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사상의학과 근대 인간의 탄생. 이제마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 에서 체질 의학의 이론으로서 사상의학을 확립하였다.
이제마의 탄생.
'동의수세보원' 의 저자 이제마는 1837년(헌종 3) 3월 19일에 함흥의 반용산 기슭 사촌에서 서자로 출생하였다. 이제마의 자는 무평, 호는 동무이다.
그의 부친 이진사가 하루는 향교의 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료들과 주막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 주막집의 주모가 인물이 못난 딸을 하나 데리고 살았는데 나이가 많을 뿐 아니라 정신도 약간 이상하여 시집을 못가 걱정하고 있었다. 마침 젋은 선비들이 모여드는 것을 기회로 자기 딸을 처녀나면하게 해 주어야겠다 생각한 주모는 이진사가 대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놀게 하였다. 술에 약한 이 진사는 마침내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술에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술 깨기를 기다리던 동료들도 날이 저물자 할 수 없이 이 진사를 주모에게 맡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계기로 주모의 딸과 이 진사는 하룻밤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 10개월이 지난 어느 날 이진사의 부친 충원공이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탐스럽게 생긴 망아지를 끌고 와서 하는 말이 '이 말은 제주도에서 가져온 천리마로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귀댁에 두고 가니 받아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충원공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 망아지를 쓰다듬어 주고 있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하도 이상한 꿈이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밖에서 이 진사를 찾는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급히 하인을 불러서 나가 보라 하였더니 감깐 뒤에 키가 장대한 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 여인은 포대기에 싸인 어린아이를 앞에 내려놓고는 '진사님의 아이오니 받아 주어야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충원공은 아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 진사가 대답이 없으므로 조금 전의길몽을 생각하면서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닫고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기이름을 '제주도의 말' 이라는 의미의 '제마' 라고 지었다. 이 아기가 후일'사상의학' 을 만들어 낸 이제마이다.
이제마의 할아버지는 이제마가 큰 인물이 될 것을 믿고 가족들을 모아놓고는 서자라고 푸대접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제마는 몹시 총명해서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자라서는 호를 동무라고 지을 만큼 무인 기질도 있었다.
그는 성격이 활달하고 호방하여 한 곳에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나그네처럼 길을 떠나 전국을 방랑하였다. 만주지역으로 건너가 유랑하다가 의주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였던 홍씨라는 사람이 이제마의 사람됨이 비범함을 깨닫고 그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며칠 머물고 가라는 것이었다. 중국과 가까운 의주에 살았던 홍씨는 당시 중국에서 간행되었던 최신 의학 서적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 머무는 동안 이제마는 서양 의학 서적을 처음 대하게 된다.
서출인 탓에 관리로 출세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베풀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이제마는 애민할 수 있는 차선책으로 의술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19세기 조선에서는 콜레라가 여러 차례 발병해서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곤했다. 19세기 초반에 인도로부터 유입되었던 콜레라는 치사율이 높아 공포의 대상이었다.
'살아 있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을 살리는 길이라면 더 중요한 도이리라.'이제마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의학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물론 전통적인 한의학 서적들을 통해서였다.
무인기질이 있었던 이제마는 의학공부를 하면서 무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조선조 말기는 일본과 청국, 러시아 등 주변 나라들이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난국이었다. 이제마는 당시 고급 무관이었던 김기석과 친분이 깊었는데 그는 이제마의 인물됨을 아껴서 왕에게 여러 차례 추천하였다. 이로 인해 이제마는 병마선 무과에 등용되었고 무위장, 진해 현감을 거쳐 병마절도사에 이른다.
이제마는 자신의 역할이 생명의 치료에 있다고 생각,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 의학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만년에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와 보원국이라는 약국을 냈는데 약값을 받는 일이 없고 사례를 받더라도 좁쌀 두 되 정도밖에는 받지 않았다. 그의 약국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멀리 서울에서도 손님이 찾아들었다.
함흥에서의 생활은 이제마에게 그 동안 자신이 겪었던 지적 편력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주었다. '동의수세보원' 의 저술도 이때 이루어졌다.
첫댓글 큰사람이 될 사람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좋은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