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13 익산역 추모탑과 익산역 전경을 사진에 담다.
자유인은 익산역의 추억을 되세기며 익산역 전경과 추모탑을 사진에 담아보다.
익산역 한쪽 적십자회관 앞에는 1950년 미군의 이리역폭격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데 여러 희생자 명단중 나의 처 외삼촌 강휘영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해 볼수 있었고, 익산역사 안쪽에 이리역폭팔사고 추모탑이 건립되어 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추모탑의 명단중 엄상호는 나와 입사동기생으로 폭팔사고후 기관차에 올라가 내가 직접 시신을 시신안치장소로 옮겨 가슴아픈 추억이 있다.
한편 희생자 명단을 살펴본 결과, 비석에서 다른 이름으로 세겨진 고인이 2명 발견됐다. 故 박제술(현수막)은 박재술(비석), 故 김형옥(현수막)은 최형옥(비석)으로 나와 있다.
추모탑을 세우면서 성을 틀리게 세겨 놓다니 유가족에 크나큰 상처가 되지 않을까?
1977.11.11 21:15 익산시 일원은 이리역 폭팔사고로 인해 생지옥을 연상할 정도로 아수라장이 되었지요. 폭팔당시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처가에 들러 별채 방에서 아내와 이야기하며 누워 있는데 심한 폭팔음이 울리고 있었지요. 내가 느끼기에는 어디 군부대에서 폭팔물이 터졌나보다 생각했으나, 오늘 출근시간이 저녁 10:30이므로 서둘어 시내뻐스로 익산역뻐쓰터니널에 도착하니 시가지는 온통 유리조각으로 뒤덮여 전쟁터를 방불하고 있었지요. 나와 같이 철도에 부임한 입사동기생 엄상호친구는 기관차에 올라 폭팔물의 위력도 모르고 불이난 곳을 바라보다가 폭풍으로 사망, 유복자를 남겨두고 이때 한 많은 세상을 떠가갔지요. 엄상호친구의 아버지는 화병으로 누워게시다 돌아가시고............폭팔의 순간 최재산입사동기생은 대전에서 출발하여 익산역에 도착한 동차역차 도착 점검중 폭팔음이 울리는 순간 맨발로 뛰어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요. 이날 저녁은 몹시도 싸늘한 날씨였으나 추위도 잊은채 엄상호친구의 주검을 여러명의 승무원과 같이 시신이 있는 장소 기관차사무소 목욕탕으로 옮겼지요. 구비 구비 인생구비 40년전 익산역 폭팔사고를 회상하며 추억 해 보았읍니다. 조동화
☞이리역 폭발사고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교훈.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올림픽 출전권을 다투는 한국과 이란 축구대표팀간의 경기를 보고 있던 대다수 국민들은 TV 화면을 흘러가는 자막에 순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시간, 1970년대를 풍미한 22살의 인기절정 가수 하춘하 씨는 이주일 씨와 함께 공연 중이던 무너진 이리역 부근 삼남극장의 담벽을 타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순간, 전쟁이 난 줄 알았다. 폭발음 이후, 이리역 근방에는 피투성이의 환자들이 즐비했고, 거리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불과 몇 분 전만 하더라도 500여명의 관객 앞에서 오프닝으로 히트곡을 10여분 부르고 다음 공연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분장실로 들어간 하씨였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에 하씨는 난로를 쬐고 있었고, 전속 사회자였던 이주일씨는 무대에 나가기 위해 거울을 보며 나비넥타이를 만지고 있었다. 그는 “뭔가 보여주겠습니다!”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그려보였다. 그 순간,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극장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초대형 폭발음은 15초 간격으로 세 번이나 이어졌고, 현장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폭발음이 들리더니 순간적으로 전기가 나가고, 벽이 무너지고 유리파편이 튀는 등 역 주변의 집은 완파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세워 놓은 차들도 뭉그려지긴 마찬가지였다. 집이 무너진 사람들은 흙더미속에 갇혀 구조대원들의 도움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이내의 가옥 등 건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반경 1킬로미터 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킬로미터 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가나갔다. 반경 8 킬로미터 이내에는 유리창까지 파손되었다.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모현동의 경우에는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화약열차가 서 있던 4번선 일대는 지름 30여 미터에 5층 건물 높이로 패어 흡사 분화구인양 사고발생 12시간이 지난 후에도 열기와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열차와 휘어진 철로가 무참하게 나뒹굴었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이내의 가옥 등 건물은 완파되었고, 반경 1킬로미터 이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킬로미터 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갔으며 반경 8킬로미터 이내의 유리창까지 파손됐다. 특히, 서민 주거 밀집지역인 창인동의 경우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모현동의 경우도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모든 피해는 당시 폭발 위력과 후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참고: 『위험관리 100호 특집 大韓民國災難47年』)
그 당시 이리역 주변의 모현동은 마살매 부락이라고 불렸는데, 모현동과 창인동 지역에는 소매치기도 많았고, 노동자와 영세민이 많이 사는 동네였으며 윤락가도 있었다. 전부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리역 건물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천정과 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객화차 사무소와 보선사무소는 기둥과 뼈대만 남고, 역사 구내에 있던 객화차차량 117량이 파괴되거나 탈선해 넘어졌고, 선로는 휘어지고 모두 1천6백50미터가 파손됐다. 모든 피해는 당시 폭발 위력과 후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폭발력이 얼마나 셌던지 현장에서 700미터 떨어진 곳에까지 화차 상판이 날아올 정도였다.
사고 후 최종 집계된 자료를 살펴보면, 사망이 59명, 사상자가 1,400명, 재산피해액이 61억원, 이재민이 7,500여명, 건물피해가 9,539동에서 발생했다. 이재민 수는 1천6백74세대 7천8백73명에 달했다. 사망자 중에는 주민들 외에도 근무 중이던 철도 공무원들이 16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피해규모는 우리나라 폭발사고 중 가장 큰 규모였다. 한국전쟁 말고 폭발사고로는 당시까지 10명이상의 사망자를 낸 사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망자만 59명이었으니 엄청난 사고였음에 틀림없다. 이후로는 각종 폭발이나 화재, 붕괴 등 각종 안전사고로 수십 명에서 100명 이상에까지 이르는 사망자를 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참사였다.
당시 이리시는 인구 13만의 조용한 도시였다. 이 소도시는 폭발음과 함께 한순간 암흑과 공포,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폭발의 진원지는 인천에 있던 한국화약에서 민수용 화약 24.810톤을 싣고 광주로 가기 위해 하행선에 대기 중이던 대전기관차사무소 소속 제1052 화물 열차가 이리역 구내 입환(入換) 4번선 철로에서 폭발하면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 열차는 영등포역에서 하룻밤을 대기한 뒤 10일 아침 9시 26분 다시 영등포를 출발, 이리역에 도착했다. 이리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31분이었으며,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할 예정으로 사고 지점인 4번 입환 대기선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 1천139상자, 초산 암모니아 200개, 초육폭약 100상자(2톤), 도화선 50개(1톤) 등 도합 30.28톤이 적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초대형 사고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없게도 역구내에 정차 중이던 화약열차가 호송원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었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날 이리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당시 수사를 맡았던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화약공업주식회사(현재의 한화)의 호송원 신무일(당시 36)씨가 술을 마시고 화차 속에서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잠든 사이 불이 마분지를 타고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대폭발로 이어졌다고 한다. 호송원 신무일씨는 수사과정에서 “인천을 출발해 이리까지 오는데도 무려 36시간이나 걸렸고, 이리역에 도착해서도 화차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 동안 역구내에 대기하고 있어 화가 나서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호송원 신무일 씨는 화약류의 직송원칙을 무시한 채 수송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리역 측에 항의를 했으나 묵살되고 말았다고 진술했다. 화차 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고, 화가 나 술을 마신 채 촛불을 켜고 잠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속내를 헤아리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사고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이 서서히 형성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신씨가 잠든 사이 양초로 인해 불이 붙은 침낭과 화약상자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15초 간격으로 세 차례의 굉음과 함께 천지를 진동시켰다. 술을 마신 신씨는 화재가 나자 진화에 실패하고 도주했다가 붙잡혔다. 그는 당시 검은색 점퍼 차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