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신 분들게 먼저 감사드립니다(_ _); 별로 글재주가 없는데다가 간만에 글을 쓰려니까 글이 많이 꼬이네요. 전편에 조훈현 국수의 기풍에 대해서 얘기했으니, 이번에는 그의 영원한 라이벌인 서봉수 명인에 대해서 글을 써볼까 합니다. 제갈량에 대해서 논했으면 다음편은 사마의나 주유가 되어야겠죠.^^ 그리고 바둑을 모르시는 분들도 많고 다른 기사들의 기풍에 대해서 길게 논할 깜냥도 안 되니; 기풍 이외의 다른 얘기들도 좀 쓰면서 서봉수 9단의 기풍에 대한 생각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 야성의 승부사 - 서봉수 9단
- 한국산 된장바둑, 서봉수 9단
한국바둑의 대통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대권이 넘어가는 시점이나 그 무게중심의 이동을 예감할 수 있는 척도로서 '국수' 타이틀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점을 드는 경우가 많다. 50~60년대를 거치면서 조남철 9단과 김인 9단이 각각 '국수'를 9연패, 6연패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70년대 초중반의 춘추전국시대, 조남철, 김인의 기존의 강자들과 윤기현, 하찬석, 정창현, 김희중, 조훈현, 서봉수 등의 새로운 기사들이 정상의 자리를 놓고 경합하던 이 시점에서는 윤기현 9단과 하찬석 9단이 각각 국수위를 2년 동안 소유했고, 76년 국수위가 조훈현 9단에게 넘어간 이후 그는 10년간 국수위를 놓지 않으면서 조훈현 1인 천하를 구가했으며, 서봉수 9단은 86년에 조훈현 9단으로부터 국수위를 빼앗아 2년간 국수의 자리에 올랐다가 조훈현 9단이 이를 다시 찾아왔던 바 있다.
사실 서봉수 9단은 한순간도 1인자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으며, 이창호가 등장하기 이전의 15년 동안 국내에서 조훈현 9단의 유일한 라이벌이자 그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지목됐었지만, 실제 전적을 살펴보면 조훈현 9단에게 약 1:2의 비율로 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봉수 9단에게는 이러한 객관적인 전력과 통계상에서 보이는 열세를 상쇄할만한 매력이 있었으며, 다른 관점으로 보면 조훈현 9단의 독주가 바둑팬들에게 식상하다는 생각을 가지게끔 한 면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서봉수 9단은 조훈현 9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조훈현 9단과 비교했을 때 흥미로운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창호 9단이 등장하기 이전, 80년대까지 33기가 진행되었던 국수전에서 국수위를 쟁취했던 기사들, 조남철,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서봉수 가운데 일본 유학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기사는 서봉수 9단이 유일했다. 나머지 기사들이 젊은 나이에 도일하여 기타니, 세고에 등 일본의 유명한 스승들에게서 바둑을 전수받고, 일본의 젊은 기사들과의 수련을 통해 갈고닦은 실력으로 한국의 바둑계를 주름잡았던 데 반하여 서봉수 9단은 조훈현 9단이 입단했던 아홉 살의 나이때에는 바둑돌조차 손에 쥐어보지 않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유명한 바둑신동이었고, 많은 후원인들의 도움 속에서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며, 현대 바둑의 메카였던 일본에서까지 당대의 대기사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동년배의 일본기사들을 두려움에 떨게했던 조훈현 9단에 비해서 서봉수 9단은 어린 시절을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큰 차이없이 보냈던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기준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도 늦은 나이에 바둑을 배운 서봉수 9단은 딱히 정해진 스승도 없이 동네의 기원에 나가서 아마 고수들과 바둑을 두고 혼자 책을 보면서 바둑을 공부해 17살 때인 1970년에 입단했으며(서봉수 9단이 한창 기원에서 바둑을 배울 때 기원의 중년 고수들이 정석책에서 아주 어려운 정석하나를 골라서 청년 서봉수로 하여금 그 수순을 맞추는지 못 맞추는지를 장난으로 시험해본 일이 있었는데, 머리를 싸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도 어찌어찌 최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고 서봉수의 천재성을 알아봤다는 일화도 있다.), 그 이듬해인 71년에 불과 2단의 서봉수는 한국바둑의 거목 조남철 8단(당시)에게 3:1 승으로 명인위를 탈취해 세인을 경악시켰다.(조남철 선생은 당시 타이틀을 넘겨주고 '서봉수의 단이 3단만 되었더라도..'라는 탄식을 하셨다고 한다.) 72년에 한국에 돌아왔고, 74년에서야 최고위전에서 우승해서 타이틀을 땄던 조훈현 9단보다 먼저 타이틀 홀더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 '장미와 잡초', 조훈현과 서봉수
조훈현과 서봉수. 역사에 남을 두 53년생 뱀띠 동갑내기 라이벌의 그간 전적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조훈현이 약 두 배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으니, 타이틀전에서의 승패, 타이틀 획득수는 이보다 더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두 기사간 첫 번째 타이틀전의 승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서봉수 9단이었다. 74년에 벌어진 국기전 5번 승부에서 서봉수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조훈현을 3:1로 꺾으면서 다시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당시 바둑계의 일반적인 예상은 조훈현이 어렵지 않게 서봉수에게 승리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는데, 이는 단지 '천재 일본유학파 조훈현', '변방의 한국바둑 서봉수'라는 선입견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훈현이 군대문제로 귀국한 이후 한국기원 5단으로 인정되면서 조·서 두 기사는 한국기원 기사실에서 짜장면 내기나 적은 액수의 돈을 건 바둑을 심심치 않게 두었고, 이런 바둑에서 조훈현의 승률이 서봉수에 비해 월등히 좋아 항상 조훈현 9단이 돈을 땄다고 한다. 평소 연습대국에서의 승률과 일본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조훈현의 기세를 높이 평가한 당시의 바둑전문가들이 조훈현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서봉수가 거뜬히 이겨버린 것이었다. 조훈현과 서봉수의 첫 도전기 결과를 사람들은 이후에 이렇게 평가한다. 서봉수는 조훈현과의 연습시합에서 지고 또 졌지만 그 과정 속에서 조훈현 바둑의 강점을 흡수하고 특징과 약점을 파악했으며, 결국 중요한 시합에서는 도리어 조훈현을 이겨버린 것이라고. 74년 국기전에서의 패배 이후로 조훈현은 이 알 수 없는 투박하면서도 끈질긴 기질을 가진 천부의 승부사를 피하게 됐으며, 두 기사의 연습시합은 중단되었고, 이후 오랜 기간, 두 기사가 한창 천하를 놓고 쟁패할 동안 두 기사는 대국 이후에 복기를 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또한, 두 기사간에 대국을 놓고 벌어지는 신경전도 꽤나 치열했다고 한다. 이미 승부가 기울대로 기울어 유리한 위치에 있는 기사가 아예 상대의 기세를 꺾기 위해 긴시간을 장고해서 대마를 잡으려고 한다든지.. 스타에 비유하자면 이미 승부가 기울어진 게임에서 베슬로 지우개를 하거나 퀸으로 커맨드를 먹는다든지, 아니면 할루시네이션으로 캐리어 개떼러쉬를 보여준다던가..; 이런 경우를 생각하면 되겠다.
첫 대결 이후, 향후 15년 동안 두 기사는 한국바둑계를 그들의 발 아래 분할하게 된다. 조훈현이 80, 82, 86년의 세 차례에 걸쳐 전관왕이라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달성하기도 했지만, 조훈현이 전관왕을 달성하는 그 현장에는 항상 서봉수가 있었고, 그 전관왕이 깨지는 순간 조훈현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 역시 언제나 서봉수였으며, 그는 수없이 조훈현의 펀치를 맞고 쓰러졌을지언정 한번도 녹다운되어 수건을 링위로 던진 일이 없었다. 줄잡아 400판이 넘게 공식대국을 치른 이 두 기사의 관계를 세간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서봉수는 조훈현과의 대결을 통해 바둑이 늘었고, 조훈현은 서봉수에게서 승부를 배웠다.' 또한, 서봉수는 서슴지 않고 이렇게 얘기한다. '조훈현은 나의 스승이었다.' 각자의 반생을 걸쳐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웠지만, 서로를 진정한 승부사이자 장인으로 인정하는,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했던 조훈현과 서봉수. 역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만큼의 진정한 라이벌이 아닐까?
- 서봉수의 기풍 - 잡초와 같은 근성, 실전지상주의, 그리고 기발한 전략.
서봉수 9단은 또래의 다른 정상급 기사들에 비해서 체계적으로 바둑을 배우지 않았으며, 실전을 통해서 더욱 강한 기력을 연마했던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유학했던 대부분의 기사들이 돌의 미학, 즉 모양을 중시하고 정석적인 바둑을 구사하는데에 익숙했던 것에 반하여 서봉수 9단은 돌의 모양이나 정석에 구애받지 않는 실전적인 수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으며, 중반의 국지접근전에서 조훈현 9단에 못지않은 탁월한 힘을 발휘했으며, 승부처를 잡아내는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조훈현 9단처럼 발빠르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바둑은 승부근성으로 단련되어 있었으며, 상대의 발목을 잡아채면 끈질기게 상대를 놓아주지 않고 전투를 펼치면서 이득을 취하는 강단을 지니고 있었다. 92년 벌어졌던 응창기배 세계바둑선수권 대회에서 서봉수는 일본의 '돌의 미학' 오다케 9단을 3:2로 꺾고 정상에 올랐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승부가 한국의 실전형 바둑이 일본의 정석과 모양바둑을 꺾은 결과라고 생각했던 바가 있다. 이러한 서봉수 9단을 사람들은 '반상의 야전사령관', '야성의 승부사'라는 닉네임으로 부르곤 했다.
이처럼 서봉수 9단은 대국내의 기술적, 정신적인 요소에서도 충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너무나 강력한 상대였던 조훈현 9단과의 15년 전쟁 속에서 전략적인 변화로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80년 조훈현 9단의 1차 전관왕 달성 이후 벌어진 81년 왕위전 도전기 7번 승부에서 들고나왔던 '흉내바둑'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81년의 15기 왕위전 7번기는 '백번필승'과 서봉수 9단의 흉내바둑으로 유명한데, 백번필승은 말그대로 백을 쥐고 둔 기사가 이겼다는 말이 되겠다. 왕위전 7번기에서 서봉수 9단이 들고나온 흉내바둑은 최강의 포석과 절정의 초반 감각을 자랑하는 조훈현 9단과의 초반 대결을 부담스러워했던 서봉수 9단이 생각해낸 실로 절묘한 전략이었다. 즉, 초반 포석 부분을 상대와 똑같이 운영함으로써 초반에 일어날 수 있는 변수를 없앰으로써 형세의 우열이 나타나는 시점을 최대한 늦추고 국면을 최대한 좁혀서 자신이 해볼만하다고 생각하는 중반의 접근전에서 승부를 내려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서봉수 9단의 이 작전은 100% 효과를 발휘해서 두 기사가 서로 백을 들고 둔 판을 모두 잡아낸 결과, 백을 네 번 쥐고 뒀던 서봉수 9단이 결국 4:3으로 승리하여 조훈현 9단의 전관왕을 깨뜨렸던 바 있다. 이와 같이 대국 내의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열세를 기발한 전략의 수립으로 극복했던 모습에서 서봉수 9단의 전략가적 기질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 서봉수 9단 : 조정현, 김동수
개인적으로 이러한 서봉수 9단의 바둑과 가장 근접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게이머는 조정현 선수다. 조정현 선수는 99년 PKO부터 출전했던 오랜 경력을 가진 게이머였지만 처음부터 팀에 소속되어 게임을 연습하지는 못했던 탓에 한동안 기본기의 부분에서 다른 게이머들에 비교할 때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조정현 선수는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전략적인 요소로 커버하는 경기를 많이 펼친 바 있으며, 대저그전에서의 투스타 레이쓰나 섬맵에서의 발키리, 대토스전 대나무조이기와 섬맵에서의 트리플커맨드 등 정석을 무시하는 실전적이며 독특한 자기류로서 기본기적 요소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기본기가 많이 보완된 현재에는 대부대 운용을 통한 전면전이나 힘싸움, 자원 축적을 통한 물량전보다는 여러 군데에서 쉬지 않고 벌어지는 소규모 병력의 국지전을 유도하여 이득을 취함으로써 결국 알게모르게 경기를 승리로 이끌어나가는 모습 역시 서봉수 9단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전략적인 경기를 자주 보여주고 있지 않은 조정현 선수가 경기에서 이러한 전략적인 모습과 기본기를 바탕으로한 국지전의 요소가 동시에 보여줬다면 조금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또한, 중요한 경기에서 기상천외의 전략으로 수차례 승리를 이끌어내던 김동수 선수의 모습을 볼 때 과거 서봉수 9단의 흉내바둑을 연상하는 이는 비단 본인만이 아닐 것이다.
한국바둑은 89년 조훈현 9단의 응창기배 우승이후 바둑 세계최강이라는 지위를 놓은 적이 없으며, 얼마전까지 세계대회 23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은 바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한국바둑의 수준 상승에 조훈현 9단의 귀국과 활동을 가장 큰 원동력으로 꼽는다. 하지만 서봉수 9단이 없었던들 지금의 조훈현 9단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때 조·서·유·이를 지칭하던 한국바둑의 4천왕 자리에 어느덧 서봉수 9단의 이름 대신에 이세돌 9단의 이름이 올라와 있으며, 서봉수 9단의 이름을 도전기 무대의 명단에서 찾아보기는 힘든 일이 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는 동안 조·서 두 라이벌이 남긴 수많은 기보와 연구들은 현재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한국적 실전형 바둑의 모태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더라도 한국 바둑에서 서봉수 9단이 가지는 비중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김동수 해설위원;의 컴백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본인도 다시 한번 세계무대의 도전기의 반상에서 전장을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의 모습을 보기를 기대해본다.
에헤헤헤...스크롤의 압박과, 빽빽한 글자로인해 읽기를 포기했었다가, 느림보님의 추천으로 프린트해서 퇴근길에 읽어봤는데요~ 정말 재미있게 글을 잘 쓰신거같아요,... 저같은 초보도 쉽게 알아보고 재미를 느낄정도로...ㅎㅎㅎ..갠적으로 스타를 즐기는 유저로 참 맘에드는글이네요^-^
첫댓글 음..이글쓴분이 누군진 몰라도..바둑도 상당히 잘아시는군요. 좋은글입니다. 밑에있는 조훈현9단글과 더불어 바둑마당으로의 이동을 추천합니다용.
좋은 글 고맙습니다~ 강추입니다.. ㅎㅎ
아깐 자세히는 안봤고,지금 다시 자세히보는데..으음.. 글자 자간들사이의 압박이 심하군요.. 좀 문단 맥락을 좀더 많이 띄워주시면 읽기 편할텐데..헤헤. 아참. 히카루 노고님도 청주분이군요..^^ 반갑습니다.
밑에 붙은 댓글도 같이 가져오시지. 거기도 좋은 글 많던데요.
글자의 압박이 너무 심해서...읽다가 포기했습니다. 현재, 컨디션 저하도 한몫을 한 듯...☆
에헤헤헤...스크롤의 압박과, 빽빽한 글자로인해 읽기를 포기했었다가, 느림보님의 추천으로 프린트해서 퇴근길에 읽어봤는데요~ 정말 재미있게 글을 잘 쓰신거같아요,... 저같은 초보도 쉽게 알아보고 재미를 느낄정도로...ㅎㅎㅎ..갠적으로 스타를 즐기는 유저로 참 맘에드는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