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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답사보고서 - 바래지않는 천년의 빛깔, 경주를 다녀와서
경제학과&역사학과 2학년 20040400 최성원
1. Prologue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실내에서 하는 공부에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물론, 실내에서 하는 공부도 매우 중요하다. 강의실에서 배우는 강의를 통해 배경지식과 역사공부에 대한 이해를 높일수 있지만 학문의 특성상 책과 스크린만으로는 유물과 유적에 담긴 정신을 느낄수없기 때문에 답사가 필요한 것이다. 답사를 통하여 강의실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실제로 눈앞에서 확인하며 거기에 담긴 혼을 느끼는 것은 답사만이 줄수있는 매력이다. 때문에 답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2. Main Section
이번에 답사를 간곳은 경주였다. 전세계적으로도 몇안되는 천년의 고도인 경주에 가는 느낌은 남달랐다. 12년만에 다시 찾는 이곳의 느낌은 단순하 관광으로 왔던 그때의 느깜과 얼마나 다를것인가? 아는만큼 보인다는, 발에 채이는 것이 다 유물이라는 경주에 다시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얼마나 다른 감흥을 느낄지 보고싶었다.
3박4일일간의 경주답사는 생각해보면 매우 빠듯하다. 2005년 새로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에서 6번째규모인데, 제대로 돌아보려면 1주일이 걸려야 가능하다고 한다. 박물관이 그정도일진데,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경주는 오죽하랴? 짧을듯하지만 그래도 3박4일간의 기간은 많은 것을 볼수있을것으로 생각하며 기대를 안고 내려갔다. 5시간이 약간 더 걸린 버퍼링을 마치고 처음 간 곳은 국립경주박물관이었다. 경주일원에서 출토된 유물유적들을 잘 모아놓은 경주박물관은 신라문화의 정수이자 신라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 1st Day
경주박물관의 정문을 지나 처음 들어간 곳은 성덕대왕신종이었다. 성덕왕을 기리고, 봉덕사에 놓았던 종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완벽하다는 종은 12년전 보았던 그대로였다. 물론 눈에 보이지않는 원소들과 공기의 접촉으로 조금씩 달라졌겠지만 그대로였다. 종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했다. 중학생때 느꼈던 그 느낌이 아니었다. 당시에 ‘종’이구나, 12만근이라 들어간 큰 종이구나 하고 넘어간 그종을 오늘의 나는 그때보다는 자세하게 보게 되었다. 비천상은 그때 알고있었지만 그냥보고 넘어갔다. 비천상은 많이 보아왔기에 그냥 넘어갔지만 용뉴와 쇠막대기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종의 울림 을 위해 만들었다는 96Cm의 용뉴를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용뉴에 새겨진 용을 보며, 지금도 쉽지않을 그 섬세함과 살아 숨쉬는 듯한 용뉴의 용을 보며 걸음을 뗄수가 없었다.
거대한 종을 보며, 작은 쇠막대기를 보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토록 무거운 종을 만들기도 어려웠을텐데, 종을 어떻게 고정시켰을까? 그정도 무게의 종을 걸려면 전각이 매우 튼튼해야 할텐데, 어떻게 그 무게를 목조전각이 지탱할수 있었을까? 쇠막대기에 관하여도 궁금했다. 언젠가 역사스페셜에서 보았던것 같은데, 에밀레종의 종을 연결하는 쇠막대기는 현대의 첨단과학으로도 만들기 어려운 강도를 자랑한다고 한다. 종을 박물관으로 가져올때, 쇠막대기를 현대식으로 바궈서 달았는데, 그만 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져서 예전것을 다시 달았다고 하는데 조사를 해보니, 그 쇠막대기는 속이 텅빈 막대기를 여러겹으로 두드려서 만든 것으로 현대과학이 따라갈수없다고 한다. 기포하나없이 27톤짜리 종을 만든 그 기술에 과연 현대가 고대보다 모든 것에서 나은가 하는 의문을 다시한번 가지게 된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기술력이 감은사지서 발견된 화려하고 작은 금동사리함을 만든 배경이 아니었을까?
에밀레종을 지나 별관으로 들어가니 절에서 출토된 여러유물들이 있 었는데, 금동가위가 있었다. 후배들이 이게 어디에 쓰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는데, 고대사에 대하여, 미술사와 불교사에 대하여 잘 모르기에 대답을 해줄수없었다. 제기정도로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것은 촛대를 깎는 가위였다.1)공부가 부족했던 것에 역사를 배우는 사람으로써 매우 부끄러웠다. 동시에 박물관에서 이러한 유물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놓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박물관은 초보자에 대한 배려가 적은 편이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소한 차이가 선진국과의 차이가 아닐까?
나와보니 고선사지3층석탑과 장항사지등에서 나온 파편들이 박물관 뒤뜰에 있었다.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도즈넉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신라시기 불국사나 기림사와 같은 절이었을텐데, 천년이 지난 지금은 몇몇만이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이렇게 잔해로 놓여있는 파편들을 보며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에서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지나 도착한 곳은 안압지였다. 안압지의 임해전등의 누각을 보니 드라마“궁”이 생각났다. 궁에서는 임해전에서 연곷을 우려만든 차를 국악을 들으며 마시는 장면이 있는데, 신라의 왕족들도 그러하였으리라. 안압지를 지나 대릉원에 갔다. 대릉원에서 눈에 가장들어온것은 거대한 황남대총도, 천마총도 아닌 죽현릉이었다.
죽현릉은 미추왕릉의 다른 이름이었다. 미추왕릉에는 많은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엽군의 전설은 많이 알려졌지만 김유신의 이야기도 또한 있다. 삼국유사에서 보았던 이야기이다. 신라의 36대 혜공대왕때의 이야기이다.2) 어느날밤 김유신의 묘에서 어느날밤 갑자기 위엄있는 장군과 각종병장기를 갖춘 수십명의 무사들이 바람처럼 휘날리며 죽현릉으로 갔다고 한다. 당시 소리와 천둥이 오가는 가운데 바람과 울음소리가 났다가 가라앉았다고 하는데, 당시의 상황은 김유신계와 김춘추계열이 내물왕계열의 반격에 무너져가던 시기였다. 삼국통일의 주역이던 김유신의 후손들이 죽자 그 화를 이기지못한 김유신이 화를 냈고, 그 화를 미추왕이었기에 김유신의 분노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만큼 미추왕의 영향력이 커서가 아닐까? 삼국유사의 내용들을 눈으로 직접확인해보니 재미있었다. 그래서 미추왕릉에는 대나무가 많은가보다. 그래서 죽현릉이라 하지 않던가? 황남대총을 보면서 문득 피라미드가 생각났다. 피라미드와 대릉원의 고분이 비슷한 점은 바로 왕의 무덤이자 무덤을 만들기 위해 국가적 역량이 총동원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부장품은 당대의 문화를 대표한다. 왕의 내세를 위해 껴묻거리들을 넣는것과 왕조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거대한 것, 그리고 국가적 역량동원을 통한 통합등 비슷한 점이 많았다. 어쩌면 이러한 무덤들이 고대 생활을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가 아닐까? 정수일의 저서 실크로드학과 고대문명 교류사에서처럼 이러한 문화도 서로 교류된 것은 아닐까?
(2) 2nd day
다음날의 여정은 장항사지에서 시작되었다. 꽤 올라가기 힘든 곳에 널찍한 터와 함께 2개의 탑과 석조불대좌가 있었다. 하나는 멀쩡했는데, 나머지는 씁쓸한 모습이었다. 동탑은 지붕만 있었고, 대좌는 밑부분만 남아있었다. 동편 석탑은 도굴범이 1923년에 폭파했는데, 1966년에 수습하여 현재자리에 놓인 것이다. 몸돌에 새겨진 인왕상과 문을 보니 활기찬 형태로 바로 뛰어나올듯한 조각이 있었는데, 제대로 있었다면 얼마나 멋졌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탑은 해체복원을 위해 공사중이었는데, 어떤식으로 복원이 될지 궁금했다. 다음에 간 곳은 가파른 암벽위에 세운 골굴암이었다. 골굴암은 석굴형태인데, 오리기 힘든 바위속에 만들어져 올라가려몀 어려운 계단과 줄을 타야했다. 그러한 어려운 곳에 만들어진 것이 참 신기하였다. 비록 암석의 질이 약했다고는 하지만 지금보다 더 오르기 힘들었을 시절 ,어떻게 이런 것들을 만들었을지 놀라웠다. 이어서 간 곳은 기림사였다. 이절은 꽤 큰 가람이었다. 절이 위엄이 있었고, 격식을 잘 차렸다.한때 불국사가 이절의 말사였다니 말 다한것 아닌가? 이절은 내소사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소사도 단청이 없는 담밳한 맛을 지니는데 기림사 역시 대적광전과 진남루등이 그러하였다. 그런데 신기한것은 진남루라는 이름이었다. 진남루에 들어가 답사설명을 들었는데, 내부가 꽤 컸으며, 회의하기에 딱 알맞은 곳이었다. 진남루, 진남루라.... 진남루라는 이름은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에 가면 있다. 이순신장군이 진남루에서 회의를 하고 그랬다는데, 사찰에 웬 군사적인 이름이 붙어있는 곳이 있을까? 절에 계시는 비구니보살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은 예전에 신라군의 본영이 있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은 호국사찰이라고 하였다. 육군 본영이라, 호국사찰이라...
(3)경주-두가지의 테마
경주를 돌아보며 느낀 두가지의 테마는 호국신앙과 구복신앙이었다. 지도를 놓고 보면 기림사는 동해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에서는 왜구의 공격이 자주 보인다. 신라초기에는 왕성을 포위하였을 정도였으며, 이후에도 자주 침공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신라는 기림사를 세우고 이곳의 승려들과 군인들로 하여금 경주를 방어하게 하는 수도방위사령부의 역할을 맡기지 않았을까?
그래서 기림사에 진남루라는 이름이 들어가있는것이다. 대적광전에 있는 문에 담겨진 꽃모양의 조각은 춘계답사에서 봤던 내소사의 대웅보전에 있는 창살같아 너무 아름다웠다. 이러한 양식은 나라를 초월하는 것일까? 뒤에 중창된 전각보다 앞에 있는 고즈넉하고 담백한 전각들이 더 마음에 들었다. 기림사를 나와 간곳은 문무대왕의 전설이 살아숨쉬는 감은사지와 대왕암이었다. 터만 남아있으나 웅장한 3층석탑은 천년을 지나 일제의 손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미소를 짓고있었다. 탑의 웅장한 규모와 기다란 찰주, 그리고 용이 드나들게 만들었다는 용혈이 신라인의 염원을 담은 것 같아 숙연해졌다. 천년이 지났음에도 거의 변하지 않은 석탑속에는 가장 아름다운 감은사지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현대의 최고기술자도 만들기 어려운 세밀한 사리함에 혀를 내둘렀는데, 그 사리함이 원래 있던 장소를 보니 동해바다가 보일듯말듯 들어왔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패기가 담긴 3층석탑을 지나 대왕암을 보았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의지를 담은 대왕암에는 푸르고 끝없는 바다만큼이나 나라를 사랑한 문무대왕과 신라인의 정신이 담겨있다. 분황사와 황룡사지에서 시작한 호국신앙의 여정은 대왕암에서 푸른 바다와 함께 끝이 났다.
(4) 3rd day
천년의 고도 경주에는 크게 2가지의 테마가 자리잡고 있다. 하나는 앞서 말했던 호국신앙이고 다른하나는 구복신앙이다. 둘의 목적은 같지만 대상이 국가냐 개인과 가족이냐하는 차이점이라고나 할가? 셋째날 답사했던 남산영역은 그러한 신라인의 신앙의 성지이다. 남산에는 구복신앙등을 담은 신라인의 정신이 담겨있는 메카이기에 꼭 한번 들러야 하는 곳이댜. 그래서 꼭 가고싶었고, 이번에 고생좀 했지만 가게 되었다. 답사의 시작은 포석정이었다. 포석정은 불국사, 석굴암과 함께 누구나 다 아는 곳이 되었지만 삼국유사 경애왕조에 나오는 내용 때문에 놀고마시는 곳이 되어버렸다. 3)
그러나 실제로는 제의를 하는 곳이라고 최근의 유적발굴조사에서 나왔다고 한다.4) 춤을 춘것은 제의를 하는 과정이 라는 데, 세계사속의 한국수업시간에 박경하 교수님이 하셨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원래 춤과 노래는 사람을 위한것이 아니라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교수님께서 그러셨는데, 그것은 기독교에서도 성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각종 신앙에는 춤과 노래가 들어가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런것을 춤추고 노래했다고 매도한것은 신라의 멸망을 합리화 시키자 함이 있었고, 중세불교인과 유교적 학자의 입장에서 고대를 바라보아서 그런것을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석정을 지나 배리 석불입상에 담긴 미소를 지나 남산을 계속 등반했다.5) 남산에 산재해있는 수많은 불상들과 선각들을 보며 많이 놀랬다. 그리고 오르면서 본것은 불상과 선각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에나 놓여있는 작은, 또는 큰 돌무더기들을 바라보며 이곳은 과거와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시기나 복을 비는 마음은 한결같을 것이고, 누구나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선각들과 돌무더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구불구불한 암벽에다 마치 도화지에 그린것처럼 섬세하고 활력있게 그린 선각 육존불을 바라보며 행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느겼다. 그 리고는 숙연해졌다. 쉽게 올라갈수없는 암벽이나 비탈에 어떻게 저리도 친근하거나, 또는 살아 숨쉬는 듯한 선각들과 석불상을 만들어낼수 있었을까? 선각육존불을 보면서 계속 알수 없는 느낌에 휩싸였다. 왜 하필 이런곳에 이런 것들을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용장사지의 유적을 바라보며 절정에 다다랐다.
가파른 낭떠러지 근처에 만든 석탑. 올라가기도 힘든곳에 절터라고 하는 데 절은 없고 뜬금없는 석탑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탑신부만 남아있는데, 기단은 남산 전체라고 한다. 남산은 신라인들의 성지이자 불국토를 상징하기에 남산을 기단으로 하는 거대한 탑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탑은 석탑이 있는 곳이 아닌, 용장골 용장사이에서 바라보면 석불대좌와 함께 일직선으로 이어지며 장엄한 멋을 나타낸다. 용장사는 남산전체를 사찰로 삼아 남산의 기운과 부처님의 힘으로 현세의 복을 기원하던 곳이었으리라. 춘계답사때 보았던 백제유적은 미를이 하생하여 중생을 구제해주길 바라던 미륵 신앙이 곳곳에 배여있었는데, 여기에는 구복신앙이 도처에 있음을 알수있었다. 둘다 결국은 복을 비는 것 아닌가? 때로는 절만 만들어지고 또 때로는 수수하고 서툴게 만들어진 선각들과 불상들의 모습은 서로간 세련되고 아니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4) last day
마지막날은 세계문화유산 불국사를 갔다. 12년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 이곳은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보는 눈은 조금은 달라졌다. 불국사의 일주문과 세계문화유산이 표시된 곳을 지나 본격적인 불국사 영역으로 들어왔다. 천왕문에 있는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등 4방을 지키는 그들의 모습에서 불교에 담긴 서방의 문화를 엿볼수있었고, 당간지주를 보면서 절의 규모를 짐작할수 있었다. 불국사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석가탑도, 다보탑도 아니었다. 바로 청운교, 백운교와 안양문에서 날아갈듯한 절의 곡선미때문이었다. 사람이 많아 집중하기도 힘든 불국사였지만, 안양문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소리는 사라지고 푸르게
맑은 하늘과 그 위로 날아오를듯한 안양문만이 있었다. 날아갈듯한, 매끄러운 미학과 하늘에 너무 빠져버렸다! 그렇게 아름다운 곡선을 가지다니, 그래서 불국사가 세계문화유산인가보다. 세속의 세계와 불국토인 불국사를 잇는 백운교 16계단과 청운교 18계단은 굉장히 아름다운데, 예전에 물이 떨어지며 생겼던 물보라에 담긴 무지개가 떴을때, 어떤 느낍이 들었을까? 불국정토를 염원하던 바램이 녹아들어간 불국사에는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현세의 복을 빌던 신라인의 마음이 들어가 있다.
3. Epilogue
불국사를 끝으로 3박4일간의 짧은 답사가 끝이 났다. 12년만에 다시 찾게된 경주는 답사지에 담긴 말처럼 바래지 않는 천년의 빛깔을 내뿜은 채 다시한번 나에게 다가옸다. 천년이란 세월을 신라로 살고, 또 천년이란 세월을 모진 풍파를 견디며 고생했음에도 2007년 오늘의 경주는 신라인의 미소를 남산에서, 또 곳곳에서 보여주었다. 똑같은 자리에 있던 종은 12년전 자신을 쳐다보던 중학생이 대학생이 되어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을 이 귀향객?을 어떻게 바라보 았을까? 답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답사를 할때마다 교실에서는 배울수없는 느낌을 받고, 또 많은 것을 배워야 함을 느낀다. 그러면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써의 자세와 보람도 커져간다. 오감으로 느낀 경주. 경주는 바래지않는 천년의 빛깔을 간직한채 새로이 별이 되고싶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살아있는 공부. 그래서 답사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주석]----------------------------------------------------------------------------------------------------------------------------
1)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금동제 가위, 촛불을 깎는 가위로 사용되었다.
2) 삼국유사, 왕력 혜공왕조편에 나오는 내용
3)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포석정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서 부정적으로 나오고 있다. 신라멸망을 합리화한 측면으로 보여지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한전등에
나오는 우리민족의 성격을 이들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4) 1999년, 경주문화재 연구소의 발굴로 인하여 이러한 새로운 내용이 확인되었다.
5) 각종불상에 대하여 조선시대 파괴한 행위를 나쁘게 바라보고 있으나 무조건 나쁘게 바라봐야할것인가? 이것을 기독교시기 그리스로마문명의 유물파괴와는
다르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조선이 세워졌을때, 불교의 폐단은 매우 심각했으며, 신진사대부의 시각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목이 부러진
불상은 종교적 관점과 함께 당시의 폐단에 대한 반발이라 볼수있으며, 얼마나 불교가 대중의 관심을 잃었는지 알수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대제의
기독교국교화이후 벌어진 그리스 로마의 문명파괴는 광적인 종교적 열망과 함께 당시 기독교도들이 이교라고 불리던 그리스-로마신앙에 대한 파괴를 통해
그 재산을 기독교에 귀속시켜 그리스-로마신앙자체를 없애며, 주도권을 확립하며, 우위를 보이기 위한 행동이라고밖에 볼수없다. 313년 기독교공인이후
100년가까이 계속된 두 신앙과의 싸움에 대한 결과를 조선의 숭유억불에 대응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는바이다.
참고문헌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주편, 돌베게, 1994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2007년도 추계답사지,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2007
고운기, 양진, 우리가 저알 알아야할 삼국유사, 현암사, 2002
요시미즈 츠네오, 로마왕국, 신라,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2
이종욱, (화랑세기로 본)신라인 이야기, 김영사, 2000
첫댓글 3박 4일 간의 답사 여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신 것과 개인적 감상이나 느낌이 많이 표현된 것이 훌륭한 기행문이라 생각합니다.
좀더 잘썼어야 했는데, 감상만 깊게 들어간게 미안하네요.^^;; 경주는 다시한번 들르고 싶은 곳이라 다시가고싶네요.
저랑 같이가는게 어떨까요? 저 경주 갈일이 있는데. 답사간곳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신게 정말 잘쓰셨네요. 이글보니 부담이...
저도함께^^;;; 제가 경주 살긴하지만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은지라..ㅋ
경주에 대해 정말 자세하게 설명하여서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유적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에 대해 읽는것도 하나의 흥미거리가 됬네요~
개인적으로는 이번 답사를 통해 경주를 처음 찾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경주를 찾아 새로움을 느꼈다는 것이 부럽군요. 저 역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다시 경주를 찾을 때 흘러간 시간만큼의 깊이있는 시선으로 경주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성덕대왕 신종이 서울 보신각 종보다도 더 크다고 하네요 ㅎㅎ 아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저의 답사기행문이 초라하다는 생각마저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선배께서 많은 것을 느끼신 것에 비해 제가 느낀 것이 적어 반성했습니다. 어쩐지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많이 느껴지네요.
같은 곳을 돌아보았음에도 느낌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 아마도 이안나 학생의 이야기처럼 아는만큼 보이기 때문이겠지요.. 사전에 제대로 준비해 가서 좀 더 많은 것을 배워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제 자신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는 글이었습니다.
많이 준비하지 못한점이 참 아쉬웠습니다. 이안나 학생의 말처럼 아는만큼 보인다는 그말이 답사내내 참 무섭더군요. 다음부터 더욱 열심히 준비하여 있는 느낌 그대로가 아닌, 숨어있는 느낌까지도 볼수있는 그런 답사를 위해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답사를 한 후 글을 쓸때 느낌과 감상을 어느정도까지 넣어야할지에 대하여 고민이 많은데, 이번 글을 통해서 그런것을 어느정도 배운것 같네요. 여러분은 느낌과 감상을 어느정도까지 넣는것이 좋다고 보시는지요?
저는 이번 답사를 자체적으로 다니면서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정말 많이 생각났습니다. 아는 것이 없으니깐 보고 있어도 제대로 내가 보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용기를 내어 답사를 가는 것도 좋지만 준비과정이 병행된다면 더욱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