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신실한 개혁주의 신봉자들은 칼빈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행사도 하고 강연회도 연다. 하지만 칼빈 신학에 구원이 없다고,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극단적인 이들이나 은사체험을 하는 이들 중에는 칼빈이 지옥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중에 의학박사 출신 목사인 서사라 목사님도 계신다. 칼빈은 어쩌다가 기독교의 대표적인 위인이면서도 그토록 맹비난을 듣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한때 칼빈주의를 추종했던 목사님들을 좋아했었다. 그 두분은 바로 마틴 로이드 존스와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그 귀족적이고 학자같은 목사님들의 책을 탐독하며 감동을 많이 받았던 그 사람이 바로 나이다. 그러던 내가 어느 순간 칼빈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이 두 목사님에게서도 멀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칼빈신학의 치명적인 오류와 칼빈 생전의 율법주의적인 신앙때문에 로이드존스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도 돌아섰다. 그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오류가 너무 치명적이다. 이 두 영국과 미국의 귀족 목사님들은 어찌하여 한평생을 살면서 그 오류를 발견해내지 못했을까. 지식으로만 믿는 이들의 한계일까? 아니면 종교관 자체에 인본주의가 스며들어 있었던 것일까? 너무 지적 완벽주의자여서 그런가? 아무튼 나는 그 두 목사님이 끝까지 칼빈을 추종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 칼빈에게 개신교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세르베투스는 잘못된 교리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죽임당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런데 칼빈은 그 친구가 이단이므로 죽여야 한다고 종교재판소에 권고하였다 한다. 그는 세르베투스가 화형을 당해 죽도록 방관하였다. 또한 술주정뱅이나 싸움을 하는 사람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 칼빈은 실정법으로 사람들을 징계하여 바르게 살도록 이끌려 하였고 그런 생각을 무리하게 하였다. 그래서 지나친 판결을 많이 내렸다. 그는 종교지도자였을뿐만 아니라 정치의 조력자였고 법의 집행관이기도 했다. 그리고 칼빈은 목양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학자였다. 그는 철저히 논리적인 여러 이론으로 아귀를 잘 맞추었고 그것을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완벽하게 포장하였다. 나는 칼빈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그의 예정론,성도의 견인 교리 등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누구보다 더 애쓰시는 분이지, 창세 전에 유기될 자들을 미리 예정하시는 분이 아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그의 죄에 대한 진노에 대해 자기들 내키는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말은 신중히 들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십자가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는 신학일 뿐이다. 십자가의 깊은 체험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철학은 또 하나의 미혹이다. 차라리 맨땅에 헤딩하든이 아무것도 모르고 믿는 것이 낫겠다. 나는 칼빈신학과 칼빈이란 사람에게 구원이 없다고 생각한다. 일반 성도들에게 이런 지식은 중요하지 않겠지만 독실한 칼빈주의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들은 내가 독설을 내뱉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부드럽게 설득하고싶다. 나도 한때 열렬한 개혁주의자였다. 부흥과 개혁사나 지평서원에서 책도 많이 사 보았다. 그때가 굽네치킨을 운영할 때였는데 없는 돈을 쪼개어 신학책을 사보곤 했다. 지금도 우리집에는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한권이 책장에 꽂혀 있다. 그런 어려운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으면서 사기도 했던 나였다.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 교리강해 등을 탐독했던 나였다. 이런 책들은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도움은 단면적인 것들이다. 그들의 교리체계 전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배울 것은 배워야하지만 많은 것이 그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종교철학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2014년경에 개혁주의 신학이 죽은 신학임을 알았다. 누가 가르쳐주어서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 있고난 후에 하나님을 진실하게 만나게 된 때쯤에 그냥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신학 안에 있는 풍성한 가치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리로 묶어서 예정론이나 성도의 견인처럼 단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개혁주의를 떠났지만 개혁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감동을 받았던 때가 엊그제만 같다. 그 중에서도 개혁주의 신학에 나를 입문시켜 주었던 웨스터민스터 교리문답 제1문은 지금도 내 마음에 감동을 준다.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개혁주의를 거쳐 은사주의를 지나 십자가 복음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