, 1883-1931) 레바논 시인, 아랍어와 영어로 표현(불어도 유창하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 예언자(The Prophet, 1923: Le Prophète).
1885 윌 듀런트 (Will Durant, 1885-1981) 미국 작가, 역사가, 철학자. 철학 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 1926(이 책은 학술적이 아니라 논문이나 재인용을 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램프레이트의 철학사도 마찬가지이다.)
1887 존 리드(John Silas "Jack" Reed: 1887-1920) 미국의 언론인, 시인, 사회주의 운동가. 볼세비키 혁명을 다룬 세계를 뒤흔든 열흘(Ten Days that Shook the World, 1919: Dix jours qui ébranlèrent le monde)
1887 장제스(蔣介石, 장개석, 1887-1975) 대만 총통.
1889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 영국의 역사가.
1890 호치민(胡志明 Ho Chi Minh 1890-1969) 베트남 정치가. 본명 구엔 타트 탄(Nguyen That Thanh). 민족해방 최고 지도자이며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
1893 마오쩌둥(毛泽东, 모택동, 1893-1976) 중화 인민공화국 혁명가, 정치인. 초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자는 룬즈(潤之, 윤지).
1895 후버(John Edgar Hoover, 1895-1972) 미국의 공무원. 1924년 수사국(FBI의 전신) 국장으로 임명되어 1935년 FBI 창설.
1899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예순둘] 미국의 소설가, 저널리스트.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 1932)(논픽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1940)(1936-1939년 스페인 내전 참전),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1952),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 카스트로는 헤밍웨이를 단 한번 만났다고 한다. 엽총사고로 사망.
1899 호세 마리아 로페스 레딘(Jose Maria Lopez-Lledin, 1899-1985), 스페인 출신, 방랑자.
1900 매슈스(Herbert Lionel Matthews, 1900–1977), 일명 "El Caballero de París" 뉴욕 타임지(The New York Times 기자 및 편집자.
1900 페드로 사리아(Pedro Sarria, Pedro Manuel Sarría Tartabull 1900-1972), 쿠바인 군인, 기자, 역사가.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에서 정부군 대위?[쉰다섯인데], 1959년 혁명에 참여. - 스페인.위키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동명이인이 또 있을까?
1901 바티스타(Rubén Fulgencio Batista y Zaldívar, 1901-1973), 쿠바 군인, 미국 앞잡이 독재자. 1952년 쿠데타. 1954년 집권. 1959년 카스트로에 의해 축출.
1902 마이어 랜스키(Meyer Lansky, 1902-1983) 유대계 아바나 마약조직 우두머리, 시칠리아계 마피아 두목들을 앞세우고 자신은 배후에서 암흑가를 지배한 지능적인 범죄자.
1903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본명 블레어(Eric Arthur Blair), 인도 제국에서 태어난 영국 작가, 언론인. 동물 농장(Animal Farm, 1945년) 1984년(Nineteen Eighty-Four, 1949년)
1905 에드거 스노(Edgar Snow, 1905-1972), 미국의 저널리스트. 그는 특히 서방 기자로는 최초로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산시성 바오안(保安, 현재의 옌안시 즈단현)을 방문 취재하여 저서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 1937), 부인은 아리랑(1941)에서 김산(장지락)을 소개했다.
1907 님 웨일즈(Nym Wales, 본명 Helen Foster, 1907-1997), 스노 부인. 아리랑(Song of Ariran: A Korean Communist in the Chinese Revolution 1941)에서 김산(장지락, 1905-1938)의 활동을 기록했다.
1908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 칠레 소아과 의사, 정치인. 197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36.62% 득표율로 승리하여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민주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칠레사회당)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국방 장관의 1973년 칠레 쿠데타에 저항하다 자살하였다.
1913 카파(Robert Capa, pseudonyme d'Endre Ernő Friedmann, 1913-1954) 사진작가. 헝거리 전쟁 특파원. 세계 전쟁터들에서 사진. 인도차이나 통킹만에서 죽음.
1913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Árbenz Guzmán, 1913–1971) 과테말라 대통령(1951-1954), 미 CIA에 의해서 전복됨.
1916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 1916-1999) 유대계, 미국에서 태어난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1918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 19년 감옥생활. 남아공 대통령을 지냈다.
1920 셀리아 산체스(Celia Sanchez, 1920-1980) ‘7월26일 운동’가담. 혁명전사. 피델의 비서실장이 된다.
1923 아이데 산타마리아(Haydée Santamaría Cuadrado, 1923-1980) 1959 혁명에 참가. 자살.
동생 아벨(Abel Santamaría, 1927-1953),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에 참가, 포로로 사망.
1925 일다 가데아(Hilda Gadea Acosta, 1925-1974) 페루출신 공산주의자. 체에게 맑스 레닌을 가르치다. 체의 첫 부인이 되다.
1926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2016) 1959년 체게바라와 더불어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ivar, 1901-1973, 쿠바정치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1959) 쿠바의 혁명가이며 최고 수반>
아바나 선언
1946 호세 카레라스(Josep Maria Carreras i Coll, 1946-) 카탈루냐 출신, 스페인의 성악가, 가톨릭 신자. 리세우 음악원에서 수학했으며 《노르마》의 플라비오 역으로 데뷔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The three tenors(3대 테너)라 불렸다.
1927 후안 알메이다(Juan Almeida Bosque, 1927-2009)는 쿠바의 정치인이자 1950년대 쿠바 혁명의 초기 사령관들 중 한명이었다.
1927 아벨 산타마리아 (Abel Santamaría, 1927-1953)[스물여섯]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에서 정부군에 포로가되어 눈알 뽑히는 고문으로 사망
1927 마르케스(Gabriel José de la Concordia García Márquez, 1927-2014) 콜롬비아의 소설가, 저널리스트이자 정치 운동가. 《백년 동안의 고독(1967)》,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28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dit Che, 1928-1967), 스물셋에 모터사이클 여행(1951-1952). 1953년 의대졸업, 저술로 『게릴라 전쟁(La Guerre de guérilla)』, 『쿠바에서 사회주의와 인간(Le Socialisme et l'Homme au Cuva, 1966)』, 『볼리비아에서 일기(Journal de Bolivie, 1968)』
1928 코르다(Alberto Díaz Gutiérrez, 예명 Alberto Korda, 1928-2001) 쿠바 하바나 태생. 쿠바 사진가. 체게바라 사진(Che Guevara, le Guerrillero Heroico, 1960)으로 유명하다. 이를 변형한 유명한 체의 이미지는 피트파트릭이 한 것이다.
1932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1932-1959) 쿠바의 혁명가,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군인, 정치가. 쿠바혁명참가, 아바나 입성. 쿠바혁명 3걸, 피델, 체, 카밀로.
1937 나바로(Vicente Navarro, 1937-) 스테인 사회학자, 정치과학자. Dangerous to your health. Capitalism in health care, Monthly Review Press (1993)
1937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이라크 정치인. 1979년-2003년 4월 9일까지 이라크를 통치한 대통령. 전범재판인 2006년 11월 5일 1심에서 시아파 무슬림 학살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사담은 "나는 사형당하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다. 이란과 손잡으면 안되며, 경계해야 한다." 고 말하였다.
1939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1939-), 이탈리아 이민 가정, 미국 영화감독. 오스카상을 다섯 번, 황금종려상을 두 번 수상. 대부 (1972), 대부 2 (1974), 지옥의 묵시록 (1979),《대부 3(1990)》
1937 나바로(Vicente Navarro, 1937-) 스페인 사회학자, 정치과학자. 미국 홉킨스 대학 교수. 당신의 건강에 위험(Dangerous to your health. Capitalism in health care, 1993)
1942 레알(Eusebio Leal Spengler, 1942–2020) 쿠바 역사가. 1994년 아바과넥스(The Habaguanex) 설립
1942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Gaddafi, 1942-2011) 리비아의 군인, 정치가.
1943 타리크 알리(Tariq Ali, 1943-) 파키스탄 라호르 태생. 라호르 대학에서 군사독재에 맞서 저항하다 영구 추방,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뉴레프트리뷰』 편집위원, 국내 번역,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공저, 삼인, 2001), 『근본주의의 충돌』(미토, 2003), 『술탄 살라딘』(미래M&B, 2005), 『석류 나무 그늘 아래』(미래M&B, 2007), 『1960년대 자서전: 열정의 시대 희망을 쏘다』(책과함께, 2008) 등이 있다.
1943 라모네(Ignacio Ramonet, 1943-) 스페인 영화기호학자, 기자. 보르도 대학에 공부했다. Fidel Castro : Biografía a dos voces, 2006, fr. Fidel Castro, biographie à deux voix, 2007.
1946 탄 타오(Thanh Thao, 1946-), 베트남 시인. 1969년 하노이 종합대학 어문학부 졸업. 최전선 전투병을 자원했다. 1978년 『초원을 건너는 발자국』이란 시로 베트남문인 최고상을 받았다. 1996년 장편 서사시 ‘미 라이의 아이들’이 실린 시집 『태양의 파도』로 두 번째 베트남 문인 최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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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 이순신(李舜臣, 1545-1598)[쉰다섯] 한성 출신, 조선 무신다. 본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
1552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조선 중기 무신, 정치인, 군인. 임진왜란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크게 활약한 의병장. 남명 조식의 제자.
1737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燕巖),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 사상가, 여행가, 소설가. 문체반정(文體反正)
1824 최제우(崔濟愚, 1824-1864) 경북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 조선 말기 동학의 창시자. 아명은 복술(福述), 호는 수운(水雲).
1855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전북 고창군 죽림리. 조선의 농민 운동가이자 동학의 종교 지도자. 동학 농민 혁명 당시의 남접의 지도자.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이며 호는 해몽(海夢).
1905 김산(金山, 1905-1938) 사회주의 혁명가, 항일독립투사, 아나키스트, 국제주의자, 민족주의자. 본명은 장지학(張志鶴) 또는 장지락(張志樂).
1905 이현상(李鉉相, 1905-1953)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노동운동가. 해방 후에는 남조선로동당의 간부로 지리산에서 파르티잔 활동. 이 산에서 다섯 겨울을 보냈다.
1929 이영희(李泳禧, 1929-2010) 대한민국의 언론인, 교수, 사회운동가. 전환시대의 논리(1974) 8억인과의 대화, 1977
1933 이종은(李鍾殷, 1933-) 한양대 교수, 국문학, 고전문학.
1941 신영복(申榮福, 1941-2016) 한국 사상가. 작가, 대학교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나무야 나무야, 1996,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신영복 유고, 2017(돌베개) 3부 속에 “혁명의 진정성과 상상력의 생환을 위하여”
1943 김석철(金錫澈, 1943-) 경남, 경기고, 서울대 건축학과 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천년 도시 천년 건축,
1947 홍세화(洪世和, 1947-) 작가, 사회운동가, 언론인. 서울대 외교학과졸, 1979년 남민전 사건.
1947 조영래(趙英來, 1947-1990) 인권 변호사. 1970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주관 전태일 장례식을 계기로 전태일 평전(全泰壹 評傳, 1983)
1948 전태일(全泰壹, 1948-1970) 한국 봉제노동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 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분신 항쟁하였다.
1952 손호철(孫浩哲, 1952-) 서강대 정외과 교수.
1955 송필경(1955-), 왜 호치민인가? 2013, 왜 전태일인가 사람 전태일. 2020.
1961 요시다 타로(吉田 太郞, 1961-) 일본인, 생태·쿠바 전문 저술가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 세계적 의료모범국 쿠바 현지 리포트(위정훈 역, 파피에, 2011년 05월), 교육천국, 쿠바를 가다: 세계적 교육모범국 쿠바 현지 리포트(위정훈 역, 파피에, 2012년 12월)
1961 정민(鄭珉, 1961-), 한양대 교수, 국문학, 고전문학 전공.
1962 최봉태(崔鳳泰, 1962-) 대구, 변호사. 현재 법무법인 삼일 소속 변호사. 2005년 1월부터 2006년 1월까지 국무총리산하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1975 정승구(鄭榺求, 1975-) 서울,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하버드 대학에서 정책학, 아버지 외교관, 영화감독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 2015,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2009)>의 각본을 쓰고 연출하고 제작했다
- 알레니스 바로소, 쿠바 여의사.
* [미국 기자.]
1863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1863-1951) 미국의 언론및 출판사 사주로 자수성가한 백만장자 조지 허스트의 아들이다. 메인호 사건을 왜곡.
1847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 1847-1911) 미국의 언론인, 신문 경영자.
* 쿠바 약사(略史)*
1492-1898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 1492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1506), 제1차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에서 과나하니 섬(추정)에 도달했고,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이라 칭하였다. 그 다음에 그는 쿠바, 히스파니올라(아이티, Haiti)에 도달하여, 이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1511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de Cuéllar, 1465–1524), 스페인 정복자, 초대 총독(1511-1524), - [화가 벨라스케스(1599-1660)와 다른 인물이다.]
[1776년 7월 4일 영국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발표한 미국 독립선언문의 첫 구절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
1868년 10월, 쿠바 최초의 독립전쟁(1868-1878)이 일어났다. 세스페데스(Carlos Céspedes, 1819-1874)가 이끌었다. 그를 쿠바의 국부, 즉 파드레 데 라 파트리아(Padre de la Patria)라 한다. 마세오(Antonio Maceo, 1845–1896)도 참여.
1895년 4얼 11일 관타나모 부근에서 식민지 군대와 싸우다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1853-1895)는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마르티 어록, “게으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질이 고약하지도 않은 사람이 가난하게 산다면, 그곳에는 불의가 있다.”
1898년 아바나 항에서 미 군함(Maine, 메인호) 폭발 사건이 있었다. 미국은 폭발 책임을 당시 쿠바를 지배하던 스페인 식민 당국에 씌우고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 미국이 영구임대 하여 악명 높은 수용소가 있다. / 1898-1902 미국의 영토였다.
1902 미군이 철수하고 쿠바가 독립하였다. - 그러나 미국이 괴뢰정권을 세워 쿠바를 식민지로 삼았다.
[1928, 콜롬비아, 시에나가(Ciénaga)에서 ‘바나나 학살’ - 미국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자행한 노동자 및 민간인 학살 사건.]
[1934년 10월- 1935년 10월: 장정(長征)은 중국공산당 홍군(紅軍)이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370일에 거쳐, 12,500km의 거리를 걸어서 옌안으로 탈출한 사건이다.
1952년 친미 괴뢰 독재자 바티스타가 선거를 없애고 쿠데타로 집권했다.
1953년 7월 26일(산티아고의 카니발 축제 날),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을 때, 이미 나(카스트로, 스물일곱)는 사회주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고 ... “M-26-7”: 몬카타 병영 습격 기념일
1953년 12월 체는 과테말라에서 민주청년 동맹에 가담했다. 여기서 일다 가데아(1925-1974)를 만났다.
1955 5 25 카스트로 석방. “나는 어떤 야망도 열망도 없습니다. 내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더 나은 더 행복한 쿠바입니다.”
1955년 7월 어느 날(26일), 피델은 동생 라울의 주선으로 멕시코에 와 있던 체 게바라를 만났다.
1956년 11월 25일 자정 출발, 82명의 투사와 ‘그란마’(할머니란 뜻)호: 12인승이라 한다. .. 마에스트라 산맥 지역에 기지를 마련했다. 남은 동지는 16명이었다. [지리산의 3봉 중의 하나 노고단(老姑壇)은 할미이다]
1957년 1월 17일 근처 정부군의 작은 부대를 점령했다.
1957년 중반 무렵 해방구를 만들었다.
1958년 초 피코 투르키노의 기슭에 영구 기지를 세웠다.
1958년 8월 21일 혁명방속을 통해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전역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12월 27일 밤, 체 게바라는 340명의 전사를 이끌고 병력이 10배 이상이며 탱크와 전투기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12월 28일 새벽, 체의 부대는 산타클라라에 잠입했다. <산타클라라는 아바나에서 24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12월 30일 산타클라라 주위 정부군 주요 수비대들이 혁명군에 항복했다.
1959년 1월 1일 쿠바 혁명은 성공했다.
1960년 6월 “복지의료는 국가의 책무이며, 모든 사람이 건강할 권리를 갖는다”라고 선언했다.
1961년 1월 19일 미국 케네디 대통령 / 4월 15일 토요일 미군 B-52가 쿠바 비행장 세곳을 폭격, 4월 17일 CIA에게 훈련받은 쿠바 망명인 1,511명 침공, - 미국의 ‘피그스만 침공’.
1961년 쿠바와 미국 단교.
1962년 10월 28일 “쿠바 미사일 위기”(La crise des missiles de Cuba):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사이의 외교적 군사적 대치를 말하다. - 1962년 10월 14일, U-2 기에 의한 첩보 사진에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의 사진이 촬영되면서 촉발되었다.
[1963년 11월 22일 존 케네디 대통령 암살. - 쿠바사태가 미소간 합의로 해결되었지만, 13개월 후인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다.]
1963년 의료 노동자 56명을 알제리에 파견했다.
[1964년 8월 2일, 미국이 통킹만에서 미국 구축함 매독스(Maddox)호가 북베트남 측의 기뢰공격을 받았다고. 이런 CIA가 조작한 사건으로 북베트남과 전쟁을 시작했다.]
1964년 12월 체게바라는 유엔에서 연설하기 위해 미국 뉴욕에 갔다.
1985년 쿠바는 가정주치의 제도를 도입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다.]
1990 소련이 쿠바에게 지원한 경제 원조가 끊겼다.
[1991 소련의 해체]
1992 쿠바에서 비타민 부족으로 5만 명 이상의 시민이 일시적 실명 등 시각 장애가 왔다.
2016년 11월 26일 아흔 나이로 피델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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