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딸에게 매일 편지를 쓴 아빠가 있다. 입시공부에 시달려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축 처져 들어오는 딸. 그 딸을 보기가 애처로워 힘이 되는 방법을 고민하다 시작한 편지다. 매일 써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빠는 점심시간을 쪼개 편지를 썼다. 시간이 부족해 책상 앞에서 주먹밥을 먹어가며 편지를 쓰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쌓인 편지는 총 301통. 단행본으로 엮으면 1000쪽이 넘는 분량이다.
충북 청주에 있는 LS산전에 근무하는 나경일(53) 부장과 맏딸 성진씨 이야기다. 딸에게 전하는 소박한 편지의 영향력은 강했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세 자녀의 아버지가 쓴 편지는 입소문이 났고, 편지를 읽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부녀의 이야기는 청주에서 유명세를 탔다. 아버지 나씨는 청주 지역 라디오 방송에 초대손님으로 출연한 바 있고, 반칠환 시인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 ‘지혜’에서 책도 냈다. 반 시인은 추천사에서 “교육의 붕괴와 아빠의 부재 속에서 쓴 이 편지는 이 시대 ‘부정(父情)의 의미’와 ‘편지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다”고 말했다. 책 제목은 ‘아빠는 있다’. 반 시인은 “‘아빠는 있다’는 말은 ‘아빠가 없다’는 것을 웅변한다”며 스승이자 동반자로서 아빠가 실종된 현실을 지적했다.
아빠의 감동 편지를 받고 자란 성진씨는 올해 국민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27년간 한 회사를 성실히 다니면서 만족도 높은 아빠처럼 ‘좋은 회사에서 오랫동안 즐겁게 일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작가나 기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있다.
부녀를 지난 3월 19일 서울 광화문 부근에서 만났다. 아버지 나씨는 대학생 딸의 시간표까지 알고 있었다. “성진이가 화요일 오후에 수업이 없으니 그때 만나자”고 했다. 붕어빵처럼 닮은 부녀는 편지로 화제가 된 것에 대해 겸연쩍어했다. 나경일씨는 “그저 아이한테 편지를 자주 써 준 평범한 아빠”라고 소개했고, 딸 성진씨는 “아빠가 나한테 써준 편지가 책으로 나와 신기하다”고 말했다.
“성진이가 고3이 되어 매일 늦게 들어오는데, 해줄 게 없었어요.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도움을 줄 만한 형편도 못 되고. 아빠로서 뭔가는 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매일 편지를 쓰기 시작했죠. 답장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할 공부도 많은데 부담 될까봐요.”
아빠 편지의 힘은 셌다. 성진씨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빠가 써 주신 편지가 버팀목이 됐다”고 한다. 성진씨는 지갑에 아빠 편지 몇 개를 꼬깃꼬깃 접어 지니고 다닌다. 중심 다잡기 용도다. 공부하기 싫을 때,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아빠 편지를 꺼내 읽으면 아빠의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을 다잡게 됐다고 한다. 지갑을 꺼낼 때마다 아빠 편지가 보여서 돈을 덜 쓰게 되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아빠의 노고가 느껴져서다. 또 아빠표 서평은 흡수가 잘됐다. 편지를 통해 아빠의 육성으로 전하는 책 소개는 공부가 아니라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부녀는 요즘도 거의 매일 편지를 주고받는다. 성진씨에게 스마트폰이 없었던 작년까지는 이메일로 주고받았지만 최근엔 카카오톡으로 편지를 주고받는다. 어제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빠 : (정호승 시인의 시 ‘고래를 위하여’ 전문 인용) 성진아, 요즘이 마음 속에 고래를 키우기 가장 좋은 시기일 거야. 책도 많이 읽고 영어 공부도 하며 마음속 푸른 바다에 고래를 담도록 하렴. 멸치처럼 작았다 해도 어느 순간 큰 고래로 자라 있을 거야. 파이팅! ♥ ♥
성진 : 저도 요새 시간이 많아서 좋아요. 이럴 때 잘 보내야죠. 책 많이 읽어서 마음이 꽉 찬 대학생이 될게요. 오늘 하루 파이팅! 힘내세요. ♥ ♥ ♥ ♥
아버지 나씨가 딸에게 보낸 편지의 장르는 다양하다. 수험생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애틋한 심정, 응원 메시지에서부터 신문 읽을 시간이 부족한 딸을 위해 국내외 10대 뉴스나 박완서 선생님 별세 등의 이슈를 요약해 주기도 하고 ‘체 게바라 평전’ ‘정의란 무엇인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의 서평을 전하기도 한다. 호국의 달 6월에는 이문열의 ‘영웅시대’, 황석영의 ‘손님’, 안정효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를 소개했다. 평일에는 자유 주제로, 토요일에는 서평을, 일요일에는 성경 구절에 관해 썼다.
한 번에 평균 200자 원고지 7매 내외의 편지, 그것도 주제를 담은 편지를 매일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의지가 흔들릴까봐 딸에게 ‘매일 편지를 써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쓰기 싫어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썼다”고 말했다.
부녀에게 있어 편지는 소통의 가장 큰 수단이다. 아버지는 말로 하는 표현에 서툴고, 아버지를 꼭 닮은 딸 역시 말보다 글이 더 편했다. 성진씨는 “과묵한 아빠가 편지를 안 주셨다면 아빠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다. 편지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아빠의 모습이 많다”고 말했다. 편지의 말미마다 ‘성진이를 사랑하는 아빠가’라고 써 있지만, 아빠는 딸에게 말로 사랑한다고 해본 적이 거의 없다.
편지의 힘을 깨닫기 시작한 건 성진씨가 사춘기 때다. 성진씨 역시 또래 아이들처럼 사춘기의 반항기를 피해 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딸은 아빠가 곁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아빠가 손을 내밀면 딸은 그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성진씨는 “그때는 이유 없이 엄마 아빠가 싫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짜증이 났다”고 했다. 그 마음을 되돌린 것 역시 편지다. 아빠의 말을 들으려조차 하지 않는 딸에게 아빠는 편지를 전했고, 편지가 쌓이면서 딸은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성진씨는 “아빠 편지가 없었다면 사춘기 때의 벽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경일씨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의 가장 큰 힘을 ‘관심’이라고 말한다. “편지는 관심의 표현이에요. 쓰는 동안에는 그 사람만 생각하게 되니까요. 길게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거창한 내용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가 너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는 최근의 학교폭력이나 왕따 문제도 편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학교폭력과 왕따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모나 선생님들이 매일 짧은 글을 자녀에게, 학생들에게 써준다면 왕따문화는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경일씨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종이 뭉치를 꺼냈다. 15년 전 성진씨가 여섯 살 때 아빠 회사로 보낸 팩스, 초등학교 때 아빠한테 보낸 메모 꾸러미였다. 나경일씨는 “잘 버리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아이들 편지와 일기장은 못 버리겠더라고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어요. 한 상자 가득 쌓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한테 소중한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성진씨는 “아빠! 이걸 아직도 가지고 계세요? 난 기억도 안 나는데”라며 울먹거렸다. 울고 또 울었다.
성진씨에게는 고1이 된 여동생 성은이가 있다. 나경일씨는 성은이를 위한 대규모 편지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성진씨한테는 고3 한 해 동안만 편지를 써 줬지만 성은이에게는 고1 때부터 쓸 계획이다. 아버지 나씨는 성은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첫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쓰고 있다. 1000통이 목표라고 한다. 그는 “편지를 쓰면서 저도 마음이 많이 자랐습니다. 편지 쓸 내용을 만들기 위해 공부와 사색을 많이 합니다. 좋은 아빠가 되려면 공부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나경일씨의 자녀 편지 tip 답장 없어도 실망하면 안 돼
1. 내용보다 빈도가 중요하다. 자주 써라 자녀에게 거창한 내용을 길게 쓰려 작정하면 부담스러워 오래가지 못한다. 일기 쓰듯 내용의 길이와 깊이에 구애받지 말고 자주 써라. 자녀에게 주는 편지의 가장 큰 기능은 관심 전하기다. ‘아빠가 지금 너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2. 목표 편지 수를 정하라 꾸준한 편지 쓰기도 금연이나 다이어트처럼 의지력이 필요하다. 자녀나 주변 사람에게 목표 편지 수를 정해서 말하고 다녀라. ‘얼마간 몇 통의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하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주 쓰게 된다. 3. 오랫동안 쓰려면 기획을 몇 개월, 혹은 1년 이상 자녀에게 편지를 쓰려면 기획을 하는 게 좋다. ‘월 : 아빠의 어린시절, 화 : 너를 키우며, 수: 아빠의 회사생활, 목: 책 이야기’ 등 요일별 테마를 정하는 것도 좋다. 쓰다 보면 아이는 물론 아빠도 함께 자란다. 인생의 본질적 가치를 놓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4. 하고 싶은 잔소리도 편지로 잔소리도 편지로 하면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부모 입장에서는 잔소리의 핵심 메시지만 전달할 수 있고, 자녀 입장에서는 놓치지 않고 읽게 된다. 5. 답장을 바라지 마라 부모와 자식의 마음은 같지 않다. 100을 전한다고 해서 100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식은 없다. 50 정도만 받아들여도 성공이다. 무반응이어도, 답장이 없어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써라. 편지의 정성과 진심은 서서히 스민다. 6. 편지는 고이 간직하라 자녀와 주고 받은 편지는 버리지 말고 간직하라. 그 편지를 하나하나 모아 두면 가족의 역사이자 아이의 성장일기가 된다. 아이가 독립할 때 혹은 결혼할 때 선물로 주면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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