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장간재공 시제를 위하여 충남 서천군시초면 용곡리를 찾아 용산역에서 08:00 남양군회장 성종님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재경상수화수회및 상수종중 총무 성구 및 노곡총무 남표님 등 대형버스를 이용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장간재공은 諱는 융(戎)이며 시조하 12세로 高麗 重大匡 判三司事 남양부원군이시며시는 장간이시다
배위는 통의군부인 나주나씨(남양군, 문정공, 판밀직공의 어머니이심)와 창원군부인 회산황씨(判中樞公의 어머니)이시다
이상 네 아드님께서는 남양홍씨 16개 파조중 4대 파조가 되신다
또한 공의 누이중 한분은 순화원비(충선왕비)와 명덕태후(충숙왕비)가 되시며 명덕태후는 충혜왕과 공민왕의 어머니가 되신다
충혜왕은 외숙부이신 공께 賜牌地 홍주목을 드렸고 그로 인해 현재의 장소에 공의 유택(幽宅)이 모셔졌다고 전해져 왔다
그 후 고려 말과 조선 건국의 격변기에 공의 후손들이 무진지화(戊辰之禍 1388년)를 당하여 숨어 살게 되어 공의 유택 관리가 안되어 실전되었다가 1876년(고종13년 봄) 후손 순낙공(淳樂公)께서 현몽에 의해서 지금의 자리에서 표석 조각을 발견하고 투장(偸葬)한 무덤을 파내고 다음해 1877년(고종 14년)당시 영의정이신 분계공(汾溪公 諱 淳穆)에 의해 묘표를 세우고 묘역을 정비하였으나 1894년(고종 31년)동학난때 혼란한 틈을 타 묘하에 살던 토족에게 다시 봉분을 훼손당하고 묘사와 제전을 빼앗겼다가 3년후 1897년에 난이 평정되고 질서 회복 후 부읍(府邑)에 제소(提訴)하여 범법자(犯法者)들을 의법 처단하고 봉문을 수축하고 묘사와 제전을 종전대로 다시 찾아 복원하였다(1898년)
향사는 매년 음력10월 3째주 일요일에 거행되며 차량지원은 상수종중,노곡종중 해봉종중이 각각 100만씩 출원하여 장간재공, 진주광제서원 ,노곡제에 참여 지원합니다
도집례: 연기공종중 성근, 축관:남양군파 순웅, 좌,우집사: 당표, 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